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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 여수

Auteur: 기봉이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9-01 18:55:02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규현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었다.

몇 번을 봐도 같았다.

-채영 씨 나 오늘 못 들어가. 친구 아버지 돌아가셨대.

입가에 얇은 웃음이 번졌다.

“영훈이라…….”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네, 대표님. 안 그래도 오늘 보고ㅡ”

“지금 사람 하나만 확인해 줄 수 있어요?”

“아, 네. 물론이죠.”

나는 규현이 다녔던 대학과 학과를 전하고,

그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영훈’이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결과가 돌아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없다는데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렇겠죠.”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몇 사람만 더 찾아 주세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찾아보면 그만이다.

“알겠습니다. 조카분 동창 쪽도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규현이 지금 함께 있는 곳은 장례식장이 아닐 것이다.

향내 짙은 착잡한 공간이 아닌,

씻어내도 남고 멀어져도 다시 떠오르는 그 향이 있는 곳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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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60화 : 뺨(2)

    “…이, 이모ㅡ” 짜악ㅡ! 시야가 번쩍이고 고개가 순식간에 옆으로 돌아갔다. 순간 경찰서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얼얼한 통증이 뺨에 번졌다. “채영 씨!” 옆에서 규현 씨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조서를 쓰던 경찰도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이모는 규현 씨도, 경찰도 상관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평소에 행실이 얼마나 지저분했으면, 저런 것까지 들러붙니.” “그런 게 아니라!” 규현 씨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입가가 터진 얼굴. 엉망이 된 옷차림. 그런데도 눈빛만은 여전히 단단했다. “저 남자가 유진 씨를 억지로 끌고 들어간 거야!” 이모의 시선이 천천히 규현 씨 쪽으로 향했다. “당신은 유진이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간 거야?” 규현 씨가 순간 굳었다. 이모는 그대로 내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설마 너, 내 남자까지 건드렸니?” 이모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탁ㅡ! 규현 씨 손이 이모의 손목을 붙잡았다. “때리지 마.” 이모의 시선이 손목을 붙잡은 규현 씨의 손으로 내려갔다. 그 시선에 규현 씨의 눈이 크게 흔들렸지만, 이를 악문 채 이모에게 말했다. “왜 피해자를 때려. 때리려면 저 새끼를 때려야지.” 이모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마치 처음 보는 걸 바라보는 사람처럼. 그 순간이었다. “저기, 두 분 진정하시고 손 좀 놓으시죠.” 경찰이 끼어들었다. 그제야 규현 씨가 정신이 든 사람처럼 천천히 손을 놓았다. 이모는 말없이 손목을 한 번 내려다봤다. 경찰이 이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이분 뺨을 왜…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이모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경찰을 향해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이모의 시선이 잠깐 내 쪽을 스쳤다. “유진이 이모, 이채영이라고 합니다. 유진이 엄마 대신 왔습니다.” 이모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규현 씨의 여자친구이기도 하고요.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59화 : 뺨.

    머리가 울렸다. 등도 아팠고, 숨 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런데, 지금 물러나면 안 될 거 같았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운동으로 만든 몸. 분명 단단했다. 그런데 가까이 마주하자 오히려 알 수 있었다. 힘은 분명 내가 더 셌다. 문제는 저 인간이 싸움을 안다는 거였다. 중심을 무너뜨리고, 관절을 꺾고, 힘을 흘리는 법을 안다. “왜, 그 남자에겐 그런 눈을 하는 거야.” 그 순간, 그가 내게 다시 달려들었다. 훅ㅡ! 순간적으로 팔이 뻗어왔다. 이번에도 메다꽂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메다꽂히더라도 팔 하나는 부수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윽…!” 남자의 호흡이 순간 흔들렸다. 그래, 힘은 내가 더 셌다. 나는 그대로 몸을 밀어붙였다. 쾅ㅡ! 이번엔 남자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나와 그의 숨이 거칠게 얽혔다. 남자가 바로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끝까지 붙잡았다. “유진 씨…! 도망ㅡ” 그때, 남자가 팔꿈치로 내 뺨을 후려쳤다. 퍽ㅡ! 시야가 흔들렸고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놓지 않았다. 놓으면 안 될 거 같았다. 뒤쪽에서 흐느끼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콰직ㅡ!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따뜻한 액체가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남자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였다. 뒤를 돌아봤다. 유진 씨가 부서진 키링을 쥔 채 떨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준 유진 씨의 미니어처였다. 그걸로 남자의 머리를 찍은 거였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진 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에선 거친 숨이 연거푸 오갔다. 그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싸움 난 거 아냐?” 현관문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도. *** 경찰서의 형광등 불빛은 바깥과는 달리 밝았다. 나는 말없이 손만 내려다봤다. 아까부터 계속 떨리고 있었다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58화 : “도와주세요.”

    “그 남자 때문이죠?” 철렁ㅡ. 규현 씨. “맞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틈을 윤슬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맨날 집에 틀어박혀서 이상한 거나 만들고. 돈도 제대로 못 버는 남자잖아.”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그런 남자는 되고, 나는 안 돼요?” 윤슬기가 두 손으로 제 어깨와 팔을 쓸어내렸다. “나 진짜 최선을 다했는데… 아, 이제 진짜 남자가 되어가는구나 싶어서.” 윤슬기의 붉게 젖은 눈이 처참할 만큼 솔직했다. “6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주먹만 움켜쥐었다. “근데 결국… 그냥 ‘남자’를 좋아했던 거였어요…?” *** 한 칸, 그리고 또 한 칸. 나는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유진 씨 방 앞에 멈춰 섰다. 잠깐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똑똑. ‘전화도 안 받는데 찾아온 건 정말 뭐 하는 건지.’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유진 씨.” 목소리가 내 생각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대답은 없었다. “아직 안 온 건가.”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똑똑ㅡ. 그 순간이었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던 그때였다. 철컥.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ㅡ. 문이 천천히 열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나시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몸,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입가에 걸린 기묘한 웃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너머를 바라봤다. 원룸 안쪽, 벽 끝까지 몰린 유진 씨가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겁에 질린 눈.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천천히 남자를 향해 물었다. “당신 뭐야?” 잠깐 정적이 흘렀다.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 여기서 이렇게 등장하네.” 뭐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57화 : 사람 미치게 만드는 눈(2)

    채영의 회사 근처 카페에서 유진의 연락을 기다렸다.창밖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다.나는 얼음이 녹아내리는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오후 3시 37분.조금 전에도 전화했었다.신호는 갔는데,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뭐 하고 있는 거야.’바쁜 건가, 아니면 진짜 나 피하는 건가.문득 며칠 전 유진 씨 얼굴이 떠올랐다.ㅡ이모로 바꾸라고 했잖아요!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어떻게 바꾸냐고.당신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걸 바꾸냐고.문득 생각이 스쳤다.그녀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다가오다가도 갑자기 선 긋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 밀어내고.나는 괜히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30분 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받지 않았다.또 한 시간 뒤 다시 걸었지만, 이번에도 연결음만 길게 이어졌다.이건 바쁜 게 아니다.일부러 안 받는 거다.순간, 가슴 안쪽이 천천히 식어 내려가는 거 같았다.나는 멍하니 꺼진 휴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56화 : 사람 미치게 만드는 눈.

    오후였다.ㅡ지금 회사로 와. 오늘도 유진이 수발 좀 들어줘.나는 거울 앞에 한 번 더 섰다.웃겼다. 고작 방을 같이 보러 가는 건데.작업대 조명 아래에는 유진 씨를 본떠 만든 피규어가 놓여 있었다.아직 완성되지 않은 눈매와 입술 선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조금만 더.”완성된 피규어를 받은 유진 씨의 표정을 상상하자 자꾸 웃음이 나왔다.집을 나서며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바쁜가?”***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알고?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내가 신은 구두가 삐걱 소리를 냈다.윤슬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순간,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았다.저 눈.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나와는 달리,단 한 번도 나를 놓친 적 없다는 듯한 눈.윤슬기가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후드 그림자 아래 드러난 얼굴은 예전과 달랐다.턱선은 더 날카로워졌고, 목엔 옅은 굴곡이 생겨 있었다.“…여길 어떻게.”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55화 : 그림자.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였다.직원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누군가는 회의실로 뛰어가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그 사이를 지나 대표실 앞에 멈춰 섰다.똑똑.“들어와요.”문을 열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이모는 그대로였다.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다녀왔어?”너무 친절한 목소리였다.나는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네.”“어땠어?”이모가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순간, 등골이 천천히 식었다.‘아, 난 이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민 대리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ㅡ사람 감정도 결국 패턴이 있거든요.그래, 이 사람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8년 전에도 그랬던 사람은 이제 외로움도, 행복도, 위로받는 기분도 설계해서 팔고 있었다.아니, 지금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습조차 전부가 아닐지 몰랐다.나는 천천히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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