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붉은 밤》 언론시사회 날. 서령은 극장 뒤편 대기실에서 자기 이름이 적힌 좌석표를 확인했다. 주연 강태욱과 정하린.
감독 윤재문. 그리고 주요 조연 5명. 한서령의 이름은 그중 네 번째였다.
예전 같으면 자리 순서부터 신경 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영화가 어떻게 나왔는지가 더 무서웠다.
“긴장돼요?”
정하린이 물었다.
“엄청요.”
“나도.”
주연 배우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고, 강태욱은 제작진과 마지막 Q&A 순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서령과 눈이 마주치자 짧게 손을 들어 보였다.
개인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오늘은 동료였다.
***
영화는 124분이었다. 서령이 연기한 기자 윤희정의 분량은 촬영 때 생각했던 것보다 줄어 있었다. 잘린 장면도 보였다.
《붉은 밤》 개봉 첫날 저녁.서울 시내 극장 무대인사는 4곳이었다.첫 번째와 두 번째 극장은 별일이 없었다. 세 번째 극장 로비에서 문제가 생겼다. 상영이 끝난 관객과 다음 회차 관객, 배우를 보러 온 팬이 같은 시간에 몰렸다.통제선이 조금씩 밀렸다. 서령은 계단 앞에서 먼저 멈췄다.“여기 너무 좁아요.”현장 진행자가 무전기로 답했다.“동선 바꾸겠습니다.”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크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렸다. 앞줄도 같이 흔들렸다.차민혁은 초청받지 않은 행사였지만 근처 체육관 훈련을 마치고 서령을 보러 왔다가 로비 바깥에 있었다. 소란을 본 그가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보안요원이 막았다.“출연자 동선입니다.”“사람 넘어졌는데.”“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차민혁의 턱이 굳었다. 예전 같으면 밀고 들어갔을 얼굴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대신 바깥에서 몰려드는 팬들에게 소리쳤다.“여기 더 들어가면 위험해요. 뒤로 조금만 빠져요.”운동선수 특유의 큰 목소리가 도움이 됐다. 보안요원도 바깥쪽 라인을 다시 잡았다. 안에서는 서령과 다른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잠시 중단했다.넘어진 관객은 발목을 삐끗한 정도였지만 극장 측은 구급대 확인을 요청했다. 감독이 진행자에게 말했다.“다음 회차 입장 늦춰도 됩니다. 안전부터 봐요.”서령도 마이크를 들었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다친 분 확인하고 다시 시작할게요.”관객은 웅성거렸지만 큰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15분 뒤 행사가 재개됐다.
《붉은 밤》 개봉을 이틀 앞두고 사진 한 장이 돌기 시작했고, 한서령이 강태욱의 차에서 내리는 장면. 촬영일은 한 달 전이었다.둘이 함께 후시녹음실을 나와 주차장까지 걸어간 날. 기사 제목은 그보다 훨씬 앞서갔다.[한서령·강태욱, 사실상 동거? 심야 귀가 포착]서령은 아침부터 박하나와 기사 원본을 확인했다.“동거 근거가 차에서 내린 사진 하나예요?”“차량이 강태욱 배우 명의라서.”“목적지는?”“네 집 지하주차장.”“그날 녹음 끝나고 태워준 거잖아요.”“맞아요.”박하나는 기자에게 보낼 답변 초안을 보여줬다.[두 배우가 작품 후시녹음 일정을 마친 뒤 귀가 과정에서 동승한 사실은 있으나 동거설은 사실이 아닙니다.]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이 정도면 돼요.”“관계 자체를 부인하진 않을 거죠?”서령은 잠깐 생각했다. 강태욱과 입을 맞춘 적이 있다.좋아한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기사 한 줄로 정의할 준비가 된 건 아니었다.“사생활은 추가 답변 안 하는 걸로.”“좋아요.”오전 11시 기사에는 소속사 입장이 반영됐다.오후 1시에는 제목에서 ‘사실상 동거’가 빠졌다.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일부 커뮤니티는 계속 둘을 연인으로 확정했고, 다른 쪽에서는 서도현과 차민혁 이름까지 붙였고, 서령은 반박문을 3번 더 쓰는 대신 휴대폰을 내려놨다.모든 사람의 해석을 고칠 수는 없었다.***그날 오
개봉 전 마지막 공식 행사는 프리미어 레드카펫이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의상 4벌을 걸어놨다.검은 드레스.은색 수트. 짙은 남색 벨벳 드레스.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흰색 롱드레스.“강태욱 배우님 쪽에서는 검정이 영화 톤이랑 맞을 것 같다고 했대요.”스타일리스트가 말하자 서령이 고개를 들었다.“그쪽에서 제 옷도 골라요?”“아니요. 그냥 의견 물어봐서요.”서령이 웃었다.“그럼 의견은 의견으로만.”스타일리스트도 웃었다.“당연하죠.”서령은 흰색을 골랐다.“이게 제일 편해요.”“사진은?”“걸을 수 있어야 사진도 찍죠.”신발은 굽이 낮은 걸 택했다. 아름다움보다 이동이 먼저였다. 예전의 서령이라면 레드카펫에서 누구 팔을 잡을지가 기사 제목이 됐을 것이다.오늘은 제작사에서 동선을 따로 정했다. 감독과 배우들이 각자 입장한 뒤 무대에서 합류. 서령도 혼자 차에서 내렸다.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다.“한서령 씨, 강태욱 씨와 같이 안 들어오세요?”“차민혁 선수는 오늘 안 왔습니까?”“서도현 대표와 관계는 어떻게 됐나요?”질문이 날아왔지만 포토월 진행요원이 바로 정리했다.“작품 관련 질문만 부탁드립니다.”서령은 카메라 정면을 보고 3초.왼쪽.오른쪽. 그리고 손을 한번 들어 인사했다. 배우로서 배운 동선이었다.누구의 팔도 필요하지 않았다.***
《붉은 밤》 언론시사회 날. 서령은 극장 뒤편 대기실에서 자기 이름이 적힌 좌석표를 확인했다. 주연 강태욱과 정하린.감독 윤재문. 그리고 주요 조연 5명. 한서령의 이름은 그중 네 번째였다.예전 같으면 자리 순서부터 신경 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영화가 어떻게 나왔는지가 더 무서웠다.“긴장돼요?”정하린이 물었다.“엄청요.”“나도.”주연 배우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고, 강태욱은 제작진과 마지막 Q&A 순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서령과 눈이 마주치자 짧게 손을 들어 보였다.개인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오늘은 동료였다.***영화는 124분이었다. 서령이 연기한 기자 윤희정의 분량은 촬영 때 생각했던 것보다 줄어 있었다. 잘린 장면도 보였다.대신 남은 장면은 더 단단했다. 특히 신문사 계단에서 주인공을 보내주는 장면.“살아서 돌아오세요.”후시녹음으로 다시 한 그 문장이 극장 스피커에서 나왔다. 서령은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서 손바닥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영화가 끝나자 박수가 나왔다.기립박수는 아니었다. 기자들이 노트북을 펴고, 사진기자들이 앞으로 이동하고, 스태프가 무대 의자를 정리했다. 그 평범한 소란이 좋았다.Q&A 첫 질문은 감독에게 갔다. 두 번째는 강태욱. 세 번째가 서령이었다.“한서령 배우는 예능 이미지가 강했는데, 시대극에서 절제된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이미지 전환을 의식했습니까?”서령은 마이크를 들었다.“이미지를 바꾸려고 연기한 건 아니에요.”잠시 생각했다.“오디션을 보고 역할을 받았고, 윤
진채린이라는 이름이 다시 기사에 올라온 건 뜻밖의 방식이었다.[한서령 허위 경력 자료, 외주 홍보업체 직원이 최초 유포]경찰 수사 결과가 일부 송치 단계로 넘어갔다는 기사였고, 서령은 제목만 보고도 박하나에게 전화했다.“우리 쪽에서 낸 기사예요?”“아니요. 사건 송치 기사 받아쓴 거예요.”“진채린이 시킨 걸로 나온 거예요?”“그건 아니에요.”박하나가 바로 선을 그었다.“외주 홍보업체 팀장이 온라인 제보를 확대해서 퍼뜨린 정황은 있는데, 진채린 씨가 불법 유포를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기사 기준으로 확인 안 됐어요.”서령은 숨을 내쉬었다.“그럼 우리도 그렇게만 말해요.”“당연하죠.”한 시간 뒤 모먼트액터스 명의의 짧은 입장이 나갔다.[수사 중인 사안으로, 확인되지 않은 개인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추측하지 않겠습니다.]댓글은 답답하다는 반응이 많았다.[왜 봐주냐][진채린이 몰랐겠냐][재벌이면 다 빠져나가네]서령은 댓글창을 닫았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건 여전히 인기 없는 태도였다.그래도 필요했다.***오후에는 진채린 측 변호사에게 연락이 왔다. 민사 분쟁을 별도 조정으로 끝내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한지우가 물었다.“만날래?”“변호사끼리 하면 안 돼?”“돼. 근데 상대가 직접 사과 의사가 있다고 해.”서령은 한참 생각했다.“그럼 변호사 동석하고요.”
박성훈 측 회계자료가 넘어온 건 9일 뒤였다. 한지우가 파일을 열면서 말했다.“이건 좀 봐야겠다.”서령은 먼저 표부터 읽었다. 보증대출 실행일. 회사 운영계좌 입금.그리고 3일 뒤 여러 계좌로 나뉘어 빠져나간 돈. 한지우가 한 줄을 짚었다.“여기 1억 8천. 개인회사 쪽으로 갔어.”“박성훈 개인회사?”“지분 대부분 본인과 가족 명의.”다른 항목도 있었다. 제작비 선급금. 차량 리스 보증금.개인 명의 상가 임차보증금 일부. 모든 돈이 서령 관련 활동비로 쓰인 게 아니었고, 그렇다고 곧바로 횡령 확정도 아니었다.회사의 자금과 대표 개인의 자금이 섞인 흔적이 있다는 정도였다.“형사고소부터 해요?”서령이 묻자 한지우가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민사 자료부터 정리. 형사 여부는 회계감정 결과 보고 결정하자.”“왜요?”“자료가 이상하다고 범죄가 바로 되는 건 아니니까.”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답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말이 오히려 익숙했다.증거가 있는 만큼만 간다.***그날 오후 법원에서 박성훈 명의 계좌 일부에 대한 가압류 결정이 나왔다.한지우는 기뻐하지 않았다.“임시로 묶어두는 거야. 우리가 이겼다는 뜻 아니야.”“알아.”“담보도 제공했고, 박성훈 쪽에서 이의할 수 있어.”“그래도 돈 빼돌리는 건 조금 막겠네요.”“맞아. 그게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