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준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어르신과 바둑을 둘 수 있다니,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그는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와 이병철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이 모습을 보고 임지유와 하승태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바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연미혜와 김태훈도 뒤따라왔지만, 그들은 이병철의 뒤쪽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았다.임지유와 하승태는 바둑을 둘 줄 아는 편이었다. 그런데 연미혜가 예상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바둑판을 바라보는 것을 본 하승태가 슬쩍 다가가 물었다
연미혜는 경민준과 이병철의 대국을 조용히 복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임지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르신, 방금 대국을 보니 저도 한번 해보고 싶어졌어요. 하지만 제 실력으로 민준 씨를 이기는 건 쉽지 않겠네요.”“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이병철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그냥 재미로 두는 거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어서 와서 한 수 두어 보게.”임지유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누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끼어들었다.“지유 씨가 두면 승패를 장담하기 어렵겠는데요?”이어 또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그러게 말입니다
이병철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꽤 훌륭하네.”그는 말을 마치고 지관식을 향해 물었다.“근데 네 그림은 안 그리고 여기는 또 왜 온 거야?”지관식이 태연하게 답했다.“너한테 접대가 소홀하다고 잔소리 들을까 봐 일부러 챙겨 주러 온 거야.”이병철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됐고 얼른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하지만 지관식은 갈 생각이 없었다.한편,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사람들은 이병철과 지관식이 임지유를 칭찬하는 걸 들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이 자리의 많은 이들이 이미 임지유를 알고 있었다
“좋아요.”경민준이 짧게 대답했다.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연미혜는 평온한 얼굴로 바둑판을 바라보았다.임지유는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지관식과 몇 마디 나눈 뒤, 조용히 경민준의 곁으로 돌아갔다.사실 놀란 건 하승태나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지현승과 지관식도 예상치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전 바깥 전시장에서 지철호가 간략히 연미혜를 소개한 적은 있었지만,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그들은 연미혜를 단아하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으로 보았다. 눈에 띄길 좋아하는
그다음, 그녀는 연미혜 쪽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경민준이 만든 난국을 풀어내는 연미혜를 보며, 그녀의 마음이 순간 얼어붙었다.그리고 이병철의 감탄이 들려오자, 심장이 아예 바닥까지 가라앉았다.하지만 정작 연미혜는 오직 눈앞의 바둑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일단 흐름은 잡았어. 하지만 이기려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그녀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경민준을 바라보았다.경민준이 다시 한 수를 두자, 연미혜의 손이 멈췄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관식이 흐뭇하게 웃었다.“확실히 볼만하군. 이런 자리에
사람들은 경민준을 한번 보고 다시 연미혜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임지유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잠시의 정적 속에서 경민준이 문득 입을 열었다.“오랜만에 바둑 두는 맞아?”연미혜는 그의 포석을 해체하며 분석하고 있었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맞아.”그와 결혼한 이후로 바둑을 둘 기회가 거의 없었다.“확실히 손이 덜 풀린 것 같아.”연미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오직 바둑판에만 집중했다.지금 상황은 그녀에게 불리했다. 얼핏 보면 경민준 쪽에 돌파구가 보이지만, 실상은 그의 함정이 곳곳
김태훈은 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단번에 느껴졌다.그들은 분명 연미혜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미혜야...”연미혜가 입을 떼기도 전에, 김태훈이 먼저 웃으며 끼어들었다.“임 대표님,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이유가 미혜와의 관계를 모두에게 공개하려는 건가요?”임해철의 얼굴에 잠시 미묘한 경직이 스쳤지만, 이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김 대표님, 아비로서 미혜와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잠시만...”그러나 김태훈은 연미혜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말을 잘랐다.“임 대표님이 정말 미혜와의 관계를
경다솜은 크리스마스를 유독 좋아했다.매년 아이와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곤 했다.하지만 경다솜이 경민준과 함께 해외로 떠난 뒤로, 그녀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건 단 한 번도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이제 크리스마스를 더 이상 챙기지 않았다.이미 다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했지만, 열 달 품어 낳고 손수 키운 딸이었기에 완전히 잊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번잡한 거리 한복판에 멈춰 선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차갑게 가라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