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을 거슬러

피안을 거슬러

By:  레몬과 향수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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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오랜 기간 지병을 앓고 있고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유지영은 정왕 세자 배준형과 혼인하고 삼 년 동안 지아비를 살뜰히 섬기며 현모양처 역할을 했다. 본디 그녀는 밖에서 길러진 태후의 딸이었다. 태후는 딸을 어여삐 여겨 배준형을 태자의 자리로 올렸다. 책봉식 전, 유지영은 정왕부를 위해 불공을 드리러 산속 사찰로 갔다가 길을 잃고 산적들에게 붙잡혔다. 삼일 간 온갖 혹형과 능욕을 당한 후, 경성의 성문 앞에 짐짝처럼 버려졌다. 체면을 보전하기 위하여 배준형은 진실을 조사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를 회임한 그녀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 사촌동생 유선주는 산적은 자신이 매수하였으며 이제 곧 태자비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유선주는 더러운 술수로 그녀의 목숨을 빼앗고 그녀의 자리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 그 배후에는 배준형의 침묵과 관용도 빠질 수 없었다. 원한을 품고 죽은 유지영은 성년례 전날로 회귀했다. 그녀는 수구를 던져 망나니로 알려진 경왕 세자 배현준과 혼인을 약속했다. 경성 사람들 모두 그녀를 비웃었으나, 결국 배현준은 태자가 되었고 그녀는 태자비가 되었다. 반면 배준형은 반역에 패배하며 정왕부 일가가 죄인으로 몰리게 되었다. 사슬을 차고 지나가던 배준형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서 유지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영아, 너는 본디 내 부인이었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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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

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

털썩!

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읍….”

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

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한 일을 당한 것 같군. 참 어여쁜 처자였는데 안됐어.”

유지영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흘 전, 그녀는 사찰로 불공을 드리러 가다가 중도에 납치를 당해 눈이 가려진 채 인적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 뒤로 매일이 고통이었다.

죽도록 맞았고, 고통 속에 의식을 잃었다가 간신히 깨어나면 또다시 고통이 이어졌다.

그렇게 그녀에게 지옥을 선물한 자들은 사흘째 되던 날, 마차에 그녀를 싣고 번화가로 가 짐짝처럼 내던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하기는커녕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유지영은 해명하고 싶었지만, 독을 당해 목소리를 잃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뻔뻔하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지? 정신이 제대로 된 처자라면 결백을 잃은 후에 기둥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을 테야. 여인의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 세상인데.”

마침내 한 시진 후, 소식은 정왕부에 전해졌다.

정왕부에서는 마차를 한 대 보내왔다. 두 시종은 그대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마차 위로 끌어올렸다.

그중 한 명은 그녀의 얼굴에 침까지 뱉으며 비아냥거렸다.

“차라리 밖에서 죽지. 정왕부의 명성에까지 먹칠하면서 살아 돌아올 건 뭐야.”

유지영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들것에 실어 왕부로 끌고 갔다.

태비는 지팡이를 짚은 채 음침한 얼굴로 내전으로 들어섰다.

마침 병풍 뒤에서 시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달려나온 시녀는 노태비의 싸늘한 눈빛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태… 태비마마, 세자비께서 하혈이 심하신데, 어의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막돼먹은 것! 외간사내에게 순결이 더럽혀진 불결한 것이 무슨 자격으로 어의의 진찰을 받는단 말이냐! 여기서 집안 망신을 더 시키라고!”

태비의 분노한 호통에 내전 안에는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태비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오는 배준형을 불러 세웠다.

“준형아, 세자비 유씨는 이미 순결이 더럽혀졌는데 너는 어찌 처리할 생각이냐?”

배준형이 놀란 얼굴로 태비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유씨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거의 벌거벗겨진 채 성문 앞에 내던져졌다. 이 상황에서도 저 아이를 두둔할 생각이냐?”

말을 마친 태비는 지팡이로 힘껏 바닥을 쳤다.

“폐하께서 중병으로 앓아누우시고 슬하에 황위를 이을 황자가 없으신 상황이다. 최근 들어 태후께서 네 아버지를 빈번히 궁으로 부르시어 너를 태자로 책봉하실 뜻을 내비치셨다. 유씨의 상황이 안타깝긴 해도 제 팔자인 것을… 어찌하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태비의 눈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겁에 질린 시종들이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할머니, 지금 우선해야 할 일은 배후에 숨은 범인을 찾는 일이 아닙니까?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마차는 경왕 세자의 마차였다고 합니다. 제가 경왕부를 찾아가 지영이의 억울한 한을 풀어줄 것입니다!”

짝!

듣고 있던 태비가 배준형의 뺨을 후려쳤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고 하얀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 일을 어전까지 끌고 갈 생각이냐? 어차피 증거를 잡는다고 해도 태후께서는 곤장 몇 대 치고 끝내실 것이다. 이미 명성이 더럽혀진 아이다. 네가 일을 크게 만들수록 우리 정왕부의 체면만 깎이는 것을 왜 모르느냐! 어찌 이리 어리석으냐!”

태비는 분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유지영은 병풍 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하반신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깨문 채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병풍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끝에는 역겨운 피 냄새가 진동했다.

태비의 각박한 말들이 예리한 칼이 되어 그녀의 지친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결백을 잃은 여인은 죽어 마땅하다!”

태비는 병풍을 노려보며 거침없이 악담을 이어갔다.

“준형아, 유선주 그 아이도 너와 어린 시절부터 정을 쌓아온 아이 아니더냐. 그 아이의 아버지와 오라비 모두 조정의 중임을 맡은 대신들이고 어여쁘기까지 하니, 그 아이와 혼인한다면 네 앞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유지영 저 아이는 그냥 잊어버리거라.”

유지영은 숨이 턱 막힐 듯했다.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지만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배준형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와 혼인하고 3년, 한때는 서로를 공경하고 연모하며 남부러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작게 들린 “알겠다”는 한마디가 청천벽력처럼 그녀의 귀를 강타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놓아버렸다.

태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을 내렸다.

“여봐라! 가서 유씨 집안 사람들을 불러 세자비가 위독하니 속히 왕부로 오라고 전하여라!”

분부를 받든 시종은 허겁지겁 대문을 향해 달려가며 세자비가 곧 세상을 떠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유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다름 아닌 유선주였다. 그녀는 병풍을 돌아 유지영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멀찍이 서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더니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언니,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짓을 하였나요. 할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시겠어요.”

목소리는 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 가득 묻은 핏자국을 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깝게 되었네요. 의원 말을 들어 보니 사내아이였다고 하던데, 이 아이를 3년이나 바라왔던 언니는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어요.”

유지영은 증오에 찬 눈으로 유선주를 노려보았지만 비명 한마디 지를 수 없었다. 납치를 당한 당일, 그녀는 혼란을 틈타 납치범들의 입에서 유선주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납치 사건의 배후에는 분명히 유선주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언니, 안심하고 가세요. 미래의 태자비, 아니 미래의 황후 자리는 내가 언니를 대신해 잘 지킬 테니까요.”

유선주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 참. 그래도 한때 가족이었는데 가기 전에 왜 이리 되었는지 연유는 알려줘야겠죠? 언니 곁의 시녀들은 모두 내가 매수했어요. 언니가 산에 불공을 드리러 가던 날 언니를 납치한 사람도 경왕 세자가 아닌 내 아버지 사람들이고요.”

“경왕 세자를 끌어들인 것은 준형 오라버니를 그 자리에 올리기 위함이었죠. 그 멍청한 놈은 언니가 청운산에서 길을 잃고 갇혔다는 말을 듣더니 정말 사흘 밤낮을 청운산을 떠나지 않고 수색했더라고요? 흔적을 잔뜩 남겨서 우리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죠. 언니가 떠나 있는 동안 세자 오라버니의 곁을 지킨 것도 나예요. 나와 세자 오라버니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었다고요.”

“하!”

유지영은 안간힘을 써서 손을 뻗어 유선주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비녀 하나가 쥐어졌고, 유선주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제 어깨를 힘껏 찔렀다.

“언니!”

그러더니 유선주가 당황한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주저 없이 주먹을 유지영의 어깨에 휘둘렀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녀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선주야, 괜찮느냐?”

배준형은 안쓰러운 얼굴로 유선주를 부축했다.

유선주는 다친 왼쪽 어깨를 손으로 잡더니 배준형의 품에 몸을 기댔다.

“제가 오라버니의 세자비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언니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배준형은 잔뜩 실망한 눈으로 유지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실망이다, 지영아! 내가 선주와 혼인하려 한 것도 모두 정왕부의 명예를 위함이었거늘. 어찌 죄 없는 선주를 원망할 수 있어? 어렸을 때부터 넌 선주를 괴롭히고 매사에 선주에게 시비를 걸었지. 오늘 네가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하늘이 알고 천벌을 내린 것이야!”

천벌이라는 말에 유지영은 그저 웃고만 싶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둘을 보고 있자니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눈을 찌르고만 싶었다.

‘내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너희는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고 나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구나.’

“더 이상 입씨름할 것도 없다.”

태비의 싸늘한 목소리가 병풍 뒤에서 전해졌다.

“처결하거라!”

손에 비수를 든 어멈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자 오라버니, 저… 너무 무섭습니다.”

유선주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배준형은 그런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며 작은 소리로 위안했다.

“살아서 모두의 비난을 받으며 목숨만 붙어 있기보다는 차라리 열녀라는 명성을 남기고 세상을 뜨는 것이 지영이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우리도 지영이를 위해서 이러는 게야.”

어멈들은 양쪽에서 유지영의 어깨를 꽉 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유지영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었다.

예리한 칼끝이 피부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관통했다. 유지영은 오래전 혜공대사의 말을 떠올렸다.

“이 아이는 전반생에 일생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대사의 예언이 맞았던 것 같았다.

다음 생이 정말 존재한다면, 반드시 내게 해를 가한 모두에게 피의 복수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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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이인
찌이인
재미있어요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됩니다~ 사라지지말고 계속 연재되길바랍니다
2026-04-15 08: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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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Chapters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털썩!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읍….”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한 일을 당한 것 같군. 참 어여쁜 처자였는데 안됐어.”유지영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사흘 전, 그녀는 사찰로 불공을 드리러 가다가 중도에 납치를 당해 눈이 가려진 채 인적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그 뒤로 매일이 고통이었다.죽도록 맞았고, 고통 속에 의식을 잃었다가 간신히 깨어나면 또다시 고통이 이어졌다.그렇게 그녀에게 지옥을 선물한 자들은 사흘째 되던 날, 마차에 그녀를 싣고 번화가로 가 짐짝처럼 내던져 버렸다.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하기는커녕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유지영은 해명하고 싶었지만, 독을 당해 목소리를 잃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어떻게 뻔뻔하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지? 정신이 제대로 된 처자라면 결백을 잃은 후에 기둥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을 테야. 여인의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 세상인데.”마침내 한 시진 후, 소식은 정왕부에 전해졌다.정왕부에서는 마차를 한 대 보내왔다. 두 시종은 그대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마차 위로 끌어올렸다.그중 한 명은 그녀의 얼굴에 침까지 뱉으며 비아냥거렸다.“차라리 밖에서 죽지. 정왕부의 명성에까지 먹칠하면서 살아 돌아올 건 뭐야.”유지영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들것에 실어 왕부로 끌고 갔다.태비는 지팡이를 짚은 채 음침한 얼굴로 내전으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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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종령각 이층 누각.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전생의 배준형도 성년례 하루 전에 인주에 도착해 그녀에게 혼약을 청했다고 했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대전으로 향했고, 정원에 들어서니 비단옷을 입은 호위들이 허리에 검을 차고 대기하고 있었다.“세자, 선주와 혼인하고 싶으시다고요?”“그건 안 됩니다. 세자는 원래 지영이와 정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놀란 목소리가 대전 안에서 울려 퍼지자 유지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부인, 지영이는 제게 그저 여동생 같은 사람이고, 선주야말로 제가 진정으로 연모하는 이입니다. 만약 이런 감정을 가지고 지영이와 혼인한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지요.”목소리를 들으니 전생에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배준형이 분명했다.“이번 생에 저는 선주 한 사람만 사랑할 것이고, 이 마음은 절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정왕부가 유씨 집안과 혼약이 있었다고는 하나 정확히 누구와 혼인할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거늘, 어찌 선주는 안 된다고 하십니까?”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배준형은 대전에 우뚝 서서 우아한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까지, 그는 경성의 뭇 여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랑감이었다.한때는 유지영도 그런 그를 마음에 품었던 적이 있었다.몇 년 전, 배준형은 유씨 저택에서 일 년 정도 지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정왕부로 돌아간 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매년 명절 때는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곤 했었다.그렇게 양가는 유지영의 성년식이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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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전으로 달려왔다. 송씨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지영이는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에요. 분명 마음속에 세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세자에게 심통을 부리고 있지 뭐예요. 내일 혼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우리 유씨 집안은 온 인주의 웃음거리가 될 텐데 말이에요.”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영아, 세자께 사죄드리거라.”양모가 돌아가신 뒤,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슬하에 두고 보살폈다.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 손녀를 총애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유씨 노부인은 담혜정이 남기고 간 거액의 지참금과 매년 담씨 가문에서 보내오는 풍성한 선물들 때문에 그녀를 떠맡았을 뿐이었다.유지영이 말이 없자 유씨 노부인의 안색이 차갑게 바뀌었다.“너는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느냐? 이제는 이 할미 말도 듣지 않겠다는 거니?”말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은 손에 든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표독스럽게 번뜩이는 눈에서 자비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유지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조금 전, 배준형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들은 끝까지 강요하더니 이제는 불효의 죄명까지 씌우려는 듯했다.“언니, 할머니 뜻대로 하세요.”유선주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언니가 허락하지 않으면 저는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배준형을 돌아보았다.“세자는 저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하셨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보아하니 선주는 세자와의 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군요. 제게 자꾸만 혼사를 강요하는 걸 보면 말이죠. 제가 보기엔 유씨 가문과 정왕부는 사주가 맞지 않아 사돈이 될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 세자도 더 이상 선주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그 말에 배준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영아, 그게 무슨 헛소리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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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측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둘은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골목을 지나 취선루에 도착했다.홍주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문앞에서 잘록한 허리를 씰룩이며 호객하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아… 아가씨, 저희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유지영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가 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전생에 그녀가 배준형과 혼약을 정한 뒤, 그는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야명주만 선물로 보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만약 배현준이 도와준다면 앞으로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유지영은 품에서 은표와 초대장을 꺼내 홍주에게 쥐여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홍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소… 소인은 못하겠습니다.”“이 일이 성사되면 너를 일등 시녀로 올려 주고, 매달 녹봉으로 은 세 냥에다가 끼니마다 닭다리를….”끼니마다 닭다리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홍주의 두 눈이 번쩍이며, 곧바로 은표를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렇게 잠시 후, 홍주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 아가씨, 잘 전달했습니다.”그녀는 품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경왕 세자께서 소인에게 주신 포상이에요. 소인은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은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꿈만 같아요!”그녀는 그저 유지영의 지시에 따라 은표를 포주 어멈에게 전하고, 경왕 세자가 있는 곳을 알아낸 뒤 그에게 향낭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그러자 경왕 세자는 주변 사람들을 물리더니 홍주를 가까이 불러 말을 전하라고 했다.“소… 소인은 지영 아가씨의 명으로 초대장을 전하러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내일 성년례에서 수구로 정혼자를 간택하실 예정인데, 세자께서 꼭 와 주셔서 수구를 받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의 일생이 달린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어요.”그러자 경왕 세자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난 경왕 세자이지 정왕 세자가 아니다!”“아가씨께서 경왕 세자께 꼭 전하라고 하셨습니다.”그 말에 배현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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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주향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나머지 셋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부관, 저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조리 끌어내세요!”유지영은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장 부관은 하는 수 없이 하인들을 불러 넷을 모두 끌어내게 하고 중개 어멈을 부르라고 일렀다.유지영은 그것마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중개인은 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게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성년례가 끝난 뒤 차차 처리할 생각이었다.그렇게 다음 날, 저택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갔다.유지영이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홍주가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아뢰었다.“노부인 곁의 고씨 어멈께서 오셨는데, 아가씨께서 일어나시는 즉시 노부인 처소로 오라 하셨답니다.”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어제 그런 소란이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할머니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을 씻어 단장한 뒤 유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그러다 문 앞에서 송씨와 유선주를 마주쳤다.유선주는 은은한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송씨는 푸른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딸과, 아직 젊은 시절의 미모가 남아 있는 귀부인의 모습이었다.양어머니인 담혜정이 죽은 뒤 큰댁에는 안주인이 없었기에, 유국공부의 집안 살림은 거의 송씨가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송씨는 그녀를 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영아, 숙모가 너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만, 세자에게 파혼당했다고 시녀들에게 화풀이하고 그것도 모자라 팔아버리겠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유지영은 문지방을 넘어서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숙모님께서는 제게 편견이 많으신가 보군요. 어찌하여 이유도 묻지 않고 제 잘못이라 단정하시는 겁니까?”송씨는 말문이 막혔다.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공손히 유씨 노부인께 예를 올렸다.“제가 어제 방 안에서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주향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제가 방에 사내를 숨겼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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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어제 유지영은 외숙모에게 전갈을 보냈다. 오늘 수구를 던지게 된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렸기에, 한씨도 더는 그녀를 말릴 도리가 없어 우선 성년례에 맞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유지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외숙모,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삼십여 명의 사내가 서 있었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배현준이었다.그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우뚝 서 있었다.유씨 노부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배현준을 보며 뭐라 말하려다 송씨가 붙잡는 바람에 결국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교지 도착이오!”그때 앙칼진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서 태후의 최측근인 창 내관이 황색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창 내관을 본 사람들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유국공부 장녀의 성년례에 궁중의 태후까지 축사를 보낼 줄이야!이를 지켜본 유선주의 얼굴도 질투심으로 일그러졌다.유지영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지영 아가씨, 금일이 아가씨의 성년례인 것을 아신 태후마마께서 특별히 명을 내리셨습니다.”창 내관이 아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지영은 담담히 무릎을 꿇었다.“소녀 유지영, 명을 받들겠습니다.”창 내관은 그제야 두루마리를 펼쳤다.“유씨 집안의 적녀 유지영은 빼어난 학식을 갖추고 예의 바르며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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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짝!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이내 유선주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유지영! 선주에게 어서 사과하지 못할까!”배준형이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유선주는 마치 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눈물을 쏟아냈다.유지영은 턱을 치켜들고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오늘 내 성년례 날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실수라는 핑계로 언니인 나를 모함하고도 뭘 잘했다고 울어? 너는 대체 어리석은 거니? 아니면 원래 이렇게 간악한 아이였던 거니? 밤중에 내 침소에 사내가 들었다고? 증거는 있어?”“시녀가 증언했잖아요.”“시녀가 그 사내를 직접 보았다고 했어?”유선주는 말문이 막혔다.“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배준형의 말에 유지영은 비웃듯 되물었다.“동생이 입을 더럽게 놀리기에 언니로서 따끔하게 혼내 준 것뿐인데, 왜 안 된다는 거죠? 그런 논리라면 저도 세자께 묻고 싶군요. 어제 갑자기 찾아와 혼약 상대를 바꾸겠다고 하셨는데, 그럼 세자와 선주도 진작부터 서로 눈이 맞았나요?”“허튼소리! 난 그런 적 없어!”유선주가 빨갛게 부은 눈으로 반박하자, 유지영은 냉소를 보였다.“여인의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데, 넌 같은 유씨 집안의 딸이면서 좋은 날 축복은 못 해 줄망정 역겨운 말로 날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구나!”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더는 유선주의 가식을 눈감아 줄 이유도 없었다.오늘 이 자리에서 사람들 앞에 그녀가 얼마나 어리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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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지영아,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느냐?”송씨는 못 말리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날은 오해가 좀 있었단다. 선주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어.”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어찌 작은어머니와 선주에게 화를 내겠어요. 운부 비단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들었어요. 일부 무늬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던데, 구하시느라 참 힘드셨겠어요. 감동이에요, 작은어머니.”그 말을 들은 송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역시 그 멍청함은 어디 안 가는구나!’유지영은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안의 맏언니로서 당연히 동생들에게 양보해야지요. 다른 동생들도 불러서 골라 보게 하는 게 좋겠어요.”그녀는 송씨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사람을 보내 동생들을 불러오게 했다.송씨의 안색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주를 제외한 세 소녀가 내전으로 들었다. 셋째인 유지란, 넷째인 유운연, 다섯째인 유채령이었다.“각자 하나씩 돌아가면서 고르면 공평하겠구나.”유지영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유지란은 가장 먼저 붉은색 비단을 골랐다.송씨는 헛기침을 하더니 근엄하게 말했다.“색상이 지나치게 화려하구나. 지영이가 피부가 하얗고 고우니 이건 지영이에게 주려고 준비한 거였어.”그 말을 들은 유지란은 고개를 돌려 유지영의 눈치를 보더니 어색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어차피 비단이 거기서 거기죠. 지란이 네가 마음에 들면 가져가거라. 자매끼리 사양할 것 없어.”유지영은 웃으며 붉은색 비단을 유지란의 몫으로 정해 주었다.“어차피 저는 이미 붉은색 옷이 많으니까 다른 걸 골라 볼게요.”유지란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감사해요, 큰언니.”예상했던 것처럼 나머지 세 필도 다른 동생들에게 돌아갔다. 유지영은 가장 색이 탁한 것으로 골랐다.비단을 받은 소녀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꽃이 피었다.그들과 반면, 아직도 음침하게 굳은 송씨의 얼굴을 보고, 유지영은 입꼬리를 올렸다.이때 셋째 부인이 마침 안으로 들어오더니, 유지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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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내비쳤다. 노부인 처소를 나서는데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왕 세자께서는 오늘도 선주 아가씨와 나들이를 나가셨대. 오찬은 돌아와서 노부인과 함께 드신다던데, 참 자상한 분이야. 선주 아가씨는 복도 많아.”유선주는 어릴 때부터 복덩이라는 별명을 달고 태어나, 가는 곳마다 그녀와 얽힌 사람들에게 행운이 따른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유씨 노부인이 가장 총애하는 손녀이기도 했다.‘왜 그리 서둘러 나를 돌려보내려 하나 했더니, 내가 있어서 방해가 됐던 거였구나.’유지영은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전생의 흐름대로라면 생모인 서 태후는 곧 황제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조정의 업무를 관장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경성에 올라간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녀를 궁으로 불러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예정이었다.그날 이후 태후는 곳곳에서 그녀를 도우며 보살펴 주었다.“이 나라 국모의 자리는 우리 지영이 것이어야지.”서 태후가 어느 날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었다.안타깝게도 전생의 그녀는 모녀간의 정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어머니라는 큰 나무를 단단히 붙잡고, 자신을 짓밟았던 자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종령각으로 돌아오니 한꺼번에 시녀 넷이 사라져서인지 처소는 몹시 조용했다. 그러나 홍주 하나만 곁에 두자니 일손이 부족했다.“혹시 사이가 좋은 자매나 친한 벗은 없느냐? 눈치가 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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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동금은 원래 표사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잃은 뒤 전당포에 팔려간 데다가, 전생에서는 실족사로 죽기까지 했다.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생에 유지영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매일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송씨에게서 문서를 기어코 받아낸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있는 듯했다.나머지는 아직 관찰 대상이었다.“오늘부터 종령각을 배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유지영은 근엄한 표정으로 엄명을 내렸다.나머지 사람들은 주향 일당이 내쳐지는 것을 보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방으로 돌아온 유지영은 피곤한 몸을 침상 위에 뉘었다.홍주가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아픈 무릎에 대주었다.“아가… 아니, 군주님. 동금이 계약서를 가져올 거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유지영은 웃으며 말했다.“정왕 세자께서 지금 할머니와 함께 식사하고 계실 게야. 숙모는 내가 또 소란을 부릴까 두려워서라도 이런 사소한 일은 내 뜻에 따를 테지. 어차피 곧 경성으로 복귀할 텐데, 담씨 가문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노곤함이 몰려왔다.그렇게 눈을 붙인 유지영은 밤중이 되어서야 다시 눈을 떴다가 창밖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잠들었다.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묘시 삼각이었다.기척을 들은 홍주가 서둘러 세숫물을 대령했다.“고씨 어멈이 조금 전 다녀갔는데, 요즘은 행장을 꾸리느라 저택 안이 분주할 테니 문안 인사는 면하고 경성에 가서 다시 정식으로 하자고 하셨다네요.”그동안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문안 올리는 일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유씨 노부인은 이것이 다 그녀의 의지를 단련하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말했다.설령 병이 나더라도 꼭 얼굴을 비추어야 훈계를 피할 수 있었다.“정왕 세자가 저택에 머무르셨느냐?”유지영이 물었다.홍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소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군주님께서는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유씨 노부인이 문안 인사를 면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온 집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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