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띠동갑 연상 여자친구 채영. 그녀가 주는 안락함에 살아가던 내 앞에, 채영의 조카 유진이 나타났다. "만들어줘요. 세상에 하나뿐인 모습으로." 채영의 집에서 유진을 빗기 시작했다.
View More“진짜 나도 가?”
“안 가도 돼.”
채영이 피식 웃더니 안전벨트를 고쳐 매며 덧붙였다.
“대신 이번 달은 당신 돈만 쓰도록 해.”
경쾌한 협박에 나는 헛웃음 쳤다.
“아이고, 무서워라. 얌전히 따라가겠습니다. 마마님.”
“그렇지.”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끼웠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건 네튜브 댓글 창이었다.
구독자 527명의 내 채널.
알고리즘을 탄 덕분에 조금 터져준 영상.
좋아요 1.7천
댓글 312개
- 손 때문에 영상 끝까지 봤어요.
- 브이로그도 찍어 주세요.
- 얼굴 공개 더 해주세요.
한숨이 나왔다.
‘피규어 얘기는 없네.’
나는 화면을 끄고 네비를 켰다.
“규현 씨.”
“응?”
“어째, 조형에 대한 평가보다 외모 평가가 더 많은 거 같은데?”
“아냐, 제작 문의도 있어.”
채영이 창밖을 힐끗 보며 내게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재능만으론 안 굴러가. 세상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피규어 외주 몇 개를 긁어모아도 월 백만 원 남짓.
그 돈으로는 혼자 먹고사는 것도 빠듯했다.
반면 채영은 비싼 집의 방 하나를 작업실로 쓰라며 내어주고, 한도조차 알 수 없는 블랙 카드를 내게 쓰라며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옮겨 날 바라봤다.
“혹시라도, 댓글 남긴 여자들 따로 만나기만 해.”
“하하, 질투하는 거야?”
“질투?”
채영이 피식 웃더니 덧붙였다.
“한 번 만나보던가.”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나는 조금 굳었다.
그녀는 늘 그랬다.
사람을 편하게 안아주듯 감싸놓는 거 같지만,
어딘가 조금 무서울 때가 있었다.
“당신을 두고 내가 왜 다른 여자를 만나.”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채영이 내 오른손을 운전대에서 떼어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그래도 당신 손은 정말 예뻐. 정말 좋겠어, 이 손으로 만든 걸 선물 받는 사람은.”
***
여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폐업을 앞둔 오래된 예식장이었다.
팔순 잔치 현수막.
촌스러운 조명.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예식장 문을 열자마자 음식 냄새와 사람 열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언니들! 오빠!”
“채영이 왔다!”
채영은 내 팔에 팔짱을 끼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인사해. 내 남자친구 규현 씨.”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채영의 언니 넷과 오빠 하나, 그리고 친척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남자친구가 아니라 조카 아냐?”
기분이 조금 나빴다.
“채영이 능력 좋네.”
다들 농담처럼 웃었지만, 그 안에 묘한 가시가 섞여 있는 거 같았다.
‘그래, 열두 살 차이니.’
채영이 잠시 날 보다가 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 규현 씨 기죽이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혼난다.”
어째서일까, 채영의 말과 동시에 그녀 가족들의 태도가 변했다.
“농담이야, 농담.”
“규현 씨, 이리 와서 앉아요.”
자리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진아!”
채영이 누군가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이모, 오랜만이에요.”
내 귓가를 채우던 주변 소음이 순간 전부 멀어졌다.
“얘는 같은 서울 살면서 얼굴 보기가 더 힘들다니까?”
“시험 끝나면 놀러 갈게요.”
이상했다.
이 공간에서 이 여자만 유독 다른 존재 같았다.
채영이 내 팔을 당겼다.
“유진아. 이쪽은 내 남자친구 규현 씨.”
유진이 먼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한 박자 늦게 따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목이 바짝 마르는 거 같았다.
그 이후 몇 번이나 시선이 마주쳤다.
가족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채영과 달리, 유진은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변을 맴돌았다.
나도 모르게 몇 번 더 눈이 갔다.
***
잔치가 끝난 뒤 도착한 채영 부모님 집은 오래된 단독주택 특유의 냄새가 났다.
채영의 가족들과 인사는 했지만, 어울릴 자신까진 없었다.
방 하나를 내어준 덕분에 난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고 거실에선 늦은 밤까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이불 위에 누운 채 천장만 바라봤다.
이상했다.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인지 알 수 없는데 자꾸 얼굴이 떠올랐다.
ㅡ
한참이 지나서야 집 안이 조용해졌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쇼츠를 넘기다, 어느 영상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성의 관심 신호 7가지 알려드릴게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넘기려다가 다시 봤다.
-자꾸 눈이 마주치나요?
-괜히 주변을 맴도나요?
“미친.”
나는 머리를 흔들고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런데도 괜히 심장이 더 뛰는 거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담배나 피우고 자자.”
담배를 챙겨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오래된 집 특유의 마룻바닥 소리가 삐걱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흙냄새. 풀냄새. 축축한 봄밤의 공기.
나아가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별들이 하늘 가득 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아래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심장이 다시 크게 뛰었다.
밤에 보니 알 수 있었다.
낮에 느꼈던 그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그래, 어울리지 않는 계절에 내리는 눈발 같은.
내 여자친구의 조카였다.
머리가 울렸다. 등도 아팠고, 숨 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런데, 지금 물러나면 안 될 거 같았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운동으로 만든 몸. 분명 단단했다. 그런데 가까이 마주하자 오히려 알 수 있었다. 힘은 분명 내가 더 셌다. 문제는 저 인간이 싸움을 안다는 거였다. 중심을 무너뜨리고, 관절을 꺾고, 힘을 흘리는 법을 안다. “왜, 그 남자에겐 그런 눈을 하는 거야.” 그 순간, 그가 내게 다시 달려들었다. 훅ㅡ! 순간적으로 팔이 뻗어왔다. 이번에도 메다꽂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메다꽂히더라도 팔 하나는 부수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윽…!” 남자의 호흡이 순간 흔들렸다. 그래, 힘은 내가 더 셌다. 나는 그대로 몸을 밀어붙였다. 쾅ㅡ! 이번엔 남자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나와 그의 숨이 거칠게 얽혔다. 남자가 바로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끝까지 붙잡았다. “유진 씨…! 도망ㅡ” 그때, 남자가 팔꿈치로 내 뺨을 후려쳤다. 퍽ㅡ! 시야가 흔들렸고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놓지 않았다. 놓으면 안 될 거 같았다. 뒤쪽에서 흐느끼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콰직ㅡ!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따뜻한 액체가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남자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였다. 뒤를 돌아봤다. 유진 씨가 부서진 키링을 쥔 채 떨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준 유진 씨의 미니어처였다. 그걸로 남자의 머리를 찍은 거였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진 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에선 거친 숨이 연거푸 오갔다. 그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싸움 난 거 아냐?” 현관문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도. *** 경찰서의 형광등 불빛은 바깥과는 달리 밝았다. 나는 말없이 손만 내려다봤다. 아까부터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 남자 때문이죠?” 철렁ㅡ. 규현 씨. “맞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틈을 윤슬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맨날 집에 틀어박혀서 이상한 거나 만들고. 돈도 제대로 못 버는 남자잖아.”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그런 남자는 되고, 나는 안 돼요?” 윤슬기가 두 손으로 제 어깨와 팔을 쓸어내렸다. “나 진짜 최선을 다했는데… 아, 이제 진짜 남자가 되어가는구나 싶어서.” 윤슬기의 붉게 젖은 눈이 처참할 만큼 솔직했다. “6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주먹만 움켜쥐었다. “근데 결국… 그냥 ‘남자’를 좋아했던 거였어요…?” *** 한 칸, 그리고 또 한 칸. 나는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유진 씨 방 앞에 멈춰 섰다. 잠깐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똑똑. ‘전화도 안 받는데 찾아온 건 정말 뭐 하는 건지.’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유진 씨.” 목소리가 내 생각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대답은 없었다. “아직 안 온 건가.”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똑똑ㅡ. 그 순간이었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던 그때였다. 철컥.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ㅡ. 문이 천천히 열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나시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몸,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입가에 걸린 기묘한 웃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너머를 바라봤다. 원룸 안쪽, 벽 끝까지 몰린 유진 씨가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겁에 질린 눈.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천천히 남자를 향해 물었다. “당신 뭐야?” 잠깐 정적이 흘렀다.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 여기서 이렇게 등장하네.” 뭐
채영의 회사 근처 카페에서 유진의 연락을 기다렸다.창밖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다.나는 얼음이 녹아내리는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오후 3시 37분.조금 전에도 전화했었다.신호는 갔는데,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뭐 하고 있는 거야.’바쁜 건가, 아니면 진짜 나 피하는 건가.문득 며칠 전 유진 씨 얼굴이 떠올랐다.ㅡ이모로 바꾸라고 했잖아요!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어떻게 바꾸냐고.당신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걸 바꾸냐고.문득 생각이 스쳤다.그녀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다가오다가도 갑자기 선 긋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 밀어내고.나는 괜히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30분 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받지 않았다.또 한 시간 뒤 다시 걸었지만, 이번에도 연결음만 길게 이어졌다.이건 바쁜 게 아니다.일부러 안 받는 거다.순간, 가슴 안쪽이 천천히 식어 내려가는 거 같았다.나는 멍하니 꺼진 휴
오후였다.ㅡ지금 회사로 와. 오늘도 유진이 수발 좀 들어줘.나는 거울 앞에 한 번 더 섰다.웃겼다. 고작 방을 같이 보러 가는 건데.작업대 조명 아래에는 유진 씨를 본떠 만든 피규어가 놓여 있었다.아직 완성되지 않은 눈매와 입술 선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조금만 더.”완성된 피규어를 받은 유진 씨의 표정을 상상하자 자꾸 웃음이 나왔다.집을 나서며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바쁜가?”***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알고?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내가 신은 구두가 삐걱 소리를 냈다.윤슬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순간,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았다.저 눈.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나와는 달리,단 한 번도 나를 놓친 적 없다는 듯한 눈.윤슬기가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후드 그림자 아래 드러난 얼굴은 예전과 달랐다.턱선은 더 날카로워졌고, 목엔 옅은 굴곡이 생겨 있었다.“…여길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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