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의 입가에 헛웃음이 일었다. “보아하니 호 이사님은 그다지 저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연은 말을 이렇게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룸 안으로 들어섰다. 하연에게 현장을 들킬 줄을 예상 못한 호현욱은 갑자기 약점을 잡힌 듯 어색한 모습을 했다. 하지만 호현욱도 나이를 그냥 먹은 것은 아니었는지, 잠시 후 평소와 같은 상태로 회복되었다. “최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 신 건가요? 제가 어떻게 대표님을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말과 함께 호현욱은 일어나 하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하연은 기세 좋게 앉았고, 눈을 드는 순간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잠시 서로의 눈빛이 교차되는 동안 보이지 않는 불꽃이 한데 뒤엉켰다. “공교롭게도 한 대표도 있었네!” 하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두 분을 방해했나 봅니다.” “방해랄 것 까지야. 공교롭게 최 대표 얘기가 나온 거뿐이야. 전에 HT그룹에서 일했었는데, 그 뒤로 DS그룹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고? 호 이사님이 지금 나에게 최 대표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칭찬하고 있었어. 이사회에서 1년 안에 30% 실적 향상을 하겠다고 했다지? 최 대표, 맞아? ” “저도 그냥 한 말이니, 대표님께서도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호 이사는 서준과 하연의 사이가 물과 불 같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보물을 잘못 건드린 것처럼 실수한 것 같았다. 방금 하연은 서준과 호현욱의 대화를 입구에서 똑똑히 들었는데, 호현욱은 책장 넘기는 것보다 더 빨리 표정을 바꾸며 시치미를 뗐다. 하연은 호현욱의 속셈을 알고 있었지만, 서준과 약속을 했을 줄은 몰랐다. ‘서준 씨가 호 이사와 손을 잡고 나를 상대하려고 하는 걸까?’ 하연은 생각이 많았지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응, 그런 일이 있었어. 거기다 난 호 이사님과 내기도 했지.”화제를 돌리며 하연의 시선이 호현욱에게 향했다. “호 이사님, 기왕 저희의 내기가 이렇게 밖으로 드러난 이상, 이
하연은 빙그레 웃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어쨌든 오늘 일은 제가 신세를 진 것이니 나중에 제가 임 대표님을 도울 만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성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마디 타일렀다.“호현욱은 생각보다 교활한 사람이에요. 그동안 업계에서 일하면서 많은 인맥과 계략을 쌓아온 사람이라 상대하기 쉽진 않을 거예요. 최 사장님께서 앞으로 좀 더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네,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성재는 하연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귓가의 잔머리를 발견한 성재는 손을 내밀어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려고 했다.“임 대표님!”서준의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성재의 동작을 멈추게 만들었다. 성재는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내밀던 손을 거두고 하연에게 말했다.“잔머리가 불편해 보여서요.”“네?”하연은 그제야 눈치챘다. 서준은 긴 다리를 내디디며 성큼성큼 걸어가 하연의 옆에 서서 성재의 시선을 막았다.“임 대표님께서 곧 약혼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미리 이 자리에서 약혼을 축하드리도록 하죠.”약혼은 성재의 가족들이 정한 것인데 성재는 줄곧 동의한 적도 외계에 입장을 밝힌 적도 없었다. 그런데 서준이가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니.“아직 제대로 결정 난 일은 아니니 축하를 받긴 너무 이른 것 같네요.”성재는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하연을 힐끗 보더니 계속 말했다.“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한 대표님을 제 결혼식에 초대하도록 하죠.”서준은 그의 말 뜻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재가 하연을 좋아한다는 것을.서준은 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연은 줄곧 서준을 무시하였다. 그가 하연을 따라 나왔는데도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최 사장님,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죠.”성재는 화가 잔뜩 난 서준의 눈빛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하연에게 말했다.“괜찮아요, 저도 차를 가지고 왔어요.”“그럼 제가 주차장까지 바래다 드리죠.
이와 동시에 SG호텔의 룸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호현욱은 화가 나다 못해 룸에 있는 모든 물건을 깡그리 깨뜨렸다.“최하연, 네년이 감히 내 앞에서 잘난 척을 해?”호현욱이 앞에 있는 의자를 세게 걷어차자 의자는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호현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디.‘이 일은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가! 내가 이쯤에서 그만둔다면 앞으로 평생 최하연 그년한테 지게 될 거야.’호현욱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최하연 그년을 DS 그룹에서 내쫓아!”호현욱이 전화를 끊고 떠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룸의 문을 두드려왔다.“누구시죠?”호현욱이 경계심을 가지며 묻자 상대는 밖에서 문을 열었다.“호현욱 씨, 저희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호현욱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쪽 회장님이 누구죠?”“민진현 회장님입니다.”이 이름은 별로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민진현과 전혀 모르는 사이다.“민 회장님께서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거죠?”“가보시면 아실 겁니다.”호현욱은 잠시 고민하더니 상대를 따라가보기로 했다....밤 11시.SOLO 스탠드바 안은 매우 떠들썩했다. 귀를 찌르는 듯한 음악 소리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시켰다.서준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구석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술잔을 들고 계속해서 술을 마시기만 했다.“왜 그래?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안태현은 다가와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서준은 시종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태현은 서준의 이런 모습을 보자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혹시 전처와 관계있는 일이야?”이 말을 들은 서준은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역시 그 여자 때문일 줄 알았어!”“그 여자 얘기하지 마.”이건 오늘 밤 서준이가 꺼낸 첫 마디다. 태현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계속 물었다.“설마 전처 때문에 이렇게 술을 마시는 거야?”“꺼져!”서준은 화를 내며 말했다. 이에 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준은 태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익숙한 실루엣을 보게 되었다. 붉은색의 치마를 입은 여자는 바로 최하연이다.‘최하연은 임성준이랑 함께 갔었잖아. 그런데 왜 여기 있어?’하연의 춤사위는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스탠드바에서 가장 주목을 받게 되었다.하연의 웃는 얼굴은 자신감이 넘쳤는데 그녀의 이런 모습은 서준을 설레게 만들었다.서준은 하연의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하연이가 이렇게 예쁘게 웃는 건 처음 보네.’서준은 마음이 복잡하여 단숨에 잔속에 남은 술을 다 마셨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채 잔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걸어갔다.“대박! 하연아, 너 정말 너무 예뻐!”정예나는 하연을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역시 오늘 밤에 널 불렀어야 했어. 이 분위기를 타고 제대로 즐겨보자!”하연은 음악소리에 취해 기쁜 마음을 주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술잔을 들고 예나와 건배를 했다.“마셔!”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은 뒤 술잔을 비웠다. 그 술은 하연이가 매우 좋아하던 술이기에 하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채 원샷을 했다.“예나야,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하연은 컵을 내려놓고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서준을 보았다.하연은 방금까지 웃던 표정을 감춘 뒤 뒤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했다.그녀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난 서준은 재빨리 하연을 불렀다.“최하연, 거기 멈춰!”하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은 뒤 더 빨리 도망쳤다. 서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달려가 하연을 화장실 모퉁이에 막았다.“뭐 하는 거야! 이거 놔!”하연은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서준은 한사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두 시간 전 하연이가 자신을 오해한 것을 떠올리자 서준은 화가 치밀어올라 술기운을 빌어 입을 열었다.“최하연, 나와 호현욱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내가 정말 그딴 놈과 손 잡을 리가 있겠어?”하연은 그의 말을 듣지
한편 한서영은 SOLO 바탠드바 입구에 서서 서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서영의 곁에 있던 예쁜 여자가 재빨리 물었다.“서영아, 네 오빠가 정말 이곳에 있는 게 확실해?”서영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새언니는 나만 믿어. 우리 오빠는 분명 이 바탠드바 안에 있을 거야.”서영의 옆에 있던 여자는 민혜경이다. 민씨 가문은 혜경을 완전히 포기했기에 민진현은 직접 그녀를 구치소에 보냈다. 최씨 가문이 확실한 증거를 제출한 다음 공개적으로 심사가 가다 오기 전에 혜경은 자신이 임산부라는 것을 핑계로 몸이 아프다며 보석을 받았다.혜경은 서준에게 전화를 걸고 메시지도 보냈지만 서준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핑계를 대고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왔다.서영한테서 서준이가 SOLO 스탠드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새언니, 우리 들어가자.”서영은 혜경을 데리고 스탠드바 안으로 들어갔다. 혜경은 떠들썩한 분위기와 활기찬 노래들을 듣자 모처럼 활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어딘가를 보더니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새언니, 왜 그래?”서영은 호기심에 혜경의 시선을 따라 살펴보았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연과 서준을 한눈에 보았다.“저 여자는 왜 또 여기 있는 거야! 이미 이혼했으면서 왜 자꾸 우리 오빠한테 들러붙는 건데!”서영은 화가 난 마음에 앞으로 나가 따지려고 했지만 혜경이 그녀를 막았다.혜경은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서준이가 뺨을 맞고 오히려 웃는 상황을 보았다.혜경은 두 손을 주먹 쥔 채 하연이가 떠나는 것을 보고 곧장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하연은 기분이 너무 안 좋아 자리로 돌아간 후 가방을 들고 예나한테 말했다.“재밌게 놀다 가, 난 먼저 가봐야겠어.”예나와 친구들이 밤새 놀 생각으로 바에 온 것이기에 떠나려는 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래. 밤 길 조심하고!”하연이가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혜경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혜
혜경이가 도움을 청하자 바 안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점점 작아졌다.“제, 제 뱃속의 아이 좀 살려주세요!” 하연은 눈앞의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혜경이가 이와 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모함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연기에 중독되기라도 했나 보네.’멀지 않은 곳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어두운 표정으로 두 여자를 향해 걸어왔다.땅에 쓰러진 혜경을 본 서준은 그녀가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물어보려 했으나 혜경은 그가 묻기도 전에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혜경은 통증 때문에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서준 씨, 나 좀 살려줘! 우리 아이 좀 살려줘!”“오빠, 모두 최하연 저 년이 새언니를 밀어 이렇게 된 거야!”서영은 재빨리 고자질을 했다. 하지만 서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혜경이가 정말 아파 보이자 서준은 그제야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았다. 이때 그는 손에 뭔가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피야! 오빠, 새언니 피났어!”서영의 말은 주위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만들었다.“뭣들 하는 거야, 얼른 119 불러!”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한 마디 외치자 모두 핸드폰을 꺼냈다.서준은 망설이지 않은 채 혜경을 안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갔다. 이때 급하게 달려온 예나가 하연에게 물었다.“하연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하연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귀찮은 일에 얽힌 것 같네.”“뭐?”하연은 머리를 숙여 땅바닥의 핏자국들을 보았다. 그녀는 혜경이가 자기 아이마저 도구로 이용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하연은 금방 마음을 가라앉힌 뒤 어두운 눈빛으로 멀지 않은 곳의 CCTV를 보았다.한편 혜경은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서준과 서영은 모두 수술실 밖을 지키고 있었다.얼마 뒤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급히 달려왔다.“환자 가족분이 누구시죠?”서준이 얼른 물었다.“환자 상태는 괜찮은 가요?”“환자분 남편이신 거죠? 환자분은 현재 유산되어 수술로 뒤처리를 해야 되는 상태입니다. 남편분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겠네.”민진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영을 보며 말했다.“서영 아가씨께서 똑똑히 보셨다고 하셨으니 우리 혜경을 위해서라도 경찰들 앞에서 증인으로 나서주실 거죠?”“그게...”서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증인으로 나서려고 했던 그녀는 서준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후 하려던 말을 바꾸었다. 그것도 민진현이 보는 앞에서.“하지만 그곳의 불빛이 어두워서 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요.”겁을 잔뜩 먹은 서영은 심장이 매우 빨리 뛰었다. 이때 민진현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서영 아가씨, 전 그저 진실에 대해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그게...”서영은 고개를 숙이더니 서준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민진현은 안색이 매우 어두웠다. 서준이가 아직도 하연의 편을 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민진현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혜경이는 자네의 아이를 품고 있었어! 지금 아이가 유산되었는데 자네는 아빠로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 편을 드는 건가? 자네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기나 해?”“죄송합니다.”서준이 입을 열었다.“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반드시 조사해 내겠습니다.”“조사한다고 해놓고 또 그 여자를 감싸주려는 건가?”민진현과 서준이 다투는 소리는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혜경은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두 사람의 아이가 유산되었는데 서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하연의 편을 들고 있었다.혜경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연을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할아버지...”혜경의 허약한 목소리가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렸다.“새언니 깼어요?”서영은 바로 혜경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새언니, 몸은 좀 어때요?”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 서준을 보며 말했다.“서준 씨, 우리 아이가...”하지만 서준은 마치 이 일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
“서준 씨가 아직 그 여자한테 감정이 남아있다는 건 이해해. 두 사람이 3년 동안 부부로 지내왔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는 날 밀어 우리 아이를 죽게 만든 범인이야!”“그래, 알았어.”서준은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그럼 경찰에 신고해서 제대로 조사해 보지.”서준은 이 말을 마친 뒤 병실을 떠나려 했다. 이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하연이가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최하연 씨, 당신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찾아와!”혜경은 하연을 보자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에 하연은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방금 하신 말씀들 모두 병실 밖에서 들었습니다. 한 마디만 물을 게요. 민혜경 씨,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정말 그쪽 말대로 인 가요?”“최하연, 네년 때문에 내 아이가 죽었어!”하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민혜경 씨, 말을 함부로 하셔서는 안 되죠.”“내 말은 모두 사실이야! 범인은 바로 너야! 내가 당장 신고해서 널 감방에 처넣을 거야! 넌 내 아이를 죽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혜경은 미친 듯이 소리 질렀지만 하연은 시종 침착한 모습이었다.“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이미 경찰을 데리고 왔거든요.”하연은 말을 마친 뒤 몸을 옆으로 돌려 자리를 비켰다.“안으로 들어오시죠.”곧 경찰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혜경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랐다.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