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현숙의 생신날이 밝았다.경다솜은 아침이 되자마자 아빠에게 부탁해서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품에 안고 내려왔다.그리고 식탁에 도착하자마자 조심스레 선물을 건넸다.“증조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노현숙은 눈가에 잔잔한 주름이 잡히도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우리 다솜이가 선물을 다 준비했어? 고맙다...”곧이어 경민준도 선물 상자를 건네며 말했다.“이건 저랑 미혜가 함께 준비한 겁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노현숙은 잠시 그를 찬찬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김영수가 큰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어르신,
김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다솜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삼촌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그 순간 김태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설 연휴쯤, 연미혜와 스피커폰으로 몇 시간씩 업무를 논의하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경다솜이 바로 옆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다솜이가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할 리 없지.’하지만 그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랬구나?”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삼촌 목소리가 좀 흔한가 보네?”그 말을 듣고 있던 경민준은 가만히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정범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연미혜의 과거를 아예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하승태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연미혜와 김태훈이 사귀는 줄 알았지만,그녀가 유명욱 교수의 제자라는 걸 알고 난 후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들 사이엔 남녀 간의 감정 따윈 없었다고 확신했다.이미연이 그런 말을 했던 건 정말로 김태훈과 이어지길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연미혜라면 설령 한 번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해도, 누구와
노현숙의 생일이 끝난 뒤, 도원시 상류층 사회는 그야말로 술렁였다.경민준이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데다가 여섯 살짜리 딸까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그동안 임지유를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들은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에 휩싸였다.임지유가 경민준과 연인 사이라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결혼 이력’과 ‘자녀 존재’까지는 처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아침, 여러 남성들이 세인티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임지유를 붙잡고 이쯤에서 그만두라며 설득하려 들었다.결국 장건식 등 측근들이 나서 겨우 임지유를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도왔다.
연미혜, 김태훈과 전현재, 세 사람은 따로 소통하는 단체 채팅방이 있었다.오늘 벌어진 일은 워낙 충격적인 데다 화제성도 커서, 전현재는 특유의 ‘소문 레이더’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 채 가장 먼저 그 내용을 공유했다.임지유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가 줄을 서 있는지, 그 남자들이 그녀를 두고 얼마나 광기를 부리는지 일일이 ‘브리핑’했다.하지만 연미혜와 김태훈은 그 얘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오후, 전현재는 또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참, 아까 경 대표님 딸이 회사에 와서 임 이사님을 찾아왔었어요. 전에 임 이사님이 다솜
배지호는 연미혜의 말에 흠칫 놀랐다.“진짜 전부 포기하실 거예요?”배지호는 한동안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경민준이 연미혜에게 약속한 이혼 합의 재산은 그녀가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큰 금액이었다.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겠다는 말에, 배지호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미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확실해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사실 그녀는 애초에 그의 재산에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경민준이 뭘 주든 안 주든, 받아도 미련 없고 안 받아도 아쉬울 게 없었다.‘다만...’예전에 노현숙이 갑
경민준이 말을 이었다.“할머니한테 네가 직접 말씀드릴래?”연미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할머니는 내가 무일푼으로 이혼하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연미혜는 되물었다.“그러면 협의서 내용을 안 건드리면 이혼 절차는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아?”“올해 안엔 가능할 거야.”이제 갓 3월이 시작됐으니, 연말까지는 아직 한참 많이 남아있었다. 차분히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우리 이혼에 대해 또 궁금한 거 있어?”연미혜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끝낸 지 얼마 되지
“봐야죠. 면접 끝까지 봐야죠.”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구진원입니다. 진실의 진, 원할 원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연미혜는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력서 봤어요.”연미혜는 이력서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이제부터 제가 구진원 씨를 면접해 보는 건가요? 아니면 계속해서 저를 테스트하실 생각인가요?”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전 뭐, 둘 다 괜찮습니다.”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알고리즘에 강점을 둔다고 했다.연미혜는 그가 데이터 정제, 특성 엔지니어링, 하이퍼파라미터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