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르세인은 창밖을 등진 채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방금 전까지 전장 보고서를 검토하던 그의 펜 끝은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그의 뇌리는 방금 목격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했다.짙푸른 녹음 속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튀어 오르던 그 와인빛 머리카락과 루비빛 동공.그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하지 않았다. 미학적 가치는 주관적인 변수일 뿐, 그의 논리 세상에서는 무가치한 정보였다. 그러나… 그 선명함만은 분명 달랐다.‘가시성이 지나치게 높군.’르세인은 눈을 감았다.감긴 눈꺼풀 너머로 엘라엔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찰나의 순간은 인상처럼 박혔다.자신을 보고 분명 놀랐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을 세우던 그 붉은 눈동자.그건 르세인이 평생 보아온 질서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이었다.무질서하고, 감정적이며, 선명하게 타오르는 생명력.“바델.”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대기하던 부관 바델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폐하의 다과회에 참석했던 명단 중, 와인빛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는 누구인가.”바델은 그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숙련된 자세로 답했다.“제국 제일 가문,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입니다. 전하께서 전장에 계신 동안 황후 폐하께서 직접 황태자비 후보로 공표하신 분이기도 합니다.”황태자비 후보.그 수식어를 듣는 순간 르세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황태자비라….”자신은 곧 황태자가 될 것이고, 자신의 세상은 완벽한 질서 아래 통제되어야 했다.그런데 그 질서의 핵심 조각이 될 후보가 황궁의 하찮은 변수와 섞여 무의미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그건 명백한 오점이었다.“비논리의 극치이군.”그는 자신이 가져야 할 가장 화려하고도 결함 있는 조각에 이름을 붙였다.관심도, 연모도 아니었다.정교한 기계 장치 속에 잘못 끼워진 나사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지독한 강박이었다.***황궁 서문을 빠져나온 마차는 거칠게 흔들리며 마레즈나로 향했다.엘라엔은 가죽 시
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