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에서 버린 아들이 세계를 샀다

재벌가에서 버린 아들이 세계를 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By:  해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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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에서 버림받은 아들 강도현. 열아홉에 쫓겨난 그는 13년 만에 월가를 뒤흔드는 투자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어머니의 장례식이었다. 평생 국밥집을 지키던 어머니는 한성그룹의 강제 철거에 맞서다 쓰러졌고,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도 외면했다. 이복형은 조의금 1억을 던지며 다시 사라지라고 비웃는다. 도현은 돈을 받지 않았다. 대신 형의 개발사업 자금줄부터 끊었다. 어머니가 남긴 낡은 수첩에는 한성그룹을 세운 숨겨진 투자계약까지 적혀 있었다. 빼앗긴 이름과 재산, 그리고 어머니의 마지막 존엄을 되찾기 위해 도현은 선언한다. “당신들이 지키려던 그 회사를, 내가 사겠습니다.” 재벌가의 상속 전쟁은 곧 월가와 세계 자본을 뒤흔드는 거대한 복수로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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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장마가 서울을 집어삼킨 지 엿새째였다.

새벽부터 쏟아진 비는 오후가 되자 더욱 거세졌다. 도로의 배수구마다 흙탕물이 소용돌이쳤고, 자동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누런 물이 인도까지 튀어 올랐다. 짙게 내려앉은 먹구름 아래로 건물들이 흐릿하게 잠겨 있었다.

강도현이 탄 검은 세단은 그 빗속을 뚫고 한빛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현은 무릎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고인 이정숙]

[향년 58세]

[빈소: 한빛병원 장례식장 특3호실]

어머니의 이름 앞에 붙은 '고인'이라는 두 글자가 낯설었다.

나흘 전 통화에서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아들의 끼니부터 걱정했다.

'도현아, 거긴 지금 몇 시니?'

'새벽 두 시요.'

'아이고, 또 안 자고 일했어? 돈도 좋지만 잠은 자야지.'

그때 도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도 이제 가게 그만하시고 좀 쉬세요. 제가 집 알아보고 있다니까요.'

'나는 괜찮아. 너나 밥 잘 챙겨 먹어.'

그것이 마지막 통화였다.

도현은 통화기록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익숙한 번호가 화면에 나타났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받을 사람이 없었다.

“대표님, 곧 도착합니다.”

앞좌석에서 박성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현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도착하면 나부터 내려.”

“비가 많이 옵니다. 우산을 준비하겠습니다.”

“괜찮아.”

성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뉴욕에서부터 함께 온 그는 도현이 비행기 안에서 단 한 번도 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소의 도현이라면 열 시간이 넘는 투자협상에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상대가 준비한 숫자의 허점을 찾아내고, 계약서에 숨어 있는 위험을 짚어 내는 데 누구보다 냉정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부고를 들은 뒤로는 달랐다.

뉴욕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결재한 서류가 무엇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차가 장례식장 현관 앞에 멈췄다.

도현은 운전기사가 문을 열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다. 굵은 빗방울이 검은 코트의 어깨를 두드렸고,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목덜미를 적셨다.

성재가 우산을 펼쳐 뒤따라왔지만 도현은 이미 현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국화 향과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밀려왔다.

안내판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이정숙.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그 아래에는 빈소 번호가 적혀 있었다.

도현은 한동안 그 글자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쓰는 사람이었다. 국밥집 앞에 붙여 놓은 손글씨 메뉴판에도, 아들에게 보내는 택배 상자에도 그랬다.

그런 이름이 이제 장례식장 안내판에 올라 있었다.

“도현아!”

빈소 입구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김복순이었다.

어머니와 삼십 년 가까이 같은 시장에서 장사한 여자였다. 일흔이 넘은 복순은 도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우리 도현이 왔구나.”

도현은 복순의 두 손을 붙잡았다.

“아주머니.”

“정숙이가…… 네 엄마가…….”

복순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거칠고 마른 손이 도현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네가 뭘 잘못했니. 먼 나라에서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복순은 도현의 젖은 어깨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어서 들어가 봐라. 엄마 기다리겠다.”

도현은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국화 향이 짙었다. 향로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천장 쪽으로 가늘게 흩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머니가 있었다.

영정사진 속 이정숙은 연보라색 블라우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도현은 그 옷을 알아보았다.

삼 년 전 생신에 사 드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옷을 받아 들고 한참이나 잔소리를 했다.

'국밥집 하는 사람한테 이런 비싼 옷이 왜 필요하니?'

그러면서도 사진을 찍을 때는 그 옷을 입었다.

도현은 영정 앞에 섰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입술이 조금씩 굳어졌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나 왔어.”

사진 속 어머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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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장마가 서울을 집어삼킨 지 엿새째였다.새벽부터 쏟아진 비는 오후가 되자 더욱 거세졌다. 도로의 배수구마다 흙탕물이 소용돌이쳤고, 자동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누런 물이 인도까지 튀어 올랐다. 짙게 내려앉은 먹구름 아래로 건물들이 흐릿하게 잠겨 있었다.강도현이 탄 검은 세단은 그 빗속을 뚫고 한빛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있었다.도현은 무릎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고인 이정숙][향년 58세][빈소: 한빛병원 장례식장 특3호실]어머니의 이름 앞에 붙은 '고인'이라는 두 글자가 낯설었다.나흘 전 통화에서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아들의 끼니부터 걱정했다.'도현아, 거긴 지금 몇 시니?''새벽 두 시요.''아이고, 또 안 자고 일했어? 돈도 좋지만 잠은 자야지.'그때 도현은 웃으며 대답했다.'엄마도 이제 가게 그만하시고 좀 쉬세요. 제가 집 알아보고 있다니까요.''나는 괜찮아. 너나 밥 잘 챙겨 먹어.'그것이 마지막 통화였다.도현은 통화기록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익숙한 번호가 화면에 나타났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이제는 받을 사람이 없었다.“대표님, 곧 도착합니다.”앞좌석에서 박성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도현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도착하면 나부터 내려.”“비가 많이 옵니다. 우산을 준비하겠습니다.”“괜찮아.”성재는 더 말하지 않았다.뉴욕에서부터 함께 온 그는 도현이 비행기 안에서 단 한 번도 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평소의 도현이라면 열 시간이 넘는 투자협상에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상대가 준비한 숫자의 허점을 찾아내고, 계약서에 숨어 있는 위험을 짚어 내는 데 누구보다 냉정했다.그러나 어머니의 부고를 들은 뒤로는 달랐다.뉴욕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결재한 서류가 무엇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차가 장례식장 현관 앞에 멈췄다.도현은 운전기사가 문을 열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다. 굵은 빗방울이 검은 코트의 어깨를 두드렸고, 머리카락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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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도현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유리 액자 너머의 얼굴을 만져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향을 집어 들었다.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는데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불꽃이 두 번이나 꺼지고 세 번째에야 향 끝에 불이 붙었다.도현은 향로에 향을 꽂고 두 번 절을 올렸다.차가운 바닥에 이마가 닿았다.잠시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열아홉 살에 집에서 쫓겨났을 때도 울지 않았다. 뉴욕에서 처음 투자에 실패해 가진 돈을 거의 잃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그런데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는 몸을 일으키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복순은 빈소 한쪽에 놓인 낡은 가방을 가져왔다.“이거 정숙이 물건이야. 병원에서 받아 왔는데, 네가 직접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도현은 가방을 받아 들었다.오래된 갈색 손가방이었다. 손잡이의 가죽이 벗겨져 있었고, 지퍼에는 작은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다.어머니가 십 년 넘게 들고 다니던 가방이었다.안에는 손수건과 돋보기안경, 낡은 지갑이 들어 있었다. 도현은 지갑을 열다가 손을 멈췄다.투명한 사진칸에 어린 자신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중학교 졸업식 날 찍은 사진이었다.사진 속 도현은 교복을 입고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날 사진관에서 사진을 여러 장 뽑았지만, 아들에게는 한 장만 건네주었다.나머지 사진을 어디에 두었는지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도현은 손가락으로 사진의 닳은 모서리를 쓸었다. 오랫동안 꺼내 보고 다시 넣었던 듯 가장자리가 하얗게 해져 있었다.“네 엄마가 그 사진을 얼마나 아꼈는지 몰라. 장사하다 힘들면 가끔 꺼내 보곤 했어.”도현은 지갑을 닫지 못했다.자신은 뉴욕에서 수백억 원이 오가는 계약서를 다루면서도 어머니가 어떤 사진을 품고 살았는지 몰랐다.그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꺼내 자신의 지갑 안쪽에 넣었다.“가방은 제가 가져갈게요.”복순이 고개를 끄덕였다.도현은 지퍼를 끝까지 잠근 뒤 가방을 영정사진 아래에 내려놓았다.***장례지도사가 다가온 것은 도현이 상주복으로 갈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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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녀는 영정 앞에 절을 올린 뒤 도현에게 작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어머님께 드리려고 쓴 편지예요.”도현은 봉투를 받았다.“저 고등학교 때 매일 국밥집에서 밥 먹었어요. 형편이 어려워서 돈을 못 낸 날이 많았는데, 어머님은 한 번도 싫은 소리를 안 하셨어요.”여자는 눈물을 닦았다.“이번에 취직했거든요. 첫 월급 받으면 찾아뵈려고 했는데…….”도현은 편지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았다.“어머니께 잘 전하겠습니다.”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도현은 봉투를 영정사진 아래에 놓았다.어머니가 지켜 온 세월이 그곳에 있었다.그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보내 드린 돈으로 충분히 편하게 지내셨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빈소에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신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밤이 깊어지면서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빈소 밖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도현은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잠시 영정 앞에 앉았다.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 국밥집 문을 닫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큰 솥을 씻고, 바닥을 닦고, 다음 날 사용할 재료를 손질했을 것이다.그때 장례식장 현관 쪽에서 자동차 경적이 짧게 울렸다.검은 세단 세 대가 빗속에 멈춰 섰다.수행원들이 우산을 펼쳤고, 그중 가장 큰 우산 아래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강태준.한성그룹 전략부문 사장이자 도현의 이복형이었다.열세 해 전, 열아홉 살이었던 도현을 한성가에서 쫓아낼 때 가장 앞장섰던 남자.태준은 수행원에게 우산을 넘기고 빈소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영정사진보다 접객상과 조문객들을 먼저 둘러보았다. 낡은 상복을 입은 시장 상인들이 눈에 들어오자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여전하네.”태준이 영정사진을 바라봤다.“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도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조문하러 오셨습니까?”“그럼 뭘 하러 왔겠어?”태준은 수행원에게 손을 내밀었다.두툼한 흰 봉투가 건네졌다.“1억이다. 네 어미 장례 치르고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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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태준은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장례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밖에서 천둥이 울렸다.“한국에서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 생각 하지 말고.”도현은 형의 얼굴을 살폈다.방금 전까지 어머니를 모욕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웃지 않고 있었다.“쓸데없는 일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네가 몰라도 되는 일.”태준은 손바닥으로 도현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다.도현이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태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강도현.”“말씀하십시오.”“네가 월가에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한국이야. 한성이 마음먹으면 네가 가진 돈쯤은…….”“형님.”도현이 말을 끊었다.“한성이 얼마나 큰 회사인지는 압니다.”그는 태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런데 큰 회사에 계신 분이 왜 어머니 장례식까지 찾아와서 저더러 도망가라고 하십니까?”태준의 입술이 굳었다.아주 짧은 순간이었다.그러나 도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태준이 다시 비웃었다.“어릴 때부터 말꼬리 잡는 버릇은 여전하군.”“형님도 변한 게 없으십니다.”“뭐?”도현은 영정사진을 한 번 바라보았다.“사람이 죽은 자리에서도 돈이면 다 되는 줄 아시니까요.”태준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렸다.수행원들이 서둘러 뒤따랐다.유리문이 열리자 거센 빗소리가 빈소 안으로 밀려들었다.태준은 끝내 어머니의 영정 앞에 절하지 않았다.***태준이 떠난 뒤에도 도현은 한동안 빈소 입구에 서 있었다.유리문 너머로 검은 세단들이 움직였다. 수행원이 펼친 우산 아래에서 태준은 구두에 묻은 빗물을 털어 냈다.조금 전 어머니의 영정 앞에 돈을 던졌던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에 올라탔다.도현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열세 해 전에도 태준은 저런 얼굴이었다.한성가를 떠나는 도현에게 여행용 가방 하나를 던져 주고는 다시는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가 아들의 짐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도 태준은 웃었다.그날 도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열아홉 살의 자신에게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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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작년 생신에 자신이 사 드린 외투였다.도현의 시선이 어머니의 오른손에 멈췄다.손가락은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고, 손등에는 검붉은 흙이 묻어 있었다.늘 뜨거운 국솥을 만지던 손이었다.어린 도현이 열이 나면 밤새 이마를 짚어 주던 손이기도 했다.그 손이 차가운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도현은 화면을 끄지 못했다.사진 한쪽에는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중장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사진만으로는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어머니가 쓰러진 순간에도 철거 현장은 움직이고 있었다.“이게 언제 찍힌 겁니까?”“정숙이가 쓰러진 날.”복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철거하는 사람들이 들이닥쳤어. 아직 가게 안에 물건이 있는데도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지.”“어머니가 그곳에 계셨습니까?”“자기 가게 앞에 있었어. 다른 상인들이랑 같이.”도현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어머니는 평생 누구와 싸우는 법이 없었다. 손님이 돈을 내지 못하면 다음에 주라고 했고,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도 따뜻한 물부터 내주던 사람이었다.그런 어머니가 중장비 앞에 서 있었다.“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복순이 고개를 숙였다.“정숙이가 못 하게 했어. 네가 한국에 오면 또 그 집안이랑 싸우게 될까 봐.”도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한성 때문입니까?”복순의 어깨가 움찔했다.“알고 있었니?”“형님이 방금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복순은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시장을 개발하는 곳이 한성 쪽이야.”도현은 다시 사진을 들여다봤다.먼지에 가려져 있던 현장 가림막 위쪽을 확대하자 흐릿한 글씨가 나타났다.**한성건설.**그 아래에는 재개발사업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도현은 사진을 자신의 휴대전화로 전송받았다.“원본도 지우지 말고 보관해 주세요.”“도현아…….”“누가 찍은 사진인지도 알려 주십시오.”복순은 도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장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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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는 사진을 확대했다가 다시 줄였다.화면 속 사람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그러나 그날 현장에서는 분명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그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잠시 후 성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확인했습니다.”도현은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말해.”“한성건설이 시공에 참여하는 재개발사업입니다. 시행사는 별도 법인이고, 철거는 외부 업체가 맡았습니다.”“현장 관리 책임자는?”“공개된 사업 자료에 명단이 있습니다. 지금 보내 드리겠습니다.”도현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첨부파일을 열자 여러 기업과 담당자의 이름이 나타났다.도현은 천천히 명단을 내려 읽었다.그중 한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강현우.**한성건설 전무.현장 사업관리 책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도현은 화면을 확대했다.강현우.강성호 회장의 조카.열세 해 전, 도현이 한성가를 떠나던 날에도 그곳에 있었다.태준의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형, 저런 애한테 돈까지 줄 필요 있어요?'그랬던 남자가 이제 어머니가 쓰러진 재개발사업의 책임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성재가 물었다.“아는 사람입니까?”“사촌형.”“한성그룹 회장 조카 말입니까?”“그래.”도현은 사진과 명단을 나란히 띄웠다.어머니가 쓰러진 장소.그곳의 사업관리 책임자.그리고 장례식장까지 찾아와 한국을 떠나라고 경고한 강태준.아직 이 세 가지 사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도현은 성재에게 말했다.“현장 작업일지, 철거업체 계약 관계, 안전관리 기록부터 확인해.”“확보 가능한 자료를 알아보겠습니다.”“병원 이송기록은 유족 자격으로 요청할 거야. 한지수 변호사에게 절차를 맡기고.”성재는 잠시 침묵했다.“대표님, 한성을 상대하실 생각입니까?”도현은 대답 대신 장례식장 안을 바라보았다.영정사진 속 어머니가 보였다.그 아래 놓인 국화는 태준이 건드린 흔적도 없이 가지런했다.어머니는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도 한성가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다. 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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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강도현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날은 결혼 5주년 기념일이었다.서울에는 사흘째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강남대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도현은 조수석에 놓인 꽃다발의 포장지를 다시 여몄다. 붉은 장미 사이에는 작은 보석 상자가 숨겨져 있었다. 며칠 전 백화점에서 아내 한서연이 한참 들여다보던 목걸이였다.퇴근은 예정보다 세 시간이나 늦어졌다. 해외 투자계약의 자금 집행 문제로 긴급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를 마무리하느라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서연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직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결혼한 지 다섯 해가 지났어도 서연은 기념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난해에도 약속을 어겼다가 며칠 동안 냉랭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올해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아 미리 식당까지 예약했지만, 결국 회사 일 때문에 취소해야 했다.한성그룹 회장 강성호의 혼외자로 태어난 도현에게 회사는 언제나 전쟁터였다. 이복형 강태준이 실수하면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수습했지만, 도현이 작은 숫자 하나라도 잘못 적으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 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일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가정에 소홀해지는 날도 많았다.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서연이라고 믿었다.차량이 고급 주택가로 접어들 무렵, 한성그룹 재무관리팀 박성재 부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박 부장, 아직 퇴근 안 했습니까?"— 상무님, 혹시 오늘 오후 해외 법인 자금 집행 건을 직접 승인하셨습니까?도현은 조수석의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좁혔다."어떤 집행 건입니까? 오늘 제가 최종 승인한 해외 송금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승인 기록에 상무님 계정이 남아 있어서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내일 아침 원본 기록부터 확인합시다. 지금은 아무것도 수정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하세요."성재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곧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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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서연은 진주색 실크 잠옷을 입고 태준의 무릎 가까이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어깨끈 하나가 흘러내려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고쳐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태준의 셔츠 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태준은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 놓은 채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한 손이 서연의 허리를 감싸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기울이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오빠, 오늘은 나한테 상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무슨 상?""다섯 해나 착한 아내 노릇했잖아요. 나 정도면 정말 잘한 거 아닌가? 그 답답한 남자 옆에서 웃어 주고, 밥 먹어 주고, 매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척까지 했는데."서연은 손가락으로 태준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태준이 그녀를 끌어당기자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대었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태준이 웃음을 터뜨리자 서연은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가렸다."쉿, 그렇게 크게 웃지 마요. 도현 씨가 들으면 어떡해.""그놈은 아직 회사에 있을걸.""알아요. 오늘도 늦게 들어오라고 했거든요."도현의 손이 굳어졌다.아침에 서연은 그에게 무리해서 일찍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 회사 일을 먼저 마무리하라며, 자신은 집에서 쉬고 있겠다고 했다. 도현은 그 말을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서연은 형의 품에 안겨 그 일을 자랑하고 있었다."그런데 오빠,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아요?"서연이 태준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그놈 결혼기념일?""맞아요. 벌써 다섯 해예요. 내가 그 사람한테 처음 접근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태준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처음에는 네가 일 년도 못 버틸 줄 알았지.""나도 그랬어요. 그런데 도현 씨가 생각보다 너무 순진하더라고요. 내가 조금만 웃어 주면 뭐든 믿었어요. 출장 가서도 매일 전화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면 꼭 미안하다고 하잖아요."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태준의 넥타이를 손가락에 감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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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날 오빠가 축사하면서 우리 행복하게 살라고 했잖아요."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태준의 어깨를 두드렸다."나 그때 진짜 웃을 뻔했어요. 오빠가 얼마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는지 몰라요."태준도 웃었다."네 남편은 감동해서 울 것 같던데.""그랬죠. 나한테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으니까."서연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내가 결혼식 전날 밤에도 오빠랑 같이 있었다는 걸."도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결혼식 전날, 서연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겠다며 늦게까지 외출했다. 도현은 그녀가 피곤할까 봐 다음 날 아침까지 연락하지 않았다. 그날도 형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신혼여행도 생각나네요."서연은 와인잔을 들었다."내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일찍 돌아왔잖아요. 그 사람은 내가 아픈 줄 알고 예약까지 전부 취소했어요."태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네가 빨리 돌아오고 싶다고 난리였지.""오빠가 보고 싶었으니까요."서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도현은 자신이 신혼여행지에서 서연을 업고 호텔 로비를 지나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다며 제대로 걷지 못했고, 그는 아내가 걱정돼 예정된 여행을 취소했다. 그날 밤 서연은 미안하다며 울었고, 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고 괜찮다고 말했다.그 기억마저 거짓이었다."그런데 도현 씨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알아요?"서연은 태준의 손목시계를 풀어 자신의 손목에 대 보았다."내가 갖고 싶다고 하면 뭐든 사 줘요. 이번에도 목걸이 사 오겠죠. 며칠 전에 백화점에서 일부러 오래 쳐다봤거든요."태준이 그녀의 손목에서 시계를 빼내며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계속 살아.""에이, 오빠."서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돈 쓰는 건 마음에 들지만 남편으로는 정말 재미없어요. 매일 회사 얘기만 하고, 쉬는 날에도 서류를 들여다보잖아요.""그 서류 덕분에 우리가 편했는데.""그건 그렇죠."서연의 눈빛이 달라졌다."이번에 가져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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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태준이 웃었다.도현은 천천히 형에게 시선을 돌렸다."형은 내 결혼식에서 축사까지 했어.""그랬지.""내가 서연이랑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했을 때도 축하한다고 했잖아."태준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그래서?"그 한마디에 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태준은 동생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해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형이 내 아내를 이용해서 내 자료를 빼돌린 거야?""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네."태준은 셔츠 소매를 정리했다."네가 일을 워낙 잘하잖아. 아버지가 중요한 투자 검토는 죄다 네게 맡기고, 나는 결과만 보고받으라고 하니 방법이 없었지.""그래서 서연이를 이용했어?""이용이라니. 서연이도 자기가 원하는 게 있었어."태준이 서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맞아. 나도 오빠가 잘되는 게 좋았으니까."도현은 그제야 자신이 밤새워 작성했던 보고서들을 떠올렸다. 동남아 물류회사 인수, 해외 특수목적법인 투자, 건설 계열사 자금 지원까지. 자신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사업들이 이상하게도 이사회에서 승인됐고, 그 과정에서 원래 보고서와 다른 내용이 올라간 적도 있었다.당시에는 단순한 내부 의견 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누군가 자신의 자료를 빼돌리고 불리한 내용을 지우거나 바꾸어 형에게 유리하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서재 열쇠도 네가 가져갔어?"서연은 화장대 서랍에서 작은 은색 열쇠를 꺼냈다."당신이 직접 알려 줬잖아. 중요한 자료는 여기 보관한다고.""내가 널 믿었으니까.""그러니까."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당신 문제야.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널 사랑한 게 그렇게 우스웠어?"서연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미안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도현이 아직도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당신은 왜 끝까지 그런 얘기만 해?""대답해.""그래, 우스웠어."그녀는 가운의 허리끈을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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