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감사합니다 :-)
“근데 있잖아, 내 말도 너무 듣지 마.”“응?”“내 말은 그냥 참고만 해. 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봤을 땐 이런 마음이구나, 라고 참고만 해. 결정할 때는 너만 생각하고.“”…….“에스더의 당부에 인협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카페에서 들었던 우겸의 제안이 떠올라서였다. ‘10월부터 신생팀을 시작할 겁니다. 저를 주축으로요.’‘근데, 그 이야기를 왜 저한테….’인협의 경계 섞인 눈빛을 한참 동안 응시한 우겸이 피식 웃었다.‘제가요. 한동안 사람들의 동경 어린 눈빛에 익숙해져 있었나 봐요. 이런 눈빛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 보면.’‘…….’‘제가 피땀 눈물을 흘려서 만들어 둔 제 대외적인 이미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느 정도의 신뢰는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오만함이었나 봐요.’‘아, 제 대외적인 이미지와 저를 묻어버린 사람들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당한 게 있어서요.’‘미안합니다.’인협의 말에 우겸이 너무나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우경은 매우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불명예스러운 퇴출 선수가 되어버린 인협 앞에서 이렇게까지 겸손하게 구는 걸 보면. 어느 분야의 오랜 1인자로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봉길 코치님도…. 혹시 우겸 선수가 보냈던 건가요?‘’넵. 아, 그럼 명함 받았던 거예요?’‘사실 그때도 소원리에 있었어요. 하필이면 봉길 코치님이 맞닥뜨렸던 분이 저를 가장 아끼시는 할머니 중 하나셨고요.’‘아하….’‘새로운 팀을 꾸려서 어찌할 생각이죠? 제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도 이미 낙인처럼 찍힌 오명은 벗겨지지 않을 건데요. 그리고 케이비 측에서도 제가 복귀한다고 하면 누명을 더 씌워서 저를 고소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우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인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제게도 다 계획이 있어요. 아, 그리고 저희 팀 감독님은 조봉길 코치님이 될 예정이에요.’‘아….’‘구미가 매우 당기죠? 제가 알기로
늦은 저녁의 소원리. 사이사이에 밭을 두고서 띄엄띄엄 떨어진 집 두 채를 걸러 가로등 하나씩 놓인 어두운 길을 두 사람은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정렬을 위로하고 그를 집으로 보낸 후에야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래는 정렬에게 함께 읍내나 시내에라도 나가서 기분 전환하고 오자고 하려던 두 사람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정렬의 상태가 심각한 걸 깨닫고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후….”한숨을 내쉬며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약해져 완전히 어두워지는 구간에서는 약하게 빛나는 별들까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다 보였다.밤하늘은 오늘도 더럽게 예쁘네. 세상만사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때맞춰 자리를 지키며 빛을 내는 별들과 달을 올려다보며 에스더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작은 삶에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자연은 그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양,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이럴 때마다 자신이 이 광대한 우주의 먼지 한 톨 같은 존재인지를 자각하면서도 동시에 요동치는 제 삶과는 달리 전혀 요동 없는 자연을 우러러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한결 가라앉혀져 있었다.이런 걸 보면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크다는 생각보다는 나의 존재가 작다는 생각이 도움이 되는 게 아니려나.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불쑥 들려온 인협의 질문에 터덜터덜 걷던 에스더는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정말 알 수가 없지. 불행은 나쁜 사람들을 찾아가야 맞는 게 아닌가 싶은데,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세상에서 저렇게 선한 사람이 없는데 불행을 다 맞는 경우도 있고.”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불행 총량의 법칙을 굳게 믿어.” “뭐?”에스더의 엉뚱한 의견에 인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사람이 평생 견뎌야 할 불행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그래서 초년에 다 겪어내고 나면, 노년이 수월하고 그게 아니면 반대가 되어서 자기 몫의 불행이 닥치기 전까지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가.” “이렇게라도
“아니, 그렇게 하니까 심 씨가 깨갱하고 뼈도 못 추리고 가는 거 아니겠어요?“정 씨의 신이 난 목소리에 식탁에서 밥을 먹던 본용이 껄껄 웃었다.”그동안 한 게 있어서 우리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속은 시원하긴 하네. 그 여자, 남을 얼마나 깔보고 다녔어?“ ”그죠?” ”지난번에 재형이에 관해 입 놀려댄 거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심 씨와 정 씨의 실랑이가 있던 날. 본용은 뒤늦게 집에 들어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서로에게 엄청난 막말이 오가던 때. 심 씨는 기어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 그들의 손주, 재형까지 욕을 하고 만 것이었다.그 순간, 애써 정 씨를 말리던 본용은 그대로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재형은 작은방 안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무튼 속이 시원~ 하네요.” “그러네.” “그나저나, 우리 재형이가 인협이를 굉장히 따르더라고요?” “응? 인협이를?”정 씨의 말에 본용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래요, 인협이요. 인협이만 보면 순한 강아지처럼 되더라니까요. 인협이가 한마디하면 딱 들어먹고.” “그래?”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두 사람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인 재형이 유독 믿고 따른다는 말에 본용의 마음이 움직였다.“그러니까, 인협이가 학교에 최대한 오래 붙어있도록 월급이라도 더 주는 건 어때요? 듣자 하니, 50밖에 안 받고 일하고 있다면서요.” “…….”소원 초등학교의 예산은 늘 빡빡했지만, 지역 교육청과 잘 이야기해서 추가 인원에 대한 예산을 받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한번 이야기해 볼게. 힘을 한번 써보면 월급을 100까지는 올려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요.”정 씨는 인협과 에스더에게 완전히 반해버린 모양인지, 남은 식사 시간 내내 자신이 목격했던 것을 본용에게 들려주었다. *** “정렬아!” “정렬 씨!”에스더와 인협은 마을의 맨 안쪽 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정렬의 이름을 불렀다. 정렬에게 연락해도 닿지 않아 결국
“어? 다시 오셨네요.”마스크를 쓴 우겸이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온 걸 발견한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했다.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선수던데. 전 세계적으로 팬도 많고. 유진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기 짝이 없는 우겸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한곳에서 정점을 찍은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아우라는 있었으나, 외모로는 크게 특출난 기색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아, 제가 지인한테 간곡한 부탁을 받아서요.” “네?” “제가 여기로 올 수 없던 그분 대신 부끄러움을 느끼며 한번 말을 전해보도록 할게요.” “…….”뭐지? 저렇게 유명한 사람의 지인이 날 알 리가 있나?도통 뜻을 알 수 없는 우겸의 말에 유진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조봉길, 혹시 기억나시나요?”잊어본 적 없는 이름을 우겸이 언급하자, 유진의 눈이 커졌다. 맞다. 그 사람도 리그 오브 카오스 팀 코치라고 했었는데. 명함을 받은 날 검색해 봤던 내용들을 떠올린 그녀였다. “표정 보니까 기억하시나 보네요.” “네, 기억은 하죠. 알바하다가 누군가로부터 명함을 받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유진의 말에 우겸은 조용히 속으로 감탄했다. 생각보다 저돌적인 분이시네, 우리 봉길 코치님.“그런데요?” “네?” “근데 왜 연락 안 하세요?” “제가 왜 꼭 연락해야 하나요?”유진의 역질문에 우겸은 당황도 하지 않고서 씩 웃었다. 재밌는 분이시네. 꼭 봉길 코치님이랑 이어드리고 싶어질 만큼. “당사자는 오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나 보내고…. 혹시 사람 갖고 장난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인데요.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거라면 매우 불쾌하고요.” “아…. 장난은 전혀 아니에요. 제가 봉길 코치님의 마음을 잘못 전달한 거라면 정말 죄송해요.” “…….” “봉길 코치님은 매우 진지하세요.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 하세요.” “…….”그놈의 진지함. 진심 빼면 시체인양 주아의 친부는 늘 그것을 남발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걸 진심이라고 바보같이 믿었던 그녀였고.
토요일. 이른 아침의 소원리 앞 버스 정류장. “그래서, 둘이서만 가니까 좋아?” “또 놀리지?”인협과 에스더는 정류장 의자에 함께 붙어 앉은 채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무더운 7월 말의 날씨도 새롭게 사귀기 시작한 이들의 애정행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 사이에는 땀이 가득 차 있었으나, 잠시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손을 살짝 펼칠 때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은 손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귀기 전에는 이런 미련한 짓을 왜 굳이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해 왔던 인협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내일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찰나의 스킨십도 참지 못하는 연인들을 보며 한심해했던 그였다. 애초에 사랑이 미련한 짓인데 말이야. 이 험한 세상에서 상대를 위해 나를 다 내놓는 거라는 게.애초에 사랑부터가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니, 무더운 날 손잡는 거쯤이야. 인협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며 에스더의 손을 더 꼭 붙들었다. “정렬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았어?”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 “허어, 근데 그런 애를 밀어내지도 않고….”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되면 이 좁은 동네에서 마주칠 때마다 얼마나 껄끄러워. 나야 어차피 떠날 사람이고, 정렬 씨도 높은 확률로 풋사랑을 하는 걸 거고. 어차피 내가 기를 쓰고서 마음을 모르는 척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백 못 해.”에스더의 설명에 인협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 연애 고수지?” “고수는. 중학생 때 풋내기 연애 두 주 해본 거 외에는 나도 연애 경험 없네요.” “근데 뭐가 이렇게 여유로워?”인협은 괜스레 억울해지는 마음에 물었다. “사람 경험의 차이랄까? 교회도 그렇고, 교육계라는 것도 그렇고 은근히 진상 집합소거든.” “응?” “교회에는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도 해. 대체로 상처 입고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종교에 잘 기대고는 하니. 또, 교사 실습을 하다 보면 별의별 애들도 만나고, 그 문제적 행동의 근원인 어마어마한
“뭐지….”인협은 관사 거실 소파에 앉은 채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보낸 문자에도 에스더는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진 인협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관사 문도 두들겨보았으나, 에스더는 침묵할 뿐이었다. “나도 나름의 은인인데, 은인을 왜 이렇게 대하냐고….”시무룩한 얼굴로 인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외로움 따위는 모르는 줄 알았더니, 워낙 따스한 사람이 곁에 있다가 확 사라지니 외로움이 하루 사이에 사무칠 지경이었다.“너무하다, 에스더야….”인협은 꿍얼거리듯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후-.”너무해. 알려주지도 않고. 정렬이랑 읍내 나가는 게 왜 그렇게 화가 날 일이야!인협은 답답함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다짐했다.“대답할 때까지 두드린다, 내가.”오랜만에 그의 승부욕이 발동된 것이었다. 인협은 성큼성큼 걸어서 집에서 나가, 에스더의 집 문 앞에 섰다.큰소리를 내면 동네 창피해서라도 나오겠지.쾅쾅쾅쾅! 그는 힘을 꽉 준 주먹으로 최대한 큰 소리로 문을 두들겼다. “황 선생님! 황 선생님!!”쪽팔림도 무릅쓰고 인협은 목소리 높여서 애타게 외쳐댔다.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아서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물론 인협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에스더가 맞은편에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인협은 흠칫 놀랐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아무런 답이 없길래 걱정이 돼서 말이지.” “그게 말이야, 방구야?” “당연히 말이지. 그것도 아주 다정한 말.”인협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에스더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미간의 주름은 덤이었다. “뭐?” “나 안으로 좀 들어가도 돼?” “…….” “나도 나름 손님인데.”힘껏 인협을 노려본 에스더는 마지못해 인협이 집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 주었다. 이대로 인협을 문전박대했다가는 또 어떤 미친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협의 등 뒤로 에스더가 일부러 더 힘주어 당긴 현관문이 굉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