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다솜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더 이상 연미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결국 임지유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염성민은 이제 자신도 갈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떼려 했지만 그 순간, 시야 한쪽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연미혜였다.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염성민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잠시 머뭇거린 그는 애써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그러나 연미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임지유와 경다솜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그 눈
경민준과 경다솜이 막 별장으로 돌아온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경민준은 전화를 받았다.잠시 후, 그는 전화를 끊고 방금 벗었던 외투를 다시 걸쳤다. 함께 계단을 오르던 경다솜을 보며 말했다.“증조할머니께서 실수로 넘어지셔서 다치셨대. 지금 병원에 계셔서 가봐야겠다. 너는 일찍 자.”경다솜은 걱정스럽게 물었다.“나도 증조할머니 보러 가면 안 돼요?”“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내일 방과 후에 가자.”“알겠어요...”경민준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밖으로 나섰다.그때, 경다솜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그녀는 얼른
그날 밤, 경민준은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경민준의 어머니 심여정과 경민아 등이 차례로 병원에 도착했다. 경민준이 밤새 병실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우선 그에게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권했다.경민준은 노현숙에게 말했다.“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하지만 노현숙은 그를 무시했다.경민준은 병원을 나서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한 시간여 후,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사람들은 프로젝트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임지유에게 연락했다.그녀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의 뜻이에요. 어젯밤
연미혜는 경다솜을 보고도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학교 끝나고 바로 온 거야?”“네!”경다솜은 그녀를 보자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병실을 향해 소리쳤다.“외증조할머니!”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허미숙이 먼저 나왔고, 곧이어 경민준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병실에 온 연미혜와 허미숙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허미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그를 스쳐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미혜 역시 한 번 시선을 준 후 곧바로 관심을 거두었다.경다솜이 무언가 하고
경다솜은 한참 연미혜 품에 안겨 있다가, 문득 한쪽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던 경민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아빠, 나 여기서 밥 먹고 싶어요. 우리 포장해서 여기서 같이 먹으면 안 돼요?”경민준은 잠시 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기분이 좋아진 경다솜은 더욱더 연미혜에게 바짝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허미숙과 노현숙은 여전히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연미혜는 옆에서 가끔 대화에 한두 마디 정도 끼어들 뿐, 곁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다솜은 점점 나른해졌는지 연미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엄마,
연미혜는 평온한 얼굴이었다.‘경민준 기억력이라면 이 정도쯤이야 기억하고도 남지. 굳이 저렇게 준비까지 한 건, 그냥 할머니를 보러 와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일 뿐이겠지. 별 다른 뜻은 없을 거야.’식사가 끝난 뒤에도 연미혜와 허미숙은 한 시간쯤 더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시간이 늦었기에 노현숙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경민준에게 당부하듯 말했다.“너도 다솜이랑 같이 들어가 봐라.”“네. 내일 아침에 다시 들를게요.”경민준은 그렇게 말하고 연미혜 일행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 경
경다솜이 창가 쪽으로 달려가더니 창밖을 보고 외쳤다.“어! 아빠예요! 엄마, 얼른 아빠 들어오시게 해줘요!”연미혜는 눈을 내리깔았다.“알았어...”연씨 가문의 다른 가족들도 경다솜과 연미혜의 대화를 듣고 뜻밖의 방문자 소식에 잠시 놀랐지만, 경다솜이 있는 자리에서 굳이 연미혜에게 경민준이 아침부터 왜 찾아왔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잠시 뒤, 경민준이 도착하자, 연미혜가 마중 나가며 물었다.“우리 할머니 모시고 병원 가려고 온 거야?”“맞아.”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알겠어.”경민준은 대
경민준이 꽃을 받으려 손을 내밀자, 연미혜는 마지못해 안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정범규나 하승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장 침대 쪽으로 걸어가 노현숙에게 물었다.“할머니, 지금은 좀 어떠세요?”“아직 조금 아프긴 한데... 견딜 만해.”막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해 보였지만, 노현숙은 기어코 손을 내밀어 연미혜의 손을 어루만졌다.“하루 종일 일하고 왔을 텐데, 피곤하지? 밥은 먹었니? 이따 민준이랑 같이 밥 먹고 가.”연미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괜찮아요, 할머니. 회사에서 먹고 오는 길이에요.”연미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임지유, 경다솜과 함께 일찍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하승태와 수연도 도착했다.경다솜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승태 삼촌, 안녕하세요!”“수연아, 와줘서 고마워!”수연이 경다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이제 곧 경기 시작되잖아. 다솜아, 많이 긴장돼?”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또렷하게 말했다.“긴장되긴, 당연히 긴장 안 되지!”하승태는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수연이를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것이었다.경민준이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말했다.
김태훈의 부모님이 자리를 뜬 뒤, 경민준이 물었다.“사모님이랑 얘긴 잘했어?”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 고마워.”임지유는 속으론 생각했다.‘방금 사모님 얼굴 보니까 연미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던데....’사실 세인티와 넥스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훈이 미리 설명을 해뒀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임지유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울린 전화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를 미리 녹음해 두고, 자리를 비켜선 후 멀리서 경민준과 임지유 쪽을 슬쩍
임지유는 며칠은 기다려야 소식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경민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김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하신대. 우리도 같이 가보자.”그 말에 임지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다음 날 저녁, 경매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은 임지유를 데리고 곧장 김태훈의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접 임지유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김태훈의 부모는 이미 경민준과 연미혜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지현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염성민이 다시 물었다.“성민아, 철호 아저씨나 아버지 말고,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욱 교수님 연락처 아는 사람 또 없어?”“없는 것 같아.”지현승이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너 전에 임지유 씨가 유명욱 교수님을 만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지유 씨는 교수님이 연락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임지유 씨가 알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염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