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는 휴대폰을 확인한 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받았다.“그래. 알겠어.”“저희가 계속 보관해 둘까요?”“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상대방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그와 함께 식사하던 임지유가 물었다.“민준 씨, 회사에 볼일 있어?”경민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답했다.“아니야. 경매장에서 온 전화야.”임지유가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경다솜이 끼어들었다.“경매장이 뭔데요?”경민준은 식기를 들고 고기를 잘라 한 조각 먹으며 대답
‘경민준이 지유 씨를 향한 마음은 의심할 필요도 없어. 그러니 그 장면은 단순한 오해였을 가능성이 커!’...금요일 아침, 연미혜가 막 일어나자마자 허미숙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일요일 아침에 함께 지관식의 그림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했다.허미숙은 동양화의 거장인 지 화백, 지관식의 열렬한 팬이었다.지관식이 마지막으로 개인 전시회를 연 건 십여 년 전이었기에, 좀처럼 보기 힘든 기회였다.연미혜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네. 일요일에 같이 가요.”전화를 막 끊자마자, 이번엔 경다솜에게서 전화가 왔다.월요일, 학교에서 열린
연미혜는 허미숙의 팔을 꼭 붙잡았고, 허미숙은 담담하게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괜찮아.”그들이 허미숙이 올 걸 알고 있었다면 허미숙도 그들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김태훈이 말했다.“할머니, 제가 먼저 들어가서 화백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미혜야, 할머니를 모시고 같이 가자.”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허미숙을 지관식에게 소개해, 그녀가 우상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하지만 허미숙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야.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진
염성민은 아까 임해철이 말한 대로, 오늘 임지유와 경민준도 올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래. 할아버님 이야기 끝나시면 문자 하나 남겨줘.”“알겠어.”염성민과 윤신재는 먼저 전시장 밖으로 나왔다.마침 그들이 나오는 순간, 하승태와 정범규도 도착했고,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사람들이 앞다투어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하승태는 임해철과 악수를 나누었다.정범규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민준이랑 지유는? 아직 도착 안...”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눈앞에
하승태가 연미혜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손아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녀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는 정범규에게 물었다.“승태 오빠가 왜 저 여자랑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정범규가 답하기도 전에, 손아림은 이미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러나 손수희가 팔을 가볍게 붙잡으며 나직이 말했다.“그냥 사업에 관한 이야기 중일 거야.”“사업에 관한 이야기요?”손아림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콧방귀를 뀌며 한껏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억지로 감정을 눌렀지만, 시선만은 계속 연미혜와 하승태 쪽을 향해 있었다.
“승태 오빠!”하승태가 돌아오자, 손아림이 다소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하승태는 무덤덤하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한편, 경민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해지자, 손수희가 말했다.“지유는 잠깐 전화 받으러 밖에 다녀온다고...”“알겠습니다.”경민준이 대답하자마자, 전시장 안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바로 지관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와 함께 지철호, 지현승 등 지씨 가문 사람들도 동행하고 있었다.많은 이들이 그의 등장을 주목했다.지관식이 앞으로 나서자, 주변이 조용해졌고, 이윽고 인사
임지유는 공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과찬입니다.”지관식은 하승태, 염성민, 그리고 지현승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너희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야지.”그때 마침, 지철호가 연미혜와 김태훈을 데리고 이쪽으로 왔다. 그는 지관식을 향해 말했다.“아버지, 여기는 김씨 가문 어르신의 손자입니다. 현재 운영 중인 넥스 그룹이 최근 크게 성장했고 앞으로 국가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지원할 핵심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네요.”그러고는 연미혜를 소개했다.“이쪽은 넥스 그룹의 핵심 기술 개발자 연미혜 씨입니다. 과학 기술 분야에서 귀한
잠시 후, 지관식은 다시 한번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뒤, 복도를 따라 자신의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갔다.연미혜, 김태훈, 경민준, 하승태, 그리고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사람들도 함께 그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 들어간 사람이 많았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사람들도 함께 있었기에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정원과 긴 정자에는 손님들이 자리를 잡았고 도우미들이 다과와 차를 내왔다.지관식은 허미숙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미숙뿐만 아니라, 지관식에게는 동양화에 조예가 깊은 두 명의 친구가 더 있었다. 대화가 무르익자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임지유, 경다솜과 함께 일찍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하승태와 수연도 도착했다.경다솜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승태 삼촌, 안녕하세요!”“수연아, 와줘서 고마워!”수연이 경다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이제 곧 경기 시작되잖아. 다솜아, 많이 긴장돼?”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또렷하게 말했다.“긴장되긴, 당연히 긴장 안 되지!”하승태는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수연이를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것이었다.경민준이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말했다.
김태훈의 부모님이 자리를 뜬 뒤, 경민준이 물었다.“사모님이랑 얘긴 잘했어?”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 고마워.”임지유는 속으론 생각했다.‘방금 사모님 얼굴 보니까 연미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던데....’사실 세인티와 넥스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훈이 미리 설명을 해뒀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임지유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울린 전화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를 미리 녹음해 두고, 자리를 비켜선 후 멀리서 경민준과 임지유 쪽을 슬쩍
임지유는 며칠은 기다려야 소식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경민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김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하신대. 우리도 같이 가보자.”그 말에 임지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다음 날 저녁, 경매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은 임지유를 데리고 곧장 김태훈의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접 임지유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김태훈의 부모는 이미 경민준과 연미혜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지현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염성민이 다시 물었다.“성민아, 철호 아저씨나 아버지 말고,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욱 교수님 연락처 아는 사람 또 없어?”“없는 것 같아.”지현승이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너 전에 임지유 씨가 유명욱 교수님을 만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지유 씨는 교수님이 연락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임지유 씨가 알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염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
염용석이 도와줄 생각이 없자, 염성민은 직접 유명욱에게 연락하려 했다.하지만 문제는, 그에겐 유명욱의 연락처가 없었다.결국 염용석에게 연락처를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돌아온 답장은 단 두 글자였다.[꿈 깨.]반응할 틈도 없이, 염용석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철호 아저씨 쪽에도 내가 이미 얘기해 뒀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마.]염성민은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진심으로 화가 치밀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곧장 전화를 걸었지만, 염용석은 더 이상 받지 않았다.‘아버지도, 철호 아저씨도 이 일을 도울 수 없다면 누구를 찾아야
아직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염용석이 먼저 말을 잘랐다.“그래서 또 김태훈 대표가 연미혜 편 들어서, 임지유를 괴롭혔다는 거냐?”너무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에 염성민은 순간 놀라서 되물었다.“아버지, 어떻게 아셨어요? 무슨 얘기 들으신 거예요?”“들은 건 없어. 그냥 짐작한 거다.”염용석은 해탈한 듯 나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잘 생각해 봐라. 너랑 연미혜, 김태훈은 나 때문에 어렵게 얼굴 맞대고 일하는 사이인데, 서로 대놓고 엇나갈 일이 뭐 있겠냐. 네가 일로 문제를 일으킬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괜히 너만 콕 집
김태훈은 다리를 꼬고 앉아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교수님께서 어떤 이유로 달가워하지 않으실 거란 말씀이죠? 제가 여자한테 눈이 멀어 이성도 잃고, 옳고 그름도 구분 못 하게 됐다는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아주 잘 알고 있네!’염성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론 내지 않았다.하지만 김태훈은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근데 말이죠, 제가 보기엔 그렇게 이성 잃고 분별 못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염성민이 반박할 틈도 없이, 김태훈은 곧바로 말을
김태훈의 변호사는 지난주 세인티와의 계약 해지를 논의하기 위해 직접 회사를 찾았지만, 결국 협의는 결렬되었고 넥스 그룹은 그날 바로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그 무렵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세인티에서 벌어진 마찰은 업계에 이미 소문이 퍼진 상태였고, 당시 김태훈은 지방 출장을 떠나 있었기에 자리에 없었다.김태훈과 아직 직접 대면하지 못했기에, 임지유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보였다.월요일 아침, 출근한 연미혜는 회사 1층에서 다시 임지유와 마주쳤다.두 사람은 서로를 보는 순간, 눈길만 짧게 마주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