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제는 오랜 기간 지병을 앓고 있고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유지영은 정왕 세자 배준형과 혼인하고 삼 년 동안 지아비를 살뜰히 섬기며 현모양처 역할을 했다. 본디 그녀는 밖에서 길러진 태후의 딸이었다. 태후는 딸을 어여삐 여겨 배준형을 태자의 자리로 올렸다. 책봉식 전, 유지영은 정왕부를 위해 불공을 드리러 산속 사찰로 갔다가 길을 잃고 산적들에게 붙잡혔다. 삼일 간 온갖 혹형과 능욕을 당한 후, 경성의 성문 앞에 짐짝처럼 버려졌다. 체면을 보전하기 위하여 배준형은 진실을 조사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를 회임한 그녀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 사촌동생 유선주는 산적은 자신이 매수하였으며 이제 곧 태자비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유선주는 더러운 술수로 그녀의 목숨을 빼앗고 그녀의 자리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 그 배후에는 배준형의 침묵과 관용도 빠질 수 없었다. 원한을 품고 죽은 유지영은 성년례 전날로 회귀했다. 그녀는 수구를 던져 망나니로 알려진 경왕 세자 배현준과 혼인을 약속했다. 경성 사람들 모두 그녀를 비웃었으나, 결국 배현준은 태자가 되었고 그녀는 태자비가 되었다. 반면 배준형은 반역에 패배하며 정왕부 일가가 죄인으로 몰리게 되었다. 사슬을 차고 지나가던 배준형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서 유지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영아, 너는 본디 내 부인이었어야 했어!”
View More"그게 무슨 소리인가?"경왕비는 불쾌한 기색으로 받아쳤다."이들은 피가 섞인 가족이거늘….""지영이와 유리 아가씨가 무슨 피가 섞였단 말입니까?"조원금은 턱을 치켜들며 조롱 섞인 어조로 쏘아붙였다."애먼 짓만 하다가 체면을 다 구겨놓고는, 이제 와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군요. 정 억울하거든 아까 궁에서는 왜 따져 묻지 못했습니까?"말문이 막힌 경왕비는 미간을 찌푸렸다."남에게 도움을 구하기 전에 본인 딸부터 똑바로 가르치십시오.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조원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매섭게 호통쳤다.배유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내 딸을 어찌 가르치든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경왕비는 손을 뻗어 배유리를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조원금을 쏘아보았다.조원금은 유지영의 손을 다정하게 다독였다."이모가 네게 어울릴 만한 장신구를 몇 개 골라두었단다. 이따가 한번 보거라."말을 마친 그녀는 시녀들을 이끌고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어머니."배유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경왕비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배유리를 밀어내고는 아무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채로 들어갔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채찍 서른 대를 맞은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곱씹어 볼수록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배유리의 어리석음이었다."어머니."붉어진 눈시울로 뒤따라온 배유리는 경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소녀가 못난 탓에 어머니까지 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허나, 저는 정말 당학 공자와 혼인하기 싫습니다."경왕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정 싫다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천으로 목을 매달아 죽는 편이 깔끔하겠지."싸늘한 말에 배유리는 겁에 질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왕비 마마, 고정하십시오. 유리 아가씨도 한순간 판단이 흐려진 것뿐입니다."눈치를 보던 시녀가 조심스레 거들었다."한순간 판단이 흐려져?"경왕비는 돌연 언성을 높였다."유지영은 저 아이보다 고작 몇 달 먼저 태어났을
경왕비는 애지중지 키운 적녀가 서장자와의 혼인을 반강제로 맺게 된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청란이는 제가 아우의 손에서 빼내어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이따가 경왕부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아까는 사태가 급박하여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니, 부디 마마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당학은 머리를 숙이며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사죄했다.그제야 경왕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조령 장공주까지 나서서 두 사람을 이어주려 하니, 경왕비는 억울함을 꾹 삼키고 억지로 이 혼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연못가.몇몇 부인들은 아까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단박에 꿰뚫어 보고는 은밀히 코웃음을 쳤다."저 서장자란 놈, 참으로 대단한 위인이로군.""당 대인이 하도 감싸고 도니, 태후 마마 앞에서도 저리 간 큰 수작을 부리는 게지."아까는 굳이 나서서 들춰내는 이가 없었을 뿐이었다.이제 저 서장자의 맹랑한 야심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적모를 압박하여 사람들 앞에서 기어코 적자로 인정받았으니, 그 속내가 여간 검은 것이 아니었다.한편, 유지영과 곽운연은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매화를 감상했다. 단단히 화가 난 곽운연이 유지영을 향해 속마음을 토로했다."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재작년에 제 곁에 손버릇이 나쁜 시녀가 한 명 있어 물건을 제법 잃어버렸었지. 그 향낭도 그중 하나였다. 헌데 그 향낭이 당학의 손에 들어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찌 그리 추악한 속셈을 품을 수 있단 말이냐!"곽운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진저리를 쳤다.옥패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옥패는 절에 갔을 때 잃어버린 것다. 은밀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는데, 그걸 당윤 공자가 주웠을 줄이야.""그게 아닙니다."유지영은 고개를 저었다."그 옥패는 의용후가 저잣거리에서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곽 낭자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저 지나가는 길에 사둔 것이지요."곽운연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똑같이 그녀의 물건이건만, 한
당학은 영악했다. 조령 장공주의 행보를 해명하는 동시에, 은근슬쩍 자신의 신분까지 끌어올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유지영은 곁에 선 조령 장공주를 살폈다. 장공주의 안색은 눈에 띄게 누그러져 있었다.당학의 이 영리한 화술에 조령 장공주와 당 부인은 기꺼이 그의 장단에 맞춰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조령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당 공자의 말이 맞네. 서출이라는 명목으로는 왕부의 적녀와 어울리지 않지. 허나 이 아이는 내가 어릴 적부터 지켜보았는데, 신분을 제외하면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재목이야."조령 장공주는 경왕비에게 다가가 말했다."결국 이 모든 소란이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유리 역시 왕부의 적녀로서 마땅히 아량을 베풀어야지. 내 듣자 하니 그 운연이라는 낭자도 하혈을 하고 죽었다던데,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더는 소란을 피우지 마시게."이는 은근한 협박이자 경고였다.경왕비의 안색은 참담하게 굳었다. 그녀는 소매 안으로 주먹만 꽉 쥘 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당학은 당 부인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렸다."어머니, 제게 적자의 신분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와 유리 아가씨는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이입니다."당 부인의 안색이 미묘해졌다.당학은 다시 쐐기를 박았다."제가 운연 낭자와 알게 된 것은 그저 오해였을 뿐, 제 마음속에는 오직 유리 아가씨 한 사람뿐입니다."보는 눈이 이리 많으니 당 부인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조령 장공주 역시 그 틈을 타 은근히 압박했다."어차피 허울뿐인 신분이 아닌가. 부인께서 조금 아량을 베풀어 겹경사를 치르는 것이 어떻겠소?"당 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거절한다면 서로 깊이 연모하는 두 사람의 앞길을 고의로 막는 셈이 되고, 허락한다면 당학은 당씨 가문의 어엿한 적장자가 되는 것이었다.자칫 대처를 잘못했다가는 모진 비난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판이었다.배유리는 억울함과 분노에 입술만 꾹 깨물었다. 채찍에 맞은 상처는 아직도 쓰라렸고,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탓에
당학이 나타나자 주변이 일순간 조용해졌다."태후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당학은 허리를 깊이 굽혀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방금 벌어진 참상을 똑똑히 지켜본 그는, 태후가 지금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당학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배유리는 고통도 잊은 채 다급히 소리쳤다."당 공자, 그날 공자의 품에서 떨어진 향낭이 곽 낭자의 것이라고 어서 사람들에게 말하세요!"곽운연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굳이 나서서 반박하지 않았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당학에게 쏠렸다.당학은 미간을 좁히며 배유리를 힐끗 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당 부인을 응시했다. 찰나의 침묵 끝에 그는 공손히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유리 아가씨, 저는 곽 낭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입니다. 천하에 동명이인이 셀 수 없이 많으니,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당학이 부인하자 배유리는 두 눈을 부릅떴다."어찌하여 인정하지 못하는 겁니까! 며칠 전 장공주부에서 연회를 연 것도 공자와 곽 낭자를 이어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그 말에 조령 장공주의 눈밑이 미세하게 떨렸다. 장공주는 불쾌한 기색으로 배유리를 흘겨보며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저 멍청한 것이!'"유리 아가씨...."당학은 난처한 듯 말을 아끼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아도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듯한 태도였다.지켜보던 부인 중 한 명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나섰다."당 공자, 무슨 사연인지 숨기지 말고 다 털어놓으시게.""그러게 말일세.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무엇 하러 덮으려 드는가."부인들이 앞다투어 당학을 부추겼다.당학은 바닥에 꿇어앉아 당 부인을 향해 절을 올렸다."어머니, 사실 제가 마음에 품은 이는 유리 아가씨입니다. 그날 아가씨가 찾아오려던 곳은 제 처소였으나 불행히 길을 잘못 들었을 뿐입니다. '연' 자가 새겨진 옥패 역시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이니, 아우나 곽 낭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배유리는 아연실색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제가 운연이라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주향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나머지 셋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부관, 저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조리 끌어내세요!”유지영은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장 부관은 하는 수 없이 하인들을 불러 넷을 모두 끌어내게 하고 중개 어멈을 부르라고 일렀다.유지영은 그것마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중개인은 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게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성년례가 끝난 뒤 차차 처리할 생각이었다.그렇게
측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둘은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골목을 지나 취선루에 도착했다.홍주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문앞에서 잘록한 허리를 씰룩이며 호객하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아… 아가씨, 저희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유지영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가 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전생에 그녀가 배준형과 혼약을 정한 뒤, 그는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야명주만 선물로 보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만약 배현준이 도와준다면 앞으로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유지영은 품에서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전으로 달려왔다. 송씨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지영이는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에요. 분명 마음속에 세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세자에게 심통을 부리고 있지 뭐예요. 내일 혼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우리 유씨 집안은 온 인주의 웃음거리가 될 텐데 말이에요.”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영아, 세자께 사죄드리거라.”양모가 돌아가신 뒤,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슬하에 두고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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