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기억은 사라져도, 손끝의 본능은 잊지 않는다." 조작된 차트, 덫에 걸린 수술로 모든 걸 잃은 천재 의사 차수연. 절망 끝에 뛰어든 바다에서 그녀를 구한 건, 선천적 심장 질환을 가진 남자 강우혁이었습니다. 기억을 잃고 아이처럼 변해버린 수연, 하지만 심장이 멎은 그를 마주한 순간 그녀의 손은 본능적으로 수술을 시작합니다. 그녀를 무너뜨렸던 악인들이 다시 다가오고, 수연은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메스를 듭니다. 죽음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심장을 건 격렬한 운명의 메디컬 로맨스.
View More밤은 깊었고, 속초의 바다는 검은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파도는 고요하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잔잔했다.
마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겠다는 듯, 꾸준히 모래를 때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차수연은 바다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병원을 나온 지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얀 가운을 벗어 던질 때까지만 해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삐~
심장 모니터가 뱉어낸 냉정한 평탄선.
“타임 오브 데스(Time of death)…” 동료의 굳은 목소리.
그 순간 수연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죽였어.”
목구멍 깊숙이 박혀 있던 고백이 파도에 섞여 사라졌다.
차트는 거짓말이었다. 수술 전 환자의 상태와 실제 상태는 달랐다.
협착 부위도, 수치도, 과거 이력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메스를 쥔 건 그녀였으니까.
천재라 불렸던 의사가, 단 한 번의 실패로 사람을 보냈다.
병원에서 쏟아지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동정과 경멸, 그리고 은근한 조롱.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어.’
‘한 번의 실패로 끝이다.’
그 속삭임들이 귓가를 찢듯 울렸다.
수연은 천천히, 파도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발목이 젖고, 종아리까지 파도가 차올랐다.
물은 차갑고 잔인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이 위안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고통도, 이 죄책감도, 이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허리, 가슴, 어깨. 파도가 몸을 삼켜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바닷물이 입술에 닿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 순간..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그러나 수연의 귀에는 희미하게만 맺혔다.
그녀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찬 물이 온몸을 덮쳤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팔은 허공을 긁듯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점점 힘이 빠졌다. 어둠은 깊고, 바다는 끝이 없었다.
손끝은 차갑고, 발은 바닥을 잃었다. 산소는 사라지고, 시야는 검게 깔렸다.
‘죽어도… 괜찮아.’
의식은 그렇게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거센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또 다른 온기. 강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바닷속에서 그녀의 몸을 끌어올리는 힘. 누군가 거침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버텨요!”
남자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뭉개져 들렸다.
수연의 몸은 무력하게 늘어졌다.
그녀의 머리칼이 물에 흩날리며 얼굴을 가렸다.
남자는 그녀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발로 바닷속을 힘껏 찼다.
심장이 갈라질 듯 쿵쾅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은 감겨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안 돼…”
그는 입술을 닫고, 곧바로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졌다.
가슴 압박을 번갈아가며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숨이 붙지 않았다.
“버텨!”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가슴을 압박했다. 몇 차례 더 반복하자,
아주 약하게, 거의 미약하게,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두면… 안 돼.”
바닷가에서 병원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를 등에 업고,
젖은 몸으로 어둠 속을 달렸다. 모래가 다리에 달라붙고, 차가운 바람이 몸을 갈랐다.
그러나 등에 업힌 그녀의 무게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요.”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밤거리를 지나, 병원 불빛이 보였다.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자, 간호사들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환자! 익수입니다! 의식 없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스트레처가 도착하고, 의료진이 달려들었다.
그녀의 젖은 몸이 들려 올려졌다.
심전도 모니터가 붙고, 산소 마스크가 씌워졌다.
의료진의 빠른 목소리가 교차했다.
“맥박 약해요!”
“기도 확보!”
“에피네프린 준비!”
그는 응급실 문 앞에서 멈춰섰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그저 유리창 너머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새하얀 병실, 커튼 너머로 비치는 아침 햇살.
그녀는 산소 줄에 의지한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녀 곁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있었다.
바닷속에서 그녀를 끌어낸 그 남자. 강우혁.
그는 침대 곁에 앉아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이 여자를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수연의 눈꺼풀이 아주 느리게 떨렸다.
긴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시야가 열렸다.
천장의 희미한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의식 돌아옵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우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드세요?”
그가 다급히 물었다.
수연은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목이 말라, 입술이 잘 열리지 않았다.
겨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에요. 괜찮으세요?”
“…….”
그녀는 시선을 흔들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이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간호사가 물었다.
수연은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병실 안 공기가 순간 멎었다.
우혁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분명 몇 일 전, 바닷속에서 죽음과 맞닿아 있던 여자인데
지금은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곁에 서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인가.”
그리고, 두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흰 커튼이 병실을 조용히 가르고 있었다.
심전도 모니터가 미약한 리듬을 기록하고 있었고, 산소 줄이 숨결에 맞춰 오르내렸다.
세 번째 아침, 닫혀 있던 그녀의 눈이 열렸다.
차수연. 그러나 이제는 그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죠…?”
낯선 천장을 바라본 채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간호사들이 안도와 놀람이 섞인 표정으로 달려왔다.
활력징후를 체크하는 손길이 분주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붙은 모든 기계들이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이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그녀는 오래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안 나요… 아무것도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문 앞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다.
젖은 구두로 달려와 그녀를 병원까지 업고 왔던 사람, 강우혁이었다.
그동안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낮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따뜻함이 있었다.
“누구세요…?”
“그날 밤, 바다에서 당신을 끌어낸 사람입니다.”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묵직했다.
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억은 텅 비어 있었고, 단지 가슴 한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움찔거렸다.
병원 회진이 끝난 뒤,
의사들은 그녀의 상태에 대해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뇌 손상은 없습니다. 신체적으로도 큰 문제는 없어요.
다만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스로 기억을 차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시적 기억 상실, 혹은 심리적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들으며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이름도, 집도, 직업도, 가족도.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때, 우혁이 나섰다.
“그럼… 당분간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환자가 안정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혼자 두기보다는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병실 안의 시선이 잠시 우혁에게 향했다.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른 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돌보겠습니다.”
수연은 놀란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저를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혼자 두는 건 위험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
차창 너머로 바닷바람이 스며들었고, 도로 위 가로등 불빛이
차례대로 흘러갔다. 수연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폐만 끼치는 거 아닌가요?”
우혁은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가 대답했다.
“당신은 바다에서 혼자 죽어가던 사람이에요.
제가 본 건 그뿐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착한 곳은 속초 시내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바다와 가까워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스며드는 곳.
실내는 정갈했고, 군더더기 없는 가구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여기가… 집이에요?”
“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면 됩니다.”
그는 짐짓 무심하게 말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냈다.
그녀의 손에 건네며 덧붙였다.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수연은 컵을 잡으며 손끝이 떨렸다.
낯선 곳, 낯선 사람. 그러나 바닷속에서 자신을 끌어안던
그 팔의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따뜻했다.
“고마워요.”
짧은 말 한마디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우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밤을 새운 탓인지 눈가에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단단했다.
“…당신이 살아난 게, 다행입니다.”
그 말에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날 밤,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병원 복도 끝에서 스며드는 햇살은 따뜻했다.윤지아는 창가에 기대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하얀 김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피어오르며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병원은 늘 같은 풍경이었다.기계음, 발자국, 환자의 숨소리.그 모든 익숙한 소리들 속에서도,그녀는 매일 조금씩 다른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오늘은 라벤더 정원이 문을 연 지 정확히 15년째 되는 날이었다.그녀는 그 숫자가 믿기지 않았다.처음 이 정원이 생겼을 때만 해도,그저 ;의미 있는 시도' 정도로 여겨졌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세계 각국의 의사와 연구자들이 이곳을 찾아왔다.병원의 한 구석에 불과했던 정원이 이제는 생명과 회복의 상징이 되었다.“원장님, 이쪽으로 오세요.”젊은 간호사가 그녀를 불렀다.정원 앞에는 새로 심은 라벤더 묘목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녀가 다가서자 아이들이 줄을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병원에서 회복 중인 아이들, 작은 손에 흙이 묻은 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이 꽃 이름 아는 사람?”지아가 물었다.아이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라벤더요! 향기 나는 꽃이에요!”“맞아요.”지아는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높이에 맞췄다.“그런데 이 꽃은 향기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 마음도 편하게 만들어줘요.누군가가 그걸 믿고 처음 심었거든요.”“누가요?”또 다른 아이가 물었다.지아는 잠시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요. 서로를 아끼고, 환자를 사랑했던 사람들.”그녀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정원의 한켠으로 향했다.라벤더 사이에 작은 표석이 있었다.“우리가 함께 있었던 모든 시간은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향기로 남았다.”-강우혁 & 차수연그 문장을 볼 때마다,지아는 마치 시간의 문을 살짝 열어보는 기분이 들었다.정오가 가까워지자 기자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정원에 모였다.오늘은 라벤더 프로젝트의 새로운 확장 계획이 발표되는 날이었다.지아는 연단에 섰다.그녀의 뒤로,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리창
윤지아는 새벽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창문을 열면 라벤더 향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익숙한 향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진하게 느껴졌다.마치 누군가가 다가와 속삭이는 것처럼 오늘은 꼭 와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다고.병원 기념관 한켠에는 라벤더 프로젝트의 기록 전시가 준비되고 있었다.10년 동안 이어온 시간,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그리고 그 모든 시작이 되었던 두 사람.강우혁과 차수연.지아는 조심스레 전시 패널을 정리하고 있었다.손끝에 닿는 오래된 사진,붉은 원으로 표시된 수술 메모,환자들의 감사 편지. 그 속엔 숫자보다도 더 많은 온기가 담겨 있었다.“원장님, 이거… 여기로 옮길까요?”보조 스태프의 목소리에 지아는 고개를 들었다.그가 가리킨 건 유리 프레임 속의 한 장의 사진이었다.라벤더 정원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그래요. 제일 앞에 두세요.”지아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그 사진이…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게 했으니까요.”행사는 오후 세 시에 시작됐다.대강당 안은 따뜻한 조명으로 가득했다.무대 뒤편의 대형 스크린엔‘라벤더 프로젝트 10주년, 그리고 그 이후’라는 문장이 걸려 있었다.지아는 연단에 올랐다.그녀의 시선은 객석 한가운데,한 칸 비워둔 두 좌석에 잠시 머물렀다.라벤더 모양의 리본이 조용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오늘 우리는, 두 사람의 이름을 다시 부르기 위해 모였습니다.”지아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들은 의사였지만,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었습니다.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향기를 다시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영상이 재생됐다. 기록실에서의 인터뷰, 수술실의 긴장된 공기,정원 벤치에서 서로에게 건네던 미소. 사람들은 숨죽여 그 장면을 바라봤다.어떤 이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지아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지만, 그 떨림은 슬픔이 아니라, 감사였다.행사가 끝
병원 옥상 정원은 또 한 번의 계절을 맞았다.라벤더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햇살은 그 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윤지아는 난간에 기대어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를 한참 동안 들었다.지난겨울, 병원은 큰 변화를 겪었다.새로운 인공심장 연구팀이 꾸려졌고,라벤더 프로젝트는 국내를 넘어 해외 병원들과 협력 연구로 확대되었다.언제나 그랬듯 지아는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올해의 봄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그건 아마도… 병원 한켠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일 것이다.“원장님, 차트 서명 완료하셨나요?”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사람은 신입 펠로우, 이현우였다.한때 라벤더 정원의 토양을 바꾸겠다고 나서던 청년.이제는 스스로 수술대에 서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네, 들어와요.”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현우는 파일을 들고 다가와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어제 심장외과 팀에서 회의했는데요.라벤더 프로젝트의 신규 케이스 중 한 분이 해외에서 수술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그 병원… 이름이 좀 낯익더라고요.”지아가 고개를 들었다.“어디요?”“서울제중심장센터요. 기록을 보니까… 주치의가 강우혁 교수로 되어 있더라고요.”순간, 공기가 멈췄다.그 이름이 입 안에서 맴도는 동안,시간이 미세하게 뒤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그래요.”지아는 눈을 깜빡였다.“그럼, 환자분 기록을 다시 검토해요.혹시 그때 남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네, 원장님.”현우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멀리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살짝 스치는 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히며 투명한 선을 그렸다.그녀는 이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시 당신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며칠 뒤, 지아는 그 환자를 직접 보기로 했다.중년의 남자, 심근 절개 부위의 섬유화가 예상보다 심했고,과거 수술로 이식된 판막 근처엔 작은 혈전이 보였다.그녀는
오전 회진을 마치고도 병동의 공기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수술 대기 중인 소아 환자의 어머니는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새로 입원한 중년 남성은 심전도 패치가 꺼질까 봐 손을 가슴에 대고 가만 서 있었다. 윤지아는 노트를 닫아 포켓에 넣고, 차트를 끌어안은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라벤더 정원이 병원의 한복판에 만들어진 뒤로, 향기는 분명 사람들의 어깨를 조금은 내려앉게 했지만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의사는 향기보다 더 정확한 무언가를 내밀어야 한다.“윤 원장님.” 의무기록팀장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카이브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습니다.”얇은 외장하드 하나가 그녀의 손에 건네졌다. 라벨에는 낡은 볼펜 글씨로 두 단어가 쓰여 있었다. 보고. 기록. 뒷면 구석엔 작은 이니셜-K.W.H.와 C.S.Y.지아는 잠깐 손끝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강우혁과 차수연이 공동 서명을 올린 병원 자료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순간,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각자 자리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만든 흔적을 만지는 일은 늘 조심스러웠다. 가느다란 유리잔을 들어 올릴 때처럼.“보안실에서 열람하세요. 영상 파일이라… 용량이 큽니다.” 팀장이 덧붙였다.보안실은 오후 빛이 닿지 않는 복도 끝에 있었다. 문을 닫으니 바깥 소음이 일시에 꺼졌다. 지아는 모니터를 켜고 외장하드를 연결했다. ‘라벤더_프로젝트_프리브리핑’, ‘응급OP_리뷰_내시경캡쳐’, 그리고 마지막에 ‘Two_Seats_Final.mp4’. 두 개의 의자. 정원의 중심에 놓인 그것들. 파일 이름만으로도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재생 버튼을 눌렀다.잡음 섞인 프레임이 잠시 흔들린 뒤, 화면이 또렷해졌다. 기록실의 오래된 조명 아래, 회색 니트와 흰 셔츠의 남자, 그리고 옅은 미소의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카메라가 초점을 잡는 동안, 두 사람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스치듯 닿았다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
밤은 깊었지만, 수연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피스텔 창문 너머로 흩뿌려진 불빛들이 검은 하늘 위에서 은근한 떨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기자들의 질문, 민도혁의 날 선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혁이 남긴 한 마디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어쩌면… 그때 저를 살린 사람이 교수님일지도 모릅니다.”그 말이 진실일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기억 속 흐릿한 얼굴이 분명 누군가의 생존을 의미했지만,
늦은 밤, 병원 기록실.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서류 더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수연은 여전히 오래된 차트를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페이지마다 스며든 잉크 냄새가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들은 분명히 현실의 파편인데, 이름을 붙이려 하면 흩어져 버렸다.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조여왔다. 그녀는 메스를 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 심장이 멎어가는 환자, 절망 속에서도 끝내 맥박을 되살리던 순간. 그때 들려왔던 비명 같은 심전도 소리와 환자의 가슴이 다시 뛰던 울
밤이 내려앉은 병원 본관 앞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리고, “차수연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연신 날아들었다. 그 중심에 민도혁이 서 있었다. 완벽하게 맞춘 수트 차림, 눈썹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 그는 마치 자신이 정의의 대변자인 듯 미소를 지었다.“차수연 교수는 불과 몇 달 전, 환자를 수술 도중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오늘 봉사 현장에서 잠시 보여준 행동은 그 죄를 덮기 위한 쇼에 불과합니다. 병원은 의료사고를 저지른 자를 두 번 다시 수술실에 세울 수 없습니다.
밤이 깊었지만 오피스텔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우혁은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된 공기가 방 안에 감돌았다. 그의 눈가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손끝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여기… 드디어 연결이 잡혔습니다.”그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접속 로그를 확대했다. 수연이 다가와 숨을 죽였다. 화면에는 외부 계정이 남긴 접속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병원 본관 서버실, 특정 시각. 그리고 이 접속은 관리자 권한을 가진 계정으로만 가능했습니다. 더구나, 이 계정이 사용된 기기의 고유 번호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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