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3화

작가: 강노을
제헌은 정장 차림으로 카페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 모델 같은 큰 키와 단정한 이목구비는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페 안 여기저기서 몰래 제헌을 훔쳐보는 손님들의 눈빛에는 감탄이 그대로 드러났다.

제헌 옆에는 깔끔한 인상의 또 다른 남성이 나란히 서 있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남성은 단정한 외모에, 은근한 품위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이람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시우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한빈.

이람은 종종 IT 커뮤니티 사이트를 둘러보곤 했는데, 거기서 한빈이 AI 데이터 기반 안정성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제헌과 한빈 뒤에는 제헌의 비서 허기성이 서류를 한 뭉치 안고 따르고 있었다.

KU그룹은 H시에서 손꼽히는 테크 기업이다.

제헌과 한빈이 함께 있는 건 업무상 자리일 가능성이 컸다.

‘제발 강제헌과 마주치지만 말자...’

이람은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지금 일어나면 오히려 더 눈에 띌 게 뻔했다. 그저 들키지 않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늘 기대와는 반대로 흐른다.

다음 순간, 제헌의 시선이 정확히 이람을 찾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헌은 이람을 낯선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곧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헌은 이람의 존재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 듯했다.

기성도 제헌의 시선을 따라 이람을 바라봤지만, 역시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룸은 이쪽입니다. 한 교수님, 대표님, 이쪽으로요.”

이람은 조금 안도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제헌과 한빈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한빈이 불쑥 물었다.

“강 대표님, 창가에 앉아 계신 분... 아는 사이신가요? 실례일 수도 있지만, 방금 강 대표님이랑 허 비서님 두 분 모두 그분을 보신 것 같아서요. 우연히 눈에 띄었어요.”

제헌은 이람이 회사에 나타날 거라 예상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장소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이 제헌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히 답했다.

“집안일 돕는 사람입니다.”

한빈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가 이 질문을 한 건 제헌이 누군가를 봤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그 여성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시우대학교 연구팀에 있던, 잊을 수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시우대학교는 전국 최고 수준의 대학이다. 이 학교 졸업생이라면 아무리 실력이 형편없어도 가사도우미를 할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한빈의 기억 속 그 학생은, ‘천재’라 불러 마땅한 사람이었다.

현재 연구팀이 기술적인 난관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그 천재가 팀에 합류한다면 단기간에 상황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고 판단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학생은 몇 년 전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빈은 모든 졸업생 기록을 다시 살펴봤지만, 그 천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이력뿐이었다.

‘그런 재능이라면 논문 몇 편만 냈어도 학계가 떠들썩했을 거야.’

‘시우대 최연소 교수? 그 이상도 가능했을 텐데...’

‘컴퓨터과학연구원 명예의 전당까지도...’

한빈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가시죠, 강 대표님.”

제헌은 더 이상 이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

...

이람의 손톱이 커피잔을 긁었다. 날카롭고 불쾌한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퍼졌다.

예전에 고지후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이람이 만든 음식을 먹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형수님 같은 요리 실력을 소유한 여성분이 제 이상형이에요. 꼭 그런 여성분이랑 결혼할 거예요.”

그때 제헌은 무심하게, 시큰둥한 얼굴로 한 마디 내뱉었다.

“여자 셰프 하나 데려다주면 되겠네.”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정말 어리석게 만들기도 하니까... 그때 이람은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넘겼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이 참 우습고도 한심했다.

자신에게 가장 값진 3년의 세월을 바쳤지만, 돌아온 건 고작 셰프, 가사도우미 취급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아내인 나에게 준다는 게 이게 전부였어? 그 사람이?’

이람의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고, 뒤늦게 밀려드는 감정은 더 날카롭고 잔인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통증은 바늘 끝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똑똑-

제헌이 룸에 들어간 직후, 기성이 이람의 자리로 다가와 테이블을 두드렸다.

생각이 끊긴 이람은 고개를 들었다.

기성은 냉랭한 표정으로, 불쾌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대표님께서 사모님한테 더 이상 대표님 동선 캐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하셨던 걸로 압니다만?”

며칠 전, 강수철 회장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람은 제헌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결국 기성에게 연락했고, 비서를 통해 제헌이 술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 제헌은 만취 상태였다.

이람은 그를 부축하려다, 소파에 함께 쓰러졌고, 제헌이 이람을 껴안으며 거칠게 입을 맞췄다.

그 순간, 그녀는 놀라기도 했지만... 솔직히 기뻤다.

항상 차갑기만 했던 제헌이 처음으로 먼저 다가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단 한 마디로 산산이 부서졌다.

제헌의 입에서 나온 이름.

“유리...”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람이 진짜 머리끝까지 얼어붙었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온몸으로 밀쳐냈다.

그날 이후, 제헌은 결혼 후 처음으로 큰 화를 냈다. 한 달간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이람에게 다시는 자기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이혼이라고 못 박았다.

“명심해! 또 이런 일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누가 나서도... 난 이 결혼 끝낼 거야.”

그게 제헌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람은 겁이 났다. 그 이후로 어떤 상황에서도, 제헌의 스케줄을 캐묻지 않았다.

기성은 그걸 알고 있었다.

이람이 제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질문을 던진 순간, 기성도 느꼈다.

‘설마 사모님이... 또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는 곧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따라온 걸 보면, 뭔가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거겠지.’

기성은 눈매를 좁히며 낮게 말했다.

“만약 하유리 씨 귀국 때문에 사모님이 이런 무리수를 둔 거라면...”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차갑게 덧붙였다.

“대표님 마음속에 하유리 씨가 어떤 존재인지... 사모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행동은... 너무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하유리는 박사 학위 취득 후 귀국하자마자 한빈 교수의 연구팀 면접에 합격했고, 정식 연구원으로 합류했다.

한빈은 업계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다.

그 연구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실력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팀원들은 모두 업계 최정점에서 활동하는 인재들이었고, 연구 주제는 인공지능 기술의 가장 선두에 있는 실전 응용이었다.

하유리가 사는 세계는, 조이람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기성은 생각했다.

‘내가 사모님 입장이라면... 적어도 현실 인식은 했겠지.’

‘괜히 하유리 씨를 직접 만나면 더 비교될 텐데...’

‘자기 비참함만 드러낼 걸 왜 굳이 자초하나?’

하지만... 이람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했다.

기성과 이람의 사이는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실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기성은 제헌의 비서였고, 제헌이 차가우면 그 역시 똑같이 차갑게 이람을 대했다.

‘주인’의 태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게 기성의 방식이었고, 이람은 기성으로부터 날 선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래도 예전엔, 이람은 늘 제헌에게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기성에게는 항상 예의를 갖췄고, 그가 날을 세워도 맞대응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람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람이 기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뭐가 무의미하다는 건데요?”

이어지는 말은 날카로웠다.

“허 비서님 논리대로면, 제가 아침부터 강제헌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고, 어디 가든 몰래 따라붙는 게 훨씬 간단하고 직접적이겠네요.”

“더 효율적이고요. 그렇게 하면 적어도 허 비서님 말대로, 질투로 미쳐버린 스토커처럼 보이겠죠?”

기성은 눈을 크게 떴다.

항상 말도 조심스럽게 하던 이람이... 지금은 똑 부러지게, 딱 잘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성은 곧 상황을 이해했다.

‘어제... 사모님은 아이를 잃었지.’

‘그리고 그 시간에 대표님은 하유리 씨 곁에 있었어.’

이렇게 생각하자, 기성도 아이를 잃은 여자가 조금은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온순한 성격이라도, 그런 충격 앞에선 버틸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기성이 보기엔 그렇다고 해서 이람의 날카로움이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기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사모님이랑 말싸움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표님은 사모님과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이제 돌아가시죠.”

기성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람의 존재는 방해물일 뿐이며,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비할 이유도 없었다.

이람은 한 박자 멈추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 강제헌이랑 이혼했어요. 앞으로 내가 뭘 하든, 당신들이 간섭할 이유 없어요. 다신 저한테 명령하지 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람은 단호하게 돌아섰다.

똑- 똑- 똑-

굽 높은 힐 소리가 카페 바닥을 울렸다.

기성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았다.

‘진짜 어이가 없네. 대표님이 이혼 얘기를 그렇게 여러 번 꺼냈을 때...’

‘진짜 이혼한 적 한 번이라도 있었나?’

‘나한테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약간의 연기라도 해보시지.’

‘결혼반지는 여전히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그대로인데...’

‘거짓말을 하려면, 티 안 나게 하던가.’

기성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아.’

...

이람은 자리를 떠나자마자 민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다른 데서 만나자.]

원래는 민서를 만난 후에 들를 생각이었던 주얼리 샵.

하지만 지금은 더 기다릴 수 없었다.

...

주얼리 샵.

직원이 조심스럽게 핀셋을 들어 이람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살폈다.

“잠깐 움직이지 마세요.”

차가운 금속 소리가 들리고, 반지가 ‘딱’하고 끊어졌다.

결혼반지는 두 조각이 되었다.

이람은 무표정하게 그 조각들을 바라봤다.

이 반지는, 몇 해 전 결혼식 날 손에 끼워졌고, 그날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어머니는 온갖 민간요법과 의심스러운 약들을 들이밀었기 때문에 이람의 몸이 점점 붓고, 살이 쪘다.

그래서 어느새 반지는 손가락에 낀 채로 박혀버렸다.

‘언젠가 빼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잘라낼 줄은 몰랐네.’

직원은 말없이 반지를 저울에 올렸다.

“순도는 좋아요. 근데 잘랐으니까, 재활용 처리로 들어갑니다.”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박힌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했던 이람의 취향 그대로.

하지만 그 작은 조각 다이아몬드는 중고 시장에선 거의 가치가 없었다.

“회수 금액은... 48만 원 나옵니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순간, 민서가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야, 겨우 그 돈에 이걸 파는 거야? 진짜 이혼할 마음 먹은 거 맞긴 하구나.”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네가 지난 3년 동안 얼마나 강제헌한테 매달렸는데. 그런 네가 먼저 반지 자르고, 이혼 선언하고, 진짜... 이번엔 연기 좀 제대로네.”

이람은 아무 말 없이 미세하게 웃었다.

‘웃기지 마. 이건 연기가 아니야. 이제 진짜 끝내는 거야.’

긴 시간 억눌렸던 자신의 감정이, 잘린 반지처럼 조용히 정리되고 있었다.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제100화

    “그럼 뭐, 둘이 잘 되길 바라야지.”온라인의 여론이나 현실이나, 결국 한통속이라는 걸 이람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놀랍지도 않았다.민서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한편으론 이람이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고, 한편으론 강제헌과 하유리가 너무 역겨워서 화가 났다.‘그래도, 지금은 이람이가 중요하지.’‘쓸데없는 사람들의 말 때문에 또 상처받는 건 싫어.’민서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고,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이람은 진심으로 강제헌과 하유리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무심코 핸드폰을 열어 실시간 검색어를 눌렀다.둘의 이름은 대충 훑고 지나갔다.스크롤을 맨 아래까지 내려봐도 ‘서하준’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이 정도 규모의 자선 행사면 노출이 클수록 좋은데...’‘예씨 가문이라면 당연히 대대적으로 홍보했을 텐데...’하준처럼 생긴 사람이라면, 사진 한 장만 올라와도 단박에 실시간 검색어 1위감이다.그런데 온라인에는 사진 하나 없이 조용했다.‘자선 만찬에 그렇게 많은 기자들이 왔는데...’‘기사에 올라간 사진이나 영상도 다 검수된 거겠지.’‘결국 본인이 원치 않았다는 뜻이겠네.’하준은 원래부터 조용하고 절제된 사람이었다. 굳이 자신의 얼굴을 이용해서 이슈몰이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예씨 가문에서도 하준의 성향을 아는 만큼 억지로 노출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반면 강제헌과 하유리가 검색어에 오른 건, 명백히 제헌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진짜 온 세상에 알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나 보네.’‘그래, 그럼 나는... 마음으로라도 축하해 줘야지.’이람은 핸드폰을 끄고 조용히 일어났다.화장을 지우고 세수하며 마음도 같이 씻어냈다.강제은이 엉망으로 만든 드레스는 이미 버렸고, 새로 산 원피스는 벗어 세탁기에 넣었다.샤워를 마치고 나와 파자마로 갈아입은 이람은,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이제는 감정 낭비보단, 일이나 하자.’...재원과의 약속은 오후 세 시였다.이

  •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제99화

    [이건 그냥 가정이야. 현실에선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굳이 현실적인 반박은 필요 없어. 나는 그냥 네 생각이 궁금해서 묻는 거야.]민서가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서하준이랑 강제헌 사이에 어떤 혈연관계도 없다고 가정하자. 그런 상황에서 서하준이 너를 좋아한다면, 넌 어떨 것 같아?]현실과 분리된 상상은 결국 공상에 불과했다.이람은 그런 류의 ‘가정’들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하지만... 민서랑 이런저런 수다 떠는 건 괜찮지.’그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이람은 꽤 진지하게 말했다.“일단 첫 번째 가정은, 서하준이 나를 좋아한다는 거고, 두 번째는, 서하준이 강제헌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라는 전제지? 그 두 가지가 모두 성립된다면...”“글쎄, 서하준 같은 사람을 거절할 여자는 많지 않을걸? 잘생겼지, 부자지, 몸매도 좋지. 여자로서 바라볼 수 있는 외적 조건은 다 갖췄으니까.”민서가 기대하듯 물었다.[그래서? 너의 결론은?]이람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사람의 생각은 자기 경험에 따라 달라져. 민서야, 너도 알지? 내가 강제헌이랑 그 끔찍한 결혼을 겪고 나서, 가장 크게 바뀐 게 뭔 줄 알아?][연애관?]“맞아. 연애관이 완전히 바뀌었어. 친구는 괜찮아. 서로 좋은 감정 있으면 주고받으면 되지. 그런데 연애는, 이젠 난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려고 해.”“앞으로 내가 누굴 만나게 되더라도, 그 사람은 반드시 날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어줘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게 안 된다면, 그 사람은 나의 대상이 될 수 없어.”이람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단단한 확신이 있었다.“그러니까 네가 물은 그 가정, 서하준이 날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안 만난다고.”민서가 조용해졌다.이람은 말을 이었다.“같이 있은 시간은 짧지만... 내가 지금껏 느낀 바로는, 서하준이라는 사람은, 설령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기보다 상대를 우선으로 두는 성격은 절대 아니야.”민

  •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제98화

    이람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서하준은 자기 원칙이 확실한 사람이야.’‘자기 돈 아니면 절대 안 받지만, 자기 몫이라 생각하면 한 푼도 안 남기고 챙기지.’야식을 다 먹은 뒤, 이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장 용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하준이 소파에 기대앉은 채 말했다.“그냥 두세요. 그건 조 비서가 할 일이 아니에요. 정리하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이람은 그 말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절반 이상 정리한 상태였다.하준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기에 미리 손을 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어차피 여기까지 했는데...’결국 이람이 다 정리한 뒤, 쓰레기봉투와 하준의 외투를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안녕히 주무세요.”짧게 인사한 뒤, 그녀는 문을 열고 조용히 나갔다....하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잠시 멍하니 있다가 아까 재원이 보낸 메시지를 열어봤다.[아까 내가 이람 씨 바래다준다고 했더니, 넌 야식 다 시켜놨다며 갑자기 심심하다고 나가더라? 그 ‘갑자기’ 좀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냐? 솔직히 말해봐, 너 이람 씨 데려다주고 싶었던 거지?]하준의 답장은 짧았다.[응.][아, 이 여우 같은 놈. 내가 그럴 줄 알았어.]이어서 도착한 다음 메시지는 훨씬 길었다.[진짜 웃긴 건 뭔지 알아? 이람 씨가 아까 너한테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했잖아. 근데 넌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더라?][결국 내가 대신 대답해줬잖아. 넌 왜 그렇게 대답 하나도 안 하냐. 그러니까 너 혼자 사는 거야. 근데 또 그런 네가 갑자기 야식까지 시켜놓고, 뭐 하는 건데? 진심 뭐냐고.]하준의 답장은 여전히 간단했다.[아무 생각 없었어.]‘조이람 집이 옆이라서 그냥 데려다준 건데,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생각 없기는. 내일 이람 씨랑 테니스 약속한 거 알지? 근데 그 사람 테니스 처음이래.][초보자가 테니스 적응하는 거 얼마나 어려운지 너도 알잖아? 내가 가르칠게. 너는 옆에서 보기만 해.]하준은 타이핑을 멈췄다가, 한 박자 늦게 답을

  •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제97화

    하준은 신발을 갈아 신지 않았다.그걸 본 이람은 다시 집에 가서 덧신을 챙겨올 생각을 접었다.이 집엔 벌써 두 번이나 온 적이 있었다.그때마다 방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아마 매일 가사도우미가 안팎으로 꼼꼼히 청소하는 듯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예전엔 이람 혼자였고, 오늘은 하준도 같이 있었다.‘묘하게 낯설어... 근데 또, 못 견딜 정도는 아니고.’이람은 가장 먼저 하준의 정장이 담긴 종이백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손에 들고 있던 야식 봉투를 식탁 위로 옮겼다.자연스럽게 포장을 풀고, 반찬들을 정리했다. 마치 늘 하던 일처럼 익숙한 동작이었다.하준은 손을 씻고 돌아와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그걸 본 이람은 조용히 말했다.“대표님, 맛있게 드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딱 그 정도 인사였지만, 그 순간 하준의 목소리가 가볍게 걸렸다.“이렇게 많은데, 나 혼자 못 먹어요.”이람이 일부러 양을 절반으로 줄이긴 했지만, 하준이 아까 시킨 양 자체가 워낙 넉넉했기에 결국 지금 이 양도 두 사람 분량 이상은 됐다.‘그냥 가고 싶은데...’이람은 잠깐 머뭇거렸다. 거절해도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너무 여러 번 사양하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어차피 밥 한 끼잖아.’하준은 이미 젓가락을 들었고, 더는 이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이람은 말없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준비된 일회용 젓가락을 뜯었다.자선 만찬 때 거의 먹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정신없이 집중한 업무가 이어졌다.이람도 꽤나 배가 고팠다. 한 입 두 입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다 말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심지어 이람은 편안했다.그 반면 하준은 음식들을 하나하나 건드리며 입에 맞지 않는 것들은 피했다.‘입맛에 안 맞는 건가?’이람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방금 시킨 메뉴 대부분은 하준이 전에 시킨 것과 같았다.자신이 잘못 기억했을 리는 없었다.그럼 남은 것들은 유재원이나 다른 사람들 입맛에 맞춰

  •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제96화

    하준의 시선은 이미 오래전에 이람에게서 떨어져 있었다.대신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 푸짐하게 쌓인 음식들을 가리켰다.“식사하죠.”재원이 눈치를 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이람 씨도 같이 먹어요.”이람은 무심한 듯 앉아 있는 하준의 얼굴을 살폈다.표정도 없고, 말도 없다.‘뭘 생각하는지 도통 모르겠네.’그래도 별말 없는 걸 보니, 아까 그 얘기는 일단 넘어간 것 같았다.이람은 테이블 위 음식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식사는 편히 하세요.”갑작스러운 말에 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벌써 가요? 약속 있어요?”이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재원이 하준을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서 대표님? 이람 씨 가지 말고 밥 먹고 가라고 해.”그 말에 하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이람 씨는 하준이 말만 듣는단 말이지.’재원은 슬며시 웃었다.이람은 자리에 일어서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다들 편히 드세요. 오늘은 감사했습니다.”그에 맞춰 재원도 따라 일어났다.“아유, 뭐가 그렇게까지 감사해요. 솔직히 제가 나섰어도 강제은을 혼쭐낼 수 있었는데, 우리 하준이 더 적격이니까 양보한 거고요. 아무튼 밥은 먹고 가요.”이람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내일 뵐게요.”‘아, 내일 테니스 약속 있었지?’재원은 그제야 기억났고, 더는 붙잡지 않았다.“그러면 제가 바래다줄게요.”재원은 원래 그런 식으로 사람 챙기는 데 익숙한 남자였다.“아니에요. 금방 택시 부르면 되니까요.”“이 밤에 택시 위험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남자들이 너무 다정한 것도 귀찮다니까...’이람이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는 순간, 하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리고 말도 없이 먼저 문 쪽으로 향했다.재원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어? 어디 가?”하준은 짧게 대답했다.“심심해서. 들어가려고.”‘뭐야, 방금 음식 시켜놓고 왜 갑자기 나가?’하준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자, 이람도 세 사람에게 가볍게 손을

  • 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제95화

    “이람 씨, 진짜예요. 저번에도 서 대표님이 겨우 한 판 이겼거든요? 근데 우리 셋이 그다음에 한 판씩 크게 이겨서 서 대표님이 힘들게 딴 거 전부 뺏겼어요. 결국엔 마이너스 됐죠.”재원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그 말투엔 약간의 놀림과, 은근한 통쾌함이 섞여 있었다.이람은 조용히 하준을 바라봤다.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말이 없다는 건... 진짜라는 뜻이었다.“계속하죠.”이람이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봐주는 거 없어요.”연훈이 단호하게 선언했다.세진도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우리 셋 다, 젠틀한 척 안 할 거니까 그리 아세요.”재원은 옆에서 분위기를 띄웠다.하준이 드물게 이람에게 목표치를 줬다는 게 신기한 듯, 그 자체를 재미 삼아 즐기고 있었다.‘솔직히 이람 씨가 계속 지면 더 오래 놀 수 있잖아.’그게 재원의 솔직한 계산이었다.세 사람의 도발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람은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괜찮아요.”재원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어머, 어머! 서 대표님! 조 비서님이 저희한테 도전장 던졌는데요? 오늘은 우리 셋 중 누구한테 거시겠어요? 조 비서님? 아님 우리 셋?”하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지 않았다.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그러자 이번엔 연훈이 살짝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이람 씨, 미안하지만... 난 안 져줄 거예요.”세진도 곧바로 분위기에 합류했다.“나도. 오늘만큼은 선 긋고 갑시다.”이람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는 예전엔 오로지 익스트림 스포츠에서만 느끼던 그 짜릿한 긴장감이 다시 떠오르는 걸 느꼈다.‘승부욕이 생기면... 아무 생각도 안 들어.’‘그게 나한테 제일 좋은 상태야.’그 순간, 이람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만 있었다.‘이겨야 해.’그 감정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좋았다.마치 현실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는 듯한 집중.이람은 카드를 섞는 세진의 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덤벼요.”하지만 첫판이 끝난 뒤, 이람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