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거부당했다. 배신당했다. 죽음의 표적이 되었다. 아이언클로의 루나였던 레이븐 문섀도. 반려인 알파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목의 표식을 지운 채 적진으로 달아난다. 잔혹한 블러드팽 무리 속 방랑자 ‘스칼렛 베인’으로 숨죽여 살아가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을 죽여야 마땅할 적의 알파 디미트리를 살려내고 만다. 그녀의 손길로 사선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그녀를 전속 치유자로 지목한다. 적진 한복판에서 다른 알파의 아이를 품은 레이븐,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초록빛 눈동자로 그녀를 조여오는 가장 위험한 남자.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비밀이 드러난다.
View More뺨을 후려치는 타격음과 함께 머리뼈가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 세게 처박히며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비명조차 비집고 나오지 못했다. 맞서 싸우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오래전, 나는 그의 말 없는 샌드백이 되는 법을 이미 터득해 버렸다.
단단한 나무 바닥에 짓눌린 뺨이 지끈거렸다. 입안 가득 비릿한 쇠맛이 번졌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숨만 계속 들이쉴 수 있다면, 나는 괜찮을 것이다.
루칸은 내 위에서 일 초쯤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 이 초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엇 하나 똑똑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말을 건네지 않은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는 셔츠의 소맷자락을 반듯하게 정돈하더니, 마침내 성가신 짐을 치워버렸다는 듯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등을 돌렸다.
그의 뒤로 방문이 조용히 닫히며 딸깍 소리를 냈다.
내 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통은 서서히 피어오르더니, 이내 온몸 구석구석을 갉아먹으며 퍼져나갔다. 손가락을 들어 얼굴을 건드렸다. 닿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나직이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익숙하게 부풀어 오른 상처 때문에 목구멍 뒤로 두터운 응어리를 삼켜야 했다.
그제야 천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높고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무거운 벨벳 암막 커튼, 그리고 내가 잠들기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기둥 달린 침대가 시야를 채웠다. 이것이 바로 안락한 삶을 대가로 내가 치러야 했던 몫이었다.
버텨.
그 생각이 머릿속을 울렸다. 일어나야 해. 피를 씻어내야 해. 멍에 얼음찜질을 해야 해. 남들이 보기 전에 감춰야 해. 이런 꼴로 살아가는 여자가 아니라, 여전히 아이언클로 무리의 루나인 것처럼 굴어야 해. 하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익숙한 일과였다. 이 뒤에 찾아올 침묵이 더 끔찍하다는 것을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지만, 복도 너머로 멀어져 가는 그의 발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나는 달의 여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나직이 읊조렸다. 오늘 밤은 두 번째 폭행 없이 넘어갈 모양이었다.
협탁 위에서 전화기가 진동했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번. 다섯 번. 화면에 제나의 이름이 번쩍였다. 무거운 팔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입술이 굳어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정적만이 이어졌고, 마침내 제나가 입을 열었다. “또야?”
목구멍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고, 이내 눈물이 쏟아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남은 한 손으로 눈을 짓눌렀다. 숨을 고르려 애썼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제나는 늘 그래왔듯 끊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다그쳤다. “언제까지 이럴 순 없어, 레이븐. 그 인간은 멈추지 않을 거야. 넌 루나야. 그런데 또 망할 바닥에 나뒹굴고 있잖아. 네가 행복한 반려인 척 연기하는 한, 이 무리에서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는 피를 삼켰다. “이유를 알잖아.”
그녀는 가만히 기다렸다.
말을 꺼내려 애썼지만, 여전히 갈라져 비어져 나왔다. “그 사람 때문만은 아니야. 우리의 짝짓기는… 정략적인 결합이었어, 너도 알잖아. 정치야, 제나. 내가 도망치면 동맹에 금이 가. 아이언클로는 그걸 두고 보지 않을 거야. 날 사냥할 거야. 날 적으로 만들고 배신자라 부르겠지. 우리 가족도… 날 받아주지 못해. 받아줄 수가 없다고. 대가가 너무 커. 난 혼자가 될 거야.”
이번에는 제나의 침묵이 훨씬 더 길게 이어졌다.
“갈 곳이 없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사람의 손길이, 이 무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따윈 아무 데도 없어.”
여전히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이 화제를 완전히 접었다고 생각했을 무렵, 입을 열었다. “지금 갈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 돼. 제나, 오지 마. 상황만 나빠져. 그 사람이 싫어할 거야.”
그녀는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전화기를 가슴에 품은 채, 부디 상황이 더 엉망진 진창으로 치닫지 않기를 여신께 빌었다.
떨리는 다리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불로 지지는 듯 쓰라렸지만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머리카락을 앞으로 쓸어내려 가릴 수 있는 만큼 흉을 가렸다. 거울 속 갈색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채 죽어 있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온몸이 쑤셔와, 최대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집은 지나치게 넓었지만, 아무리 멀리 걸어가도 방금 침실에서 벌어진 일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세상이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은밀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루칸이 내 여동생 라일리와 숨이 닿을 듯 가까이 붙어 서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내게는 단 한 번도 내어주지 않았던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는 매 순간을 음미하듯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현실일 리 없었다. 헛것을 본 게 틀림없었다.
루칸은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가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나직이 속삭였다. 여동생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라일리?!” 부서져 간신히 흩어져 나온 내 목소리가 터져 나갔다.
라일리가 몸을 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 손은 여전히 루칸의 가슴에 얹혀 있었고, 마치 원래 제자리라는 듯 그의 셔츠를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사과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나를 시험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루칸은 찰나의 순간 고개를 천천히 돌리더니, 다시 라일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나를 흘겨보며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춘 것이다.
현실이었다. 방금 얻어맞은 탓이 아닌 눈물이 두 눈에 가득 차올랐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혀왔고, 그에게서 풍겨오는 여동생의 체취에 또다시 속이 메스꺼워졌다. “매일 아침 네 곁에서 눈을 뜰 때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돼. 너와 짝지어진 날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어.”
그 말들이 내 온 존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훨씬 더 거셌다.
나는 바닥으로 처박혔다. 눈앞에서 하얀 섬광이 터졌다. 충격으로 귀에서 삐 소리가 울렸고, 가슴속에서 고통이 다시금 번져나갔다. 피 맛이 더 진하게 퍼졌다. 몸이 저절로 둥글게 말려들었다. 잠시 동안 숨도 쉴 수 없었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을 들썩이며 손과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눈물이 뜨겁게 타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말을 뱉어냈다. “이 결합은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야. 동맹이… 이 무리를 지탱하고 있잖아. 당신도 알잖아. 날 거부하면… 모든 걸 잃게 돼.”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고, 싸늘한 눈동자 속에서 경멸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닥쳐!”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 집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짚은 채, 멍든 몸을 떨며 매달렸다. “무리를 생각해. 균형을 생각하라고. 제발—”
“닥치라고 했다.”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어. 동맹은—”
“그만!” 천둥처럼 공기를 가르는 고함이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널 거부한다. 우리의 유대는 끊어졌다. 이혼 서류를 접수할 것이다.”
그 말이 내 세상을 두 쪽으로 찢어놓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닥 타일에 손을 짚은 채 꿇어앉아 있었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거부당한 루나는 죽은 목숨보다 못했다. 무리는 나를 향해 등을 돌릴 것이다. 가족들도 날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할 터였다.
“제발,” 숨이 턱 막힌 채 애원했다. “다시 생각해 줘. 오늘 밤엔 이러지 마. 내가—”
그는 듣지 않았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배 위로 내려앉았다. 몇 주 동안 홀로 품어온 비밀이 속에서부터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손을 내려다보며 눈물과 고통 속에서 머리를 굴렸다. 지금 그에게 말한다면—
현관문이 열렸다.
제나가 걸어 들어왔다.
바닥에 쓰러져 배에 손을 얹은 채 눈물을 흘리는 나, 내 위에 선 채 내려다보는 루칸,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굳어버린 라일리를 본 제나는 세 걸음 만에 방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방패처럼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몸을 웅크린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린 채 루칸을 노려보았다.
“쓸모없는 개자식. 마치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양 여잘 때려? 그 여자와 함께 사는 집에서 그 여동생이랑 뒹굴어? 무리에 남은 유일하게 좋은 것마저 부숴버리면서 네가 알파라고? 그 애한테서 빼앗아 간 그 망할 힘 한 조각 한 조각마다 목이 막혀 뒈져버리길 여신께 빌어주마.”
루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그녀를 치려고 손을 치켜들었다.
제나가 더 빨랐다. 그녀는 협탁에 놓인 묵직한 크리스털 화병을 낚아채 던져버렸다. 화병은 그의 머리에서 불과 몇 치 떨어진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았다.
팔로 나를 감싸 제 옆구리에 바짝 밀착시키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부어오른 얼굴에 닿자 쓰라림이 더욱 심해졌다. 문이 등 뒤에서 쾅 닫히는 충격에 무릎이 꺾일 뻔했다.
제나는 나를 차로 데려가 조수석에 밀어 넣었다. 뒤따라 올라탄 그녀가 시동을 걸었지만, 차를 출발시키지는 않았다. 핸들을 쥔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얹힌 손.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감각이 마비된 채, 상처만이 생생했다.
제나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임신했어.”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계단을 절반쯤 내려왔을 때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눈 깜짝할 사이에 주방 조리대 위에 다리를 쩍 벌리고 드러눕게 되는 거예요, 남편이 샅샅이 잡아먹을 준비를 하는 동안에 말이죠.”발걸음이 느려졌다.그것은… 결코 평범한 대화의 결이 아니었다.남은 계단을 내려와 로비로 들어섰다.“스칼렛.” 무슨 해괴한 짓이든 당장 멈추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불렀다.그녀는 마치 중범죄라도 저지르다 현행범으로 딱 걸린 사람처럼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한 손에는 여전히 전화기를 꼭 쥐고 있었고, 얼굴은 머리칼과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스카프 위로 드러난 모든 살결이 극심한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쥐구멍에라도 숨어 바닥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안내 데스크 뒤에서 나를 발견한 여인은 아주 흡족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한층 더 찢어 올렸다.“좋은 아침이에요.” 데스크의 여편네는 방금 제 입으로 내 치유사를 음탕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묘사해댔다는 사실 따윈 까맣게 잊은 듯 쾌활하게 지껄였다. “아내분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며 케이크를 구울 수 있는지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저 다정하게 조언을 좀 건네던 참이었죠.”데스크 옆에서 스칼렛은 차마 말로 터져 나오지 못한 작은 질식할 듯한 신음을 삼켰다.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안내원에게 시선을 돌렸다.내 표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불행하게도, 다른 녀석이 이미 그 틈을 타 한마디 얹기로 작정한 상태였다.‘우리 아내가 우리를 먹이고 싶어 해.’제드는 마땅히 그래야 할 수준 이상으로 지나치게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제드를 묵살하고 스칼렛을 쳐다보았다.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귓바퀴 끝까지 발갛게 물든 채 한 손에는 전화기가 힘없이 매달려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서 하얗게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부적절한 농담 한마디만 더 얹어졌다간 당장 뒤돌아 여관 밖으로 내달릴 기세였다.안내원은 제멋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그보다 먼저 눈을 떴다.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알파 디미트리는 여전히 제 쪽 침대에 누워 한쪽 팔을 머리 아래 괸 채, 느리고 일정한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잠시 동안 그저 그가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럴 때의 그는 한결 온화해 보였다. 눈빛 하나만으로 무리 전체를 짓누르던 그 무시무시한 알파라기보다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온전한 쉼을 허락한 한 사내에 가까워 보였다.더 오래 빤히 쳐다보기 전에, 매트리스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불 밑에서 몸을 빠져나왔다.방 안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욕실은 하루를 준비할 수 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몇 분의 시간을 내어주었다. 씻고 나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양치를 하고, 습관처럼 목에 스카프를 단단히 여며 둘렀다.거울 속으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짧은 붉은 머리와 갈색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스칼렛 베인.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레이븐 문섀도는 죽었고, 세상은 그 거짓을 진실로 믿어버렸다.방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창가 쪽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새 전화기를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잠금을 풀자 화면이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온전히 내게 속한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생소하게만 느껴졌다.메모장을 열고 제목을 적어 넣었다.‘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처음에는 천천히, 이내 꼬리를 물고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다.지금껏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간단한 요리법들을 찾아보았다. 원팬 갈릭 버터 파스타. 꿀과 산딸기를 얹은 오버나이트 오트밀. 전자레인지만 있으면 완성되는 초콜릿 컵케이크. 그저 내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먹는 기분이 얼마나 근사할지 머릿속에 그리며, 조심스레 조리법들을 하나하나 화면 캡처로 저장해 두었다.다음으로는 소원 팔찌를 만드는 법을 찾아보았다. 알록달록 고운 색감의 설명서에는 자수 실과 간단한 매듭짓기, 그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불은 꺼져 있었다.나는 이불을 어깨까지 바짝 끌어올린 채 침대 내 쪽 자리에 모로 누워 어둠 속을 멍하니 응시했다. 매트리스는 서로의 몸이 닿지 않을 만큼 충분히 넓었으나,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도록 의식되었다.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하나가 적막한 방 안에서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그의 고른 숨소리조차 모른 척 지나치기란 불가능했다.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어둠 속이라 그의 눈빛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묵 속에는 그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이곳에서의 첫날밤이 그러했듯, 알파 디미트리는 내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를 기다렸다가 제 쉼을 청하려는 것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긴장을 풀기가 한층 더 어려워졌다.눈을 질끈 감았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때까지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집요하게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는 그 기억에 파르르 떨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매어 주는 것은 손바닥을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뿐이었다.그의 알몸을 보아버렸다.기억은 불청객처럼, 그리고 너무나도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변신 직후의 열기로 아직 촉촉이 젖어 있던 짙은 머리칼. 떡 벌어진 어깨. 가슴과 복부의 단단한 근육선, 그리고 질주의 긴장감을 여전히 머금고 있던 그의 육신.그리고 그 아래쪽—얼굴로 열기가 너무나 순식간에 치솟아, 어둠이 이 붉은 기운을 감춰주고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감사할 지경이었다.나는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길지는 않았다. 결코 불순하다 여겨질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아마도.아, 달의 여신이시여, 내가 알파 디미트리의 완벽한 알몸을 보아버리다니.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변신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났다. 찰나 전까지만 해도 나무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거대한 검은 늑대였는데, 다음 순간 공터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우뚝 서 있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이성이 제어하기도 전에 눈길이 먼저 아래로 떨어져 내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으로 일갈했다.‘닥쳐라.’‘난 그 암컷이 우리 곁에 있는 게 좋은데.’ 제드가 뻔뻔스럽게 실토했다.그따위 소리에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해 무시해 버렸다.‘조용하고, 좋은 냄새가 나고, 널 웃게 만들잖아.’‘난 웃지 않는다.’제드의 웃음소리가 즐겁다는 듯 나직하게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거짓말쟁이.’그를 철저히 묵살한 채, 스칼렛이 남은 설정 화면들을 넘길 수 있도록 계속 도왔다.마침내 기본 화면이 떠오르자, 그녀는 잠시 전화기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에 번진 안도감은 결코 모른 척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고작 전화기 한 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내가 훨씬 더 값진 무언가를 건네주기라도 한 것처럼 벅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모든 설정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물러섰다. “끝났다.” 내가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문자를 보내라. 충전은 꼬박꼬박 해두고.”그녀는 여전히 그것이 제 물건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손으로 전화기를 소중히 받쳐 든 채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창가로 다가가 팔짱을 끼고 유리창 너머 짙어져 가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지난 며칠 사이 이 방은 기묘할 만큼 편안해져 있었고,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당연하게도, 제드는 바로 그 틈을 타 다시 입을 열었다.‘원하는 만큼 실컷 시치미 떼어봐.’ 그가 나태하게 읊조렸다. ‘난 다 느껴지니까.’‘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군.’‘네가 그 암컷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그런 엉뚱한 광기 어린 헛소리 따위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대신 침묵 속에 창가에 서서, 내 등 뒤에 얌전히 앉아 있는 여인을 마땅히 그래야 할 수준 이상으로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결론지었다.밤은 서서히 여관 위로 내려앉았다. 창밖의 불빛들은 유리창을 어두운 거울로 바꾸어 놓았다. 스칼렛은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