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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금붕어
신태현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민윤서에게 닿았다. 검은 눈동자는 늘 그랬듯이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

그 순간, 현장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민윤아에게 향했다.

민윤아는 민윤서의 언니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민윤아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민윤서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민윤아가 도착하기도 전에 서승재가 한발 먼저 도착해 민윤서를 번쩍 안아 들었다.

민윤서의 귓가에 주변 소음이 웅웅 울렸다. 온몸에 힘이 빠졌고 아랫배의 통증은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했다.

민윤서는 통증을 견디기 위해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귓가에서는 서승재의 초조한 목소리만 들렸다.

서승재의 품에 안겨 현장을 빠져나갈 때, 우연히 신태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멀리서 본 신태현의 눈빛은 한없이 고요했고 또 차가웠다.

민윤서는 조용히 눈을 감아 시선을 차단했다.

민윤서의 남편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누구에게나 온화할 수 있었으나 오직 민윤서에게만은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민윤서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말이다.

민윤아가 따라가려고 하자 서승재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민윤아 씨, 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세요.”

서승재는 민윤서가 민윤아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민윤아가 따라오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민윤서 기분만 잡칠 테니 말이다.

이때 신태현이 다가와 민윤아에게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

민윤아는 입술을 깨물면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서가 많이 아픈 것 같아. 어떻게 된 일이지? 예전에는 괜찮았는데...”

서승재는 시선을 들어 신태현을 바라봤다.

“신태현 씨는 같이 안 가실 겁니까?”

민윤서에게서 곧 이혼할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아직 이혼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신태현은 서승재를 바라봤다.

민윤아는 손으로 조심스레 자신의 배를 감쌌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민윤아도 두려웠고 당황스러웠으며 곁에 누군가 있어 줘야 했다.

민윤아는 고개를 들어 신태현을 바라봤다.

“태현 오빠, 나는 진짜 괜찮으니까... 윤서는 지금 혼자잖아. 너무 불쌍해.”

조심스럽게 행동할수록 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었다. 게다가 민윤아는 지금 임신까지 한 상태였다.

그래서 우선 서운함을 삼키며 말했다.

“가봐. 나는 좀 기다려도 괜찮아. 나는 내가 잘 케어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니 너무 온순하고 착해 보였다.

신태현은 시선을 내려 민윤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흔들림 하나 없는 평온한 눈빛이었다.

민윤서는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진 채로 온몸을 덜덜 떨면서 흐릿한 시야 속에서 신태현과 민윤아를 바라봤다.

민윤서는 신태현의 아내였고, 지금 아파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태인데 신태현의 눈에는 배를 감싸면서 자기 동생을 챙겨주라고 설득하는 착하고 이해심 많은 민윤아밖에 없었다.

신태현은 민윤아를 내려다보며 덤덤히 말했다.

“내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그 한마디가 민윤서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신태현은 단 한 번도 민윤서를 선택한 적이 없었고, 아내인 민윤서를 지키려고 한 적도 없었다.

민윤서는 입안에서 피비린내를 느꼈고 가슴은 터질 듯이 아팠다.

버림받은 사람도, 외면당한 사람도,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전부 민윤서였다.

하지만 신태현에게 있어 민윤서는 보살핌을 받을 자격조차 없었다.

민윤서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서 말했다.

“가요...”

매달려봤자 더 치욕적이기만 할 뿐이었다.

서승재는 싸늘한 눈빛으로 신태현을 바라봤다.

민윤서가 기절했는데 신태현은 그 상황에서 민윤아와 밀당을 했다.

서승재는 곧바로 민윤서를 안고 차에 앉은 뒤 차 문을 닫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경인 병원으로 가주세요.”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민윤아는 신태현을 올려다보면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오빠, 윤서는 아마 저혈당일 거야. 원래 편식이 심했잖아. 좋은 것만 먹고 자라서 그런지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 집에 갔을 때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고 했어. 싫은 티도 많이 냈고.”

민윤아가 말한 자신을 키워준 부모님은 바로 민윤서의 친부모님이었다.

민윤아는 어렸을 때 민윤서의 친부모님 손에서 자랐다.

그리고 민씨 가문의 친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민씨 가문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민윤아의 친부모님이 굉장히 아껴주었다.

“하지만... 나는 윤서한테 민씨 가문을 떠나라고 한 적이 없어. 우리 부모님은 윤서를 친자식처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윤서는 내가 죽도록 미운가 봐... 내가 자기 가족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런데 나도 달리 방법이 없었어. 나도 윤서를 아끼고 있고 다른 자매들처럼 윤서랑 잘 지내고 싶은데...”

신태현은 덤덤한 눈빛으로 민윤아의 붉어진 눈꼬리를 바라보며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서는 어려서부터 너무 오냐오냐 자라서 그래.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뒤로는 더 이상 민윤서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민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너만 잘 챙겨. 다른 사람 때문에 너를 희생하려고 하지는 마.”

신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를 내지도, 달래주지도 않았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민윤아를 편애하는 것이 느껴졌다.

민윤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나는 윤서가 부러워... 아껴주는 사람이 많잖아.”

...

차 안.

“약 좀...”

민윤서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질 만큼 희미했다.

서승재는 허둥지둥 민윤서의 가방을 뒤지다가 진통제를 찾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민윤서는 따뜻한 물 몇 모금과 함께 약을 삼키고는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힘을 쥐어짜 내서 입을 열었다.

“병원에 안 가도 괜찮아요.”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안 가.”

서승재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민윤서는 눈을 감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리 때문에 그래요.”

서승재는 멈칫하더니 결국 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했다.

진통제가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지만 날카롭던 통증이 조금 둔해진 것뿐,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윤서는 고개를 돌려 서승재를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네 몸 좀 잘 챙겨.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서승재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고통을 참는 민윤서의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내가 휴가 줄 테니까 며칠 좀 쉬는 게 어때?”

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민윤서는 단 1분 1초도 의미 없는 휴식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서승재는 고집스러운 민윤서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 힘들면 쉬어. 억지로 버티지 말고.”

민윤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차 안에는 다시 적막이 흘렀다.

민윤서는 구석에 몸을 웅크렸고, 그 탓에 작은 몸이 더 작아 보였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통증은 가슴에서 시작되어 손끝까지 뻗어나갔고 뼛속까지 시릴 정도였다.

이를 악문 민윤서는 입술이 새하얗게 질려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이제 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윤서는 겨우 버티다 신혼집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서승재는 민윤서의 야윈 뒷모습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워했다.

“내가 같이 있어 줄까? 정말 병원에 안 가봐도 되겠어?”

민윤서는 고개를 돌리며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동자에 아무런 웃음기가 없어서 마냥 공허해 보였다.

“정말 괜찮아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요.”

민윤서는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것도, 이 세상에 자신의 고통을 진심으로 걱정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서승재가 떠난 뒤, 민윤서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거실 소파에 힘없이 쓰러지며 몸을 웅크렸다.

불을 켜지 않아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태현이 돌아온 것이었다.

신태현은 불을 켜고 나서야 소파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민윤서를 발견했다.

야윈 몸이 아주 작아 보였다.

신태현은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겉옷을 벗고 민윤서 쪽으로 걸어가서 소파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몸이 안 좋아?”

민윤서는 신태현이 오늘 밤 돌아올 줄은 몰랐다.

예전에 신태현은 매번 말없이 귀국했고 언제나 민윤서가 가장 마지막에 그 사실을 알았다.

민윤서는 신태현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신경 안 써도 돼.”

신태현의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신경을 써?”

신태현은 서승재가 민윤서를 안아 올리는 걸, 민윤서가 거절하지 않고 힘없이 서승재의 가슴에 기대는 걸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았다.

“남자한테 안기는 게 그렇게 좋아?”

민윤서는 흠칫했다.

신태현의 시선이 민윤서의 창백한 얼굴에 머물렀다.

“너한테 남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아프면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다른 남자부터 찾아? 민윤서,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않아? 아니면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낫기라도 해?”

신태현의 눈빛은 매우 차가웠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상대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냉담함이었다. 마치 민윤서의 고통을 유치한 연극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민윤서는 그 말을 들으며 허탈함과 서러움을 느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고?’

민윤서는 분명 몸이 좋지 않아서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때 신태현은 뭐라고 했는가?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다니.

정말 우스웠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아픔도 연기이고 죽어가는 것도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법이었다.

민윤서는 반박하지 않고 침묵했다.

어차피 곧 이혼할 테니 굳이 다툴 필요도, 화를 낼 필요도, 스스로를 난처하게 만들 이유도 없었다.

힘을 아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는 것이 나았다.

신태현이 손을 뻗었다. 부축하려는 것도, 걱정해서도 아니었다. 신태현은 비교적 거칠게 민윤서를 붙잡으면서 소파에 앉아 있던 민윤서를 그대로 안아 들려고 했다.

“병원에 가자.”

신태현의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지자 민윤서는 마치 뜨거운 불에 덴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신태현은 흠칫하더니 갑자기 시선을 내려 조용히 민윤서를 내려다봤다. 무서울 만큼 깊고 차가운 눈동자에서는 오랫동안 권력을 쥔 사람 특유의 압박감과 짜증이 서려 있었다.

민윤서는 병원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신태현이 입을 열었다.

“왜? 진짜 아픈 척해서 동정이라도 받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그냥 서승재 씨 품에 안기고 싶었던 거야?”

민윤서는 신태현을 바라봤다. 온몸이 떨리고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민윤서는 죽어가고 있는데 신태현은 민윤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3년간의 결혼 생활은 정말 아무 의미 없었다.

민윤서는 손을 들어 신태현의 뺨을 때렸다.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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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밖에서 대체 뭘 먹은 거야?”신태주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지난밤 민윤아가 다녀가면서 그동안 집안에서 엄격하게 제한해 온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다 주었고 그걸 단숨에 해치웠던 참이었다.하지만 그는 혼날까 봐 감히 이실직고하지 못했다.민윤서는 이 녀석이 회피하는 꼴만 봐도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지만,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깨어났으니 됐어. 이따 태현 씨 올 테니까 난 먼저 갈게.”민윤서는 이미 신씨 가문과 남남인지라 더 이상 신태주를 돌봐야 할 의무 따위 없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실 문이 열리고 신태현과 민윤아가 나란히 들어섰다.민윤아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태주야, 괜찮아? 정말 깜짝 놀랐잖아.”신태주는 순식간에 든든한 보호자를 만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불평했다.“형수님, 저 죽는 줄 알았어요. 아무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거든요.”그는 민윤아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좀 전까지 민윤서에게 쏘아대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민윤서는 일말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신태현을 향해 말했다.“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서 고열이 난 거야. 앞으로는 아이가 원한다고 다 들어주진 마.”불현듯 신태현의 미간이 좁혀졌다.“태주가 먹지 말아야 할 건 손도 못 대게 했어.”이 말이 나오자 남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민윤아에게로 향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민윤아가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음식 주문할 때 태주가 먹으면 안 되는 게 뭔지 미처 몰랐어.”신태주가 즉시 민윤아를 감싸며 민윤서에게 심술궂게 소리쳤다.“당신이랑 뭔 상관인데요? 평소에 날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몸이 약해진 거잖아요! 열이 났는데 바로 오지도 않고 뭐 했어요?”민윤서는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그러니까 신태주의 눈에는 모든 게 민윤서의 잘못인 격이었다.신씨 가문에서 보낸 지난 3년간 그녀는 헌신을 다해 식구들을 살뜰히 챙겼건만 결국 돌아온 것은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95화

    민윤서는 요즘 약리 연구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모든 혐의를 원점에서부터 하나씩 벗겨내기 위해서였다.종일 노트북을 끌어안고 수치와 데이터를 파고들거나 회의실에 틀어박혀 팀원들과 밤낮없이 대안을 찾았다.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외할머니의 병실을 지키는 일과가 이어졌다. 숨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상이었지만 그녀의 하루는 여느 때보다 보람차고 충실했다.밤 아홉 시, 적막을 깨고 갑작스레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흐름이 끊긴 민윤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발신자는 신태현... 번호를 차단했었지만,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이 차단을 풀고 연락처를 남겨둔 상태였다.마음 같아선 받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는 좀처럼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으니 전화를 걸어올 땐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민윤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분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태주가 열이 나서 학교 보건실에 있대. 가서 좀 돌봐줘.”신태현의 말투는 건조했고 그 속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이에 민윤서의 미간이 차갑게 일그러졌다.“그 아이 일은 이제 나랑 상관없어.”“민윤서.”신태현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태주 내 동생이야. 지금 집에 아무도 없으니 이런 일로 토 달지 말고 가.”민윤서의 가슴이 덜컥 조여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뾰족한 가시가 되어 귀를 콕콕 찔렀다.열이 나는 아이를 방치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 외할머니의 병세가 위태로웠던 그때, 정작 신태현은 어디에 있었던가?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짐을 자신에게 떠넘기던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만 찾아오는 꼴이라니.민윤서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을 애써 누르며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봤다.“보건 교사도 있고 선생님도 있을 테니 내가 가봐야 도움이 못 돼.”“나 지금 윤아랑 지방에 있어서 바로 돌아가지 못해.”신태현이 말했다.“그러니까 지금 당장 가.”그게 출장이었는지 아니면 민윤아의 기분을 맞춰주러 떠난 여행이었는지 민윤서는 굳이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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