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는 기술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바쁜 업무에 투입됐다.AI와 인간 조종사 간의 대결을 완성도 높게 구현하려면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필요했다.연미혜가 기술 센터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센터에서는 또 한 번의 인간과 AI 간 공중전 시뮬레이션이 시행됐다.그날 저녁, 연미혜는 늦은 시간에야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엔 이미 사람이 거의 없었다.식판에 음식을 담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마침 식사를 끝낸 지현승과 마주쳤다.지현승이 멈칫하더니 가볍게 웃으며 다가왔다.“미혜 씨, 안녕하세요. 언제 오셨어요?”“현승 씨
고창완은 그런 경민준을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연미혜도 그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지만, 경민준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연미혜의 찻잔이 거의 비어 있는 걸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찻주전자를 들어 그녀와 고창완의 잔에 조용히 차를 따라주었다.점심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나, 연미혜는 줄곧 고창완이나 경다솜과만 이야기를 나눴다.두 사람이 서로는 피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할 말이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연미혜가 경민준을 외면해서인지, 아니면 경민준 역시 그녀와 나눌 말이
김태훈이 진행 상황을 간단히 설명한 뒤 물었다.“오늘 아침에도 또 마주친 거야?”“네...”이혼을 앞둔 상황에서 전남편을 자주 마주쳐야 한다는 건 분명 피곤한 일이었지만, 이미 회사 간 협력이 시작된 이상 가끔 얼굴을 마주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회사에 복귀해 이틀 동안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던 중, 수요일 아침 전현재가 단체 채팅방에서 연미혜와 김태훈을 태그했다.그 시각 김태훈은 지방 출장을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전현재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연미혜는 곧바로 짐을 챙겨 기술 인력들과 함께 세인티로 향했다.경민
엘리베이터가 작업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 연미혜는 임지유 일행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는 애초에 임지유에게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는 듯, 곧바로 업무에 몰입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미혜가 전현재와 함께 기술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심코 고개를 들던 찰나에 이금자, 박영순, 손수희, 그리고 손아림이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전현재 역시 그들을 보았다. 하지만 연미혜가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넘기자, 이분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말했다.“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고, 그 금액만 제대로 지급된다면 연미혜는 세인티와의 계약을 끝내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연미혜! 네가 그렇게 말하면 다 되는 줄 알아?”손아림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계약 해지를 추진할 권한이 없었다. 설령 임지유 대신 넥스 그룹과의 계약을 끊을 수 있다고 해도, 넥스 그룹의 뒷배가 김태훈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게다가 임지유뿐만 아니라 임씨 가문 사람들, 그리고 손씨 가문 사람들까지 모두가 김태훈과 잘 지내길 원하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손아림이 독단으로
손수희와 임지유는 그 말을 듣고 미묘하게 얼굴빛이 변했다.평소 같았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불필요하게 일이 커져 자신들의 이미지에 타격이 가지 않도록 손아림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혼을 냈을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연미혜가 먼저 넥스 그룹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계약을 해지해도 좋다고 말한 순간부터,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연미혜가 넥스 그룹의 실질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에 쏠리게 되었다.속으로는 손아림이 잘못한 건 맞지만, 당장은 연미혜와 신경전을 벌여보고 나서 사과할지 말지를
점심 무렵, 연미혜는 시간을 내어 김태훈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고, 덧붙였다.“이번 일은 갈등의 초점을 좀 돌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김태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좋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그 말이 끝나자마자, 곧 임지유에게서 걸려 왔다.김태훈은 피식 웃으며 무심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임지유가 난감해하며 말했다.“오늘 아침 있었던 일... 혹시 김 대표님도 들으셨나요?”김태훈은 굳이 예의를 따질 생각도 없는 듯,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아침에
임지유는 김태훈과의 통화를 마친 후, 손수희와 이금자, 손아림 등과 함께 고급 식당의 룸에서 식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손수희가 물었다.“무슨 일이야? 김태훈 대표가 뭐라고 했는데?”임지유는 휴대폰을 꽉 쥔 채 대답했다.“김태훈 대표가 우리랑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해요. 그리고 명예 훼손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요구했어요.”“뭐라고?”손수희뿐만 아니라 이금자와 손아림도 놀란 표정이었다.손아림은 당장 언성을 높였다.“아침에 그 자리에서 사과도 했잖아. 연미혜! 그 나쁜 년이 김태훈 대표한테
‘교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애초에 김태훈과 임지유 사이엔 교류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김태훈 입장에선 굳이 마우재 교수와 얼굴을 붉힐 이유도 없었다.‘어차피 서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하니...’“앞으로는 교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그저 적당히 웃어넘기며 대답한 김태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마우재 교수는 국내 AI 분야에서도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인물이었다.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역시, 임지유가 캐벳 스미스 교수의 박사과정 제자라는 이유로 김태훈이 그녀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현승이 반응할 틈도 없이 연미혜의 통신기에 알림이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짧게 ‘데이터센터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연미혜는 예정대로 기술 센터를 떠났다.다음 날 하루는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이어지는 그다음 날은 넥스 그룹으로 복귀했다.넥스 그룹과 경문 그룹의 협업은 이제 공식적으로 시작된 상태였다.마침 그녀가 복귀한 날, 김태훈은 경문 그룹과의 협의 미팅에 참석할 예정이었다.이전처럼 단순한 계약 조율이라면 김태훈이
연미혜는 바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현승을 향해 말했다.“죄송해요. 오늘은 같이 식사 못 할 것 같네요...”지현승은 부드럽게 대답했다.“괜찮아요. 다음에 함께해요.”연미혜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고, 지현승은 그녀가 유명욱과 함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홀로 식당으로 향했다.그는 꽤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연미혜를 본 지 이틀 뒤부터, 마침내 정식 휴가가 시작됐다.하지만 휴가가 시작되기 전인 이틀 동안 그는 다시는 그녀와 마주치지 못했다.집에 돌아와 보니, 가족들도 모두 각자 바쁜 듯 아무도
일요일은 어버이날이었지만, 경다솜은 하루 먼저 토요일에 연씨 가문을 찾았다.경민준의 운전기사가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었다.경다솜이 준비한 어버이날 선물은 손수 만든 카드 한 장이었다.카드에는 ‘어버이날 축하해요’라는 여섯 글자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예쁘죠? 선생님이 아빠랑 같이 만들어도 된다고 하셨는데요. 아빠가 요즘 너무 바쁘셔서... 도안이나 그림을 그린 것부터, 하트 붙이는 것까지 전부 제가 혼자 했어요.”연미혜는 경다솜이 과제를 하는 모습을 본 지 꽤 되었는데, 그새 글씨가 부쩍 또렷하고 단정해졌다는 걸 느꼈다.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