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최준혁의 시점.“'투자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이 아니라, 시장 규모가 훨씬 큰 미국에서 경제와 투자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우석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을 떠나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갔죠.”원하정은 이야기를 마치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대학 유학을 계기로 그 아이가 이 별채를 떠난 뒤의 일은 저도 잘 몰라요. 소문으로는 한국에 돌아와 자신의 법인을 몇 개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고, 곧 그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매각한 뒤 이번에는 미국의 대형 투자펀드에 입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제가 그 아이의 상황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경제 매체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이후부터였어요. 그러니까…… 나도 최 사장과 비슷한 정도의 정보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그래도 사모님과 그는 거의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같은 저택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으셨습니까?”내가 떠보듯 묻자 원하정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후후, 최 사장. 우리는 피가 이어진 부모 자식도 아니고, 가족관계등록부상으로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같은 저택에서 살았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가까웠을 뿐, 서로의 근황을 일부러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우석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유학을 간 첫해에 단 한 번 생일 축하 메일을 보내 준 것이 전부였고, 그 이후로는 아무 연락도…….”원하정의 말에서는 거짓이나 모순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지금 말하지 않았을 뿐, 두 사람 사이에는 메일이나 전화 같은 단순한 연락 수단을 넘어서는, 더 깊은 정신적인 연결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함께 살던 시절에는 독서 말고도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저택에 오기 전 이야기나 친구들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었나요?” “……최 사장,
원하정의 시점.그날 이후 신우석은 더 이상 자신의 불우한 처지만 원망하며 인생을 비관하는 아이가 아니었다.어떻게 하면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와, 자신을 짐짝 취급한 아버지, 그리고 본채에 있는 할아버지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지.그러기 위해 지금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 아이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선실에서 가정부들과 있었던 그 사건 이후, 신우석은 완전히 나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았다.주변에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내게 자주 찾아와 이것저것 열심히 말을 걸기 시작했다.“사모님…… 지금 뭐 읽고 있어요?”“이거? 비즈니스 관련 책이야.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장이 어떤 사이클로 움직이는지에 대해 쓰여 있는 책이지.”“경제? 사이클……?”“그래. 경제와 정치의 흐름을 제대로 아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단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지식을 쌓아 두면, 그건 앞으로 살아가면서 분명 큰 자산이 될 거야.”아직 열 살짜리 아이에게는 어려운 내용이었겠지.신우석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분명한 흥미를 보였다. 그 뒤에도 이것저것 탐욕스럽게 파고들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 아이는 누구보다 호기심이 많았다. 한 번 궁금한 것이 생기면 끝까지 그 본질을 파헤치려는 성향을 가진 아이였다.그 날카로운 탐구심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묘하게 재미있기도 했고, 든든하기도 했던 나는 제 책장에서 비즈니스 서적 한 권을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이건 네게 줄게. 어려운 용어나 수식도 많겠지만, 읽을 수 있다면 한번 읽어 보렴.”“……사모님, 정말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감사합니다!”신우석은 푸른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고, 마치 보물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두꺼운 책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그래도 어른을 대상으로 쓰인 책이니 금세 포기하겠지.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래서 며칠 뒤 서점에 들렀을 때 중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
원하정의 시점.내가 복도를 지나가던 때였다. 식당 안쪽에 있는 배선실에서 쨍그랑하고 값비싼 도자기가 산산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가정부들의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뭘 하는 거니!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깜짝 놀라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에 흩어진 고급 수프 접시 파편 앞에서 겁에 질린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신우석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작은 배에는 뜨거운 수프가 그대로 쏟아져 옷이 흠뻑 젖어 있었고, 김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죄송해요…… 배가 고파서, 도와드리려고…….” 신우석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가정부장은 아이의 화상은 안중에도 없는 듯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차갑게 내뱉었다. “도와준다고? 웃기지 마세요. 본채 사모님들께서 쓰시는 귀한 식기에 너 같은 더러운 손을 대지 마. 불륜 끝에 태어난 너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불명예스러운 일이야. 더 이상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여기부터 치운 뒤 방으로 돌아가!” 가정부들은 우석이에게 걸레를 던져 주더니, 화상으로 붉게 달아오른 아이의 손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배선실을 나가려 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와, 그보다도 지금까지 이런 광경을 묵인해 온 나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감에 휩싸였다. 그 아이의 모습은 아이를 낳지 못했고, 남편마저 잃어 가문에서 마치 대형 폐기물처럼 취급받던 내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거기까지 하세요.” 나는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배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정부들은 놀라 뒤돌아보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모님……! 이건, 도련님이 멋대로…….” “조용히 하세요.” 나는 그들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당신들의 직무 태만과 이 저택의 주인인 나에 대한 무례, 모두 본채 회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세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한 치의 여지도 없는 내
최준혁의 시점. “최 사장, 나는 우석이를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아이의 행방을 물으셔도 정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옛날이야기라도 괜찮습니다. 사모님과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말입니다. 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의지할 가족마저 잃은 그에게 사모님은 분명 큰 존재였을 겁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사모님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들려주십시오.” 내가 진지한 눈빛으로 거듭 부탁하자, 원하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옆모습에는 자조 섞인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미안해요. 우석이에 대해 그렇게까지 알고 싶어 하며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라서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그 가문의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본채와 건물은 달랐지만 같은 부지에서 살고 있었음에도 다른 친척들이나 사용인들은 모두 그 아이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했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차분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 시절 우석이에 대해 얘기할게요.” 원하정은 찻잔을 들어 호박빛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원하정의 시점.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남편을 잃고 아이도 갖지 못해 가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나는 홀로 별채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 내게 신우석이라는 소년이 맡겨진 것은 그 아이가 열 살이 되던 봄이었다. “사모님,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지금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본채에서 파견 나온 집사장의 부름을 받고 읽고 있던 책을 덮은 뒤 방을 나서자, 그곳에는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홀로 서 있었다. 살짝 곱슬거리는 금발과 빨려 들어갈 듯 맑은 푸른 눈동자.지금의 건장한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당시 그 아이는 왜소했고 병색이 돌 정도로 몹시 말라 있었다.“오늘부터 이 별채에서 생활하게 되실
최준혁의 시점.신우석이 우리 앞에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뒤로 어느덧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경찰의 끈질긴 수사도, 우리가 독자적으로 촘촘히 펼쳐 놓은 추적망도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신우석의 정확한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조금이라도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아버지는 전보사 현 회장과도 극비리에 접촉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하지만 인지한 자식이라고는 해도 정실부인의 자식이 아닌 신우석을 명문가 사람들 가운데 좋게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도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어린 시절에도 본채가 아닌, 마치 불길한 존재처럼 별채에서 생활했다는 사실.당시 겨우 열 살에 불과했던 신우석이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현실을 얼마나 일찍 깨닫고 깊은 소외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 왔을지.같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그의 뒤틀린 성장 배경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해인이나 심예련의 인생을 마음대로 농락할 이유는 결코 될 수 없었다.한편, 또 다른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인 원하정에게는 아버지조차 여전히 연락 한 번 닿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언제나 강단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호랑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아버지가 원하정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빌려 온 고양이처럼 한없이 작아져 괴로운 표정만 지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강한 충격과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버지는. 남자라면 이 과거의 악연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것 아닌가.' 최 씨 그룹의 회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실망과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외부 인사와의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왔다.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걷던 순간, 시야 한쪽에 있는 티라운지 안쪽에서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내 몸이 굳어 버
최준혁의 시점.'나는 해인과 다시 시작하기 위해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붙잡고 이 문제와 필사적으로 맞서고 있다. 하지만 해인은 이제...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달라질 것은 없고, 내가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건 아닐까...'순식간에 끝없는 부정적인 감정이 내 마음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도, 목적도, 버텨야 할 이유도 모두 희미해져 갔다.학생에서 사회인이 되고, 최 씨 그룹의 대표로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뒤부터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노력이 반드시 보답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언제나 성공하는, 그런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나는 서해인과의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과거의 잘못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문제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려 애써 왔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일이 과연 보답받을 수 있는 일일까. 내가 아무리 달라졌다 한들 해인과의 관계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균열이 생겨 버렸다면, 애초에 모든 것이 헛수고인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한 줄기 빛도 닿지 않는 깊은 어둠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문득 책상 위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밤 8시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이 시간이면... 아이들은 아직 안 자고 있으려나...? 아니, 깨어 있더라도 해인에게는 가장 바쁘고 손을 뗄 수 없는 시간일지도 모르겠군.”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에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를 키워 본 적도 없는 내가 머릿속으로 아무리 상상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더 이상 답 없는 고민 속에서 멈춰 서 있지는 말자.연결되지 않을 거라고 반쯤은 체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휴대폰을 귀에 대자 길고 규칙적인 신호음이 조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