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Chapter 1 - Chapter 10

22 Chapters

1. 정오의 장미

엘레니르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 그곳에 자리한 에르디엔 황궁은 정교한 금박을 두른 화려함의 향연이었다. 에르디엔은 황실의 권위가 하늘에 닿아 있음을 증명하듯 채움과 범람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단 한 곳만은 달랐다. 아르젠트 궁. 황태자의 거처인 이곳은 비움과 질서의 미학이 흐르는, 여름의 열기조차 제 질서 안으로 수렴시키는 거대한 침묵의 공간이었다. 밝은색을 거부한 듯 짙은 회색의 석재로 쌓아 올린 외벽은 불필요한 조각과 장식이 없었다. 정원조차 화려하지 않았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사치스러운 장식이 아닌,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질서에서 기인되었다. 아르젠트 궁은 화려함으로 계절을 선언하지 않는 대신 질서로 계절을 품었다. 황태자. 르세인 폰 루카르디아. 차가운 질서의 정점에 있는 그의 얼굴은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가진, 매서운 아름다움을 지녔다. “바델.” 낮고 매끄러운 음성이 정적을 갈랐다. 대기 중이던 전속 부관 바델은 르세인의 부름에 곧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황태자 전하.” 모든 판단은 감정 이전에 내려져야 한다는 신념이 짙게 내려앉은 르세인의 오묘한 녹색 눈동자가 바델을 직시했다. 바델은 침을 삼켰다. 곧 보고해야 할 말은 그의 손을 미약하게 떨리게 만들었다. “보고.” “어제 오전, 라안느 영애께서 마레즈나를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테르시아입니다.” 바델의 떨리는 음성에도 르세인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생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말을 걸러내는 과정에 가까웠다. “또 카시안이군.” 르세인에게 카시안은 위협의 대상도, 동정의 대상도 아니었다. 자신의 완벽한 소유물에 묻은 불쾌한 얼룩 같은 존재였다. 르세인은 바델의 말을 듣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라안느가의 마레즈나가 있을 곳으로. 라안느 영애. 엘라엔 폰 라안느. 르세인은 그녀가 카시안을 보며 짓는 미소가 진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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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색무취의 질서

목소리의 주인, 르세인. 자신의 인생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둔 설계자이자, 이 가증스러운 평화를 유지해 준 대가로 모든 것을 예약한 남자. 그의 구두 굽이 정원을 짓누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일정한 보폭과 흐트러짐 없는 박자는 포식자가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때 내는 가장 우아한 소음이었다. “꽃향기가 너무 짙어. 영애 몸에 밴 향이 이 역겨운 정원의 것인지, 본연의 살 냄새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군.”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멈춰 섰다. 엘라엔은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 엘라엔이 입술을 달싹였다. 루비처럼 붉고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는 르세인을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의 긴 손가락이 엘라엔의 턱 끝을 느릿하게 치켜올렸다. 거칠고도 부드러운 악력이 그녀의 여린 피부를 파고들었다. 여름의 매미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정원의 장미들은 열기에 지쳐 고개를 떨구려 했지만 르세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르는 긴장감은 날이 선 채 팽배하게 당겨졌다. 그는 엘라엔의 떨림을 즐겼다. 공포인지, 혹은 금기된 존재를 향한 갈망인지 알 수 없는 그 전율을……. “에르디엔으로 떠날 준비는.” “전하, 전 아직…….” “아직?” 르세인이 짧게 냉소했다. 그의 목소리엔 감정의 고저가 없었다. 잘 닦인 칼날 위로 흐르는 물방울처럼 매끄럽고 냉혹했다. 오묘한 녹색 동공이 그녀의 눈을 꿰뚫었다. 라안느 공작과 거래를 하게 만들었던 그 치명적인 빛은 더욱 짙어진 붉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자신을 무너뜨릴 유일한 위협…. 그는 엘라엔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았다. 르세인은 그것이 불쾌했다. 그는 더욱 서늘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름답군.” “…….” “그 눈으로 다른 것을 보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수만 송이의 장미가 뿜어내는 향기는 어느새 질식할 듯한 압박감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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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식자

찰싹!르세인이 떠나자마자 라안느 공작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엘라엔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엘라엔! 더는 황태자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거라!”엘라엔은 고개가 돌아간 채 잔디 위로 엎어졌다. 공작 부인 이사벨라는 그 모습을 보며 속이 시원하다는 듯 야비한 웃음을 흘렸고, 어린 남동생 하르만과 루시안은 겁에 질린 채 엘라엔을 내려다보았다.‘르세인….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바닥에 엎드린 엘라엔의 시야에 르세인이 짓밟고 간 장미의 잔해가 들어찼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장미를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정원의 흙이 함께 파고들었다.엘라엔은 그 손을 들어 에드먼의 반지에 긁혀 입가에 흐르는 피를 훔쳤다. 그녀의 눈은 증오로 타올랐다.곧 그 붉은 눈에 자각 없이 눈물이 흘렀다.카시안을 지키기 위해 르세인이 설계한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잔인하고 가혹했다.푸르른 하늘은 유리판처럼 깨끗했으나 정오의 장미 향은 이제 죽음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에르디엔 황궁의 아르젠트 궁에는 오직 르세인이 서류를 넘기는 건조한 소리와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는 마찰음만이 존재했다.이곳에는 장미의 붉음도, 여름의 녹음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채색의 완벽함만이 질서 아래에 놓였다.르세인은 생명을 가진 것들의 무질서한 번식을 혐오했다.그는 꽃 향이 섞인 미풍이 아닌 깎아지른 절벽에서 불어오는 듯한 건조한 내음을 맡으며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검토했다.제국 남부의 관세 조정안과 북부 요새의 보급로 확충, 그리고 황실 직속 기사단의 재 편성안.그의 손끝에서 제국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지만 르세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슥, 슥.펜촉이 고급 양피지 위를 스치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르세인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의 움직임은 효율성을 극대화했다.“바델.”펜을 놓지 않은 채 르세인이 입을 열었다.전실에서 대기하던 바델은 그의 부름에 소리 없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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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호한 충동

그녀는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테라스 너머 정원을 응시했다.그리고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그를 보았다.카시안.그는 공식적인 직함도 없는 허울뿐인 황자였지만 오늘 같은 대규모 다과회 날에는 외곽 경비를 보조한다는 명목으로 후원 어딘가에 배치되곤 했다.뜨거운 열기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는 그는 엘라엔이 앉아 있는 테라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엘라엔은 황후와 영애들의 시선을 피해 아주 찰나의 순간에 카시안과 눈을 맞췄다.그건 짧았지만 강렬한 위로였다.질식할 듯한 향수 냄새와 가식적인 웃음소리, 그리고 태양보다 더 뜨거운 시기심이 들끓는 이 장소에서 엘라엔에게 카시안은 유일한 숨이었다.카시안은 엘라엔의 시선을 확인하자마자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지루해도 조금만 참아.눈으로 그리 말하는 듯했다.엘라엔은 그 무언의 위로에 비로소 긴장된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지루하게 이어지던 다과회는 황후의 피곤 섞인 한마디로 마무리되었다.영애들은 아쉬운 척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며 흩어졌고, 엘라엔은 하녀 마리를 먼저 마차로 보낸 뒤 후원의 한적한 사잇길로 접어들었다.정오의 태양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잔인한 열기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엘라엔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벼웠다.미로처럼 얽힌 장미 넝쿨 너머, 인적이 드문 낡은 분수대 근처에는 카시안이 서 있었다.그는 주변을 경계하며 엘라엔이 다가오는 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엘라엔! 이 더위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카시안이 수줍게 웃었다. 그는 정부도 아닌, 미천한 하녀에게서 태어난 탓에 제국의 오점이라 여겨졌다. 그런 그에게 허락된 자리는 오직 뙤약볕 아래 보초였다.“너야말로. 물은 좀 마신 거야? 얼굴이 발갛게 익었네.”엘라엔은 안쓰러운 듯 카시안의 뺨 근처로 손을 뻗었다가 멈칫하며 손을 거두었다. 보는 눈이 많은 황궁이었다. 하지만 카시안은 그녀의 머뭇거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소년의 손바닥은 뜨거운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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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허상인 안온한 질서

같은 시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르세인은 창밖을 등진 채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방금 전까지 전장 보고서를 검토하던 그의 펜 끝은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그의 뇌리는 방금 목격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했다.짙푸른 녹음 속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튀어 오르던 그 와인빛 머리카락과 루비빛 동공.그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하지 않았다. 미학적 가치는 주관적인 변수일 뿐, 그의 논리 세상에서는 무가치한 정보였다. 그러나… 그 선명함만은 분명 달랐다.‘가시성이 지나치게 높군.’르세인은 눈을 감았다.감긴 눈꺼풀 너머로 엘라엔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찰나의 순간은 인상처럼 박혔다.자신을 보고 분명 놀랐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을 세우던 그 붉은 눈동자.그건 르세인이 평생 보아온 질서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이었다.무질서하고, 감정적이며, 선명하게 타오르는 생명력.“바델.”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대기하던 부관 바델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폐하의 다과회에 참석했던 명단 중, 와인빛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는 누구인가.”바델은 그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숙련된 자세로 답했다.“제국 제일 가문,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입니다. 전하께서 전장에 계신 동안 황후 폐하께서 직접 황태자비 후보로 공표하신 분이기도 합니다.”황태자비 후보.그 수식어를 듣는 순간 르세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황태자비라….”자신은 곧 황태자가 될 것이고, 자신의 세상은 완벽한 질서 아래 통제되어야 했다.그런데 그 질서의 핵심 조각이 될 후보가 황궁의 하찮은 변수와 섞여 무의미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그건 명백한 오점이었다.“비논리의 극치이군.”그는 자신이 가져야 할 가장 화려하고도 결함 있는 조각에 이름을 붙였다.관심도, 연모도 아니었다.정교한 기계 장치 속에 잘못 끼워진 나사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지독한 강박이었다.***황궁 서문을 빠져나온 마차는 거칠게 흔들리며 마레즈나로 향했다.엘라엔은 가죽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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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집품에 대한 관리 욕구

이안의 다정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엘라엔의 날선 긴장감을 차츰 부드럽게 풀어냈다.이황자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전 회랑 위에서 보고 느꼈던 그 기이한 시선이 한낱 망상처럼 느껴졌다.“영애, 오늘따라 유독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군요. 형님의 귀환이 사교계의 영애들에게는 꽤나 위압적인 모양입니다.”이안이 엘라엔의 샴페인 잔을 받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온화하게 웃었다.엘라엔은 그 다정함에 기대어 억지로 가슴속의 울렁임을 눌러 내렸다.“…아무래도 전장의 이야기는 저희에겐 조금 생경하니까요. 하지만 전하께서 곁에 계시니 마음이 놓입니다.”엘라엔의 말은 진심이었다. 황태자 책봉은 아직 멀었지만 제국은 이미 이안이라는 상냥한 지배자를 맞이할 준비를 끝낸 듯 보였다. 필시 그래야만 했다. 그녀는 이안의 뒤로 펼쳐진 견고한 황실의 예법과 정해진 미래를 믿었다.엘라엔은 이 평화로운 연회가 끝나면 다시 마레즈나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시안과 비밀스러운 우정의 편지를 주고받는 일상을 꿈꿨다.하지만 그 안락한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가 웅장해지는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갈라졌다.회랑 위에 멈춰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르세인.그는 황제에게 승전 보고를 마친 뒤, 비로소 사교라는 이름의 전장으로 발을 내디뎠다.그의 부츠 굽이 대리석 바닥을 짓누르는 규칙적인 소리가 음악의 박자와 묘하게 어우러졌다.르세인은 화려하게 치장한 영애들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엘라엔과 이안이 서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엘라엔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엘라엔의 앞을 막아서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형님. 여기 라안느 영애가 형님의 무용담에 꽤나 놀란 모양입니다.”이안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엘라엔을 자신의 영역으로 보호하려는 명확한 의지가 담겼다.르세인은 이안의 면전에 멈춰 섰다. 그의 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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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 마주치면 그만

“영애님! 어머, 안색이!”마차 근처에서 대기하던 마리가 뛰어왔으나 엘라엔은 대답 대신 마차 문을 어서 열라는 손짓만 했다.‘오차? 하.’엘라엔은 마차에 올라타 르세인의 시선을 지워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그가 전장에서 돌아온 영웅이든, 적통이든 솔직히 말하면 자신과 무관했다. 사교계의 다수가 믿는 것이 진실이 되어야 했다.이안과 약속한 안온한 미래만이 엘라엔이 믿어야 할 유일한 정답이었다.르세인. 그는 곧 다시 전장으로 떠날 것이고 그전까지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이다.엘라엔은 그렇게 정의 내리며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마레즈나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엘라엔은 일부러 즐거운 생각만을 골라냈다.다음 다과회에 입을 드레스의 색상.카시안에게 보내줄 작은 선물의 종류.이안이 황태자가 되었을 때 라안느 가문이 누리게 될 영광들.‘당신이 뭘 안다고.’그녀는 창밖에 비치는 달빛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라안느 공작저 마레즈나에 도착하자 익숙한 장미 향기가 엘라엔을 반겼다.방으로 들어온 엘라엔은 하녀들의 손길을 받으며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췄다.‘잊힐 일일뿐이야. 그가 황궁에 있든 전장에 있든 내 세상과는 상관없는 일이야.’르세인이 던진 말에 휘둘리는 순간 자신의 완벽한 일상이 흔들리게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그는 감정이 없는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시선 역시 어떤 전략적인 계산의 산물일 것이다.라안느 공작가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행보이거나 이안을 견제하기 위한 유치한 도발이었겠지.엘라엔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했다.내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카르네티아의 거리를 거닐거나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르세인의 그 기분 나쁜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즐기리라.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낼 무렵에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에드먼과 이사벨라가 이제야 마레즈나로 돌아온 듯했다.엘라엔은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말도 없이 먼저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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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안, 그리고 조건

카르네티아 번화가에서 마차를 돌린 엘라엔은 잡초가 무성한 외곽 도로로 접어들었다.황궁 서문 밖, 이끼 낀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낡은 쪽문 하나가 나타났다.과거 궁정인들이 드나들던 이 좁은 문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엘라엔은 미리 준비한 은화 몇 닢을 졸고 있는 보초병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제국의 법도보다 은화가 더 힘이 있는 곳.엘라엔이 카시안을 만나기 위해 설계한 유일한 틈이었다.“엘라엔!”쪽문을 지나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황궁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낡은 분수대 앞에 카시안이 있었다.그는 이 경계의 공간에서 엘라엔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다.“카시안, 많이 기다렸지? 번화가 쪽 검문이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말이야.”엘라엔은 숨을 몰아쉬며 카시안에게 다가갔다.그는 엘라엔의 어깨를 감싸 쥐며 안색을 살폈다.“아니야. 네가 이 위험한 길을 매번 오게 해서 미안할 뿐이야. 라안느 공작….”“아버지는 정무로 바쁘셔. 그리고 절대 들키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엘라엔은 카시안의 걱정을 잠재우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품 안에서 만년필 상자를 꺼냈다.“엘라엔…!”순간 카시안의 움직임이 절단된 것처럼 끊어졌다. 카시안은 한참을 뜨거운 시선으로 엘라엔의 얼굴에 파고들었다. 르세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 습하고 그늘진 숲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에만 집중했다.같은 시각, 저 멀리 황궁 본궁과 연결된 높은 곳.르세인은 기사단의 훈련 일지를 검토하며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무심한 시선은 문득 황궁 담장 밖 무성한 숲이 우거진 외곽 지역을 훑었다.숲 사이로 언뜻 비친 드레스 자락과 그 곁에 서 있는 초라한 체구의 남자.르세인은 펜을 멈추고 그 방향을 보았다.‘우습군.’그는 그 남자가 카시안임을 알아차렸다. 황궁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한 채 담장 밖 숲에서 밀회를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르세인에게 그건 애틋한 로맨스가 아니라 관리 구역 근처에서 발생한 소동 정도로 분류되었다.그는 황후 로잘린이 정해놓은 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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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논리를 들고

엘라엔의 단호한 어조에 에드먼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조건이라니.”“하르만은 아직 어립니다. 제국 군 지휘관들의 거친 생리를 다 알지 못하죠. 그러니 제가 하르만의 조력자이자 가문의 대리인으로서 공사 현장에 동행할게요.”“…뭐?”“공사 현장의 물자 보급과 행정 절차를 제가 옆에서 챙긴다면 하르만도 더 빨리 실무를 익힐 수 있을 것이고, 전하께서도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거예요.”엘라엔의 말에 이사벨라는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어머, 엘라엔. 정무는 하르만이 배울 일이지.”“어머니. 전하께서는 효율을 중시하는 분이에요. 제가 현장에서 보급의 오차를 줄여 기간을 단축시키겠다면 전하께서도 마다하지 않으실 거예요. 무엇보다 하르만이 전하 곁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라안느 가문의 위엄을 보이려면 제가 옆에 있어야만 해요.”에드먼은 딸의 말에서 타당성을 읽었다.엘라엔의 영리함은 가문의 이득을 극대화하는데 탁월했으니까.“좋다. 전하께 그리 전하도록 하지. 엘라엔, 하르만을 잘 보살펴야 한다.”“물론이죠, 아버지.”“아니, 이건…!”이사벨라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날이 선 얼굴로 엘라엔을 보았다.엘라엔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어머니. 걱정 마세요. 하르만과 루시안은 너무나 소중한….”“…….” “제 동생들이거든요.”이사벨라는 엘라엔의 거짓 없는 강고한 눈빛을 보며 그간 엘라엔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렸다.엘라엔이 하르만과 루시안을 끔찍이 아낀다는 건 마레즈나를 넘어 사교계 전부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이사벨라는 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다시 고아하게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회의실을 나온 엘라엔은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노을은 어느새 저물고 있었다.르세인.엘라엔은 그의 질서를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다.그가 숲을 밀어버리고 요새를 세우겠다면 자신은 그 요새의 성벽 위에 올라 그와 대등하게 눈을 맞추며 하르만의 뒤를 지키리라.르세인에게 엘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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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의외로 정교한

엘라엔은 서류철을 펼쳐 르세인의 지형도 위에 올렸다.“전하께서 벌목하신 이 구역은 배수가 좋지 않아 장마철이면 보급 마차가 수령에 빠지는 곳입니다. 또한, 감시탑을 세우려는 이 지점은 겨울철 북풍이 가장 매서워 기사들의 피로도가 극심하죠.”“…….”“라안느 가문은 이 지형을 수백 년간 관리해왔습니다. 제가 가져온 이 보급망 재편안은 전하의 요새가 유지되는 데 드는 행정 비용을 삼십 퍼센트 이상 절감해 줄 것입니다.”르세인이 눈을 치켜뜨자 엘라엔은 위압적인 모습에 목뒤가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확실히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하지만 엘라엔은 여태 되뇌어 왔던 말을 상기하며 자세를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르세인은 엘라엔이 내민 서류 위의 숫자들을 빠른 속도로 훑어 내려갔다.이건 감정 섞인 호소가 아니라 철저하게 통계와 지형적 이해를 바탕으로 작성된 효율적인 보고서였다.그는 다시 엘라엔을 보았다. 뙤약볕 아래에서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형형하게 빛났다.르세인에게 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그는 엘라엔이 동생의 뒤에 숨어 감정적인 방패막이 노릇이나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논리를 들고 심장부를 타격하고 있었다.“…라안느 공작이 영애를 보내며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었군.”르세인이 서류철 위로 손을 얹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엘라엔의 손등 근처에서 머물렀다. 닿지는 않았으나 엘라엔은 숨을 삼켰다.“좋습니다. 영애의 제안은 합리적이군요. 하지만 질서란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애가 말한 그 절감이 현장에서 증명되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은 그대의 가문이 지게 될 겁니다. 그래도 동행하겠습니까.”“가문의 이름보다 무거운 책임은 없습니다, 전하. 제가 증명해 보이죠.”엘라엔은 지지 않고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의 온기도 흐르지 않았다.르세인은 몸을 돌려 바델에게 지시를 내렸다.“영애와 라안느 후계자의 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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