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과 하연의 약혼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은 모두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약혼이 결정된 이상, 번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씨 가문에서도 반대 의견은 없었고, 어쩌면 감히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저녁 식탁에서 상혁이 드물게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저와 하연이 약혼하게 되었습니다.”순간 식탁 위의 젓가락들이 멈췄다. 송혜선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갑작스럽네요. 둘이 헤어졌다고 들었는데요?” 상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 외부 소문을 들으셨나 봅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네가 가정을 이루고 자리 잡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네 어머님 쪽도 이미 알고 계셔? 최씨 가문에서도 반대는 없었고?” 부동건은 식탁에 앉아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하연이는 진숙이가 키운 아이야. 진숙이도 기뻐할 일이지 반대할 일은 없을 거야. 다만 최씨 가문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거야. 그 가문은 과거에도 항상 자신들의 가문이 주도권을 잡아오면서 살아왔지. 지금도 하민과 하연이 이끌면서 더 번창하고 있다. 네가 이런 관계를 잘 조율할 수 있겠니?”부동건은 하연에 대해 별다른 반대는 없었다. 하연은 반쯤 자신의 딸처럼 여겨졌고, 과거 두 사람을 반대한 이유는 상혁의 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장애물이 사라졌다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상혁은 단호히 말했다. “제가 하연이하고 약혼하려고 하는 건, 저희 관계가 더 나아가고 가까워지고 싶어서이지, 가문 간의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송혜선은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관계는 불가피하게 얽히게 될거야.” 상혁은 차분히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지금 저희 약혼에 의견이 있으신가요?” 송혜선의 뒤에 서 있던 조봉규가 송혜선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모르겠어요! 고나희가 우리와 관련된 많은 일을 알고 있었잖아요. 혹시 모든 내용들을 기록해둔 건 아닐까요?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면 우린 큰일 날 겁니다.” 정규인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동안 둘이 손을 잡고 DL 그룹에서 상당한 부당한 이익을 취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불법적인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 흔적들이 한순간에 빛을 보게 된다면, 그들에겐 끝없는 나락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상무님, 잊지 마세요. 고나희의 죽음은...” “그만해요!” 남준은 거칠게 말을 끊었다. 그의 눈에는 불꽃 같은 분노가 번뜩였고,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며 날카로워졌다. “지금 상황이 충분히 복잡합니다. 정 사장님,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습니까? 부상혁이 곧 최씨 가문의 지지를 받아 약혼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DL 그룹의 미래 실권자가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보아하니, 이제 우리에게는 승산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정규인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고, 두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저도 더 이상 도박할 수 없어요. 최근에 제 모든 일이 폭로된 건 부상혁이 우리를 견제하려는 신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무님, 혹시 부상혁이 이미 우리가 계획했던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부남준은 정규인을 쏘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마치 단검처럼 날카롭게 빛났고, 얼굴에는 혐오와 피로가 가득 서려 있었다. “정 사장님, 그 입 잠시만이라도 좀 닫아 주실래요. 지금 우리 그렇게 여유롭게 추측이나 할 시간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남준의 말에 정규인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날이 선 유리처럼 위태로웠고, 조금만 건드려도 산산이 부서질 듯했다....한낮의 겨울 햇살 아래, 남준이 흔들의자에 누워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바로 정다영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부남준의 약혼식은 대단히 성대했다. 정씨 가문은 이 결혼을 매우 중시했기에 준비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송혜선은 원래 약혼식에 직접 참석하려 했으나, 출발 전 넘어지는 바람에 큰 위기를 겪었다. 만약 조봉규가 곁에 없었다면 태아를 잃을 뻔했다. 부동건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서 태교나 해.” “남준이 약혼식인 큰 행사인데, 어머니로서 참석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송혜선은 억울한 듯 반박했지만, 부동건은 사적인 의도가 있는 듯 대답을 피했다. “예법은 모두 갖췄어. 집사가 경험도 풍부하니 걱정하지 마. 이 정도 일은 실수 없이 처리할 거야.” 송혜선은 분노로 인해 어지러움에 휩싸일 지경이었다. 정신을 다잡은 그녀는 조봉규에게 화를 쏟아냈다. “내가 넘어진 거, 당신이 밀어서 넘어진 거 아니야?” 조봉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급히 부인했다. “내가? 말도 안 돼! 내가 왜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해?” 송혜선은 이를 악물며 낮게 중얼거렸다. “참나! 그럼 분명히 누군가가 날 해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은 증거가 없지만 난 절대 이대로 당하지 않을 거야!”...정씨 가문에 예물을 전달하러 갔을 때, 예법은 철저히 갖춰졌지만 부씨 가문의 두 어른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지철 부부는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남준이, 네가 아무리 DL그룹 이사회에서 하위권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우리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게 아니냐?” 정다영의 어머니 하미주는 불만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남준은 얕은 미소를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곁에 있던 집사가 대신 나섰다. “사모님께서는 태교 중이시고, 부 회장님께서는 중요한 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저를 통해 예를 갖추셨습니다. 결혼식 때는 꼭 참석하시겠다고 전하셨습니다.” 하미주의 불만을 눈치챈 정다영이 바로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엄마, 남준 씨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줄지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상혁은 나가기 전, 노크하듯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남준, 축하한다. 약혼, 행복하길.” 남준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상혁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쥔 듯한 모습이었다. “형은 언제 형수님 댁으로 예물을 보내나요?” “다음 달. 약혼식도 다음 달로 잡았다. 그때 제수씨 데리고 와서 축하해줘.” 남준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네 물론 그렇게 해야죠.” 남준의 사무실에서, 정규인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수천억의 구멍을 제가 어떻게 메우라는 겁니까? 도대체 회장님께서 어디서 이런 소식을 들으신 거죠?” 남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정 사장님 주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정규인은 충격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잃었다. “제 주변에요?”...DS그룹 쪽에서는 하연은 요즘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손이현과 자주 부딪쳤다. 늘 일부러 피했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이현은 먼지를 뒤집어쓴 듯 급히 찾아왔고, 정태훈이 이현을 막아섰다. “한 상무님, 여기서 뭘 하십니까?” 이현은 급하게 들고 온 재킷을 벗어 손에 쥔 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하연을 향해 물었다. “하연 씨, 제가 들었는데, 약혼한다면서요?” 하연은 순간 멍해졌지만, 숨길 이유는 없었다. “네, 부상혁하고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현은 거의 좌절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저를 기다려주지 않은 거죠? 저도 충분히 하연 씨한테 어울 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요.” 하연은 천천히 걸어가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무얼요? 부상혁과 같은 위치에 서는 걸요?” “하지만 사랑이란 건 저울과 같잖아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버렸어요.”
“당신!!!” 정규인은 이를 악물고 상혁을 노려보았지만, 결국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표님,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합니까?” 정규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상혁은 태연하게 무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정 사장님,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상혁의 기세도 날카롭고 위압적이며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돌아서서 차가운 뒷모습을 남겼다. 오늘 정규인의 협력 논의는 완전히 결렬되었고, 수천억의 손실은 이제 발 빠르게 처리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규인의 다리가 휘청거렸고, 굵은 땀방울이 이마에서 떨어졌다. 비서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정규인은 손으로 땀을 닦아내며 상혁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이미 사람을 보내 확인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감시해. 누가 배신했는지 밝혀내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바쁜 하루를 마친 하연은 회사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익숙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자 놀란 눈빛이 잠시 스쳤다. 곧바로 미소를 띤 하연은 기쁘게 뛰어가 남자의 품에 안겼다. 상혁은 하연을 받아들이며 힘껏 안아주었다. “어쩐 일이에요?” “내 약혼녀를 데리러 왔지!” 상혁의 입에서 나온 ‘약혼녀’라는 말에 하연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오래 기다렸어요? 왜 미리 전화 안 했어요?”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고 차로 향했다. 차 안은 히터가 켜져 있어 따뜻했고, 하연은 외투를 벗으며 환히 웃으며 말했다. “하경 오빠가 말하길, 크리스마스에 아린 씨에게 청혼할 계획이라던데, 우리도 축하하러 가요.” “그래.”상혁은 짧게 대답하며 바로 동의했다. 기쁨에 휩싸인 하연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상혁의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자기야...” 갑자기 그는 하연을 품에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청혼에 아린은 순간 멍해졌다. 한참 동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서서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아린의 마음속에 어느새 깊이 자리 잡은 하경이었다. 아린의 눈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고,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좋아요. 나도 하경 씨와 결혼하고 싶어요...”그 확실한 대답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하경은 천천히 반지를 아린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자세히 보면, 평소 차분하고 냉정한 하경의 손마저 긴장으로 땀에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린을 바라보며 진중하게 약속했다. “평생 아린 씨만 사랑할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하연은 이 감동적인 청혼 영상을 ‘미녀4총사’ 단톡방에 올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우리 오빠가 이러다니! 우리 오빠가 이러다니!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야! 우리 오빠가 이렇게 로맨틱하고 다정한 사람일 줄이야!] 채팅방은 곧 들썩였다. 신가흔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최하경이 청혼을 했다니?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너희 집안 진짜 축제 분위기네.] 정예나도 장난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 맞아! 우리 집안 요즘 축제 분위기인데, 너희 둘도 얼른 이 기운 받아서 빨리 결혼들 해라.]하연이 바로 답장이 올렸다.뒤이어 다양한 반응들이 이어졌다. [최하연, 설마 네가 우리한테 결혼 압박 넣는 거야?][이 제안, 난 정중히 거절한다.] [나도.] [그리고 나도.][결혼 안 해.]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저었다. 하경의 청혼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린을 품에 안았고, 집 안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하경의 친구들은 그를 둘러싸며 떠들썩하게 축하했다. “하경아, 청혼 성공했으니 결혼식 준비는 서둘러야지.” “우린 벌써부터 축배 들 준비가 돼 있어!” 하경은 아린을 살짝 끌어안으며
하성은 갑작스럽게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연아, 네가 생각해 봐. 우리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흔이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하성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끄며, 한숨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오빠가 말은 그 때 그 사진들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하연은 전에 가흔이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그 사진이 두 사람의 이별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임이 분명했다. “사진 문제는 내가 이미 해명했어. 가흔이도 사진 때문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가흔이는 나를 진심으로 믿지 않았어.” 하성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하연은 조용히 하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빠, 의심이 되면 직접 확인해 봐야지. 이렇게 추측만 하고 있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거 잘 알잖아.” 하성은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바라보며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가흔이... 나를 피해 해외로 도망가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찾겠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성은 동생의 말투에서 뭔가 눈치챘는지 물었다. “하연아, 솔직히 말해. 너 혹시 가흔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하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빠, 연애라는 건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오해가 있으면 풀고, 시간을 들여 서로를 이해해야 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물었다. “요즘 오빠 행복했어?” 하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표정은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럼 가흔이를 찾아가요. 직접 만나서 가흔의 진심을 들어봐요.” “만약 가흔이가 여전히 나를 만나기 싫어한다면?” 하성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그럼 오빠는 더 노력해야죠. 언젠가 가흔이도 마음을 열 거예요.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래 사랑했잖아요. 그런 사
“걱정 마십시오. 저도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정지철은 말하며 얼굴에 잠시 음험한 기색을 띠었다가 이내 웃음으로 돌려놓았다. “게다가 이제 진 이사님의 지지까지 더해졌으니, 제 승산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괜히 염려했군요.” “머지않아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면, 남준이가 반드시 우리에게 든든한 보답을 할 겁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길 바랍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잔을 부딪치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이어서 술잔을 들이켰다. 한쪽에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남준은 입꼬리에 묘한 웃음을 띤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술집을 나서자, 진수용은 이미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 내 주량으로는 절대 취한 적이 없었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더 이상은 힘들어... 힘들어...” “진 이사님의 천배불취라는 명성은 우리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과음하신 것 같습니다.” 정지철은 웃으며 운전기사에게 손짓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번 실력을 겨뤄보겠습니다.” “그럼, 그럼! 꼭 한 번 다시 겨뤄야지...” 정지철은 진수용을 부축해 차에 태우며 알랑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 돌아가 푹 쉬십시오.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까요.” 차 문이 닫히고, 차량이 출발하며 먼지와 함께 멀어졌다. 남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정지철의 옆에 섰다. 그의 시선은 차가 사라지는 방향을 향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진 이사는 오늘 술도 얼마 안 마셨는데 이렇게 취하다니?” 정지철의 얼굴은 점차 굳어졌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다 늙은 여우 주제에, 내 앞에서 큰소리만 치더니.” “보아하니 진 이사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 같네요.”남준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덧붙였다.정지철은 차갑게 웃으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의 눈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