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이 진행 상황을 간단히 설명한 뒤 물었다.“오늘 아침에도 또 마주친 거야?”“네...”이혼을 앞둔 상황에서 전남편을 자주 마주쳐야 한다는 건 분명 피곤한 일이었지만, 이미 회사 간 협력이 시작된 이상 가끔 얼굴을 마주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회사에 복귀해 이틀 동안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던 중, 수요일 아침 전현재가 단체 채팅방에서 연미혜와 김태훈을 태그했다.그 시각 김태훈은 지방 출장을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전현재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연미혜는 곧바로 짐을 챙겨 기술 인력들과 함께 세인티로 향했다.경민
엘리베이터가 작업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 연미혜는 임지유 일행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는 애초에 임지유에게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는 듯, 곧바로 업무에 몰입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미혜가 전현재와 함께 기술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심코 고개를 들던 찰나에 이금자, 박영순, 손수희, 그리고 손아림이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전현재 역시 그들을 보았다. 하지만 연미혜가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넘기자, 이분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말했다.“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고, 그 금액만 제대로 지급된다면 연미혜는 세인티와의 계약을 끝내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연미혜! 네가 그렇게 말하면 다 되는 줄 알아?”손아림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계약 해지를 추진할 권한이 없었다. 설령 임지유 대신 넥스 그룹과의 계약을 끊을 수 있다고 해도, 넥스 그룹의 뒷배가 김태훈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게다가 임지유뿐만 아니라 임씨 가문 사람들, 그리고 손씨 가문 사람들까지 모두가 김태훈과 잘 지내길 원하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손아림이 독단으로
손수희와 임지유는 그 말을 듣고 미묘하게 얼굴빛이 변했다.평소 같았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불필요하게 일이 커져 자신들의 이미지에 타격이 가지 않도록 손아림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혼을 냈을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연미혜가 먼저 넥스 그룹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계약을 해지해도 좋다고 말한 순간부터,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연미혜가 넥스 그룹의 실질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에 쏠리게 되었다.속으로는 손아림이 잘못한 건 맞지만, 당장은 연미혜와 신경전을 벌여보고 나서 사과할지 말지를
점심 무렵, 연미혜는 시간을 내어 김태훈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고, 덧붙였다.“이번 일은 갈등의 초점을 좀 돌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김태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좋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그 말이 끝나자마자, 곧 임지유에게서 걸려 왔다.김태훈은 피식 웃으며 무심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임지유가 난감해하며 말했다.“오늘 아침 있었던 일... 혹시 김 대표님도 들으셨나요?”김태훈은 굳이 예의를 따질 생각도 없는 듯,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아침에
임지유는 김태훈과의 통화를 마친 후, 손수희와 이금자, 손아림 등과 함께 고급 식당의 룸에서 식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손수희가 물었다.“무슨 일이야? 김태훈 대표가 뭐라고 했는데?”임지유는 휴대폰을 꽉 쥔 채 대답했다.“김태훈 대표가 우리랑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해요. 그리고 명예 훼손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요구했어요.”“뭐라고?”손수희뿐만 아니라 이금자와 손아림도 놀란 표정이었다.손아림은 당장 언성을 높였다.“아침에 그 자리에서 사과도 했잖아. 연미혜! 그 나쁜 년이 김태훈 대표한테
임지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번 일의 시작은 분명 우리 쪽이 잘못했으니까...’경민준 앞에서 임지유는 늘 좋은 인상을 유지해 왔다. 그래서 경민준이 이번 일을 알게 된 후 혹시나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연미혜를 몰아붙였다고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됐다.손수희는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지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남자의 마음을 오랫동안 붙잡아두기 위해선 보여지는 것들, 매너와 태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금자 또한 경민준이 임지유를 특별하게 여기는 건 임지
그날 오후, 연미혜가 넥스 그룹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민준의 전화가 걸려 왔다.세인티와의 계약을 해지하게 되면, 세인티 입장에선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전화 수신창에 ‘경민준’이라는 이름이 뜨는 순간, 연미혜는 그가 왜 전화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하지만 경민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연달아 두 통의 전화를 더 걸어봤지만 연미혜가 끝까지 받지 않자, 결국엔 김태훈에게까지 연락을 돌렸다.김태훈은 그 역시도 그 목적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통화가 연결되자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