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의 상처 입은 힐러

알파의 상처 입은 힐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By:  Sada Vii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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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했다. 배신당했다. 죽음의 표적이 되었다. 아이언클로의 루나였던 레이븐 문섀도. 반려인 알파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목의 표식을 지운 채 적진으로 달아난다. 잔혹한 블러드팽 무리 속 방랑자 ‘스칼렛 베인’으로 숨죽여 살아가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을 죽여야 마땅할 적의 알파 디미트리를 살려내고 만다. 그녀의 손길로 사선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그녀를 전속 치유자로 지목한다. 적진 한복판에서 다른 알파의 아이를 품은 레이븐,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초록빛 눈동자로 그녀를 조여오는 가장 위험한 남자.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비밀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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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장: 값비싼 새장

뺨을 후려치는 타격음과 함께 머리뼈가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 세게 처박히며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비명조차 비집고 나오지 못했다. 맞서 싸우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오래전, 나는 그의 말 없는 샌드백이 되는 법을 이미 터득해 버렸다.

단단한 나무 바닥에 짓눌린 뺨이 지끈거렸다. 입안 가득 비릿한 쇠맛이 번졌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숨만 계속 들이쉴 수 있다면, 나는 괜찮을 것이다.

루칸은 내 위에서 일 초쯤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 이 초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엇 하나 똑똑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말을 건네지 않은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는 셔츠의 소맷자락을 반듯하게 정돈하더니, 마침내 성가신 짐을 치워버렸다는 듯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등을 돌렸다.

그의 뒤로 방문이 조용히 닫히며 딸깍 소리를 냈다.

내 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통은 서서히 피어오르더니, 이내 온몸 구석구석을 갉아먹으며 퍼져나갔다. 손가락을 들어 얼굴을 건드렸다. 닿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나직이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익숙하게 부풀어 오른 상처 때문에 목구멍 뒤로 두터운 응어리를 삼켜야 했다.

그제야 천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높고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무거운 벨벳 암막 커튼, 그리고 내가 잠들기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기둥 달린 침대가 시야를 채웠다. 이것이 바로 안락한 삶을 대가로 내가 치러야 했던 몫이었다.

버텨.

그 생각이 머릿속을 울렸다. 일어나야 해. 피를 씻어내야 해. 멍에 얼음찜질을 해야 해. 남들이 보기 전에 감춰야 해. 이런 꼴로 살아가는 여자가 아니라, 여전히 아이언클로 무리의 루나인 것처럼 굴어야 해. 하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익숙한 일과였다. 이 뒤에 찾아올 침묵이 더 끔찍하다는 것을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지만, 복도 너머로 멀어져 가는 그의 발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나는 달의 여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나직이 읊조렸다. 오늘 밤은 두 번째 폭행 없이 넘어갈 모양이었다.

협탁 위에서 전화기가 진동했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번. 다섯 번. 화면에 제나의 이름이 번쩍였다. 무거운 팔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입술이 굳어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정적만이 이어졌고, 마침내 제나가 입을 열었다. “또야?”

목구멍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고, 이내 눈물이 쏟아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남은 한 손으로 눈을 짓눌렀다. 숨을 고르려 애썼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제나는 늘 그래왔듯 끊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다그쳤다. “언제까지 이럴 순 없어, 레이븐. 그 인간은 멈추지 않을 거야. 넌 루나야. 그런데 또 망할 바닥에 나뒹굴고 있잖아. 네가 행복한 반려인 척 연기하는 한, 이 무리에서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는 피를 삼켰다. “이유를 알잖아.”

그녀는 가만히 기다렸다.

말을 꺼내려 애썼지만, 여전히 갈라져 비어져 나왔다. “그 사람 때문만은 아니야. 우리의 짝짓기는… 정략적인 결합이었어, 너도 알잖아. 정치야, 제나. 내가 도망치면 동맹에 금이 가. 아이언클로는 그걸 두고 보지 않을 거야. 날 사냥할 거야. 날 적으로 만들고 배신자라 부르겠지. 우리 가족도… 날 받아주지 못해. 받아줄 수가 없다고. 대가가 너무 커. 난 혼자가 될 거야.”

이번에는 제나의 침묵이 훨씬 더 길게 이어졌다.

“갈 곳이 없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사람의 손길이, 이 무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따윈 아무 데도 없어.”

여전히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이 화제를 완전히 접었다고 생각했을 무렵, 입을 열었다. “지금 갈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 돼. 제나, 오지 마. 상황만 나빠져. 그 사람이 싫어할 거야.”

그녀는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전화기를 가슴에 품은 채, 부디 상황이 더 엉망진 진창으로 치닫지 않기를 여신께 빌었다.

떨리는 다리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불로 지지는 듯 쓰라렸지만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머리카락을 앞으로 쓸어내려 가릴 수 있는 만큼 흉을 가렸다. 거울 속 갈색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채 죽어 있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온몸이 쑤셔와, 최대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집은 지나치게 넓었지만, 아무리 멀리 걸어가도 방금 침실에서 벌어진 일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세상이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은밀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루칸이 내 여동생 라일리와 숨이 닿을 듯 가까이 붙어 서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내게는 단 한 번도 내어주지 않았던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는 매 순간을 음미하듯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현실일 리 없었다. 헛것을 본 게 틀림없었다.

루칸은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가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나직이 속삭였다. 여동생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라일리?!” 부서져 간신히 흩어져 나온 내 목소리가 터져 나갔다.

라일리가 몸을 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 손은 여전히 루칸의 가슴에 얹혀 있었고, 마치 원래 제자리라는 듯 그의 셔츠를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사과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나를 시험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루칸은 찰나의 순간 고개를 천천히 돌리더니, 다시 라일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나를 흘겨보며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춘 것이다.

현실이었다. 방금 얻어맞은 탓이 아닌 눈물이 두 눈에 가득 차올랐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혀왔고, 그에게서 풍겨오는 여동생의 체취에 또다시 속이 메스꺼워졌다. “매일 아침 네 곁에서 눈을 뜰 때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돼. 너와 짝지어진 날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어.”

그 말들이 내 온 존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훨씬 더 거셌다.

나는 바닥으로 처박혔다. 눈앞에서 하얀 섬광이 터졌다. 충격으로 귀에서 삐 소리가 울렸고, 가슴속에서 고통이 다시금 번져나갔다. 피 맛이 더 진하게 퍼졌다. 몸이 저절로 둥글게 말려들었다. 잠시 동안 숨도 쉴 수 없었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을 들썩이며 손과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눈물이 뜨겁게 타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말을 뱉어냈다. “이 결합은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야. 동맹이… 이 무리를 지탱하고 있잖아. 당신도 알잖아. 날 거부하면… 모든 걸 잃게 돼.”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고, 싸늘한 눈동자 속에서 경멸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닥쳐!”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 집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짚은 채, 멍든 몸을 떨며 매달렸다. “무리를 생각해. 균형을 생각하라고. 제발—”

“닥치라고 했다.”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어. 동맹은—”

“그만!” 천둥처럼 공기를 가르는 고함이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널 거부한다. 우리의 유대는 끊어졌다. 이혼 서류를 접수할 것이다.”

그 말이 내 세상을 두 쪽으로 찢어놓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닥 타일에 손을 짚은 채 꿇어앉아 있었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거부당한 루나는 죽은 목숨보다 못했다. 무리는 나를 향해 등을 돌릴 것이다. 가족들도 날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할 터였다.

“제발,” 숨이 턱 막힌 채 애원했다. “다시 생각해 줘. 오늘 밤엔 이러지 마. 내가—”

그는 듣지 않았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배 위로 내려앉았다. 몇 주 동안 홀로 품어온 비밀이 속에서부터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손을 내려다보며 눈물과 고통 속에서 머리를 굴렸다. 지금 그에게 말한다면—

현관문이 열렸다.

제나가 걸어 들어왔다.

바닥에 쓰러져 배에 손을 얹은 채 눈물을 흘리는 나, 내 위에 선 채 내려다보는 루칸,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굳어버린 라일리를 본 제나는 세 걸음 만에 방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방패처럼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몸을 웅크린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린 채 루칸을 노려보았다.

“쓸모없는 개자식. 마치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양 여잘 때려? 그 여자와 함께 사는 집에서 그 여동생이랑 뒹굴어? 무리에 남은 유일하게 좋은 것마저 부숴버리면서 네가 알파라고? 그 애한테서 빼앗아 간 그 망할 힘 한 조각 한 조각마다 목이 막혀 뒈져버리길 여신께 빌어주마.”

루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그녀를 치려고 손을 치켜들었다.

제나가 더 빨랐다. 그녀는 협탁에 놓인 묵직한 크리스털 화병을 낚아채 던져버렸다. 화병은 그의 머리에서 불과 몇 치 떨어진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았다.

팔로 나를 감싸 제 옆구리에 바짝 밀착시키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부어오른 얼굴에 닿자 쓰라림이 더욱 심해졌다. 문이 등 뒤에서 쾅 닫히는 충격에 무릎이 꺾일 뻔했다.

제나는 나를 차로 데려가 조수석에 밀어 넣었다. 뒤따라 올라탄 그녀가 시동을 걸었지만, 차를 출발시키지는 않았다. 핸들을 쥔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얹힌 손.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감각이 마비된 채, 상처만이 생생했다.

제나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임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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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값비싼 새장
뺨을 후려치는 타격음과 함께 머리뼈가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바닥에 세게 처박히며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비명조차 비집고 나오지 못했다. 맞서 싸우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오래전, 나는 그의 말 없는 샌드백이 되는 법을 이미 터득해 버렸다.단단한 나무 바닥에 짓눌린 뺨이 지끈거렸다. 입안 가득 비릿한 쇠맛이 번졌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숨을 쉬는 것뿐이었다.숨만 계속 들이쉴 수 있다면, 나는 괜찮을 것이다.루칸은 내 위에서 일 초쯤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 이 초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엇 하나 똑똑히 분간할 수 없었다.그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말을 건네지 않은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는 셔츠의 소맷자락을 반듯하게 정돈하더니, 마침내 성가신 짐을 치워버렸다는 듯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등을 돌렸다.그의 뒤로 방문이 조용히 닫히며 딸깍 소리를 냈다.내 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통은 서서히 피어오르더니, 이내 온몸 구석구석을 갉아먹으며 퍼져나갔다. 손가락을 들어 얼굴을 건드렸다. 닿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나직이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익숙하게 부풀어 오른 상처 때문에 목구멍 뒤로 두터운 응어리를 삼켜야 했다.그제야 천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높고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무거운 벨벳 암막 커튼, 그리고 내가 잠들기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기둥 달린 침대가 시야를 채웠다. 이것이 바로 안락한 삶을 대가로 내가 치러야 했던 몫이었다.버텨.그 생각이 머릿속을 울렸다. 일어나야 해. 피를 씻어내야 해. 멍에 얼음찜질을 해야 해. 남들이 보기 전에 감춰야 해. 이런 꼴로 살아가는 여자가 아니라, 여전히 아이언클로 무리의 루나인 것처럼 굴어야 해. 하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익숙한 일과였다. 이 뒤에 찾아올 침묵이 더 끔찍하다는 것을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지만, 복도 너머로 멀어져 가는 그의 발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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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태우고, 도망치다
“아이 이야기는 나중에 해. 지금은 움직여야 해.” 제나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너무 아파 대답조차 나오지 않았다.“블러드팽이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제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떠난다. 루칸이 우리 둘이 함께 나가는 걸 봤어. 한 시간 안에 그놈의 부하들이 들이닥칠 거야.”입이 딱 벌어졌다. 숙적의 무리. 루칸이 전쟁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이었다.“그쪽은 충성을 맹세하는 방랑자들을 받아줘. 가서 원래 무리가 와해되었다고 말하고, 새로 시작하는 거야.”그녀의 시선이 내 배로 떨어졌다. 나를 향해 뻗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움찔하더니 멈춰 섰다.“그럼 시작하자.” 내가 말했다.그녀의 욕실은 너무 비좁게 느껴졌다. 발밑의 타일이 차가웠다. 내가 닫힌 변기 뚜껑 위에 앉아 바닥만 응시하는 사이, 제나는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었다.제나가 내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하자 칠흑처럼 짙은 머리칼이 타일 위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것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생을 간직해 온 머리칼이었다. 내 주인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고 싶을 때마다 루칸이 주먹에 칭칭 감아쥐곤 했던 바로 그 머리카락이었다. 그것들이 이제 바닥에 쓸모없는 무더기로 널브러져 있었다.제나의 손놀림은 빨랐다. 손질을 끝낸 그녀는 가위를 내게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일어섰다. 그녀의 긴 금발을 자르는 동안 내 손은 아주 조금 떨렸을 뿐이었고, 그녀는 단 한 번도 움찔하지 않았다.다음은 염색이었다.그녀는 나를 위해 붉은 진저 색 염료를 섞었고,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녀는 내 남은 머리칼에 염료를 꼼꼼히 발랐다. 레이븐 문섀도는 공식적으로 죽었다.제나의 차례에는 금발을 갈색으로 덮어버릴 염료를 택했다. 군중 속에 섞여들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인 색이었다.“새 이름.” 제나가 중얼거렸다. “스칼렛 베인.” 그녀가 제안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었다.“넌 피오나 라이트웨더 해.” 내가 말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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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적의 무리 속으로
스카프 자락을 쥔 손가락이 굳어버렸다.심장이 한 번, 그리고 두 번 뛰었다.피부 표면을 영구히 문드러뜨린 흉터만으로도 족하기를, 방금 전 그 남자처럼 피웅덩이에 처박히지 않기를 바라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경비병을 마주했다.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놀라울 만큼 차분한 손길로 스카프를 풀었다.서늘한 공기가 목덜미의 뭉개진 살갗에 닿았다. 경비병의 시선이 순식간에 아래로 내리꽂혔다. 그는 물집투성이에 울퉁불퉁 짓무르고 군데군데 진물이 배어 나오는 시뻘건 상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더니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눈빛에서 동정 어린 시선을 읽어낼 수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제나가 곁으로 다가서며 어깨를 스쳤다. 옆구리에 내려놓은 그녀의 두 손이 한 번 떨려오더니 주먹을 쥐었다. 파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지만,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터져 나왔다.“제 동생은… 여기까지 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간신히 살아남았죠.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블러드팽 무리가 강하고 질서 정연하며 안전하다고 들었기에 이곳을 택했어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는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제발요.”마지막 단어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부서져 내렸다. 피폐하고 절박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우리 둘 다 마찬가지였다.경비병은 내 목을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제나를 바라보았다. 서로밖에 남지 않은 두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건넸다. 그는 제나의 몸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우리는 시선을 정면으로 둔 채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뼈마디를 울리는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성문이 닫혔다. 드디어 블러드팽 영역 안으로 들어섰고,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경비병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폐부에 가둬두었던 숨을 토해냈다. 숨결이 덜덜 떨려 나왔다.어린 안내인이 아이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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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초록빛 눈동자
방을 다 가로지르기도 전에 내 두 손은 이미 그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적성 심사실에서 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겁고 날카로운 온기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나는 가진 모든 것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내 능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응답하며 그의 피와 장기, 그리고 생명이 꺼져가던 모든 구석구석을 쫓아 손상을 메워나갔다.생각할 시간 따윈 없었다. 오직 매달려야 할 시간뿐이었다.몇 분 지나지 않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단단한 돌바닥에 꿇어앉은 탓에 등허리가 쑤셔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타들어 가듯 욱신거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더욱 힘을 밀어 넣었다.“버텨요. 내 곁에 있어요. 숨을 쉬어요. 제발… 숨을 쉬어 봐요.” 나직이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그의 육체는 거세게 저항했으나, 나는 내 안의 바닥난 줄도 몰랐던 기운까지 끌어모으며 더 필사적으로 맞섰다.방 안은 점점 어두워졌고, 촛불은 낮게 타들어 갔으며, 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흐려졌다.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이것은 독이 아니었다.이 손상은 외부의 공격으로 생긴 느낌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되고 깊숙한 무언가였다.그의 몸 안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내적인 붕괴였다. 극에 달해버린 지병. 바닥에 쏟아진 강장제는 아마도 그 증세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으리라.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알파의 숨소리가 먼저 달라지더니, 손끝 밑으로 뛰는 맥박이 점점 굵어졌다. 그의 가슴팍이 더 힘차게 부풀어 올랐고, 나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 내리눌렀다.그의 눈이 번쩍 뜨였고, 내 입술 사이로 턱 막힌 숨이 새어 나왔다.아름다운 숲빛을 머금은 짙은 초록빛 눈동자가 내 얼굴에 고정되었다.나는 탈진으로 온몸을 떨며, 손을 여전히 그의 가슴에 얹은 채 그 위에 꿇어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의 시선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살아났다.우리 둘 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방 안에는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내 이마가 그의 가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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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그의 전속 치유자
광장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불과 몇 초 전만 해도 나는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고, 제나의 파란 눈동자는 칼날 아래서 나를 끌어당겨 구원해 내기라도 하려는 듯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알파 디미트리의 목소리가 모든 소음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그리고 지금, 경비병들은 나를 놓아주었다.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두 팔이 기묘할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다. 무릎이 꺾이려 했지만, 억지로 힘을 주어 버텨냈다.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고, 여전히 두 발로 서 있었다. 목숨이 끊어졌어야 마땅했으나 살아남은 이 여자를 두고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군중은 웅성거리며 동요하고 있었다.그때 제나가 달려왔다.방금 전까지 자신을 억누르던 경비병들을 밀쳐내고, 미안하다는 기색 하나 없이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왔다. 몇 초 만에 내게 다다른 그녀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나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장이 내 심장에 맞닿아 거세게 요동쳤다. 전장에서 피해를 확인하는 전사처럼, 그녀의 손길이 내 어깨와 팔, 얼굴 위를 다급히 훑어 내렸다.“다친 데는 없어?” 말들이 서로 뒤엉키며 쏟아져 나왔다. “그자들이 손대진 않았고? 괜찮아? 레— 스칼렛— 씨발, 정말 괜찮은 거야?”웃음이 비어져 나왔는데, 그 소리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 여기 있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나 아직 살아 있어.”그녀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간신히 시선이 마주칠 만큼 몸을 물렸다. 파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턱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그 소중한 찰나의 순간 동안, 우리는 그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성문을 넘은 뒤로 벌어진 모든 일들이 말없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부식성 세제, 강제된 결별, 지하 감옥, 그리고 이 광장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녀는 이 세상에 내게 남은 유일하게 변치 않는 존재였고,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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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연결된 문
그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알파 디미트리가 문간에서 앞으로 걸어 나오며 느리고 신중한 걸음으로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혀왔다. 그가 한 뼘씩 다가설 때마다 내 새 방 안의 공기는 점점 희박해져 갔다. 미처 제어하기도 전에 내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턱은 가슴팍에 닿았고 어깨는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루칸의 곁에서 수년간 내 몸이 취해왔던 바로 그 자세였다. 몸을 작고, 안전하고, 눈에 띄지 않게 만드는 꼴. 그게 끔찍했다. 이곳에서조차 내 근육들이 스스로를 웅크리는 법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나는 숨을 헐떡이며 얕고 빠른 호흡을 반복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 위쪽이 턱턱 막혀왔다.그가 내 바로 앞에 멈춰 섰다.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은은한 약초 향과 뒤섞인 깨끗한 살결의 냄새, 그리고 더 짙고 남성적인 체취가 코를 스쳤다. 침대 시트를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타격을 기다렸다. 내가 알지도 못했던 모종의 시험에서 이미 낙제했다는 선고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그의 손이 올라왔다.나는 거세게 움찔거렸다. 순전한 본능으로 머리를 홱 틀며 얼굴을 가리기 위해 한쪽 팔을 허겁지겁 치켜올렸다. 보기 흉할 만큼 기계적인 반사 작용이었다.그러나 손찌검은 날아오지 않았다.대신 그의 손가락이 눈가를 가리던 짧은 붉은 머리칼 한 가닥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다정하고, 거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손길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반 박자쯤 더 길게 머물렀다.치켜올렸던 팔을 억지로 내리기 전까지 한 호흡 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안도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그는 나를 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그가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반응하고 만 것이다.알파 디미트리가 한 걸음 물러서며 내게 공간을 내어주었다. 어깨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이 느껴졌고, 마침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온전히 들어찼다. 다시 안정을 찾기 직전, 그의 숨결 역시 찰나의 순간 멎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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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주어진 일들
연결된 문은 열려 있었다.침대에 누워 내 방과 그의 처소 사이에 드리운 어두운 틈을 응시하자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잠을 청해 보려 했으나 헛수고였다.문간에 서 있던 그의 초록빛 눈동자, 너무나 태연하게 내 목을 베겠다고 협박하던 서늘한 목소리,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양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손길까지. 같은 잔상들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몸은 도무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성 안에서 울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 벽을 타고 흐르는 환기 시설의 나지막한 웅웅거림, 복도 저편 어딘가에서 딸깍거리는 희미한 전자음에도—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한 손은 내내 배 위에 얹어두었다. 아이는 하루 종일 미동조차 없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아니면 극심한 피로와 공포가 아이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 위를 천천히 문지르며 여신께 소리 없는 기도를 올렸다.‘부디 내 아이를 지켜주소서. 우리 둘 다 무사히 살아남게 해주소서.’무심코 방 안을 살피다 창문과 방문, 그리고 닫을 수 없는 그 연결된 문을 눈에 담았다.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가 머리칼을 쓸어넘겨주거나 협박을 늘어놓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도를 품고 저 문을 넘어온다면, 내겐 맞설 무기가 단 하나도 없었다.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이 메마른 몸뚱이와 지금까지 나를 살려온 생존 본능뿐이었다.결국 탈진이 이성을 집어삼켰다.머리로 깨어있으려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이, 몸이 한계에 부딪혀 나를 깊은 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따가운 햇살이 얼굴을 내리쬤다.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빛에 눈을 질끈 감으며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혼란스러운 찰나의 순간,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했다. 이내 광장, 처형대, 제나, 알파 디미트리, 그리고 열린 문까지의 기억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는 가운데, 반사적으로 배 위에 한 손을 얹으며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문가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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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시간은 없다
보급창고 안에는 바싹 마른 약초 냄새와 먼지 냄새가 자욱했다.창구 뒤편의 사내에게 목록을 건넸다. 오는 내내 종이를 어찌나 억세게 쥐고 있었던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여전히 쑤셔왔다. 그는 종이를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고, 시선조차 들지 않은 채 비보를 전했다.“이 중에 세 개밖에 재고가 없소.”속이 바짝 조여들었다. 열두 개 중에 고작 세 개라니. 갈비뼈를 부술 듯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우두커니 서 있자, 머릿속에서 다크문 부인의 서슬 퍼런 얼굴이 떠올랐다. 창구의 사내는 악의를 품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읊었을 뿐이었는데, 그 무심함이 상황을 한층 더 절망스럽게 만들었다.침을 꿀꺽 삼켰다. “나머지는요?”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몇몇은 바깥 장터에 가봐야 할 거요. 하나는 성 안의 정원에서만 자라고. 나머지는… 글쎄, 나도 모르겠소. 제철이 지나버린 모양이지.”그곳에 있는 세 가지 약초의 값을 치렀다. 보급창고를 나설 때, 다크문 부인이 쥐여주었던 돈주머니는 확연히 홀쭉해져 있었다. 목록의 사분의 일을 채우는 데 절반이 날아갔다. 여전히 찾아내야 할 약초는 아홉 개나 남았건만, 손에 쥔 돈은 그중 하나를 제대로 사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눈부신 오후의 햇살 속으로 발을 디뎠다. 해는 이미 야속할 만큼 높이 떠 있었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득한 두려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애초에 쉽게 끝내라고 준 심부름이 아니었다. 나를 완전히 짓밟고 소진시키기 위해 짜인 덫이었다.장터는 인파로 북적였다. 상인들은 서로 목청을 돋우며 가격을 외쳐댔다. 길거리 음식과 갓 구운 빵 냄새가 톡 쏘는 약초와 향신료 냄새와 뒤섞여 풍겨왔다. 목록을 손에 꼭 쥔 채 가판대 사이를 누비며 깎을 수 있는 곳마다 흥정을 시도했다. 겉으로는 떨림 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루칸의 시종들이 흥정하던 모습을 수년간 지켜봐 왔던 덕분이었다. 그 요령을 잘 알고 있었다. 가격을 깎고, 미소를 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것처럼 굴 것.아주 간단하지 않은가?천만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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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알파의 비밀
“병명은. 알아냈나?”적절한 대답을 찾으려 발버둥 치는 동안 그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알파 디미트리가 연결된 문틀 사이에 서서 초록빛 눈동자로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갈비뼈를 부술 듯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고, 그 고동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그에게까지 다 들릴 것만 같았다.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병명도, 진단도 없었고, 오직 앞서 그가 내뱉었던 처형의 위협만이 귓가에 여전히 웅웅거릴 뿐이었다.공포보다 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그 병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속마음보다 훨씬 차분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정확히 어떤 느낌입니까?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떻게 다스려오셨나요?”앞에서 꼼지락거리는 내 손가락에서 감히 눈을 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비록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내겐 답이 절실했다. 이런 사실들을 먼저 알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조사를 시작조차 할 수 없지 않은가?내 능력은 그의 침실 바닥에서 단편적인 파편들만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그의 피에 깃든 부패와 서서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장기들의 상태는 알았지만, 전후 맥락이 없는 그런 파편들은 여전히 쓸모가 없었다. 화제를 돌린 것 자체가 무모한 도박처럼 느껴졌다.시야 한구석으로 알파 디미트리가 눈썹 한쪽을 치켜올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이목구비 위로 당혹감이 스치더니, 이내 더 날카로운 기색으로 굳어졌다. “답을 요구하는 쪽은 나다, 스칼렛 베인. 그런데 감히 내게 질문을 되던지는 건가?”날카로운 그의 어조에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하마터면.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짙게 와닿았다.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내가 처형하겠다는 위협을 농담으로 던진 줄 아나?”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뻣뻣하게 뚝뚝 끊기는 움직임이었다. “아닙니다, 알파. 결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바짝 타들어 간 목구멍이 뻑뻑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제 질문은… 반항이 아닙니다. 이 또한 조사의 일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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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소리 없는 전쟁
입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알파.”“좋아.”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해 들은 사실을 곱씹었으나, 내 가슴속 가장 깊숙한 곳에 박힌 것은 그 비밀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그가 언급한 인물이었다. ‘네가 애지중지하는 그 계집 전사.’ 그는 제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름을 대지 않고도 그녀를 미끼로 흔들 수 있을 만큼 이미 훤히 꿰뚫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에게 내비친 적도 없는 내 뒷배경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그의 협박이 이어지는 동안 떨리기 시작했던 손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을 허벅지에 딱 붙여 떨림을 억눌러 보려 했으나, 진동은 손목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아예 그곳에 똬리를 튼 것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 생각은 내 목숨을 겨눈 위협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속을 메스껍게 뒤흔들었다.“감사합니다, 알파.” 간신히 말을 쥐어짰다.속으로는 머리가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모든 알파가 이 짐을 짊어지며, 혈통 밖으로는 결코 입에 담지 않는 비밀.그리고 이제 나 역시 그것을 알아버렸다.아직 모든 조각이 맞춰진 것은 아니었으나, 적의 무리에 정착함으로써 내 처지가 얼마나 더 위태로워졌는지를 소름 돋을 만큼 명징하게 깨달았다. 이것은 더 이상 디미트리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었다. 블러드팽 전체의 비밀이었고, 그는 방금 내게 이를 짊어지거나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는 굴레를 씌운 것이다.알파 디미트리가 다시금 살갗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뜯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일은 늦잠을 자지 마라.” 그가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네 목을 베겠다. 오늘 밤은 여기까지다. 물러가라.”연결된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강장제.”곧바로 몸을 돌렸다. 이미 그의 옆 탁자 위에는 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을 가로질러 가 두 손으로 잔을 받아 들었고, 조심스레 한 모금을 삼킨 뒤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쌉싸름한 약초 맛이 혀끝을 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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