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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Penulis: 강노을
이람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끼웠던 반지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흉하다. 진작 뺐어야 했는데.”

민서는 그 말을 듣고, 이람이 이번엔 진심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물론 백 퍼센트 확신할 순 없었지만, 지금 이람의 태도는 예전과는 분명 달랐다.

굳이 더 비꼴 필요는 없었지만... 또 입이 근질거렸다.

“네 사랑, 내 한 끼 밥값만도 못 하네.”

이람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럼 가자. 오늘 내가 살게.”

민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한쪽 눈썹을 올리고 이람을 바라봤다.

“내 시간 비싸. 밥 먹기 전에 먼저 말해. 넌 왜 날 부른 건데? 어디 한번 들어나보자, 내가 너랑 밥 먹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 좀 하게.”

이람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중단했던 논문, 다시 쓰려고. 실험 데이터 돌릴 수 있게, 네 실험실 좀 쓰자.”

요즘 업계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다.

이람은 그 흐름에 맞춰 논문의 방향도 바꿔야 했다.

그래서 전화로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그냥 졸업하고 논문 냈으면...’

민서라면 분명 이렇게 말할 테니까.

예상대로 민서는 비웃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갑자기 생각난 거야?”

“진심이야.”

민서는 이람을 조용히 관찰했다.

산업 최전선에 있는 사람답게, 흐름에 민감한 그녀는 최근 시우대학교 한빈 교수의 프로젝트가 국내외 굵직한 테크 기업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몰랐다. 한빈 교수팀이 요즘 붙잡고 있는 기술적 난관을... 이람은 이미 3년 전에 풀어냈다는 사실을.

완성된 Lugi-X.

그 핵심 소스는 지금 민서 회사의 서버에 있다.

이람은 Lugi-X 언어 기반 대형 모델의 유일한 개발자였다.

그가 해결해낸 기술적 허들은, 연구팀 하나가 몇 년간 붙잡고도 못 풀 정도의 난이도. 이람은 민서가 본 인물 중 단연 최고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 천재가 사랑에 빠지더니,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고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비서 일을 하며 커피나 나르고 있다.

‘이해가 안 돼. 이런 재능을 갖고도... 왜 스스로를 버리냐고.’

민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3년을 손 놓았잖아. 그 논문, 지금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수정할 거야. 교수님 나오시는 대로 찾아가서, 연구 방향 다시 정하고, 통과되면 이어서 계속 진행할 생각이야. 교수님이 날 만나주신다면.”

“그럼 너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걸. 그분 요즘 나라 위해서 몸 바쳐 연구 중이시라, 웬만해선 안 나오셔.”

“기다릴 수 있어. 더 이상, 강제헌이 날 사랑해주길 바라지 않아. 시간은 지금 내 편이야.”

민서는 뭐라 말하려다 그만뒀다.

사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몇 년을 쉬었어도, 이람이 하려는 연구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거의 없었다.

‘이람은... 그냥 넘사벽이지.’

민서는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그 밥, 같이 먹어줄게.”

말은 시니컬했지만,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안 따라갈 사람이 따라나선다는 건, 민서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람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영광이네, 진 대표님.”

...

고지후는 한 시간 전에 연애를 시작한 SNS 스타 여자친구와 강남 거리를 걷고 있었다.

데이트 기분에 취해 있던 그 순간, 뜻밖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 저 사람?’

지후는 고개를 돌려 뒤따르려 했지만, 벌써 사라진 뒤였다.

‘그 사람’이 들어간 건 한 주얼리 샵이었다.

지후는 여자친구에게 자연스럽게 말했다.

“여기 들어가자. 너 반지 좋아하잖아.”

여자친구가 진열대를 구경하는 사이,

지후는 직원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방금 나간 여자분, 무슨 반지 팔았는지 기억 나세요?”

직원이 별 의심 없이 답해줬고, 이야기를 들은 지후는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제헌 형, 나한텐 거짓말까지 하네?’

‘형수님이 아침부터 순하게 돌아갔다면, 결혼반지를 잘라 팔겠냐고.’

지후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단톡방에 메시지를 뿌렸다.

[오늘 밤 무조건 모여. 제헌 형도 포함임. 내가 한잔 살게.]

...

밤이 되자, 단골 바에 하나 둘 친구들이 모였고, 술이 돌자 분위기는 빠르게 달아올랐다.

제헌이 나타난 건, 이미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지후는 제헌을 보자마자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야야, 다들 들었어? 이람 형수님이 갑자기 결혼반지를 팔았다네?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사실 이런 모임에서는 늘 한두 마디씩 이람을 소재로 장난이 오갔다.

처음엔 다들 제헌 눈치를 봤지만, 곧 알게 됐다.

제헌은 그런 얘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눈썹 하나만 찌푸려도 다들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겠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무도 웃기 전에, 제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여주려고 쇼하는 거지.”

톤은 여전했지만, 의미는 달랐다.

카페에서 이람이 했던 말.

기성이 그 말 전부를 전했고, 제헌은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짜지.’

기성과 마찬가지로, 이람이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한 건... 자극을 받아서라고 생각했다.

결혼반지까지 자른 건... 그녀 나름대로의 ‘퍼포먼스’라는 것.

“보여주기용 쇼라... 이람 형수님이라면 그럴 만도 하죠.”

“근데 그런 수작, 제헌 형한테 안 통하잖아요. 결혼하고 반지 한 번도 안 낀 형 아니었어요?”

지후가 헛웃음을 치며 맞장구쳤다.

“특정 상황에서는 꼈겠죠. 강 회장님 앞에서는 꼈잖아요... 안 그랬어요?”

제헌이 무심하게 흘긴 눈빛에, 지후는 즉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헛기침했다.

“어... 어쨌든! 단 한 번도 안 꼈다는 걸로 정정합니다!”

그제야 제헌의 얼굴에서 묘한 불쾌함이 사라졌다.

지후는 민망한 듯 입꼬리를 씰룩이며, 조심스레 또 물었다.

“아, 근데 나중에 보니까 형수님이 다른 주얼리 샵도 들르던데요? 혹시 새 커플링 맞춰서 형한테 줄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형은... 낄 거예요?”

제헌은 아무런 반응 없이 잔을 들었다.

그는 말이 없었지만, 긴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눈동자에 살짝, 아주 미세하게 부드러운 감정이 번졌다.

차가운 인상과 다르게 그는 ‘제헌’이라는 이름처럼 절제된 사람이다.

항상 단정하고 이성적인 태도.

그런 그에게서 보이는 이따금의 ‘온기’는 매우 보기 드문 아이템이었다.

지후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 시선 끝엔, 제헌의 핸드폰 화면.

잠깐 열린 카카오톡 창.

그 안에는 ‘하유리’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하지만 제헌은 바로 핸드폰을 잠그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표정엔 노골적인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날 부른 이유가 이딴 쓸데없는 얘기 때문이야?”

지후는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이람이 한 달이고 집에 안 들어와도 제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걸.

무슨 짓을 하든, 제헌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관심 없다는 건, 그 어떤 ‘쇼’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지후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형, 내가 이긴 건 아닌데 말이죠. 그래도 형이 먼저 진 거니까, 밥은 형이 사는 걸로?”

그 말은 몇 주 전 내기였다.

이람이 언제 집에 돌아올지를 두고 했던 게임.

제헌은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

“시간 정해.”

“유리 누나 생일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날 보자. 다 같이 시끌벅적하게.”

제헌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말 안 해도, 다 초대할 생각이었어.”

지후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와, 형 진짜 준비 다 했네요? 이래서 사람 마음이란 건 참... 다 티 나는 거잖아요.”

‘누굴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 형은 정말 한 치도 숨기는 것이 없구나.’

지후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람의 생일이 딱 한 달 전쯤이었다.

그날, 자신과 제헌은 단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제헌은 술이 꽤 올랐고, 이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 전화는 지후가 대신 받았다.

“여보세요?”

[바쁘세요? 내 생일... 지나버렸네요.]

목소리는 조용했고, 감정은 눌러져 있었다.

그때가 새벽 1시.

지후는 당황하며 말했다.

“어, 형수님... 저 지후예요. 죄송해요, 형이 좀 많이 마셔서요. 그, 생신 축하드려요.”

전화 너머, 짧은 정적.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

[아, 네. 감사합니다. 지후 씨, 제헌 씨 좀 챙겨주세요. 술 취했으면, 차 키는 절대 주지 말고요.]

단 한 마디의 원망도 없었다.

남편이 생일을 잊어버렸는데도.

지후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났다.

‘이람 형수... 진짜 연애 고수네.’

‘아니면 그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바보처럼 구는 사람.’

...

새벽.

제헌은 지후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자동처럼 와인색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거실을 지나쳤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늘 익숙한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헌은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고, 계단을 올라 2층 복도 끝에 시선이 닿았다.

불이 꺼진 채 어둠 속에 잠긴 방.

손님방...

즉, 이람의 방.

안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2층 구석에 위치한 그 작은 방.

벌써 하루가 지났다.

이람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제헌은 별다른 표정 없이 몸을 돌려 조용히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월요일 아침.

출근일.

제헌은 단정하게 차려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순심은 분주하게 주방과 식탁을 오가며 정성스레 한 상 가득 아침 식사를 차려놓았다.

제헌은 음식들을 스쳐보듯 바라봤다. 맛이 없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래도 의자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순심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람이 집을 비운 이틀 동안, 이순심의 하루하루는 눈치로 시작해 눈치로 끝났다.

제헌은 기본적으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고용인이나 직원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고, 막무가내로 화를 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제헌이 풍기는 분위기는 단순한 ‘태도’ 이상이었다.

제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순심 같은 소시민은 기가 눌릴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음식은 충분히 먹을 만했지만, 이람이 해주던 아침식사에 비하면 어딘가 심심했다.

이람 없이 불과 이틀 지났을 뿐인데, 제헌은 문득 이람이 차려준 아침 식사가 떠올랐다.

‘손맛이라는 게 진짜 있긴 있나?’

젓가락질을 멈추던 제헌이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 전화 왔었나?”

식탁을 정리하려던 이순심은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덜컥 내려놨다.

“네... 네에?”

제헌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사모님 말씀인가요?”

이순심은 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아니에요! 안 하셨어요!”

제헌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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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배자의 경고는 결국 자기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만 흔들 수 있다.윤정에게는 기성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윤정은 스스로 더 많은 불확실성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제헌의 냉정함, 주위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는 태도.윤정이 모를 리 없었다.기성이 내뱉은 독한 말들은 결국 자기 위안을 위한 발버둥에 불과했다.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거기에 흔들릴 이유도 없었다.기성의 경험이 정말 참고할 만한 것이었다면, 윤정은 기성보다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고, 더 일찍 경계했을 것이다.기성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면, 윤정은 지금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이람은 분명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뒤로는 멈출 수 없게 흘러갔다.하준의 움직임은 거셌고, 이람의 머리는 침대 끝에 닿을 듯 말 듯했다.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은 것도, 이람과 나란히 누워 있다가 일이 생길까 봐 일부러 그랬던 배려였는데,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옷은 이미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커튼의 차광은 완벽했지만,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은은한 조명만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방 안의 모든 것이 또렷했다.이람은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얼굴을 손으로 가리자 바로 다음 순간 손이 붙잡혀 내려갔다.부끄러워할수록 하준은 더 보고 싶어 했다.그리고 하준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이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됐다.남자의 흥분 지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하준은 이람의 붉어진 얼굴과 초점을 잃은 눈을 바라보다가 숨을 낮게 삼켰다. 몸이 다시 내려오며 이람의 귀 옆에서 물었다.“어때? 자기야?”이람은 물론 좋았다. 이런 일은 서로 잘 맞는 사람과 해야 그런 만족한 느낌이 있었다. 틀린 사람과 하면 고통만 남는다.민서나 나솔이 침대에서 거리낌없었던 것도, 결국 그 이유였을 것이다.하지만 하준은 보통의 남자와는 달랐다.체력도, 감당해야 할 시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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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헌, 너 같은 인간을 만난 쪽이 그냥 재수 없는 거지.’밖에서 지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피... 안에서 죽은 거 아니죠?”곧이어 제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나한테 집안 욕까지 했는데, 그럼 죽었겠냐?”지후가 물었다.“진짜로 죽일 뻔한 거죠?”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고, 지후가 안으로 들어왔다.기성은 바닥에 앉은 채로 지후를 올려다봤다.“앞잡이 새끼.”지후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별로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이 정도면 굳이 내가 손댈 필요도 없겠네.”기성은 지후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기분 좀 풀어주러 온 줄로만 알았다. 지후가 이람에게 감정이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기성은 비웃듯 말했다.“언젠가는 고 대표도 강제헌한테 배신당하는 기분을 알게 되길 바란다.”지후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그래? 그럼 기대해 볼게.”사실 지후는 이미 제헌을 배신해 본 적이 있었다.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기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끼리끼리였다.제헌도, 지후도 결코 선한 인간들은 아니었다. 다만 지후의 냉정함은 완벽한 예의와 부드러운 태도 아래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을 뿐이다.마지막으로 상황을 정리하러 들어온 사람은 기성의 오랜 경쟁자 윤정이었다.윤정은 기성이 직접 끌어온 인재였다. 그런 윤정 손에 오늘 이렇게 당하게 될 줄은... 기성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윤정은 방 안에 들어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성의 처참한 꼴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없이 기성을 바라봤다.승리 뒤에 오는 감각을 충분히 음미하는 표정이었다.한 번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감각은 너무도 달콤했다. 윤정은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를 꺾는 경험은, 특히 그녀 같은 여자에게 더 강렬하게 남았다.기성의 몸에 묻은 핏자국조차 윤정은 싫지 않았다. 윤정이 입을 열었다.“난 네가 KU그룹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하려면, 내가 더 뭘 해야 할 줄 알았어. 근데 오늘 알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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