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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금붕어
곧이어 진현수가 앞으로 나오며 정중하게 이만 가보라는 듯이 제스처를 취했다.

신태현은 몸을 돌리는 순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민윤서를 힐끗 보더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평온하게 말했다.

“취재진들이 따라붙을 수도 있으니까 밖에서는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도록 해. 네 신분을 잊지 말고 처신 잘하도록 해. 괜한 사람들까지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그건 내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되지?”

신태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으며 감정 기복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신태현이 한 말들은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민윤서를 단단히 옭아맸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고지만 실상은 경고였다.

밖에서 함부로 떠들지 말고, 자신과 민윤아의 평온한 일상을 망치지 말고, 민윤아가 비난받거나 난감해할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신태현은 다른 사람들의 체면을 고려하며 민윤아도 빈틈없이 챙겼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아내인 민윤서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가장 존중받고 배려받아야 할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놓고 말한 건 아니지만 신태현은 자신의 태도로 민윤서의 존엄을 철저히 짓밟았다.

민윤서는 속으로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사랑받는 사람과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분명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민윤서는 눈동자에 차오른 서러움과 실망을 애써 감춘 채 말없이 몸을 돌려 병원을 떠났다.

...

차는 엘리안 별장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민윤서와 신태현의 신혼집이었는데 3년 동안 민윤서 혼자 넓고 텅 빈 집을 지키며 수많은 밤을 외로움 속에서 보내야 했다.

민윤서는 오늘 밤 신태현이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민윤아는 임신한 상태에서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고 불쌍하고 가여운 상황이었다. 민윤아를 끔찍이 여기던 신태현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틀림없이 병원을 떠나지 않고 밤새 민윤아를 돌보려고 할 것이다.

3년 동안의 헛된 기다림,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한 것, 병마, 그리고 배신. 그 모든 것을 겪었으니 민윤서도 더는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었다.

비록 사랑은 얻지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체면만은 지키고 싶었다.

민윤서는 노트북을 켜서 빠르게 이혼합의서를 작성한 뒤 출력하여 테이블 위에 놓은 후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무거운 심정으로 침대에 가서 누웠다.

머리는 무겁고 어지러웠다. 진료실 안에서 의사 선생님이 진단을 내릴 때의 차가운 목소리와 로비에서 민윤아를 감싸던 신태현의 모습, 취재진들이 수군대던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민윤서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자기도 모르게 아랫배를 꼭 감싸안았다.

신태현의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에 민윤서는 수술을 받는 대신 고통을 견디며 2년 동안 보존치료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새벽 세 시, 고요한 밤이었다. 얕은 잠에 빠져 있던 민윤서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를 들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침대가 살짝 내려앉더니 다음 순간 따뜻한 온기를 지닌 몸이 가까워졌다. 남자는 길고 힘 있는 팔로 민윤서의 가는 허리를 감싸안으며 민윤서를 단단히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하면서도 차가운 우디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것은 민윤서의 몸 깊숙이 새겨져 있는 신태현만의 향기였다.

민윤서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몸을 굳힌 채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민윤서는 신태현의 차가운 겉모습 아래 가끔 보이던 다정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순진하게도 그것이 진심 어린 사랑이라고 믿었었다.

오늘 낮에 병원에서 그 광경을 보지 못했더라면, 한밤중에 돌아와 자신을 안아주는 신태현의 모습에 민윤서는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3년의 외로운 기다림 끝에 마침내 신태현이 돌아왔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민윤서에게 남은 것은 짙은 혐오감과 역겨움뿐이었다.

따뜻한 팔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면서 손이 위로 올라오려고 하자 민윤서는 더는 참을 수 없어 힘껏 신태현을 밀어내고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곧바로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켰다.

따뜻한 노란 조명이 침실을 환하게 비추며 잘생겼지만 차갑기만 한 신태현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끄러워서 깬 거야?”

신태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차분했다. 미안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민윤아를 대할 때처럼 다정하지도 않았다.

민윤서는 싸늘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에는 차가운 침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신태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더니 창백하고 초췌한 민윤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얼굴이었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고 오히려 차분하기만 했다.

무심코 시선을 침대 옆 탁자로 옮긴 신태현은 접혀 있는 병원 진단서를 발견하고는 마치 일상적인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디 아파?”

그러면서 손을 뻗어 진단서를 집으려고 했다.

민윤서는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재빨리 진단서를 꽉 움켜쥐면서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감기일 뿐이야.”

뒤늦게 걱정하는 척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위선적이라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방 안에서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겉으로는 여전히 서로 예의를 지키는 부부처럼 보이나 사실은 신혼 때처럼 둘 사이에서 은근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민윤서는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만났을 때부터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던 둘 사이가 이미 산산이 부서져 다시는 이어 붙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민윤서는 신태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출국하기 전 귀국하면 아이를 갖자고 했던 것이 정말로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민윤아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했던 것인지 말이다.

이번에 귀국한 이유가 민윤서의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민윤아가 출산할 때 곁에 있어 주기 위해서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민윤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신태현의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 떠 있는 두 글자가 민윤서의 눈에 띄었다.

그것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민윤서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고 그 탓에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에 퍼졌다.

곧 휴대폰 너머에서 민윤아의 애교 섞인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현 오빠, 나 또 배가 아파. 너무 불안한데 빨리 병원으로 와서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신태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평온하게 전화를 끊더니 이내 의자에 걸쳐 둔 옷을 집어 들며 덤덤히 말했다.

“잠깐 나갔다가 올게.”

민윤서는 신태현의 차가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현 씨, 나 할 말이 있어.”

신태현은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니 계속 부부로 살 이유가 없었다.

“그래? 돌아와서 얘기하자.”

신태현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곧장 문가로 걸어갔다. 걸음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신태현의 단호한 모습을 본 민윤서는 차갑게 웃었다.

“지금 그 문을 나선다면 나랑 이혼해야 할 거야.”

민윤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신태현은 그제야 우뚝 멈춰 서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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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30화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카드였다.하지만 외할머니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지금, 민윤서는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민윤서는 원무과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이 카드로 먼저 결제해 주세요.”직원은 카드를 받아 단말기에 여러 차례 결제를 시도하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죄송합니다. 이 카드는 사용 정지된 카드입니다.”“사용 정지됐다고요?”민윤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불과 지난주만 해도 신씨 가문 어르신 생신 선물을 준비하면서 이 카드로 결제했었다.며칠 사이에 카드가 갑자기 정지될 리는 없었다.답은 하나뿐이었다.신태현이 직접 추가카드 사용을 막은 것이었다.민윤서는 허탈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었다.신태현은 이혼만큼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으면서도 아무런 언질도 없이 추가 신용카드부터 끊어 버렸다.‘벌인 걸까. 경고인 걸까. 결국 나더러 다시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건가?’민윤서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 갔고 손끝은 덜덜 떨려왔다.돌려받은 블랙카드를 바라보는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창백하게 질린 민윤서의 얼굴을 지켜보던 주민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윤서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주민석은 민윤서에게 이런 블랙카드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신태현의 카드일 거로 생각했다.그리고 지금 카드가 정지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윤서와 신태현의 결혼 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주민석은 곧장 원무과 직원을 향해 말했다.“죄송합니다, 치료비는 오늘 안으로 반드시 마련하겠습니다.”두 사람은 다시 응급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마침 의료진들이 설명을 마치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민윤서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공허한 눈으로 주민석의 지친 옆모습과 초췌한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칼로 도려내는 듯 아려 왔다.그동안 주민석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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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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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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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6화

    민윤서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서승재가 평생을 바쳐 일군 청림바이오를 무너뜨릴 수도 없었다.그리고 이 프로젝트 하나만 바라보며 오랜 세월 함께 달려온 동료들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서승재는 애써 담담한 척하는 민윤서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윤서야... 미안하다. 괜히 너만 힘든 일을 떠안게 했네.”민윤서는 옅게 미소 지었다.“일은 일이잖아요. 사적인 감정까지 끌고 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겠어요? 결국 비즈니스는 이익으로 움직이는 거고요.”서승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서승재가 다시 말했다.“민윤아랑 직접 부딪히기 싫으면 앞으로는 내가 상대할게.”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민윤아가 청림바이오에 들어오는 일은 이미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오늘 거절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또 다른 방법으로 민윤아를 들여보내려 할 테니까.신태현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생각해 보면 신태현이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하지만 그 대상은 단 한 번도 민윤서였던 적이 없었다. 늘 해외에 머물던 신태현은 민윤서가 집에서 고열로 의식을 잃었을 때조차 연락이 닿지 않았다.대화를 마친 민윤서는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 약물 성분 데이터를 반복해서 분석했다.끝없이 일에 파묻혀 있어야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씁쓸함과 모멸감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사무실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퇴근한 뒤였다.민윤서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책상을 정리한 뒤 조용히 회사를 나섰다.‘이혼하면 돼. 모든 게 정리되면... 다 끝날 테니까.’민윤서는 오래된 빌라 앞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려다 걸음을 멈췄다.문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낡은 건물이라 방음이 좋지 않았다. 애써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지만,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5화

    민윤아는 지금 신태현이 공개적으로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런 민윤아가 굳이 청림바이오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은 누구나 봐도 민윤서를 겨냥한 행동이었다.도발이었고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받아들이면 민윤서는 회사 안에서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될 터였다.하지만 거절하면 국가 핵심 연구 과제는 다른 기업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그렇게 되면 청림바이오가 수년 동안 공들여 준비해 온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될 수 있었고 회사 전체가 큰 타격을 입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서승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가까이에 서 있는 민윤서를 바라봤다.민윤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어떤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조금 전 이태섭 박사가 꺼낸 제안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것처럼 담담한 모습이었다.서승재는 그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프로젝트가 무산되더라도 민윤서에게 이런 모욕을 감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민윤서의 잔잔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목까지 올라왔던 말은 끝내 삼켜 버렸다.민윤서는 서승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회사는 혼자만의 것만은 아니었다.두 사람이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는 사이, 민윤서가 먼저 이태섭 박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박사님, 저희는 늘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회사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민윤아 씨께서 청림바이오에 합류하시겠다면 저희도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서승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 말하려 했다.그러나 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그 모습을 본 서승재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이태섭 박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시선을 민윤서에게 옮기더니 천천히 물었다.“서 대표 비서인가?”서승재는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민윤서를 소개했다.“박사님, 이쪽은 민윤서 수석연구원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핵심 약물 분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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