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기억은 사라져도, 손끝의 본능은 잊지 않는다." 조작된 차트, 덫에 걸린 수술로 모든 걸 잃은 천재 의사 차수연. 절망 끝에 뛰어든 바다에서 그녀를 구한 건, 선천적 심장 질환을 가진 남자 강우혁이었습니다. 기억을 잃고 아이처럼 변해버린 수연, 하지만 심장이 멎은 그를 마주한 순간 그녀의 손은 본능적으로 수술을 시작합니다. 그녀를 무너뜨렸던 악인들이 다시 다가오고, 수연은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메스를 듭니다. 죽음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심장을 건 격렬한 운명의 메디컬 로맨스.
view more밤은 깊었고, 속초의 바다는 검은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파도는 고요하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잔잔했다.
마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겠다는 듯, 꾸준히 모래를 때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차수연은 바다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병원을 나온 지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얀 가운을 벗어 던질 때까지만 해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삐~
심장 모니터가 뱉어낸 냉정한 평탄선.
“타임 오브 데스(Time of death)…” 동료의 굳은 목소리.
그 순간 수연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죽였어.”
목구멍 깊숙이 박혀 있던 고백이 파도에 섞여 사라졌다.
차트는 거짓말이었다. 수술 전 환자의 상태와 실제 상태는 달랐다.
협착 부위도, 수치도, 과거 이력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메스를 쥔 건 그녀였으니까.
천재라 불렸던 의사가, 단 한 번의 실패로 사람을 보냈다.
병원에서 쏟아지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동정과 경멸, 그리고 은근한 조롱.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어.’
‘한 번의 실패로 끝이다.’
그 속삭임들이 귓가를 찢듯 울렸다.
수연은 천천히, 파도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발목이 젖고, 종아리까지 파도가 차올랐다.
물은 차갑고 잔인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이 위안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고통도, 이 죄책감도, 이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허리, 가슴, 어깨. 파도가 몸을 삼켜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바닷물이 입술에 닿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 순간..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그러나 수연의 귀에는 희미하게만 맺혔다.
그녀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찬 물이 온몸을 덮쳤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팔은 허공을 긁듯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점점 힘이 빠졌다. 어둠은 깊고, 바다는 끝이 없었다.
손끝은 차갑고, 발은 바닥을 잃었다. 산소는 사라지고, 시야는 검게 깔렸다.
‘죽어도… 괜찮아.’
의식은 그렇게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거센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또 다른 온기. 강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바닷속에서 그녀의 몸을 끌어올리는 힘. 누군가 거침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버텨요!”
남자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뭉개져 들렸다.
수연의 몸은 무력하게 늘어졌다.
그녀의 머리칼이 물에 흩날리며 얼굴을 가렸다.
남자는 그녀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발로 바닷속을 힘껏 찼다.
심장이 갈라질 듯 쿵쾅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은 감겨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안 돼…”
그는 입술을 닫고, 곧바로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졌다.
가슴 압박을 번갈아가며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숨이 붙지 않았다.
“버텨!”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가슴을 압박했다. 몇 차례 더 반복하자,
아주 약하게, 거의 미약하게,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두면… 안 돼.”
바닷가에서 병원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를 등에 업고,
젖은 몸으로 어둠 속을 달렸다. 모래가 다리에 달라붙고, 차가운 바람이 몸을 갈랐다.
그러나 등에 업힌 그녀의 무게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요.”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밤거리를 지나, 병원 불빛이 보였다.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자, 간호사들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환자! 익수입니다! 의식 없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스트레처가 도착하고, 의료진이 달려들었다.
그녀의 젖은 몸이 들려 올려졌다.
심전도 모니터가 붙고, 산소 마스크가 씌워졌다.
의료진의 빠른 목소리가 교차했다.
“맥박 약해요!”
“기도 확보!”
“에피네프린 준비!”
그는 응급실 문 앞에서 멈춰섰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그저 유리창 너머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새하얀 병실, 커튼 너머로 비치는 아침 햇살.
그녀는 산소 줄에 의지한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녀 곁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있었다.
바닷속에서 그녀를 끌어낸 그 남자. 강우혁.
그는 침대 곁에 앉아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이 여자를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수연의 눈꺼풀이 아주 느리게 떨렸다.
긴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시야가 열렸다.
천장의 희미한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의식 돌아옵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우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드세요?”
그가 다급히 물었다.
수연은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목이 말라, 입술이 잘 열리지 않았다.
겨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에요. 괜찮으세요?”
“…….”
그녀는 시선을 흔들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이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간호사가 물었다.
수연은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병실 안 공기가 순간 멎었다.
우혁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분명 몇 일 전, 바닷속에서 죽음과 맞닿아 있던 여자인데
지금은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곁에 서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인가.”
그리고, 두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흰 커튼이 병실을 조용히 가르고 있었다.
심전도 모니터가 미약한 리듬을 기록하고 있었고, 산소 줄이 숨결에 맞춰 오르내렸다.
세 번째 아침, 닫혀 있던 그녀의 눈이 열렸다.
차수연. 그러나 이제는 그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죠…?”
낯선 천장을 바라본 채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간호사들이 안도와 놀람이 섞인 표정으로 달려왔다.
활력징후를 체크하는 손길이 분주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붙은 모든 기계들이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이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그녀는 오래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안 나요… 아무것도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문 앞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다.
젖은 구두로 달려와 그녀를 병원까지 업고 왔던 사람, 강우혁이었다.
그동안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낮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따뜻함이 있었다.
“누구세요…?”
“그날 밤, 바다에서 당신을 끌어낸 사람입니다.”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묵직했다.
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억은 텅 비어 있었고, 단지 가슴 한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움찔거렸다.
병원 회진이 끝난 뒤,
의사들은 그녀의 상태에 대해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뇌 손상은 없습니다. 신체적으로도 큰 문제는 없어요.
다만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스로 기억을 차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시적 기억 상실, 혹은 심리적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들으며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이름도, 집도, 직업도, 가족도.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때, 우혁이 나섰다.
“그럼… 당분간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환자가 안정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혼자 두기보다는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병실 안의 시선이 잠시 우혁에게 향했다.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른 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돌보겠습니다.”
수연은 놀란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저를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혼자 두는 건 위험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
차창 너머로 바닷바람이 스며들었고, 도로 위 가로등 불빛이
차례대로 흘러갔다. 수연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폐만 끼치는 거 아닌가요?”
우혁은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가 대답했다.
“당신은 바다에서 혼자 죽어가던 사람이에요.
제가 본 건 그뿐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착한 곳은 속초 시내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바다와 가까워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스며드는 곳.
실내는 정갈했고, 군더더기 없는 가구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여기가… 집이에요?”
“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면 됩니다.”
그는 짐짓 무심하게 말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냈다.
그녀의 손에 건네며 덧붙였다.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수연은 컵을 잡으며 손끝이 떨렸다.
낯선 곳, 낯선 사람. 그러나 바닷속에서 자신을 끌어안던
그 팔의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따뜻했다.
“고마워요.”
짧은 말 한마디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우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밤을 새운 탓인지 눈가에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단단했다.
“…당신이 살아난 게, 다행입니다.”
그 말에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날 밤,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햇살이 병원 복도를 천천히 비추고 있었다.오전의 공기는 잔잔했고,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 속에서 차수연은 창가 근처 커피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컵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어제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도시 외곽의 그 길, 꽃잎이 흩날리던 밤공기, 그리고 그의 손.그 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 묘한 온기가 손끝에 남아 있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바라봤다.마치 그 감촉이 아직 거기 있는 것처럼.“그 커피, 저 줄 서 있었는데요.”익숙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강우혁이 서 있었다.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단정했지만, 눈가엔 살짝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거짓말이에요.”“네, 들켰네요.”그는 미소를 지었다.“근데, 그 커피. 나눠 마셔도 되죠?”그녀는 피식 웃으며 컵을 건넸다.“대표님, 커피 두 잔 마시면 잠 못 자요.”“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잠 안 잘 거니까.”그 말에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무슨 뜻이에요?”“회의 자료가 많아서요.”“그럼 그렇지.”“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건 아니죠?”“그건… 대표님이 판단하세요.”그의 입가에 조용한 웃음이 번졌다.말끝마다 닿는 여운이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오후 회의가 끝난 뒤, 수연은 잠시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다.바람이 적당히 불고, 햇빛은 살짝 노을빛을 띠기 시작했다.그녀는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그러다 문득, 아래쪽에서 보이는 그림자 하나에 시선을 멈췄다.“역시 여기 있었네요.”강우혁이었다.그는 한 손에 작은 종이백을 들고 있었다.“이 시간에 대표님이 여기까지 올라오면 직원들 놀라요.”“오늘은 그냥 한 사람 만나러 왔어요.”그는 종이백을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게 뭐예요?”“점심도 못 먹었다고 해서요. 따뜻한 호빵.”그녀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호빵이요?”“이 시간엔 밥보다 이게 낫죠.”그는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너무 당연하게 나오네요.”“이젠 그럴 자격 있다고 생각해서요.”그
퇴근 후의 공기는 하루의 무게를 잔잔히 풀어내는 듯했다.병원 불빛이 차례로 꺼져가고,잔잔한 봄바람이 복도를 스치며 남은 긴장감까지 휘감아 데려갔다.차수연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손에 든 서류 봉투를 조심스레 내렸다.그 안엔 오늘 하루를 버텨낸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녀는 작은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이제 정말 끝이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또 다른 떨림이 있었다.그 떨림의 이유는 이미 명확했다.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병원 앞 주차장. 가로등 불빛 아래, 강우혁은 차 옆에 기대서 있었다.어둠 속에서도 단정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인사했다.“늦었네요.”“회의가 길어졌어요.”“그래도 와줘서 고마워요.”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대표님이 부르는데 안 올 수 없죠.”“오늘은 대표님 말고, 그냥… 우혁 씨로 불러주세요.”그의 말투엔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진지했다.“그럼, 우혁 씨.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그냥 드라이브요. 오늘따라 바람이 좋아서요.”그의 차 안은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차수연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도시의 불빛이 지나가며 반짝였고,그 불빛이 유리창에 비쳐 그녀의 눈동자에 닿았다.“이 시간대 도로는 참 조용하네요.”“그래서 좋아요. 당신이랑 있을 땐, 이런 고요함이 어울리니까.”그녀는 잠시 웃음을 삼켰다.“그런 말, 자꾸 하면 곤란해요.”“왜요?”“진짜로 설레니까요.”그의 손이 잠시 핸들 위에서 멈췄다.그녀의 말은 장난처럼 들렸지만, 그 안의 미묘한 떨림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그럼, 설레게 할게요.”그는 천천히 대답했다.“그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창밖의 불빛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그녀의 표정 위로 조용한 미소를 남겼다.차는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도로 양쪽으로 벚꽃이 피어 있었다.가로등 불빛 아래, 꽃잎이 바람에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같았다.차수연은 병원 정문 앞에서 깊은 숨을 내쉬고, 익숙한 풍경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요 며칠 사이 이 병원 복도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밝아진 것도, 조용해진 것도 아닌데 그의 시선이 닿는 공간이 늘 따뜻하게 느껴졌다.강우혁.이름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달라지는 사람.그의 존재는 여전히 단정했고,어쩐지 자신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을 믿는 사람 같았다.그게 그녀에게 안심을 주면서도, 동시에 혼란을 주었다.‘나는 왜 자꾸 그를 의식할까.’그녀는 진료실 앞에서 멈춰 서서 속으로 중얼거렸다.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차수연.”그녀의 이름을 또렷하게 부르는 그 목소리는 낮지만 깊게 울렸다.그녀가 천천히 돌아보자, 강우혁이 서 있었다.하얀 셔츠 깃이 약간 풀려 있었고,눈가엔 피곤함 대신 묘한 부드러움이 스며 있었다.“회의 전에,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네… 지금요?”“지금이요.”그는 그녀를 병원 옥상으로 데려갔다.봄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햇빛이 눈부셨지만, 그의 시선은 한결같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왜… 갑자기 옥상까지?”“잠깐 바람 쐬게요. 요즘 당신, 너무 숨 가쁘게 일하잖아요.”그녀는 작게 웃었다.“대표님은 제가 바쁜 걸 다 보시네요.”“당연하죠. 당신이 일하는 시간만큼 나도 당신을 봤으니까.”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따뜻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그녀는 잠시 말이 막혔다.그는 조용히 한 걸음 다가왔다.“차수연.”그녀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이번엔 훨씬 낮고 진지했다.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녀의 심장이 조금씩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그 이름을 이렇게 직접 부르면…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돼요.”그는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이름을 부르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지 몰랐어요.”그녀는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돌렸다.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런 척했
봄은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왔다.병원 마당의 목련이 피기 시작했고,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겨울의 찬 기운을 완전히 밀어냈다.차수연은 새로 정리된 진료차트를 덮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오늘도, 끝났다…”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하지만 예전처럼 공허하지 않았다.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벚꽃잎 몇 장이 병원 유리창에 부딪혀 흩날렸다.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문득 어젯밤 강우혁의 목소리를 떠올렸다.“내일 아침엔 같이 걸어요.”그 약속이 머릿속을 스치자,어디선가 익숙한 심장 박동이 들리는 듯했다.다음 날 아침,그녀는 오랜만에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햇살은 부드럽고, 공기는 봄의 냄새로 가득했다.병원 근처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 멀리서 그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짙은 네이비색 셔츠 차림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있던 그는,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미소를 지었다.“정말 나왔네요.”“약속했잖아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근데 생각보다 더 일찍 나왔네요.”“혹시라도 놓칠까 봐요.”그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대표님답지 않게 불안했네요.”“그런가요?”“네. 근데 그건 좀… 귀여웠어요.”그의 눈가가 순간 흔들리더니, 잠시 웃음이 번졌다.“그 말, 기억할게요.”그녀는 커피를 받아 들고 입술을 대었다.커피 향과 함께 퍼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의 온도와 닮아 있었다.그들은 천천히 병원 뒤편의 공원으로 걸었다.오전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고, 바람에 섞인 벚꽃잎이 발끝에 흩날렸다.“이 길, 자주 오나요?”그녀가 물었다.“가끔요. 머리 복잡할 때.”“그럼… 오늘은 왜요?”“오늘은 복잡하지 않아요.”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당신이랑 걷고 싶었어요.”그녀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 입술을 다물었다.말로 표현하면 깨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그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가까이 있을 때는 그저 편안하지만, 멀어지
아침 햇살이 병원 로비의 유리벽을 타고 내려왔다. 하지만 그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기자들 수십 명이 몰려든 로비는 마치 전장처럼 뜨거웠다. 카메라가 번쩍이고, 날카로운 질문들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차 교수, 어제 발표된 기사에 대해 입장이 없습니까?”“의료사고를 감추려 했다는 의혹, 사실입니까?”“병원은 책임을 묻겠다고 했습니다. 환자 보호자에게 사과할 의향은요?”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기사 제목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수연은 그들의 시선에 정면으로 마주했다. 등 뒤로는 수많은 카메라 불빛이 터졌고, 앞
아침 회의실은 평소보다 공기가 무거웠다. 커다란 테이블 위엔 신문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모니터에는 실시간 기사 화면이 떠 있었다.“천재 의사, 환자 죽음의 책임자.”“성공률 100% 신화, 붕괴하다.”언론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회의실을 가득 채우자, 이사진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의료진 일부는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고, 몇몇은 대놓고 수연을 향한 불신의 기색을 드러냈다.민도혁은 의장석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회의 시작 전부터 차분하게 태블릿을 두드리고 있었고, 마치 이 상황이 이미 자기
좁은 환기구를 빠져나왔을 때, 새벽 공기가 두 사람의 뺨을 세차게 스쳤다. 병원 뒤편 주차장 위로 바람이 몰아쳤고, 철제 난간에 걸려 있던 낙엽이 어둠 속에서 흩날렸다. 차수연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호흡을 가다듬었고, 우혁은 곧장 노트북 가방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 가방 속에는 누군가 목숨 걸고 지워버리려 했던 진실의 조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잠시 숨을 고르던 수연은 고개를 들어 병원 건물을 바라보았다. 수십 개 창문에 불빛이 흩어져 있었고, 그 불빛 속에서 지금도 수많은 환자가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그
서버실 공기는 숨이 막히도록 차가웠다. 기계가 토해내는 일정한 울림이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고, 그 소리가 두 사람의 심장 박동과 엇박자로 부딪히며 점점 더 거칠게 커졌다. 차수연은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지만, 단단히 걸린 잠금장치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깥 불빛마저 차단된 듯, 이곳은 고립된 섬 같았다.우혁은 노트북 화면을 붙잡은 채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눈빛은 전장에서 목표물을 끝내 추적하는 사수처럼 흔들림이 없었다.“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전원 관리 시스템도 누군가 손댔습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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