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학폭 누명으로 모든 것을 잃은 남자 아이돌 한수려가 일본의 작은 료칸에서 나카이로 일하며, 무대가 아닌 사람들의 곁에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다.
View More2009년, 아이돌의 전성시대.
KKB(K-King Boys)의 리더 한수려에게 무대는 곧 인생의 전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만 명의 팬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조명이 꺼진 뒤에도 앙코르를 요청하는 함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도 최고였어.'
스태프가 건넨 물병을 반쯤 비우고 대기실 소파에 몸을 기대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수혁 대표였다.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
"수려야. 설명할 시간 없어. TV부터 봐."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했다.
스태프가 급히 리모컨을 찾아 뉴스를 틀었다. 화면에 낯익은 학교 건물이 나타났다.
'······화연고?'
〔긴급 속보입니다. 현재 아시아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KKB의 리더, 한수려 씨의 학교폭력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수려의 손에서 수건이 떨어졌다.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남학생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기자가 대신 정리했다.
"A씨는 한수려 씨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금품 갈취를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얼굴을 가리지 않은 학생 — 재준이었다.
'쟤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저는 다 밝히고 싶었어요. 가릴 이유 없어요. 가해자가 숨어야지, 피해자가 숨을 필요 없거든요."
목소리에 떨림은 없었다.
"수려요? 학교 다닐 때부터 유명했어요. 걔 앞에서는 다들 눈도 못 마주쳤어요."
'거짓말이야. 내가 왜 널 때렸는지, 네가 제일 잘 알면서.'
구석에 몰려 있던 준성, 벽에 등을 붙인 채 고개도 들지 못하던 작은 등, 그 앞을 막아선 재준과 천용.
주먹을 먼저 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전혀 달랐다.
'준성이를 괴롭힌 건 너희였잖아.'
수려는 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저거 다 거짓말이에요. 쟤네들이 일진이었어요. 저는 준성이라는 친구를 도와준 것뿐이라고요!"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수려야. 계약할 때 내가 몇 번이나 확인했지. 학교에서 문제 있었던 적 없느냐고."
"대표님, 진짜 아니라니까요."
"나도 네 말을 믿고 싶다. 그래도 지금은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야. 대중이 이미 너를 가해자로 보고 있어."
뚜뚜뚜. 전화가 끊겼다.
며칠 뒤, 기획사 사무실. 책상 위에는 수려를 비난하는 기사들이 쌓여 있었다.
"멤버들과도 이야기를 해봤다." 수혁이 말을 이었다. "학폭이라는 게 요즘 워낙 민감하잖아.
네가 정말 아니라고 해도, 너 하나 때문에 다른 멤버들까지 피해가 갈 수 있어."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일단 활동을 중단하자."
연예계에서 그 네 글자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저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준성이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수혁이 받았다.
"아, 대표님.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네. 저희한테 아이 꼭 맡기고 싶다고요?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잘해보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아이돌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KKB 숙소. TV에서는 멤버들이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팬들의 함성이 스피커를 타고 터져 나왔다.
수려는 며칠째 씻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멤버가 서 있었다.
'내가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
휴대전화를 열었다. 첫 화면부터 자신의 이름이 검색어에 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연관 검색어로 따라붙었다.
"정말로······ 끝난 건가."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본 순간, 수려는 그대로 멈췄다.
할아버지. 몇 년 동안 연락 없던 할아버지로부터의 먼저 걸어온 전화였다.
"······네, 할아버지."
"밥은 먹었냐."
뉴스도, 학폭도 언급하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회사에도, 할아버지한테도 피해가 갈 텐데."
"누가 그러더냐. 네가 뭘 잘못했는지 나한테 설명해봐라."
"······힘든데 혼자 해결하려고 한 것"
"석준이한테 다 들었다. 활동 중단이니 뭐니."
짧은 한숨.
"그 바닥에서 버티라고는 안 하마. 조만간 사무실로 잠깐 들어오니라."
"네?"
"비서실에서 연락이 갈게다. 오늘은 푹 자라. 밥 꼭 챙겨 먹고. 알았냐."
"······네."
전화가 끊겼다. 어두운 방, 다른 채널에서도 KKB의 1위 축하 무대가 나오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작은 생각 하나가 마음속에 남았다.
'도대체 왜 오라고 하시는 거지?'
그 순간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수혁에게서 온 문자였다.
〔내일 오전까지 숙소에서 짐을 빼줘.〕
"······뭐?"
수려는 휴대전화를 한참 바라봤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은 무대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리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한수려는 국내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네버그린 기획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학업과 연습생 생활을 병행하며 아이돌을 준비하던 시절.수려에게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기도 했지만,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평범한 일상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어느 봄날.봄비가 내리고 있었다.교실 안.담임 선생님이 교탁에 기대어 아이들을 바라봤다."자~ 공부할 사람은 공부하고, 놀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 방해하지 말고."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그렇게 1년 잘 지내보자."선생님이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수려를 발견했다."특히 수려 너!""······네?""학교 빠지지 마!""제가 왜요?""아이돌인가 뭔가 하는 것도 좋은데 학업 분위기는 방해하지 마. 내가 그건 용서 못 한다.""제가 아이돌 하는 거랑 학업이 무슨 상관입니까?""상관 있지!""제가 나중에 성공하면 선생님이셨다고 자랑이나 하지 마세요."순간 교실이 조용해지고선생님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잘되면 당연히 내가 선생이라고 자랑해야지.""안 되거나 사고 치면 당연히 모른 척할 거고!""하하하하!"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수려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아······ 진짜."그때였다.수려의 시선이 교실 한쪽에 멈췄다.창가에 한 여자아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긴 생머리.반듯한 자세.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창밖의 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오똑한 콧날과 깨끗한 피부.누가 봐도 한 번쯤 뒤돌아볼 만큼 예쁜 얼굴이었다.'전학생인가? 한번도 못봤는데'그런데 보면서도 이상했다.예쁜 사람은 많았다.수려가 다니는 기획사 연습실만 해도 저 정도 외모를 가진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그런데 왜 저 아이는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걸까.수려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바라봤다.그러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돌렸다.눈이 마주치자수려의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여자아이는 아무
이쁜 사람이면 좋겠는데······.'"자, 들어오세요!"문이 활짝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수려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멈췄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얼굴을 잊을 리 없었다.일본으로 오기 전, 자신의 인생이 무너지는 시작점에 서 있던 얼굴.숨이 턱 막혔다. 남자도 수려를 바라봤다.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메마시떼. 재준 데쓰.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분명했다.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학교폭력 피해를 주장했던 남자.그 사건으로 수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사람 — 재준이었다.재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소개를 이어갔다."제가 일본에서 처음 일하는 거라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윙크."참고로 저는 여기서 먼저 일하고 있는 수려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굉장히 오래된 친한 친구고요." 재준이 수려 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수려야, 잘 지냈어? 이렇게 다시 보니까 진짜 반갑다."수려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려 친구래~" 직원들이 수군거렸다.수려는 그 시선들을 보며 속이 뒤틀렸다."취미는 건담이랑 세일러 문 커스텀 모으기입니다."아베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리고 이번 기회에 일본 생활에 잘 적응해서 일본 여자친구도 꼭 만들어보고 싶습니다!""재준상은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말을 참 잘 하네요." 오카미상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재준상도 수려상처럼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모든 스태프들의 도움 잘 부탁해요."직원들이 다시 박수를 쳤다. "간바레!""아, 그리고 수려상." 오카미상이 수려를 바라봤다."재준상 기숙사 안내랑 료칸 시스템은 수려상이 잘 가르쳐 주세요.""······네."기숙사로 향하는 길,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수려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여길 왔냐? 이
료칸 정문.오카미상은 오늘도 입구 한쪽에 앉아 꽃을 가꾸고 있었다.수려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오카미상은 꽃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처음 뵀을 때도 꽃을 가꾸고 계셨는데."오카미상은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미소를 지었다."꽃은 직접적인 말은 안 하지만, 표현은 확실하거든요."그녀는 라일락의 작은 꽃송이를 손끝으로 살짝 만졌다."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살아 있는 건 다 그래요."잠시 말을 멈춘 오카미상이 수려를 바라봤다."수려상, 이 라일락의 꽃말 알아요?""꽃말이요?""봄의 시작."오카미상이 환하게 웃었다."수려상도 이 라일락처럼, 봄처럼 새롭게 시작해보는 거 어때요?"수려는 라일락을 바라봤다.'다시 시작이라······'그동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모든 게 끝났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정말 끝난 걸까.'난 아직 젊잖아.'수려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다시 시작할 기회가 온 거야.'그리고 그제야 알 것 같았다.오카미상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왜 일본까지 도망쳐 왔는지.그저 말없이 곁에 있어줬다.표현하지 않았을 뿐, 어쩌면 자신이 힘들어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수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카미상······ 제가 가끔 엄마라고 생각해도 될까요?"오카미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끔요?""네······""난 이미 수려상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수려상은 아니었나 봐요?""아, 아니에요!"수려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타쿠야도 있고, 왠지 허락은 받아야 할 것 같아서······"오카미상이 웃음을 터뜨렸다."농담이에요, 농담. 수려상이 언제쯤 오사카식 농담을 받아들일지 정말 궁금하네요."수려도 피식 웃었다.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따뜻했다.그런데 오카미상이 갑자기 말했다."아, 맞다.""네?""오늘
다음 날 아침, 수려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으. 아······무우울!!!!." 이내 료칸 기숙사인 걸 깨달았다. 어제 얼마나 마신 건지, 중간부터는 필름이 아예 끊겨 있었다.'설마 사람들한테 실수한 건 없겠지.'기숙사 방문이 열리고 유코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표정이 묘했다."수려상, 괜찮아요?""숙취가 좀 있는데 괜찮아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혹시······ 어제 제가 실수한 건 없었죠?"유코가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게······ 아베상한테 얼른 가서 사과하세요. 잘못하면 일본 뉴스에 날지도 몰라요!""네????""이렇게 껴안고 난리였어요. 계속 '지수! 지수!' 하면서요. 한 백 번은 부른 것 같은데요? 아베상을 지수라고 부르면서 매달리고 울고······."수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술 먹고 일본인 직원을 붙잡고 난동 부린 한국 아이돌 출신.' 이거 기사라도 나면 제목이 뭐가 될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저······ 혹시 또 다른 실수는 안 했나요?""그거 말고는 딱히 없었어요. 아, 그리고 계속 미안하다고 했어요." 유코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지수 씨라는 사람한테 엄청 미안했나 봐요."수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저의 첫사랑이었어요."그때 기숙사 복도 끝으로 아베가 지나갔다."아베상!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습니까?"아베는 잠시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기숙사 뒤편, 조용한 복도.수려가 90도로 허리를 굽혔다."유코 선배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평소에는 술을 마셔도 필름이 끊기거나 실수하는 편이 아닌데······." 머뭇거리다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큰 실수를 했습니다."아베의 눈이 커졌다. 한동안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어제 일······ 기억나요?""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아베상이 저를 업고 방까지 데려다주신 건 희미하게 기억나요. 무거웠을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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