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효율적인 부품으로창틈으로 스며든 새벽빛이 눈꺼풀 위로 드리웠다.엘라엔은 뻐근한 목을 매만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책상 위에는 어젯밤 검토하다 잠든 자재 장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니, 그대로가 아니었다.“……!”엘라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적어 내려갔던 잉크 자국 옆으로 정갈하고 서늘한 필체가 덧붙여져 있었다.장부의 오차를 수정하고 다음 공정의 우선순위를 번호까지 매겨 정리해 둔 흔적.제국에서 이런 완벽한 질서의 필체를 가진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르세인.엘라엔은 소름이 돋는 팔을 감싸안았다. 그는 어젯밤 이곳에 왔다. 그리고 잠든 자신을 깨우지 않고 어둠 속에서 이 장부 위를 훑었을 것이다. 아니, 장부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무방비한 모습까지도 이 장부의 숫자처럼 건조하게 재단했겠지.‘질서 운운하더니 이렇게 무례할 수가 없어.’엘라엔은 장부를 탁, 소리가 나도록 덮어버렸다.‘왜 깨우지 않았지?’단순히 업무의 효율을 위해서라면 비효율적으로 직접 펜을 들 이유가 없었다. 바델을 시켜 자신을 깨워 집무실로 압송하는 것이 르세인다운 방식이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이 이곳에 머물며 자신을 내려다보았을 그 침묵의 시간을 상상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계산이 뒤엉켜 나뒹굴었다. ***그날 오전, 요새 현장 지휘소.르세인은 평소보다 더욱 짙은 위압감을 뿜어내며 기사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어젯밤의 동요를 완벽하게 지워버리려는 듯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고 지시는 자비가 없었다.“공정 3구역의 지반 보강이 미흡합니다. 재시공하도록.”“전하, 그 정도는 설계상 허용 범위 내….”“내 질서에 허용 범위란 없습니다.”기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르세인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젯밤, 서재의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보았던 그 평온한 숨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하얀 목덜미와 잔향까지도….자신의 원칙을 깨고 직접 별관으로 향했던 그 비합리적인 행위는 스스로를 모욕하고 있었다.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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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모욕적인 갈증의 시작밤이 깊어질수록 요새 건설 현장의 소음은 잦아들었지만 르세인의 집무실에 감도는 긴장감은 오히려 날카로워졌다.책상 위에 놓인 시계의 초침이 궤도를 이미 반 바퀴나 넘어서고 있었다.약속된 대면 보고 시간에서 정확히 삼십 분이 경과했다.르세인은 펜을 내려놓고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지만 평소 오차 없이 문을 두드렸을 엘라엔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열병의 후유증인가, 아니면 의도적인 태만인가.’르세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델을 보내 확인하면 그만인 일이었다.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질서 체계 속에서 보고 누락은 즉각적인 시정이 필요한 결함이었고, 그 결함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모호한 충동이 그의 이성을 앞질렀다.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걷는 르세인의 굽 소리가 평소보다 무겁게 울렸다.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왜 직접 움직이는가에 대해서.효율을 중시하는 자신이 굳이 시간을 낭비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무엇인가.르세인은 자산의 상태를 확인하는 지휘관의 의무라는 건조한 답을 내놓았으나 가슴 한구석을 긁어대는 생소한 갈증은 그 답이 오답임을 증명했다.같은 시각, 별관의 서재는 희미한 촛불 하나만이 내부를 밝혔다.엘라엔은 책상에 엎드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손 밑에는 오늘 하르만이 작성한 서툰 자재 장부와, 그것을 꼼꼼히 수정한 그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고요한 적막을 깨고 서재의 문이 예고 없이 열렸다.들어선 이는 르세인이었다. 그는 침묵을 깨뜨리며 들이닥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촛불 아래 흩어진 와인빛 머리칼과 고르게 내뱉는 숨소리를 마주한 순간 멈춰 서고 말았다.“…….”르세인은 숨을 죽인 채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집무실에서 보았던 오만한 영애는 그곳에 없었다. 동생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다 지쳐 잠든, 한없이 위태롭고 작은 존재만이 있었다.르세인은 그녀의 머리칼 아래로 살짝 드러난 창백한 목덜미와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듯 발그레한 뺨을 응시했다.그는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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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 질서의 핵심으로황제의 거처인 솔레움 궁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침묵과 약초 향에 짓눌려 있었다.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황제 헤이브릭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창밖의 정원을 응시했다. 비록 예전 같은 기력은 아니었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이 거대한 제국의 질서를 단숨에 재편할 수 있는 위엄을 품었다.그 곁을 지키는 것은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황후 로잘린과 깊은 생각에 잠긴 이황자 이안이었다.“형님이… 라안느 영애를 별관으로 데려갔다니요.”이안의 음성은 평소의 다정함을 잃은 채 낮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정원의 수국을 보며 미소 짓던, 시야가 어릿할 정도로 아름다운 엘라엔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녀는 그에게 안온한 휴식처이자 장차 자신의 곁을 지켜줄 화려한 꽃이었다. 그런데 르세인이 엘라엔을 흙먼지 날리는 요새의 심장부로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사적인 통제가 닿지 않는 관할 별관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은 가슴속에 생소한 감정의 불을 지폈다.황후 로잘린은 정교하게 세공된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단순히 데려간 것이 아닙니다, 이황자. 일황자는 지금 라안느 양을 제국의 질서를 지탱하는 실무자로 공인했지. 라안느 후계자에게 수습 기사의 직함을 준 것 역시 라안느 가문의 미래를 제 손에 쥐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고.”“……폐하!”로잘린은 이안을 보던 시선을 헤이브릭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일황자는 지금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을 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폐하.”“일황자가… 잘하고 있더군, 황후. 요새의 보급로를 재편하고, 라안느 후계자를 길들이고 있다니. 제국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소.”헤이브릭의 말에 이안의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졌다.헤이브릭은 황후와 이황자를 내보내고서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곁에 선 시종장에게 명령했다.“내일 오후, 요새 건설이 완공되는 날 제국의 황태자를 정식으로 책봉하겠다 공표하라. 누가 더 이 제국의 질서를 완벽하게 세우는지 끝까지 지켜보도록 하지.”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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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거대한 목적 아래황실 별관의 아침은 차가운 이슬 냄새와 함께 시작되었다.엘라엔은 테라스에 서서 연무장 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이제 막 제 몸보다 큰 훈련용 갑주를 갖춰 입은 하르만이 서 있었다.이사벨라의 치맛자락 밑에서 나약한 후계자로 박제될 뻔했던 아이가 드디어 제국에서 가장 서늘한 지휘관의 시야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엘라엔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에게 이사벨라는 단순히 아버지를 홀린 여자가 아니었다. 하르만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가문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저급한 탐욕 덩어리 그 자체였다.그런 이사벨라로부터 하르만을 떼어놓는 유일한 방법은 하르만을 르세인이라는 거대한 태양 옆에 두어 그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뿐이었다.“영애의 시선이 지나치게 뜨겁군. 동생을 사지로 보낸 누이의 죄책감입니까, 아니면 계획대로 흘러가는 판을 감사하는 투기꾼의 만족감입니까.”언제 다가왔는지 르세인이 그녀의 뒤편에 서 있었다. 그는 건조한 눈빛으로 연무장의 하르만을 내려다보았다.“둘 다 아닙니다, 전하. 저는 그저 잡초가 무성한 정원에서 가장 소중한 꽃 한 송이를 옮겨 심었을 뿐입니다. 그곳이 비록 메마른 황야일지라도, 썩은 늪지보다는 나을 테니까요.”엘라엔의 비유에 르세인은 입매를 치켜올렸다.그는 엘라엔이 계모인 이사벨라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그리고 하르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라는 위험한 불꽃을 얼마나 영악하게 이용하고 있는지 정확히 꿰뚫었다.“늪이라. 공작 부인을 지칭하는 것치고는 꽤나 노골적이군요. 하지만 영애, 내가 라안느 후계자를 받아들인 것은 그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라안느 후계자가 내 기준에 미달하는 순간, 나는 자비 없이 그 직함을 회수할 것이니.”“전하의 기준은 높지만 정직하죠. 하르만은 버텨낼 겁니다. 제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르세인은 대답 대신 아래를 향해 짧은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르세인의 직속 기사들이 하르만에게 거친 훈련용 목검을 던져주었다.하르만은 휘청거리면서도 검을 받아 들었다. 르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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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화끈거리는 열기요새 건설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별관은 이제 엘라엔의 새로운 거처가 되었다. 르세인이 마련한 이 공간은 지나치게 완벽했다.창밖으로는 공정의 진척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고 집무 채상 위에는 그녀가 필요로 할 모든 지형도와 장부들이 오차 없이 정렬되었다.하지만 문밖을 지키는 황실 기사들의 절도 있는 발소리는 이곳이 자신을 위한 배려가 아닌 르세인이 쳐놓은 거대한 거미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엘라엔은 침대에 기대어 앉아 르세인이 직접 서명한 공문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하르만 폰 라안느 : 요새 건설 본부 정식 수습 기사 임명.]비싼 대가를 치렀다. 지독한 열병과 르세인의 집요한 감시라는 대가.엘라엔의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가 걸렸다. 이 공문 한 장으로 하르만은 이제 르세인의 휘하에서 정식으로 군공을 쌓을 기회를 얻었다.이사벨라가 제아무리 아들을 끼고 돌려 해도 황실의 공식적인 명령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저급한 이사벨라와 하르만을 최대한 떨어뜨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라안느 가문의 진정한 미래였다.***그날 밤, 르세인의 집무실.별관과 복도로 연결된 지휘소의 중심부는 르세인의 성정답게 단출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 엘라엔은 얇은 비단 망토를 걸친 채 약속된 대면 보고를 위해 그의 방 문을 두드렸다.그럼에도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엘라엔은 재차 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엘라엔은 돌아가야 하나 망설였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내부에 없는 줄 알았던 르세인은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안경을 쓴 채 서류를 훑던 그가 고개를 들자, 안경테 너머의 녹색 눈동자가 엘라엔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었다.“아, 저… 대답이 없어서 안 계신 줄 알았어요.”“원래 대답 안 합니다. 앞으로는 바델이 열어줄 테니 그리 알면 될 것이고….”“…….”“안색이 어제보다 낫군요. 베르제의 약재가 제법 쓸모 있었던 모양입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맞은편 의자에 허락도 없이 앉으며 장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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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대체 불가능한 변수그날 오후. 베르제 대공저의 성문 너머로 황실 깃발이 밀려들었다. 르세인이 직접 대동한 황실 수석 의관과 기사단, 그리고 베르제의 기사단들이 팽팽하게 대치했다.엘라엔은 창밖으로 보이는 황실 깃발을 보며 피식 웃었다.르세인, 당신은 지금 나를 찾느라 제국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도 모른 채 갈증을 느끼고 있겠지.그녀는 하녀에게 명해 가장 단정하고도 위엄 있는 드레스를 준비하라 일렀다.르세인이 박아 넣은 질서의 쐐기를 이제 그녀가 직접 뒤흔들 차례였다.베르제 대공은 지팡이를 바닥에 쾅! 내리치며 격노했다.“감히 베르제의 성역을 침범하려 하다니! 엘라엔, 걱정 말거라. 황권을 내세워 압박해도 나는 너를…!”“아니요, 할아버지. 오히려 지금이 기회예요.”엘라엔은 블러드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으며 햇살보다도 밝게 미소를 지었다.“전하께서는 지금 제 능력이 필요해서 오신 게 아니에요. 자신의 질서에서 이탈한 오차를 견디지 못해 이곳까지 달려오신 거죠. 이 비정상적인 상황은 저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거예요. 그러니 문을 열어주세요.”***이안의 집무실 안은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책상 위에는 르세인이 기사단을 이끌고 베르제 대공저의 성문을 두드렸다는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기사단을 움직였다고?”이안의 정갈한 손등 위로 핏줄이 돋아났다.그는 헛웃음을 삼켰다.르세인은 감정이 없는 자였다. 효율과 질서만을 신봉하며 여인을 장식품이나 자산으로만 보던 냉혈한이었다.그런 그가 단 하나의 오차를 되찾기 위해 제국의 무력 집단인 베르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무리수를 두었다는 사실은, 이안에게 단순한 질투 이상의 위기감으로 다가왔다.“단순히 보급로 때문이라기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행보로군요, 형님.”이안은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엘라엔에게 주려 했던 또 다른 보석 상자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자신이 다정한 안부와 보석으로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려 할 때 르세인은 판을 깨부수고 그녀를 강탈해 갔다.“엘라엔. 당신은 지금 그 서늘한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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