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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금붕어
서승재가 말을 끝맺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민윤아에게로 집중되었다. 모두가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민윤서가 신태현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태현이 민씨 가문 딸과 결혼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고 그 상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민윤아는 고개를 들어 신태현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가볍게 짓씹었다.

신태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더니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서승재 씨는 추측을 잘하시는군요.”

애매한 말이었다. 대답 같기도 하고 대답 같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부정으로도 들릴 수 있었고, 긍정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민윤아에게는 그것이 긍정으로 들렸다.

민윤아는 본능적으로 민윤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우월감이 뚜렷하게 보였다.

‘봐, 신태현은 내 거야. 예전에도 내 거였고 지금도 내 거야.’

민윤서와 결혼했다고 해도 신태현은 결국 민윤아의 편에 설 것이다.

민윤서는 신태현의 애매한 대답을 듣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곧 이혼할 사이이니 굳이 민윤서의 체면을 지켜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민윤아가 자신의 아내라고 인정하는 것은 신태현에게 아주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민윤아는 이미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였다.

민윤서는 굳이 자신이 난처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승재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선배, 우리는 이만 가요.”

서승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

민윤서는 안색이 매우 나빴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던 서승재는 곧바로 민윤서를 부축해 자리를 벗어난 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신태현 씨는 언제 돌아온 거야? 민윤아랑 같이 왔던데... 너...”

민윤서는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시선을 살짝 내려뜨리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곧 이혼할 거예요. 이제 그 사람 일은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신태현과 민윤서는 이제 곧 아무 사이 아니게 될 것이다.

서승재는 그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으나 민윤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승재는 민윤서가 신태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모습, 신태현 때문에 행복해하던 모습, 눈물 흘리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었다.

서승재는 민윤서가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전혀 아니었다.

서승재는 민윤서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서야, 마음을 접는 건 절대 패배가 아니야. 그건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해.”

...

곧 대회가 시작됐다.

민윤서의 자리가 너무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승재는 주최 측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 자리를 앞줄로 옮겨 주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아랫배가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민윤서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버텼다.

다음 순간, 민윤아가 앞으로 걸어와서 말을 걸었다.

“윤서야, 여기는 내 자리야.”

민윤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가 말씀하셨잖아. 이 업계도, 우리 집도 내가 책임지면 된다고. 너는 편히 쉬고 있어. 돈이 부족하면 얼마든지 얘기해.”

민윤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민윤아를 바라봤다.

4년 전, 민윤아는 민씨 가문의 친딸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민윤서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뀌었고 아주 노골적으로 민윤아를 편애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민윤서는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민윤서에게 그 집은 피할 수도 없고, 물러날 수도 없는 곳이었다.

민윤서는 민윤아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가차 없이 말했다.

“우리가 가족은 아니지. 그러니까 괜히 아는 척하지 마.”

민윤아는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 임신 중이라 힘들어서 더는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아랫배의 통증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걸 느낀 민윤서는 주먹을 꽉 쥐면서 애써 통증을 참았다.

“이건 내 자리야. 내가 꼭 양보해 줘야 할 의무는 없어.”

민윤아는 입술을 깨물다가 속상한 듯이 말했다.

“윤서야, 이건 내 자리가 맞아. 네가 동생이니까 언니인 내가 모든 걸 다 양보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이미 나 대신 우리 집에서 십 년을 넘게 살았어. 그걸로도 부족해서 그래?”

그 얘기가 나오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민윤서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민윤서가 철없고, 제멋대로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봤다.

민윤서는 시선을 들어 민윤아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주최 측에 확인해 봐야겠네. 이게 대체 누구 자리인지 말이야.”

민윤서는 직원을 불렀고 직원은 난처해했다. 한쪽은 신태현이 데려온 사람이라 감히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고, 다른 한쪽은 배정된 자리에 앉은 민윤서라서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었다.

민윤서는 평온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직원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게 대체 누구 자리인지 말해 보세요.”

민윤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신태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차분한 분위기의 신태현은 현장을 쭉 둘러보다가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

민윤아는 곧바로 눈시울을 붉히면서 속상한 듯 신태현에게로 다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현 오빠, 나는 그냥...”

신태현이 손을 들어 자연스럽게 민윤아의 어깨를 감싸며 다독였다. 아주 자연스럽고 능숙한 행동에 민윤서는 눈가가 시큰해졌다.

신태현은 민윤서를 바라보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일어나.”

민윤서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이건 내 자리야.”

신태현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덤덤히 민윤서를 바라봤다.

“민윤서, 여기서 소란 부리지 마.”

“소란 부리지 말라고?”

민윤서는 순간 목이 메었다.

“이게 누구의 연구과제인지, 누구의 자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신태현은 철없는 타인을 보듯 민윤서를 차분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윤아는 몸이 좋지 않아서 무리하면 안 돼. 그런데 굳이 이런 자리에서 의자 하나 가지고 다퉈야겠어?”

민윤아의 몸이 좋지 않다는 말에 민윤서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민윤서는 이미 죽음을 앞둔 몸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민윤서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데다가 지금은 민윤아의 편을 들기까지 했다.

민윤서는 이런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태현 씨, 나는 태현 씨랑 싸우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도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양보하고 싶지 않아.”

민윤서는 싸울 기력조차 없었다.

신태현은 민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애도 아니고 이런 방식으로 관심받으려고 하지는 마.”

현장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늘 침착하고 냉담하던 신태현이 감싸는 사람이 민윤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윤서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신태현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차분한 어조로 민윤서의 모든 노력과, 서러움과, 존엄을 부정하고 있었다.

신태현은 냉담하고 강압적일 뿐만 아니라 민윤아의 편을 들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민윤서의 존엄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민윤서는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신태현이 나선 이상 민윤서가 그 자리를 지켜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몸 상태로는 싸울 기운도 없었기에 굳이 힘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민윤서가 괴로워해도 신태현은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민윤서가 하고 싶은 일은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님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됐어.’

“태현 씨.”

민윤서는 의자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기억해 둬. 이 자리는 내가 양보해 주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야.”

그건 중의적인 의미였다.

민윤서의 말뜻은 단순히 이 자리만이 아니라 신태현의 아내 자리까지 버린다는 의미였다.

민윤서가 떠나자 민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태현 오빠, 내가 너무 심했던 걸까? 윤서 많이 화가 난 것 같던데. 안색도 안 좋고 말이야.”

신태현은 떠나는 민윤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민윤아만을 바라봤다.

“너는 그동안 충분히 힘들었잖아. 앞으로는 그냥 편히 지내면 돼.”

민윤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태현조차 민윤서가 민윤아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민윤서는 민윤아 대신 부귀영화를 누렸고 남의 가족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으니 뭐든 민윤서가 양보하는 것이 당연했다.

...

그곳은 국가 핵심 연구과제인 혁신 신약 및 중개의학 연구과제 발표 현장으로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과 대형 병원, 대형 제약회사가 모두 참석하는 자리였다.

앞줄에는 박사 지도교수와 교수진, 연구책임자들이 앉아 있었다.

자리를 빼앗긴 탓에 다시 뒷줄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자리가 없었다.

민윤서는 더 이상 서승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진통제를 삼킨 뒤 한쪽에 서 있었다.

민윤서는 팀을 소개하는 자료도 없이 노트북만 품에 안고 있었다.

발표가 시작되기 전, 옆 팀의 연구원들이 한데 모여 작게 수군거렸다.

“저 사람은 누구죠?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민윤서 씨라고 서승재 씨 실험실 사람인 것 같던데요. 보조원인 걸로 알고 있어요.”

“보조원이 국가 핵심 연구과제에 도전한다고요? 그냥 머릿수를 채우러 나온 건 아닐까요?”

“서승재 씨도 참 이해할 수 없네요. 이런 곳에 보조원을 보내다니요. 계획서는 제대로 쓸 줄 아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그냥 지켜보자고요. 이런 수준의 연구과제는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민윤서는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자료를 넘겼다. 사람들의 경멸이나 멸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민윤서에게는 높은 직급도, 눈부신 경력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서승재의 밑에서 일하는 보조원일 뿐이니 이 자리에 참석한 것 자체가 서승재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한 일처럼 비쳤다.

민윤서의 차례가 되었다.

걸음을 내디뎌 단상 위로 올라가자 조명이 민윤서를 비췄다. 민윤서는 별다른 인사말 없이 곧바로 PPT를 클릭했다.

화려한 디자인 없이 오직 데이터뿐이었다. 표적 검증 모델, 내성 기전 분석, 공정 최적화, 비임상 안전성 자료, 원가 절감 방안까지 모든 내용이 심사위원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혁신성, 실현 가능성, 사업화 가능성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기존 특허와 충돌하는 부분은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파일럿 플랜트 안정성 데이터는 어디 있죠?”

“윤리성과 규제 대응은 어떻게 확보할 겁니까?”

“예산은 왜 이렇게 배분한 거죠?”

민윤서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매우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데이터도 충분했으며, 심지어 업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창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민윤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는 하지 않고 여유롭게 핵심만을 짚었다.

처음에는 무심하던 심사위원들도 하나둘 자세를 바로잡았고, 채점표 위에서 펜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발표가 끝난 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곧 또렷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행사장이 술렁였다.

민윤아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민윤서가 이 정도 실력을 갖췄을 리가 없었다.

겨우 대학생일 뿐이지 않는가?

틀림없이 서승재가 뒤에서 도와줬을 것이다.

일개 보조원이 무슨 수로 국가 핵심 연구과제를 따낸단 말인가?

결과는 내일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곳에는 거물들이 가득했고 민윤아는 신태현을 통해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심지어 신태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민윤아에게 말을 건넸다.

민윤서는 단상 위에서 내려왔다. 약을 먹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상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자기 남편이 민윤아에게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있고, 두 사람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또 씁쓸하기도 했다.

결혼 2년 차 때, 민윤서는 신태현에게 친부모님의 생신날 함께 두 분을 뵈러 가자고 했었는데 신태현은 바쁘다면서 거절했다.

신태현은 가난한 민윤서의 친부모님과는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고 민윤서와도 선을 그으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민윤아에게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민윤아의 시선이 민윤서에게로 향했다.

“윤서야, 이리 와. 내가 이분들을 소개해줄게.”

신태현의 인맥을 민윤아를 통해 소개받아야 한다니, 정말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민윤아는 지금 신태현의 아내인 민윤서 앞에서 과시하고 있었고, 민윤서는 민윤아의 우월감을 채워줄 생각이 없었다.

민윤서는 민윤아에게 시선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며칠째 밤을 새우면서 실험하고, 발표를 준비하고, 오늘은 유언비어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통증까지 느껴졌다. 민윤아를 상대할 기운이 없었던 민윤서는 최대한 빨리 조용한 곳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몸을 살짝 돌리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눈앞이 새까매지면서 모든 빛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사람들의 목소리, 발소리, 에어컨 소리, 그 모든 것이 점점 멀어졌다.

의식보다 먼저 몸이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조용한 편이 아니었던 현장에서 둔탁한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민윤서는 그대로 차가운 바닥 위로 쓰러졌다. 긴 머리카락은 흐트러졌고 손에 들고 있던 발표 자료는 바닥에 떨어졌으며 창백한 얼굴은 바닥에 닿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신태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민윤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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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태현의 눈에 민윤서는 한가한 사람에 불과했다. 집안의 평온은 민윤서의 공이 아닌 그저 당연한 일상이었다.마침 가방을 가지러 돌아온 민윤서가 그 말을 고스란히 들었다.걸음이 뚝 멈춰지고 심장이 둔기에 세게 맞은 듯 먹먹하게 아파왔다.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지난 세월 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인내와 쏟아부었던 정성, 남몰래 애태웠던 그 모든 시간이 신태현의 입을 거치자 한낱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다니.“윤서야.”민윤아가 고개를 들었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돌아왔네? 좀 전까지도 오빠랑 네 얘기하고 있었는데.”신태현도 뒤를 돌아 그녀를 힐끗 보았다. 차분한 표정에는 일말의 불편함도, 그리고 미안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민윤서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다 도우미가 케어하는 거였다면 태주가 열났을 때 왜 한밤중에 나한테 전화해서 당장 가보라고 강요한 건데?”심지어 청림바이오와의 협력을 빌미로 협박까지 해댔으니.예전에는 이 남자가 그저 차갑다고만 여겼으나 이렇게까지 잔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민윤아는 짐짓 놀란 척하더니 이내 서운함과 배려심이 뒤섞인 얼굴로 연기했다.“태주는 내 친동생이나 다름없지만, 그동안 줄곧 돌봐온 건 윤서 너였잖아. 난 절대 그 자리를 뺏으려는 게 아니야. 태주한테 넌 여전히 가족이나 다름없어.”“괜히 나 때문에 태현 오빠랑 싸우지 마.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가는 건 정말 원치 않으니까.”말은 그럴싸했다. 철저히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계산된 언어였으니까.다만 민윤서는 고상한 척하는 그녀의 태도에 비웃음만 나왔다.이미 모든 것을 깨달은 민윤서였다.신태주가 말끝마다 ‘형수님’이라 호칭하며 민윤아에게 당연하다는 듯 친밀하게 구는 모습, 거기에 신태현의 보호와 자원 몰아주기까지. 그녀가 어찌 상황을 모를 수 있겠는가.결국, 그들만이 진짜 가족이었다. 지난 3년간 민윤서는 그저 무료로 고용된 가정부에 불과했다.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을 붙잡고 남의 집 식구들을 건사하며 정작 자신의 삶은 방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96화

    “어제 밖에서 대체 뭘 먹은 거야?”신태주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지난밤 민윤아가 다녀가면서 그동안 집안에서 엄격하게 제한해 온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다 주었고 그걸 단숨에 해치웠던 참이었다.하지만 그는 혼날까 봐 감히 이실직고하지 못했다.민윤서는 이 녀석이 회피하는 꼴만 봐도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지만,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깨어났으니 됐어. 이따 태현 씨 올 테니까 난 먼저 갈게.”민윤서는 이미 신씨 가문과 남남인지라 더 이상 신태주를 돌봐야 할 의무 따위 없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실 문이 열리고 신태현과 민윤아가 나란히 들어섰다.민윤아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태주야, 괜찮아? 정말 깜짝 놀랐잖아.”신태주는 순식간에 든든한 보호자를 만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불평했다.“형수님, 저 죽는 줄 알았어요. 아무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거든요.”그는 민윤아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좀 전까지 민윤서에게 쏘아대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민윤서는 일말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신태현을 향해 말했다.“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서 고열이 난 거야. 앞으로는 아이가 원한다고 다 들어주진 마.”불현듯 신태현의 미간이 좁혀졌다.“태주가 먹지 말아야 할 건 손도 못 대게 했어.”이 말이 나오자 남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민윤아에게로 향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민윤아가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음식 주문할 때 태주가 먹으면 안 되는 게 뭔지 미처 몰랐어.”신태주가 즉시 민윤아를 감싸며 민윤서에게 심술궂게 소리쳤다.“당신이랑 뭔 상관인데요? 평소에 날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몸이 약해진 거잖아요! 열이 났는데 바로 오지도 않고 뭐 했어요?”민윤서는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그러니까 신태주의 눈에는 모든 게 민윤서의 잘못인 격이었다.신씨 가문에서 보낸 지난 3년간 그녀는 헌신을 다해 식구들을 살뜰히 챙겼건만 결국 돌아온 것은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95화

    민윤서는 요즘 약리 연구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모든 혐의를 원점에서부터 하나씩 벗겨내기 위해서였다.종일 노트북을 끌어안고 수치와 데이터를 파고들거나 회의실에 틀어박혀 팀원들과 밤낮없이 대안을 찾았다.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외할머니의 병실을 지키는 일과가 이어졌다. 숨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상이었지만 그녀의 하루는 여느 때보다 보람차고 충실했다.밤 아홉 시, 적막을 깨고 갑작스레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흐름이 끊긴 민윤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발신자는 신태현... 번호를 차단했었지만,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이 차단을 풀고 연락처를 남겨둔 상태였다.마음 같아선 받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는 좀처럼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으니 전화를 걸어올 땐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민윤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분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태주가 열이 나서 학교 보건실에 있대. 가서 좀 돌봐줘.”신태현의 말투는 건조했고 그 속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이에 민윤서의 미간이 차갑게 일그러졌다.“그 아이 일은 이제 나랑 상관없어.”“민윤서.”신태현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태주 내 동생이야. 지금 집에 아무도 없으니 이런 일로 토 달지 말고 가.”민윤서의 가슴이 덜컥 조여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뾰족한 가시가 되어 귀를 콕콕 찔렀다.열이 나는 아이를 방치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 외할머니의 병세가 위태로웠던 그때, 정작 신태현은 어디에 있었던가?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짐을 자신에게 떠넘기던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만 찾아오는 꼴이라니.민윤서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을 애써 누르며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봤다.“보건 교사도 있고 선생님도 있을 테니 내가 가봐야 도움이 못 돼.”“나 지금 윤아랑 지방에 있어서 바로 돌아가지 못해.”신태현이 말했다.“그러니까 지금 당장 가.”그게 출장이었는지 아니면 민윤아의 기분을 맞춰주러 떠난 여행이었는지 민윤서는 굳이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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