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주의였군. 형은 저런 무희들 따위엔 흥미가 없으신 분이지요. 우리 가문의 호희들조차도 그의 눈엔 들지 못하였으니 말이지.”
육황자가 보기에 강민은 남녀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강준은 모든 것을 꿰뚫고는 있으나 여색에는 그다지 흥이 없는 자였다.
그의 뜻은 오로지 권세에만 있었고 다른 것은 관심 밖이었다.
헌데 선왕부는 그의 모후인 운귀비의 친정이었고, 그 세력이 날로 창대하여 천자까지도 그 움직임을 살핀다 하였으니, 택문은 그 권세의 팽창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내 그대에게 호희들을 들여보낸 것은 즐기라 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소.”
강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형님, 공과 사란 것이 때로는 경계가 흐려지기도 하지요.”
육황자는 가볍게 답한 뒤, 하인에게 명했다.
“가서 무희들 중 가장 어여쁜 이를 데려오거라.”
강준은 다시금 소준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진명우 또한 그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냉소가 흘러간 듯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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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내려온 소은은 재빨리 의복을 갈아입고 위경화가 기다리고 있는 장막으로 돌아갔다.
“이번 일은 정말... 내가 어떻게 너에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경화는 소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놓이며 눈물이 왈칵 터져버렸다.
소은은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줄곧 친언니로 여겨온 걸 알지? 그래서 언니가 다치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해.”
“이 몸은 이제 네 거야. 네가 곤경에 처하면, 나 또한 목숨 걸고 도울게.”
위경화가 눈물을 닦고 결의 찬 목소리로 맹세했다.
둘 사이가 예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진 느낌에 소은은 가슴이 뭉클했다.
“혹 누군가가 무희에 대해 묻거든, 나와 체격이 비슷한 이를 내세워 얼버무리면 돼.”
밤중이라 똑똑히 본 이는 없을 것이었다.
소은이 너무 눈에 띄었다는 것은 위경화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녀가 그저 무희에 지나지 않았으니, 흑심을 품고 접근하려 들 것이었다.
“걱정 마, 아무도 네가 그 무희였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거야.”
하지만 소은은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소은은 다시는 연회장에 가지 않았다.
그 일로 말미암아 대사단은 없으리라 여겼지만, 혹시라도 퍼지기라도 한다면 어찌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밤새 뒤척였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국공부와 위씨 가문은 이미 한배를 탄 사이라, 한쪽이 무너지면 함께 타격을 입는 운명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나라의 존엄을 회손한 일로 번지기라도 한다면 위경화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국공부 역시 무사할 리 없고 아버지, 큰 아버지 두 오라버니의 관직과 앞길까지 모조리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밤새 한숨도 잠들 수 없었고 소은은 결국 병이 나고 말았다.
의녀가 맥을 짚어보더니 근심이 쌓여 병이 된 데다 원래 체질도 허약하여 찬 기운에 감기까지 들었다고 했다.
위경화는 사냥에도 나가지 않고 소은 곁을 지키며 그녀를 정성껏 돌보았다.
밖에서는 사냥이 한창이라 꽤 흥겨운 분위기였지만 소은과 위경화는 그저 장막 안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네 예상이 맞았어. 무희에 대해 캐물으러 온 자들이 꽤 있었지. 하지만 전부 돌려보냈어.”
소은은 기운이 없어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위경화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참, 조금 전 세자 저하를 뵈었는데 네 안부를 물으시더라.”
소은은 ‘강준’이라는 이름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분이... 내 안부를 물었다고?”
“그래, 몸이 좀 나아졌는지만 물으셨지. 그 외엔 별말씀 없었어.”
그가 갑자기 왜 자신의 안부를 묻는 것인지, 그 속셈을 알 수 없었으니 우선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해가 조금 저문 뒤, 소준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함께 온 이도 있었으니, 바로 진명우였다.
외간 남자를 대면하는 건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오라버니가 함께 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왔어?”
“떠나기 전, 숙모께서 너를 잘 돌보라 하셨는데… 이렇게 몸져누웠으니,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소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만 쉬면 금방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 곧 다시 훈련에 임할 수 있을 테니 그때는 명우 도령께 폐를 끼쳐야 할 듯합니다.”
그녀가 진명우 쪽을 바라보니 그의 표정은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그는 묘하게 냉담했다.
그가 이리도 차갑게 구는 건 처음이었다.
“폐는 아니지요.”
그 말에 소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그녀는 이미 강준의 차갑고 무심한 태도에 익숙해졌기에 이제 더는 마음을 쓸 열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틀 뒤, 병세가 나아진 소은은 승마 훈련을 위해 마장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진명우가 바위 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소은이 자신이 언제 말을 타러 올 것인지 일부러 알리지 않았었다.
계속 이 자리에 있었던 걸까?
“명우 도령.”
소은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선 진명우는 먼지도 없는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소은 아씨.”
“요 며칠... 계속 여기 계신 겁니까?”
진명우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은은 괜스레 마음이 약해져 조금 더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약조를 미리 했어야 했는데, 괜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곧장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차근차근 성의를 다해 알려 주었고 실력 또한 뛰어나 한눈에 그녀의 부족한 점을 짚어내곤 했다.
다만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하였고 소은이 묻지 않으면 그도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소은은 기분이 다시 언짢아져 툭하고 내뱉었다.
“명우 도령께서는… 한 사람을 꼭 닮으셨습니다.”
진명우가 돌아보며 담담히 물었다.
“누구 말씀이오?”
소은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강준, 지금의 강준이 아닌, 그녀의 지아비이었던 강준말이다.
“혹 요 며칠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다면 그냥 솔직히 말씀해 주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시던 소은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알던 명우 도령은 이토록 차가운 분이 아니셨잖습니까? 저를 시큰둥하게 대하는 건 싫습니다. 좀 상처거든요.”
그 말에 멈칫하던 진명우가 나직이 물었다.
“그날… 무희들 사이에 계셨죠?”
마치 비밀을 들킨 자처럼 소은의 어깨가 순간 살짝 움츠러들었다.
“무희 관련 일은 경화 아씨께서 맡고 있고 사고가 생긴 듯하니, 아씨께서 나서신 것이겠지만 그리 무모하게 나서신 건 옳지 않았습니다.”
“그날 일을 생각하면 저 또한 지금도 아찔합니다. 앞으론 절대 경솔하게 굴지 않을 터이니 그 일은 외부에 알리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진명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아씨와 연관된 일이니 밖으로 새는 일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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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의 승마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이틀 정도 지나자 곧 감을 잡았다.
진명우가 어디까지나 외간 남자인 만큼, 이후론 주로 홀로 훈련했다.
가끔 심지연과 강준이 함께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세자는 본디 남을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고 늘 바쁜 몸이었다.
그에게 제발 가르쳐달라고 애원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는 오직 심지연의 부탁만 들어주었다.
다만 두 사람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심지연은 조심스러웠고, 세자 또한 행실에 흠잡을 데 없이 신중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남녀 간의 예법을 가장 중히 여기는 자들이라 괜한 구설 수에 오를 일은 하지 않았다.
소은은 이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피해 다녔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조심스러움이 지나쳐 오히려 눈에 띄기도 했다.
어느 날, 소은은 늘 그렇듯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산 중턱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그 모습은 마치 선계라도 된 듯했다.
산엔 안개가 자욱하고, 그 자태는 마치 신선이 머무는 곳인 양 신비로웠다.
말고삐를 잡은 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모두가 그녀의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몇 배는 더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호숫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말고삐를 풀어 잠깐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가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강준은 상의를 벗은 채 서 있었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허리, 금방 목욕을 마친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물 위에 피어난 연꽃처럼 눈부셨다.
남자의 아름다움이 이토록 매혹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자태였다.
이곳은 워낙 외진 곳이라 도성처럼 편리하지 못했다.
일손도 넉넉지 않아, 온수는 여인들이 우선 사용할 수 있었고 남자들은 주로 사람이 드문 틈을 타 호숫가에서 씻는 경우가 많았다.
강준은 이내 옷을 갈아입고, 허리띠를 매며 상의를 갖춰 입었다.
소은은 숨을 삼켰다.
상황이 너무나도 불리했다.
그녀가 먼저 사내의 몸을 본 셈이고, 지금 이곳엔 두 사람뿐.
자칫 그녀의 명예가 나락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강준이 돌아보았고 순간, 숨이 턱 멎을 만큼 눈부셨다.
준수한 얼굴에 오묘한 기운이 스쳤다. 하지만 눈빛만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