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능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머릿속에는 몇몇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다치기 하루 전, 이 몸의 원래주인은 표독스런 말들로 아이를 나무라며 안뒷간 지붕의 나무판자를 더 빈틈없이 손질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아이가 다친 건 아마도 뒷간 지붕에서 굴러떨어지며 못에 찔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애초에 화용이라 불리는 그 어린 아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뿐만 아니라, 그녀가 시집올 때 같이 따라 왔던 하인들이 연이어 다른 곳으로 팔려 가자, 그녀는 초왕이 따로 자기한테 붙여준 하인들에게 모든 화풀이를 해댔었다. 툭하면 하인들을 때리거나 욕하는건 거의 매일 있는 일이였고. 기씨 어멈 역시 그녀가 던진 잔에 맞아 피를 많이 흘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몸의 원래주인은 성품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나 보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녀를 이토록 싫어하는지 납득이 됐다. “기씨 어멈에게 물어보거라, 내가 그 아이를 보러 가도 되는지.”원경능이 녹아에게 물었다.“왕비께서 그렇게 좋은 분이라면, 오늘 같이 곤란한 처지게 놓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가식적인 걱정 따위 접어 두세요, 기씨 어멈과 화용이도 왕비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녹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홱 돌려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문이 다시 닫혔다.원경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가 곧 죽는다고?’그녀는 화용이의 부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가늠할수 없었다. 이곳의 의원이 어떻게 아이의 상처를 치료하는지도 알리가 없다. 다만 만약 처치방식이 잘못된다면, 각막이 파손되고 안구도 파열되여 감염이 발생하고 말 것이다.그녀에게 있어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끝내 마음 놓고식사조차 하지 못한 그녀는 약 상자를 열어 항생제 몇 알을 꺼내 들곤 밖으로 나갔다.기씨 어멈은 왕부로 팔려 온 몸이였고 따라서 화용이는 왕부의 가생노비(家生奴才 -노비가 주인집에서 낳은 자녀)였는데 봉의각 뒤편의 작은 원락에서 살고 있었다. 원경
기씨 어멈은 무릎을 꿇고 의원에게 손자를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이씨 의원은 왕부의 가신인 탕양(汤阳)에게 기씨 어멈을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치를 보냈다. 이에 탕양은 난처하다는듯 의원에게 되물었다.“의원님, 시도는 한번 해보심이 어떠신지요?”그 말에 이씨 의원은 코웃을 치며 면박을 줬다..“시도해 보라고요?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손을 대면, 잃는 건 제 명성뿐입니다.”이 말을 들은 기씨 어멈은 거의 기절할 듯이 흐느끼며 소리쳤다, “아이고 내 손주, 불쌍한 내 손주!”녹아가 애써 기씨 어멈을 위로하며. 부축해서 일으켜 한쪽에 앉혔다.이때 탕양이 의원에게 말했다.“다른것보다 저 아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여서요. 혹시 의원님께서 저 아이의 고통이라도 덜어 줄수 있는 약을 처방해 주실수 없을가요? 저 아이가 의원님의 손을 거쳐 갔다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탕양은 이 말을 하며 의원의 소매 속에 은덩이를 밀어 넣었다.이씨 의원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고통을 멈추는 것이라면, 괜찮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통증만 줄여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게 되여 있어요.”“네네, 알겠습니다!”탕양도 그저 화용이가 편하게 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였다. 그 역시 이 아이가 태여나서 이만큼 커오는걸 지켜본 사람이고, 크게 다쳐서 오늘 내일 하는 아이가 너무 불쌍했다. 이씨 의원이 처방전을 쓰려고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누군가 방안으로 급히 들어가더니 문이 ‘쾅’하고 닫히며 안쪽에서 빗장을 걸어 문을 잠궈 버렸다.녹아는 방금 문을 닫히기 전 스쳤 지나가던 옷자락의 주인을 기억해 내고는 비명을 질렀다.“왕비님 이십니다!”기씨 어멈은 왕비가 들어갔다는 말에 참을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이성을 잃었다. 한 마리의 암사자처럼 달려들어 힘껏 문을 두드렸다.“문을 여십시오! 문을 열어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안에서는 원경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말 역시 길지 않았다. 그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목이 무쇠처럼 단단한 손가락에 잡혔다. 그녀는 옥죄여 오는 질식감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는 격노하여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것 같은 초왕의 얼굴이 보였다. 호흡이 막힌 그녀는 페속의 산소가 점점 줄어드는 질식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곧 기절할 것만 같았다.“열 살도 안 된 아이한테 어찌.”초왕의 분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찌 이리도 잔인할수가 있을가? 여봐라, 왕비를 끌고나가 곤장 30대를 쳐라!”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원경능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고 방금 뺨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온전히 서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하여 초왕이 목을 조르던 손을 풀자 그녀는 맥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다시 호흡이 가능해지자, 그녀는 다급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의 몸은 다시 누군가에 의해 일으켜졌고 강제로 끌려나갔다.아직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그녀의 눈에는 얼음이 서릴 정도로 냉혹한 초왕의 얼굴이 들어왔고, 이와 동시에 그의 눈에 어린 증오와, 몸을 감싼 화려하고 진귀한 비단 옷도 보였다.그녀는 그대로 돌계단에서 끌어 내려졌다. 딱딱하고 뾰족한 돌계단에 머리가 부딪혔다. 날카로운 아픔과 함께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결국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살아생전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허리와 허벅지에 끊임없이 매질이 이어졌고고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뼈마디에서 부터 온몸으로 고통이 퍼져나갔다. 그녀는 허리와 다리가 곧 부러질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곧이어 입안에서도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과 혀를 깨물었기 때문이였다. 정신은 점점 더 아득하게 멀어지는듯 했으나 아예 기절할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이 그녀를 깨어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곤장 서른대를 다 맞는 시간은 그녀에게 한평생처럼 길게 느껴졌다.원경능은 22세기의 의학천재라 불렸으며, 그녀를 숭배하고 존경하는 사
탕양은 녹아에게 약을 짓게 하고, 기씨 어멈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넨뒤 그 곳을 떠났다.기씨 어멈은 계속 화용이를 돌보고 있었고 날이 어두워 지자 부쩍 겁이 나기 시작했다.녹아도 기씨어멈의 곁에서 함께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채 조용히 화용이를 지켜봤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숨을 쉬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잠들었던 화용이는 뜻밖에도 자시가 가까워지자 깨어났다. 아이는 한쪽 눈을 천천히 뜨더니 기씨 어멈을 바라보았다.“할머니, 저 배고파요!”기씨 어멈은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처가 번지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힘들게 구해온 양유(羊奶) 역시 한모금도 넘기지 못했던 화용이다.기씨 어멈은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의외로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의원님의 약이 효과가 있구나, 효과가 있어!”기씨 어멈은 기쁨에 겨워 녹아에게 말했다.“그러게요, 의원님의 약이 효과가 있나 봐요!”녹아도 덩달아 기뻐했다.***다음날 이씨 의원은 다시 초왕부로 모셔졌다.그 아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식에 그는 신기해 했다.“이 녀석은 명줄이 참 길구먼. 다 죽어가던 참이었는데.”기씨 어멈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의원님, 약을 하나 더 지어주십시오. 제 손주 녀석 좀 살려주십시오.”이씨 의원은 잠시 멍해졌다. 어제 처방한 약은 전혀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껏해야 통증을 멎게 하고 진정시키는데 쓰였을 뿐, 상처 치유에는 큰 효과가 있는 약이 절대 아니였다.그러나, 어쩌면 우연히 맞아 떨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화용의 맥을 짚어보니, 확실히 어제보다 나아 보였고 몸도 더는 뜨겁지 않았다.하여 그는 다른 처방을 내렸다. “시녀를 불러 나를 따라와 약을 지으라 이르게. 연속 이틀 동안 먹여야 하네. 상처에 바르는 가루약도 마찬가질세. 호전을 보이면 계속 약을 지으러 오게.”“감사합니다, 의원님!”“진찰비와 약값은 누가 내는가?”의
차가워진 찐빵을 절반 정도 먹고나서 한참이 지나니 그녀의 기력도 어느 정도 회복이되는듯 했다. 바닥에서 애써 몸을 일으켜 탁자 옆 의자에 앉아 탁자에 엎드렸다. 허나 상반신을 일으켜 물을 따를 힘은 없어서 그나마 잔에 남아 있던 차로 일단 목부터 추겼다..이윽고 조금 나아진 느낌이 들어서 엎드리려고 천천히 두 다리를 뒤로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기력이 부족한 나머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 충격에 등에 난 상처에서 저릿한 아픔이 전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아픔이 어느정도 사그러지기 까지 버틴후 팔꿈치로 기어가 약 상자를 찾아냈다. 어둠속에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소염제와 해열제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주사를 맞을 수 없으니 약의 복용량을 늘이이는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또 반시간 정도 지난후 그녀는 비타민C를 찾아내여 몇 알 집어먹었다. 물과함께 삼킬수도 없어 씹어서 삼킨 그녀는 비타민C의 시큼한 맛에 정신이 번쩍 드는듯 했다.약을 다 먹은 그녀는 몸을 웅쿠린채 바닥에 누워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 정도의 육체적인 고통은 태여난후 처음 겪어 보는 것이였다. 이번에 맞은 곤장은 그녀로 하여금 이 시대는 자신이 살던 곳과 매우 다름을 제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곳은 높은 권력과 위치를 가진 자는 사람의 명줄도 손에 쥐고 있는 곳이였다.그리고 그녀의 명줄은 초왕의 손에 쥐여 있었다.이 곳에서 살아 남으려면 반드시 이러한 생존환경에 적응해야 했다.다만 그 아이는 어떻게 됐는지 걱정됐다. 비록 상처는 처치했지만, 약을 쓰지 않으면 제대로 나을 수 있는건 아니였기 때문이다.***한편, 약을 먹은 화가는 다시 고열이 시달리고 있었다.기씨 어멈은 마음이 급해졌다. 분명 낮에는 좋아지고 있었는데, 왜 밤이 되니 다시 열이 나기 시작하는지 알수가 없었다.녹아도 덩달아 급해졌다: “아니면, 제가 다시 이씨 의원을 불러 올가요?”기씨 어멈은 열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며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손자를 바라 보다가, 이씨 의원과 다섯 냥의
어두운 환경에 적응되어 있던 원경능은 갑자기 눈을 자극하는 빛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윽고 귓가에 ‘털썩’하고 무릎 꿇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씨 어멈이 땅에 무릎을 꿇은채 애원하고 있었다.“왕비님, 소인이 왕비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만 왕비님을 오해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소인의 손주를 살려주십시오.”“이리 와서 날 부축해!”원경능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기씨 어멈은 급히 등불을 내려놓고 원경능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리고 원경능의 등에 가득 남아있는 핏자국에 눈이 갔다. 곤장에 맞은 상처라고 생각하니 조금 망설여졌다. 사실 그녀는 아직도 왕비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화용이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움을 청하러 온것이다.“왕비님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내 약 상자를 갖고와!”원경능은 기씨 어멈이 자기를 죽도록 미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는 건 아마도 화용이의 상황이 많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할수 있었다. 하여 약 상자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숨기는것 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네, 네!”기씨 어멈은 얼른 가서 약 상자를 챙겨들고 다시 그녀를 부축하였다. 그러나 겨우 한 발자국 내딛자 원경능은 엉덩이와 다리에서부터 이어지는 고통에 심장까지 아파왔다. 방문을 나서기만 했을 뿐인데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졌고 극심한 고통에 이까지 덜덜 떨렸다.“왕비님….” “잔말 말고 빨리 가자!”원경능은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사람을 구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매우 순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화용이를 구하는 일에 그녀는 또 다른 생각이 더 추가됐다. 이번에 반드시 아이를 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세워야만 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이 곳에서 살아 남을수 있기 때문이다.“이제 죽지는 않겠네.”갑자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원경능은 본능적으로 기씨 어멈을 돌아 보았다. 기씨 어멈은 한
모든 일을 마친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쳤다. 탁자에 엎드린 채로 잠깐 쉬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볼썽사납다는 것을. 하지만 모습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밖에서는 기씨 어멈의 다소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왕비, 다 되셨습니까?”원경능은 책상을 짚고 천천히 일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들어오너라.”갑자기 문이 열리고 기씨 어멈과 녹아가 뛰어들어 왔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달려가 화가를 살펴보았다. 화가의 안정적인 숨소리를 확인한 기씨 어멈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원경능은 약상자를 들며 말했다.“오늘 밤 일은 비밀에 부치거라. 초왕이나 초왕부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기씨 어멈과 녹아는 서로 쳐다보며 속으로 원경능의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했다.녹아는 앞으로 나아가 원경능을 부축했다.“왕비 소인이 부축하여 모셔드리겠습니다.”“되었다. 화가를 돌보거라. 침대 머리에 내가 남겨놓은 약이 있으니 두 시진마다 한 번씩 먹이거라. 약을 다 먹이면 나에게 와서 더 달라 하거라.”원경능은 녹아의 손을 벗어나 힘겹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왕비!”기씨 어멈이 소리 내어 불렀다. 그녀는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지만, 원경능과의 예전 일이 떠올라 감사하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밤길 어두우니 등불을 들고 가십시오.”그녀는 등불을 넘겨 주었다. 원경능은 등불을 받으며 말했다. “고맙구나!”기씨 어멈은 깜짝 놀랐다.고맙다고? 왕비가 고맙다고 말한 건가?원경능은 봉의각에 돌아와 혼자 주사를 한 대 놓은 후 침대에 쓰러졌다.염증을 최대한 억제시켰지만, 상처 면적이 너무 컸다. 거기다 항생제가 들어 그녀는 너무 약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열에 시달린 그녀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아 머리를 들기조차 힘들었다.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깊은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급한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원경능은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약상자를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침대 밑에서 약상자가 사라져버렸다.원경능은 삼 초 동안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침대 밑을 더듬어보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다.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천천히 침대위로 올라가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최근에 발생한 사건들은 그녀가 정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그녀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은 미지의 일에 공포를 느끼기 마련, 원경능은 정말 두려움을 느꼈다.‘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원경능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냉기가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두피로부터 고통이 느껴지더니, 그녀는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본왕 앞에서 죽은 척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죽던지, 아니면 기어 일어나서 본왕과 함께 궁으로 가야 한다.”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꼭대기에서 울려 퍼졌다. 초왕은 다시 원경능을 거칠게 뒤집었다. 등이 바닥에 닿자 그녀는 고통에 온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곧장 억센 남자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았다. 턱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힘이었다.원경능의 고통스러운 눈빛이 초왕의 광기 어린 눈에 들어오자 냉혹하고도 난폭한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혐오와 멸시가 짙게 드리워졌다. “본왕이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말거라. 만일 또 태후마마 앞에서 허튼 소리를 지껄인다면 너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원경능은 너무도 아픈 나머지 화가 치밀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목숨이 이렇게나 하찮은 것인가?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도 도무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원경능은 젖 먹던 힘까지 모아 우문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무릎으로 몸을 지탱한 뒤 머리로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죽기 전 마지막 일격과도 같은 행동이었다.우문호는 원경능이 반격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더더욱 머리로 들이 받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