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준도 있었기에 연미혜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다.임지유가 김태훈과 인사하기 위해 웃으며 걸어왔다.“김 대표님, 이런 우연이 있네요. 여기서 또 만나다니.”김태훈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 정말 우연이네요.”“안 그래도 전부터 김 대표님에게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했어요.”“지유 씨,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지유 씨가 바쁜 건 저도 알고 있어요.”그렇지 않으면 처음 만나고 나서 한 달이 지났는데도 넥스 그룹에 출근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임해철도 김태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연미혜와 경민준이 집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노현숙은 연미혜가 정말로 경민준의 차를 타고 돌아온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위층으로 올라간 연미혜는 연창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연창훈과 통화를 마치자마자 김태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30분 정도 통화를 한 후 방으로 돌아온 연미혜는 경민준이 이미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연미혜가 방으로 들어오자 경민준은 책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를 흘끗 보고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연미혜도 아무 말 없이 샤워를 하
비록 오래된 지역이지만 별장 환경이 좋았고 도원시의 집값 또한 국내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기에 이런 별장은 적어도 200, 300억 원은 줘야 살 수 있었다.연미혜는 현재 이 정도의 금액을 마련할 수 없었다.방금 집으로 돌아온 경민준은 목에 맨 넥타이를 풀더니 약간 흥미로운 눈빛을 내뿜으며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나에게 돈을 주려고?”“응, 나는...”“필요 없어.”경민준은 푼 넥타이를 한쪽에 두며 말했다.“이 정도 돈은 얼마든지 낼 수 있으니까.”말을 마친 경민준은 시계를 풀고 욕실로 들어갔다.경민준의
휴대폰을 내려놓은 연미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노현숙에게 경민준이 저녁 석식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이날 밤, 경민준은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경민준이 어젯밤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안 노현숙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민준이 이 자식! 일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집에 올 시간이 없어?”이 말을 들은 연미혜는 웃으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경민준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집에 올 시간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다만 경민준에게 휴식도 필요했다.어젯밤 전화기 너머로 들렸던 임지유의 목소리를 떠올린 연미혜는 경
연미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어쩌면 임지유에게 삼촌 집을 이사하게 하는 조건으로 경민준이 내 건 보상일 수도 있다.임지유에 대한 감정이 이렇게 깊은 사람이 연미혜를 돕기 위해 임지유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김태훈이 말했다.“만약 정말로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면...”연미혜와 김태훈 모두 유명욱의 학생이었고 유명욱이 평소에 그들에게 냉담했지만 사실 유명욱과의 관계는 꽤 좋았다.유명욱은 겉으로는 엄격했지만 속은 부드러운 사람이었다.하지만 원칙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만약 임지유의 능력과 재능이 정말로 뛰어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연미혜는 온천으로 가기 위해 옷과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경민준의 물건은 건드리지 않고 자신의 물건만 챙겼다.비록 경민준이 그녀의 법적 남편이긴 하지만 이젠 그녀의 남자가 아니라 임지유의 남자였다.어쩌면 연미혜가 자기 물건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그리고 연미혜도 이제는 그의 물건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경다솜의 물건은 유순자가 챙겨줬다.예전 같았으면 그녀는 경다솜의 물건이 빠지지 않았는지 걱정했을 것이고 유순자가 도와줬더라도 다시 한번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자기 물건만 챙
연미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약간 불편함을 느꼈지만 속옷이 싫지 않았기에 그냥 입기로 했다.목욕가운을 입고 있던 연미혜는 자신을 바라보는 경민준의 시선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입고 있는 속옷이 떠올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어갔다.온천 수영장 옆으로 가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은 뒤 목욕가운을 벗었다.그녀가 입고 있는 속옷이 경민준의 눈앞에 완전히 드러난 순간 경민준은 순간 멈칫했다.연미혜는 이 속옷이 노현숙이 준 것임을 경민준이 알고 있다고 믿었다.이걸 입은
이때 다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정범규가 나왔다.정범규가 온천에 왔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연미혜는 약간 놀랐다.하지만 노현숙과 경민준은 정범규가 온천에 온 것을 진작 알고 있었던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연미혜를 본 정범규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노현숙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어르신, 벌써 가시려고요? 점심 먹고 가시지 그래요?”정씨 가문과 경씨 집안은 사이가 좋았다.정범규를 어릴 때부터 봐온 노현숙은 그의 말에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됐어 됐어, 너희들끼리 잘 놀아.”그들은 노현숙을 배웅하기 위해 문밖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