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에르디엔 황궁의 대전은 압도적인 금빛의 향연이었다.서늘한 가을의 공기가 내부를 훑었으나 수십 개의 촛불이 내뿜는 열기와 운집한 귀족들의 숨결은 그 서늘함을 눅진하게 달구었다.르세인 폰 루카르디아의 황태자 책봉식은 새로운 질서의 선포였다.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대전의 높은 천장을 울리며 퍼질 때, 르세인은 눈이 시릴 만큼 하얀 순백의 정식 대례복을 입고 등장했다. 어깨 위로 길게 늘어진 망토에는 제국의 상징인 사자가 황금 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으며 그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망토 자락이 바닥을 쓸며 긴장감을 자아냈다.단상 위에 앉아 있던 황제와 황후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르세인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금발은 촛불의 일렁임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났고, 오묘한 녹색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수많은 귀족을 무심하게 훑었다.황제가 직접 황금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주는 순간, 대전 안에 모인 모든 귀족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제국의 차기 태양이시여. 황태자 전하의 무궁한 영광을!”파도처럼 밀려오는 찬양의 소리 속에서도 르세인의 표정에는 고양감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이 화려한 굴복의 연회 한복판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와인빛 머리카락의 여인만을 서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책봉식 현장에 이황자 이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르세인의 황태자 책봉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황권을 뒤흔들지도 모를 재앙이 된다는 것을 똑똑히 인지했다.이안은 스스로 황제 헤이브릭의 승인을 받아, 황후 로잘린의 친정인 후작저로 거처를 옮겼다. 그것만이 그가 적통 황자로서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는, 본인의 목숨 줄을 연명하는 길이었으니.책봉식의 열기가 대연회장으로 이어지는 동안, 한쪽 구석에 마련된 정원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이사벨라를 중심으로 모인 반디아 상업 연맹의 부인들은 평소의 거드름은 간데없이 잔뜩 위축된 기색이었다.불과 이전만 해도 소금 전매권을 빌미로 라안느 공작
엘라엔의 말에 르세인의 입가에 희미한 고뇌의 미소가 걸렸다. 그는 엘라엔의 지략이 좋으면서도 가끔은 그 냉철함에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좋습니다. 당장 남부로 정보원들을 급히 파견하죠. 폰테의 창고를 봉인하고 황실의 이름으로 소금을 풀도록 하지.”르세인은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서늘한 수목 향만이 남았다.이사벨라는 엘라엔을 보며 새침한 눈초리로 말을 꺼냈다.“참 영리해, 넌. 황후 폐하의 독한 사랑까지 네 판의 말로 이용하다니.”“이용하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살아남으려는 것뿐이죠.”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황궁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곳 어딘가에서 황후 로잘린은 아들을 위해 한 행동에 대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엘레니르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의 가을은 잔인했다.낮의 태양은 여전히 폰테 후작저를 태웠던 불길의 여열을 머금은 듯 뜨거웠으나 지평선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대기는 서늘해졌다.그 급격한 온도 차이는 마치 르세인의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겨진 잔혹한 본성과도 닮아 있었다.폰테 후작가가 불타오른 지 단 사흘 만에 제국의 남부 경제는 르세인의 손바닥 위에서 다시 쓰였다.황후 로잘린이 뿌린 피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르세인은 그 위로 가장 정교한 논리의 성벽을 쌓아 올렸다.황실 행정부의 집무실에서 르세인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류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묘한 녹색 눈동자에는 피로도, 동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기계적인 냉정함만이 감돌 뿐.“남부 협곡의 요새는 황실 금위대가 영구 주둔하는 것으로 확정한다. 폰테의 유가족 중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방계 혈족들은 전원 남부 연안의 소금 채취 부역자로 압송하도록.”“전하. 그들은 직접적인 반역 증거가 없습니다. 가혹하다는 여론이 생길 수도…”정무관의 조심스러운 진언에 르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정무관은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폰테 후작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비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라안느 공작저에 도착했다.자신의 방에 감금되어 있던 엘라엔은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불길한 종소리를 들었다. 황궁에서 울리는 그 종소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장송곡이었다.‘……뭔가 잘못됐어.’엘라엔은 책상에 놓인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르세인과 함께 그렸던 그 정교한 도면 위로 붉은 잉크를 쏟은 듯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폰테 후작가의 처리는 엘라엔의 조언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이토록 피비린내 나게 변했다면 르세인의 칼은 이제 누구를 향하게 될 것인가.방문 너머에서는 공작 부인의 히스테릭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레즈나에 불어닥칠 폭풍의 서막이었다.한참 뒤,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평소라면 결코 허용되지 않았을 무례한 소음이었다.“영애님! 황자 전하께서…!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헐떡이며 들어온 하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엘라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하자 그녀의 연한 보랏빛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공작 부인께서는 어디 계시지?”“이미 대접견실에서 전하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영애님… 황자 전하의 기색이… 예사롭지 않으십니다.”엘라엔은 겁에 질린 하녀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감금 상태나 다름없는 처지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복도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사용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다. 제국의 거대 세력 중 하나였던 폰테가 단 하룻밤 만에 사라졌다는 공포는 공작저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황후 폐하께서 움직이셨어.’그건 엘라엔의 계산에 없던 변수였다. 르세인과 함께 세웠던 계획은 폰테 후작을 서서히 압박해 그들의 자금줄을 르세인의 수하로 귀속시키는 것이었다.폰테 후작가가 장악하고 있던 협곡은 남부의 숨통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주된 소금 산지인 남부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그 좁고 험한 협곡이었기 때
황궁의 가장 높은 탑 위. 르세인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바람이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의 눈은 멀리 마레즈나가 있을 곳을 향해있었다.르세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차올랐다.“서신은… 곧 받겠지.”그것을 읽고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잡아야 할 오류이고.그는 나직이 부연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라안느 공작저 마레즈나의 영애 침소는 공식적인 감옥이 되었다. 참나무 문밖에서는 하녀들이 교대로 자리를 지켰고, 정기적으로 문이 열릴 때마다 들리는 열쇠의 금속성 마찰음은 엘라엔의 신경을 긁어내렸다.창밖으로는 초가을의 노을이 보랏빛으로 번지고 있었다. 한때 붉게 타오르던 정원의 장미들은 거뭇하게 말라비틀어져 가느다란 가시들만이 허공을 찔렀다.“영애님. 황궁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하녀장이 은제 쟁반 위에 놓인 서신을 내밀었다. 르세인의 개인 인장인 검은 왁스가 찍힌 봉투에서는 독한 잉크 냄새가 배어 나왔다. 엘라엔은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서신의 종이는 최급 양피지였고 그 질감은 르세인처럼 매끄럽고 서늘했다.[영애.황궁의 정무는 북부의 전장보다 더 치밀한 계산을 요구합니다.폰테 후작가는 서서히 질식하고 있죠.당신의 논리가 제국의 판도를 바꾸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내가 겪어본 그 어떤 승전보다도 자극적입니다.하지만 마레즈나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유쾌하지가 않더군요.당신은 내 곁에서 가장 화려하고 단단한 정점에 서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엘라엔은 서신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나 르세인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미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또한, 공작 부인이 준비하는 그 모든 억압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명심하십시오. 당신의 모든 것은 나의 논리 안에 있음을.책봉식 이후 내가 당신의 목에 걸어줄 것은 단순한 보석이 아니라 나와 당신을 영원히 묶을 제국의 사슬이 될 겁니다.]서신을 다 읽은 엘라엔은 숨이 막혀 코
엘라엔은 카시안을 똑바로 보았다.카시안은 대답 대신 가죽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보석 대신 수십 장의 얇은 양피지가 들어 있었다.부족함 없는 엘라엔에게 블러드가 보낸 정보의 선물은 그 어떤 보석과도 비할 수가 없었다.“황자가 폰테 후작가를 지우겠다고 하셨다며.”엘라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은밀한 이야기를 카시안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카시안은 당혹감이 깃든 엘라엔의 손짓을 보며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황자는 너를 자신의 옆에 세울 완벽한 파트너로 만들지. 하지만 엘라엔. 파트너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해. 그러나….”“…….”“공범은 다르지 않겠어?”카시안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했으며 매혹적이었다.“황자가 너에게 칼을 쥐여주었다면 나는 그 칼이 박힐 급소를 알려줄게.”엘라엔은 숨을 들이켰다. 르세인이 주는 압박이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이었다면 카시안이 주는 압박은 헌신이었다.“엘라엔.”카시안은 엘라엔의 드러난 뺨에 자신의 손등을 대었다.“네가 황자의 눈을 속이는 동안, 나는 제국의 어둠을 너의 발치에 깔아둘게.”서재 창밖으로는 이제 완전히 빛을 잃은 장미 정원이 보였다. 시든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그 자리를 초가을의 찬 바람이 채웠다.엘라엔은 카시안이 건넨 블러드의 비밀 장부를 가슴에 품었다. “고마워, 카시안.”엘라엔의 미소 위로 자애로운 햇빛이 내려앉았다. 이사벨라와 에드먼은 서재 밖에서 경의 등장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고, 르세인은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그 모든 착각의 한가운데서 엘라엔은 두 남자의 비호 아래 제국의 정점을 향한 가장 우아하고 잔혹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카시안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떠난 라안느 공작저의 아침은 처참하게 고요했다.에드먼과 이사벨라는 질식할 듯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며 엘라엔을 경악스럽게 보았다.식탁 위에는 시나몬을 뿌린 따뜻한 오트밀과 요거트, 그리고 호두를 넣어 구운 빵이 차
창백한 오후의 햇살이 시든 장미 덤불 위를 무심하게 비출 무렵, 마레즈나의 정문 너머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유독 묵직하고 절도가 있었다.마레즈나의 집사장은 사색이 된 얼굴로 에드먼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공작님! 베, 베르제 대공저에서 마차가 도착했습니다!”“베르제라고? 대공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실 텐데 누가 왔단 말이냐.”에드먼이 의아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벨라 역시 부채를 꽉 쥐며 에드먼을 뒤따랐다.마레즈나의 정문으로 들어선 마차는 대공가의 문양만이 간결하게 새겨졌다. 하지만 그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기세는 르세인의 정예병들조차 긴장시킬 만큼 서슬 퍼런 살기를 품고 있었다.이사벨라는 현관 홀 입구에 서서 에드먼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흘렸다.“아무리 베르제라고는 하나, 전령도 없이 이리 무례하다니요….”“대공의 친필 서신을 지참했다 하니 어쩔 수 없지 않소. 일단 맞이합시다.”라안느 공작 에드먼은 불쾌감을 억누르며 현관을 바라보았다.마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제국의 법도가 정한 제식 예복도, 귀족들이 즐겨 입는 화려한 예복도 입지 않았으며 베르제의 군인 또한 아니었다.현관 홀의 문이 열리자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었다.곧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에드먼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남자의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었음에도 희미하게 보이는 턱 선과 굳게 다문 입술은 범상치 않은 고결함을 풍겼다.“베르제 대공의 명으로 곧 황태자비가 될 영애를 축하하기 위한 작은 성의를 가져왔습니다.”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나 묘하게 우아했다. 이사벨라는 그의 무례한 복색과 오만한 태도에 눈썹을 치켜세웠다.“대공 각하의 손님이라니 예우는 갖추겠습니다만… 성함조차 밝히지 않는 것은 라안느가에 대한 결례가 아닌지요?”이사벨라의 가시 돋친 비아냥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 에드먼과 이사벨라 뒤에 있는 엘라엔에게 시선을 맞췄다.부딪힌 그의 푸른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깊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