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문제없으면 다행이네요.”이내 옆에 있던 펜을 집어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인했다.그러고 나서 배지호를 향해 말했다.“이혼 소송에 관해서 잘 좀 부탁드릴게요.”배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따가 미팅이 있어서 오후에 경민준 씨한테 연락해서 이혼 소송 진행 상황을 공유받도록 할게요.”“네.”마침 점심시간도 다가와서 배지호와 밥을 먹은 다음 연미혜와 김태훈은 집으로 가서 논문 작업을 계속했다.두 사람이 한창 바쁜 사이 경문 그룹에 돌아간 경민준이 사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던 중 휴대폰이 울
하승태는 사실 빵집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연미혜랑 헤어진 이후에도 가게에 가지 않았다.그리고 차에 올라타 한참을 망설이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범규야, 나 왔어. 저녁에 다시 공항 가야 하니까 민준한테 연락해서 시간 되냐고 물어봐 줘. 만약 바쁘다면 이따가 지유 보러 병원에 같이 다녀오자.”정범규는 깜짝 놀랐다.“뭐라고? 언제 돌아왔는데?”하승태는 대답하는 대신 말을 이어갔다.“일단 지유한테 안부 전화부터 하고 이따가 시간 괜찮은지 확인해줘.”정범규는 본인이 직접 경민준과 임지유에게 연락해서 물어보면 되지 않냐
그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으로 연미혜에게 전화를 걸었다.연미혜는 발신자를 보자마자 종료 버튼을 눌렀다.경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아빠 전화도 안 받네.”“혹시 바빠서 못 본 걸까요?”엄마가 아빠 전화를 모른 척할 리 없었다.“그럴지도.”말을 마치고 나서 정장 외투를 걸치고 검은색 코트를 챙겼다.“아빠는 이만 가볼게. 놀러 가고 싶으면 경호원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하지만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에요...”비록 간섭받기 싫었지만 가끔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경다솜은 볼을 감
하지만 염성민처럼 일정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정보를 입수하면 자기 배부터 채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이는 또한 상류사회의 법칙이기도 했다.김태훈도 어느 순간 납득이 갔다.이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물론 프로젝트를 더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협력사가 있어야 해. 다만 요즘 염성민이 눈에 영 거슬려서...”연미혜는 김태훈이 염성민을 못마땅해하는 이유가 임지유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정작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다.곧이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이익을 최대화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어요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연미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사람을 바라보았다.김태훈이 욕설을 중얼거렸다.“젠장,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반면, 김태훈을 발견한 그들은 만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임해철이 웃으며 말했다.“김 대표님, 또 뵙네요.”김태훈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그러네요.”“이것도 인연인데 합석하실래요?”안 그래도 방금 김태훈에게 연락하면서 같이 식사하자고 제안했는데 이왕 마주쳤으니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김태훈이 거절했다.“아니에요. 지금은 사적인
넥스 그룹은 일이 밀렸다.그날 저녁 연미혜와 김태훈은 밥을 먹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수요일 아침, 두 사람이 미팅하고 있는 와중에 김태훈의 비서가 들어와서 하승태가 왔다고 전했다.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이유는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하승태의 신분과 지위로 직접 걸음까지 했는데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결국 마지못해 연미혜를 향해 말했다.“미팅 계속 진행해. 잠깐 만나고 올 테니까.”연미혜가 대답했다.“네.”김태훈이 도착했을 때 하승태는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혼자 나타난 그를 보자 심연 같은 눈동자
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혼자만 아니라면 누구랑 가든 상관없었다.경민준은 하승태에게 연락해서 하루 동안 경다솜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하승태가 흔쾌히 대답했다.“그래.”토요일, 하승태는 경다솜과 수연을 데리고 매직 킹덤으로 향했다.비록 놀이기구들이 다양했지만 재미있든 신기하든 짜릿하든 간에 경다솜은 시큰둥했고 예전만큼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하승태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줬다.그리고 연미혜를 쏙 빼닮은 경다솜을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기분이 안 좋아?
물론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경민준은 찻잔을 들어 올리고 한 모금 마셨다.“비록 양육권은 내가 가져갔지만 합의서에 엄마가 원할 때 무제한으로 언제든지 아이를 만나도 된다고 명시되어 있어.”이는 하승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아이들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사람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경민준이 문득 말했다.“요즘 넥스 그룹에 다녀왔다며?”하승태가 흠칫 놀랐다.“응.”그리고 되물었다.“넌 협력할 의향 없어?”“아직 안 정했어. 시간이 있으니까 급한 건 아니야.”“하긴.”...연미혜는 계속해서 논문을 작성했다.주말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임지유, 경다솜과 함께 일찍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하승태와 수연도 도착했다.경다솜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승태 삼촌, 안녕하세요!”“수연아, 와줘서 고마워!”수연이 경다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이제 곧 경기 시작되잖아. 다솜아, 많이 긴장돼?”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또렷하게 말했다.“긴장되긴, 당연히 긴장 안 되지!”하승태는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수연이를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것이었다.경민준이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말했다.
김태훈의 부모님이 자리를 뜬 뒤, 경민준이 물었다.“사모님이랑 얘긴 잘했어?”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 고마워.”임지유는 속으론 생각했다.‘방금 사모님 얼굴 보니까 연미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던데....’사실 세인티와 넥스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훈이 미리 설명을 해뒀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임지유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울린 전화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를 미리 녹음해 두고, 자리를 비켜선 후 멀리서 경민준과 임지유 쪽을 슬쩍
임지유는 며칠은 기다려야 소식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경민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김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하신대. 우리도 같이 가보자.”그 말에 임지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다음 날 저녁, 경매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은 임지유를 데리고 곧장 김태훈의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접 임지유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김태훈의 부모는 이미 경민준과 연미혜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지현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염성민이 다시 물었다.“성민아, 철호 아저씨나 아버지 말고,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욱 교수님 연락처 아는 사람 또 없어?”“없는 것 같아.”지현승이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너 전에 임지유 씨가 유명욱 교수님을 만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지유 씨는 교수님이 연락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임지유 씨가 알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염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