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기억은 사라져도, 손끝의 본능은 잊지 않는다." 조작된 차트, 덫에 걸린 수술로 모든 걸 잃은 천재 의사 차수연. 절망 끝에 뛰어든 바다에서 그녀를 구한 건, 선천적 심장 질환을 가진 남자 강우혁이었습니다. 기억을 잃고 아이처럼 변해버린 수연, 하지만 심장이 멎은 그를 마주한 순간 그녀의 손은 본능적으로 수술을 시작합니다. 그녀를 무너뜨렸던 악인들이 다시 다가오고, 수연은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메스를 듭니다. 죽음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심장을 건 격렬한 운명의 메디컬 로맨스.
View More밤은 깊었고, 속초의 바다는 검은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파도는 고요하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잔잔했다.
마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겠다는 듯, 꾸준히 모래를 때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차수연은 바다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병원을 나온 지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얀 가운을 벗어 던질 때까지만 해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삐~
심장 모니터가 뱉어낸 냉정한 평탄선.
“타임 오브 데스(Time of death)…” 동료의 굳은 목소리.
그 순간 수연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죽였어.”
목구멍 깊숙이 박혀 있던 고백이 파도에 섞여 사라졌다.
차트는 거짓말이었다. 수술 전 환자의 상태와 실제 상태는 달랐다.
협착 부위도, 수치도, 과거 이력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메스를 쥔 건 그녀였으니까.
천재라 불렸던 의사가, 단 한 번의 실패로 사람을 보냈다.
병원에서 쏟아지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동정과 경멸, 그리고 은근한 조롱.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어.’
‘한 번의 실패로 끝이다.’
그 속삭임들이 귓가를 찢듯 울렸다.
수연은 천천히, 파도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발목이 젖고, 종아리까지 파도가 차올랐다.
물은 차갑고 잔인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이 위안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고통도, 이 죄책감도, 이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허리, 가슴, 어깨. 파도가 몸을 삼켜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바닷물이 입술에 닿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 순간..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그러나 수연의 귀에는 희미하게만 맺혔다.
그녀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찬 물이 온몸을 덮쳤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팔은 허공을 긁듯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점점 힘이 빠졌다. 어둠은 깊고, 바다는 끝이 없었다.
손끝은 차갑고, 발은 바닥을 잃었다. 산소는 사라지고, 시야는 검게 깔렸다.
‘죽어도… 괜찮아.’
의식은 그렇게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거센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또 다른 온기. 강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바닷속에서 그녀의 몸을 끌어올리는 힘. 누군가 거침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버텨요!”
남자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뭉개져 들렸다.
수연의 몸은 무력하게 늘어졌다.
그녀의 머리칼이 물에 흩날리며 얼굴을 가렸다.
남자는 그녀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발로 바닷속을 힘껏 찼다.
심장이 갈라질 듯 쿵쾅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은 감겨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안 돼…”
그는 입술을 닫고, 곧바로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졌다.
가슴 압박을 번갈아가며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숨이 붙지 않았다.
“버텨!”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가슴을 압박했다. 몇 차례 더 반복하자,
아주 약하게, 거의 미약하게,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두면… 안 돼.”
바닷가에서 병원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를 등에 업고,
젖은 몸으로 어둠 속을 달렸다. 모래가 다리에 달라붙고, 차가운 바람이 몸을 갈랐다.
그러나 등에 업힌 그녀의 무게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요.”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밤거리를 지나, 병원 불빛이 보였다.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자, 간호사들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환자! 익수입니다! 의식 없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스트레처가 도착하고, 의료진이 달려들었다.
그녀의 젖은 몸이 들려 올려졌다.
심전도 모니터가 붙고, 산소 마스크가 씌워졌다.
의료진의 빠른 목소리가 교차했다.
“맥박 약해요!”
“기도 확보!”
“에피네프린 준비!”
그는 응급실 문 앞에서 멈춰섰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그저 유리창 너머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새하얀 병실, 커튼 너머로 비치는 아침 햇살.
그녀는 산소 줄에 의지한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녀 곁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있었다.
바닷속에서 그녀를 끌어낸 그 남자. 강우혁.
그는 침대 곁에 앉아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이 여자를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수연의 눈꺼풀이 아주 느리게 떨렸다.
긴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시야가 열렸다.
천장의 희미한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의식 돌아옵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우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드세요?”
그가 다급히 물었다.
수연은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목이 말라, 입술이 잘 열리지 않았다.
겨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에요. 괜찮으세요?”
“…….”
그녀는 시선을 흔들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이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간호사가 물었다.
수연은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병실 안 공기가 순간 멎었다.
우혁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분명 몇 일 전, 바닷속에서 죽음과 맞닿아 있던 여자인데
지금은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곁에 서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인가.”
그리고, 두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흰 커튼이 병실을 조용히 가르고 있었다.
심전도 모니터가 미약한 리듬을 기록하고 있었고, 산소 줄이 숨결에 맞춰 오르내렸다.
세 번째 아침, 닫혀 있던 그녀의 눈이 열렸다.
차수연. 그러나 이제는 그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죠…?”
낯선 천장을 바라본 채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간호사들이 안도와 놀람이 섞인 표정으로 달려왔다.
활력징후를 체크하는 손길이 분주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붙은 모든 기계들이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이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그녀는 오래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안 나요… 아무것도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문 앞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다.
젖은 구두로 달려와 그녀를 병원까지 업고 왔던 사람, 강우혁이었다.
그동안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낮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따뜻함이 있었다.
“누구세요…?”
“그날 밤, 바다에서 당신을 끌어낸 사람입니다.”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묵직했다.
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억은 텅 비어 있었고, 단지 가슴 한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움찔거렸다.
병원 회진이 끝난 뒤,
의사들은 그녀의 상태에 대해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뇌 손상은 없습니다. 신체적으로도 큰 문제는 없어요.
다만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스로 기억을 차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시적 기억 상실, 혹은 심리적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들으며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이름도, 집도, 직업도, 가족도.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때, 우혁이 나섰다.
“그럼… 당분간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환자가 안정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혼자 두기보다는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병실 안의 시선이 잠시 우혁에게 향했다.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른 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돌보겠습니다.”
수연은 놀란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저를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혼자 두는 건 위험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
차창 너머로 바닷바람이 스며들었고, 도로 위 가로등 불빛이
차례대로 흘러갔다. 수연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폐만 끼치는 거 아닌가요?”
우혁은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가 대답했다.
“당신은 바다에서 혼자 죽어가던 사람이에요.
제가 본 건 그뿐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착한 곳은 속초 시내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바다와 가까워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스며드는 곳.
실내는 정갈했고, 군더더기 없는 가구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여기가… 집이에요?”
“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면 됩니다.”
그는 짐짓 무심하게 말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냈다.
그녀의 손에 건네며 덧붙였다.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수연은 컵을 잡으며 손끝이 떨렸다.
낯선 곳, 낯선 사람. 그러나 바닷속에서 자신을 끌어안던
그 팔의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따뜻했다.
“고마워요.”
짧은 말 한마디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우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밤을 새운 탓인지 눈가에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단단했다.
“…당신이 살아난 게, 다행입니다.”
그 말에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날 밤,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밤의 병원은 늘 익숙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긴 하루의 끝에서야 찾아오는 짧은 평화.차수연은 빈 병동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모든 불이 꺼진 병실 문 사이로 희미한 조명이 스며들고,어디선가 심장 모니터의 일정한 비프음이 들려왔다.그녀는 손끝으로 메모지 하나를 가볍게 쓸어내렸다.‘내일 오전 회진 9시.’스스로에게 남긴 짧은 약속이었다.그러나 그 메모 아래, 어쩐지 눈에 익은 글씨가 하나 더 적혀 있었다.“오늘은 좀 쉬어요. 당신도 사람이에요.”그 글씨는 강우혁의 것이었다.언제 남겼는지 모르지만,그의 손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피로가 덜어지는 듯했다.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작은 메모를 접어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그의 말대로 오늘만큼은 조금 쉬기로 했다.퇴근길, 병원 정문 앞엔 이미 그가 서 있었다.검은 외투 깃을 세운 채,조용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오늘도 늦네요.”“이제는 제 일상이죠.”“그래서 기다렸어요.”그의 말투엔 조급함이 없었다.마치 그녀가 오기까지의 시간마저도그에게는 하나의 기다림의 의미였던 것처럼.“이 시간까지 병원에 있던 거예요?”“아뇨.”그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오늘은 수연 씨랑 같이 걸어가고 싶어서.”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입술 끝에 미소가 번졌지만, 가슴은 이상하게 두근거렸다.병원 근처의 작은 거리,늦은 시간에도 따뜻한 빵 냄새가 흘러나오던 제과점 앞을 지날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기억나요?”“뭐가요?”“작년 겨울, 여기서 처음 마주쳤잖아요. 당신이 환자 보호자 대신 서류 들고 뛰어오다가 빵 봉투랑 같이 떨어뜨렸던 날.”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랬죠.그때 대표님이 아무 말도 없이 빵을 주워주고는‘이거, 따뜻하네요’라고 하셨죠.”“그게 시작이었나 봐요.”“뭐가요?”“내가 당신을 기억하게 된 게요.”그녀는 그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그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쳤다.낮은 조
아침 햇살이 병원 창문 너머로 천천히 스며들었다.밤새도록 켜져 있던 수술실의 불빛이 꺼지고,간호사들의 발소리가 다시 리듬을 찾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틈에서, 차수연은 커피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창가에 서 있었다.하룻밤 사이에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도, 그녀의 마음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그의 손끝이 남긴 온도는 식지 않았고, 그 온기 덕분에 오늘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피곤했지만 이상하게 가벼웠다.마음 한켠이 고요하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이상하다…”그녀가 중얼거렸다.“하루가 이렇게 부드럽게 시작된 적이 있었던가.”그 시간, 강우혁은 병원 옥상에 있었다.손에는 스티로폼 컵이 들려 있었고,그의 시선은 저 아래 출근하는 직원들의 발걸음에 머물러 있었다.누군가는 바쁘게, 누군가는 여유롭게,그 모든 일상 속에서 그는 한 사람만을 찾고 있었다.그녀가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향하는 장소3층 진료실 앞. 그는 거기에 그녀의 뒷모습이 나타나는 순간을 기다렸다.문득, 자동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가 들어왔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늘 같은 길로 걷지만, 오늘만큼은 발걸음이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아침, 괜찮아요?”잠시 후, 화면에 도착한 답장.“네. 덕분에요.”그는 그 짧은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커피를 입에 대지 못한 채, 미소만 지었다.그날 오전,의국 회의가 끝나고 수연은 잠시 복도 끝에 서 있었다.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수연 씨.”그녀가 돌아보자,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넥타이 색이 평소보다 연했고, 그 덕에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오늘은 조금 피곤해 보이네요.”“어제 늦게까지 차트 정리했어요.”“그럴 줄 알았어요.”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컵을 내밀었다.“아침에 직접 타온 거예요.”“커피요?”“아니요. 꿀차요.”“꿀차요?”“당신이 커피를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병원 복도 끝 창가에 서 있는 차수연의 손끝이 유리창에 닿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번져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츠렸지만, 그 찬기가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해줬다.지난 며칠 동안 병원은 소란스러웠다.대형 수술 일정, 응급실 과밀,그리고 그 사이에 쌓이는 감정의 잔여물들.일은 늘 그렇듯, 사람의 마음보다 앞섰다.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비 오는 날, 같은 우산 아래에서 나란히 걸었던 시간.그의 어깨에 스친 온도, 그때 들려왔던 한마디.“이름이 이렇게 예뻤나 싶어요.”그 말이 자꾸 떠올라서, 가끔은 일보다 그 기억이 더 집중을 흐트러뜨렸다.그가 떠올랐다. 강우혁.그 이름을 입 안에서 부를 때마다 묘한 온기와 두려움이 함께 밀려왔다.그날 오후, 그녀는 회진을 마치고 의국 복도 끝 커피 자판기 앞에 섰다.잔을 받으려는 순간, 낯익은 그림자가 다가왔다.“오늘도 커피예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그녀는 놀란 듯 돌아봤다.“대표님…”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또 그 호칭이에요.”“아, 죄송해요. 습관이 아직…”“그럼 오늘은 한 번만 제대로 불러봐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우혁 씨.”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거면 됐어요.”그는 커피를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늘, 시간 좀 괜찮아요?”“네?”“퇴근 후에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말하는 ‘이야기’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저녁, 병원 근처 한적한 식당.조명이 낮게 깔린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말없이 와인을 따라주던 그의 손이 조심스레 멈췄다.“수연 씨.”그의 부름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우리… 예전에 병원 인수 문제로 처음 부딪혔던 거 기억나요?”그녀는 미간을 좁혔다.“당연하죠. 그때 대표님이 저를 꽤 미워하셨죠.”그는
파리의 새벽은 잔잔했다.창문을 열자, 습기 섞인 공기와 함께 가로등 불빛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차수연은 호텔 커튼을 걷어 올리고 하늘빛이 서서히 밝아오는 풍경을 바라봤다.그 도시의 모든 새벽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았다.어딘가 같은 시간, 그도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 생각 하나로, 그녀의 하루는 늘 단단히 시작됐다.학회 일정이 끝난 뒤, 그녀는 파리 시내의 병원을 둘러보았다.선진 의료 시스템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이유였지만,사실은 조금의 여유가 필요했을 뿐이다.강우혁이 없는 시간에 자신이 어디까지 설 수 있는지를 조용히 확인하고 싶었다.그녀는 진료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의사 가운 대신 얇은 코트를 걸친 모습은 낯설지만 자유로워 보였다.그녀는 천천히 속으로 중얼거렸다.“대표님이라면 뭐라고 했을까.”그가 늘 하던 말투가 떠올랐다.“그건 잘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불안해도 멈추지 않는 게, 진짜 용기니까.”그녀는 웃었다.이제는 그가 곁에 없어도 그의 말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한국의 병원은 여전히 분주했다.강우혁은 자문 회의와 신환 회진으로 하루를 쪼개 쓰며 틈틈이 그녀의 발표 소식을 기다렸다.그는 휴대폰 화면 속 기사 제목을 천천히 훑었다.‘한국인 여성의 심혈관 연구, 국제 학회서 주목받아.’사진 속 그녀는 낯선 무대 위에서도 또렷했다.조명 아래에서 미묘하게 긴장한 표정조차 그의 눈엔 그저 아름다웠다.그는 사진을 확대하며 마치 직접 그곳에 있는 듯 숨을 고르며 말했다.“잘했어요, 수연 씨.”그날 밤, 그는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제목: 같은 하늘 아래에서수연 씨. 그곳의 공기는 좀 다르죠?나는 오늘도 여전히 병원에 있습니다.당신이 비운 자리엔 당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요.여기선 아직 벚꽃이 완전히 지지 않았어요.당신이 돌아올 땐 아마 새로운 잎이 나 있겠죠.그 사이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강우혁.그녀는 메
새벽 세 시를 넘긴 병원은 숨을 죽인 거대한 유기체 같았다.기계음만이 일정하게 살아 있었다.삐, 삐호흡기를 타고 흐르는 산소가 규칙적인 리듬을 유지하는 동안,수연의 책상 위 컴퓨터 화면에는 여전히 불빛이 깜박였다.복제 중이던 데이터가 마침내 100%에 도달하자,화면이 순간 정지되었다가 '복사 완료’라는 문장이 떠올랐다.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손끝이 식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USB를 빼내며, 마치 누군가에게서 심장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 스쳤다.“이 안에… 진실이 있어.”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자조처럼 들렸다.
그날 새벽,수연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한동안 들리지 않던 그 규칙적인 리듬이 이상하게도 너무 크게, 귀 안쪽에서 울렸다.쾅, 쾅, 쾅그건 마치 누군가의 심장이 그녀 안에서 함께 뛰는 듯했다.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숨이 가빴다. 목 안이 타들어가듯 말라 있었고, 피부는 희게 질려 있었다.거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자기 얼굴이 낯설었다.창백한 살결 아래로 미세하게 푸른 혈관이 떠올라 있었다.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그 미세한 혈관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렸다.“……이게 뭐야.”그녀
붉은 불길이 사그라들 무렵, 바다는 여전히 거칠게 숨 쉬고 있었다.검은 연기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고,절벽 아래로는 부서진 잔해들이 파도에 밀려 흔들렸다.수연은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고, 손끝엔 아직도 피와 재가 묻어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멀리 무너져 내린 연구소 잔해를 향하고 있었다.“살아 있는 거죠?”뒤에서 우혁이 다가왔다.그의 어깨에는 피가 번져 있었고, 숨소리가 거칠었다.“응급 처치는 했어요. 당신은요?”“괜찮습니다.”그녀는 대답 대신, 손에 쥔 작은 메모리칩을 들어 보였다
밤새도록 깜빡이는 파란 불빛이 호텔 지하를 비추고 있었다. 경찰들이 현장을 통제하는 사이, 우혁은 구급대원에게 간단한 응급 처치를 받고 있었다. 팔의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피가 말라붙은 셔츠 자락은 싸늘하게 젖어 있었다.수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가 아직도 붉었다.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그가 이렇게까지 다칠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을 무겁게 눌렀다.당신이 얼마나 더러운 수를 쓰든“대표님,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구급대원의 말에 우혁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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