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연미혜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I 학술지에서 그녀의 논문이 정식 게재 승인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잠시 후, 김태훈이 업무 관련해서 찾아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논문 게재 승인되었어요.”“난 예상했어.”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유명욱 교수가 검토하고 좋다고 한 논문이라면 당연히 통과됐을 거라 믿고 있었다.업무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연미혜가 시계를 흘끗 보며 물었다.“점심 같이 드실래요?”김태훈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오늘은 안돼. 약속 있어.”“무슨 약속이요?”“소개팅.
그 뒤로 경민준은 단체 대화방에 짧은 메시지를 하나 더 남겼다.[고객 접대 중. 너희끼리 얘기해.]그러고는 더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하승태도 차에 올라탄 후 단톡방을 확인했지만, 굳이 이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나도 좀 바빠... 너희들끼리 얘기 나눠.]그러고는 카톡 창을 닫아버렸다.정범규는 말없이 점 세 개만 남겼다.그렇게 되자 임지유도 발 빠르게 응수했다.[난 식사 약속이 있어서 이만... 다음에 얘기하자.][...]대화방엔 더 이상 아무 말도 올라오지 않았다. 다들 해
잠시 후, 경민준이 전화를 받았다.“하원했어?”경다솜은 대답했다.“네...”“엄마 보고 싶어?”“네.”“엄마한테 전화는 안 했어?”“네.”경민준은 웃으며 말했다.“전화해 봐. 오늘은 엄마가 받을 거야.”그 말에 경다솜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요?”“응. 전화해 봐.”“네!”전화를 끊자마자 경다솜은 연미혜의 번호를 눌렀다.연미혜는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병원과 고씨 가문에서 한 번씩 마주친 걸 제외하면 딸과는 벌써 한 달 넘게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그 사실이 마음을 건드렸다.그녀는
식사를 마친 뒤, 경다솜이 무심코 말을 꺼냈다.“아... 엄마, 아빠는 출장 갔대요.”그제야 연미혜는 경민준이 출장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연미혜가 샤워 중인 사이, 침대 위에 두고 온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전화를 먼저 받은 건 경다솜이었다.화면에 하승태의 이름이 뜬 것을 본 경다솜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승태 삼촌, 다솜이에요!”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하승태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다솜아... 안녕.”그때, 연미
그동안 임씨 가문 산하의 엘리스 그룹은 핵심 기술도, 고급 인력도 없어 적자를 겨우 메우며 유지되는 상태였다.이번 출장에서도 경민준은 시간을 쪼개 해외에서 인재들을 수소문했고, 엘리스 그룹에 맞는 기술자 몇 명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그가 손을 뻗은 이상, 엘리스 그룹은 조만간 다시 숨통이 트일지도 몰랐지만 이 모든 일은 연미혜가 몰라도 무관한 일들이었다.만약 연미혜가 아직 경민준을 마음에 남겨두고 있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상처가 될 뿐이라는 걸 하승태는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굳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점심
하승태는 여전히 무반응이었다.그때 마침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상대는 연미혜와 김태훈까지 아는 사람이었다.자연스레 넷이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들 사이엔 빠르게 편안한 분위기가 형성됐다.그 곁에 서 있던 손아림은 대화에 낄 틈도 없이 방치된 채 멍하니 서 있었다.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아무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상황에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결국 억지웃음을 지으며 어색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정범규가 중얼거렸다.“승태는 요즘 따라 두 사람과 더 가까워지는 것 같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의미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연미혜는 복잡하게 얽힌 두 사람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김태훈과 함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식사를 거른 터라 잠시 대화를 마무리한 뒤,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뷔페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던 구진원이 곧 뒤따라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바로 옆, 같은 구역에 있던 정범규는 그 장면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었다.‘...씨X.’작게
하승태가 다가가자 가장 먼저 그를 눈치챈 사람은 구진원이었다.그의 얇은 입술이 불쾌하게 일그러졌고 시선엔 서늘한 기색이 스쳤지만 하승태는 그런 기류를 아예 못 본 척,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다.그리고 연미혜 앞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물었다.“무슨 얘기 중이었어요?”연미혜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듯, 담담히 답했다.“일 얘기요.”그녀가 구진원과 그렇게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구진원이 적어도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하승태와는 다르게 연미혜와 공통 주제가 많을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