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초조한 어조를 들은 온지유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윤정의 시선은 여이현의 사무실 쪽을 향하고 있었고, 빨리 온지유가 그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예전 같으면 여이현 사무실에 있는 일로는 이윤정을 이토록 신경 쓰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동료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었고, 이윤정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다.그리고 사무실 안에는 정말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대부분은, 온지유는 감이 무뎌서 별생각이 없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기 쉽기 때문이다.온지유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사무실에 가서 뭐 하게? 대표님의 일을 내가 어떻게 함부로 끼어들겠어?”사실 그녀는 이윤정에게 동료들 사이의 소문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이윤정은 온지유가 여전히 컴퓨터를 보고 정말로 급하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노승아가 아침 일찍부터 와서, 대표님이 사무실로 불렀는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어요. 안에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아요.”이윤정은 온지유가 상황을 모른 채 있기를 원치 않았다.만일 그녀가 대표님의 부인이라면, 정식 부인의 위치를 굳게 지켜야 하고, 다른 여우 같은 여자가 올라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온지유가 대표의 부인이라는 사실은 이윤정에게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해주었다.그녀는 전부터 여이현과 온지유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여이현에게 부인이 있다는 사실이 그 생각을 접게 했다.정말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이윤정은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노승아 같은 여우가 올라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금 그녀는 매우 오만한 상태로, 자신만만하게 지내고 있다. 만약 대표님이 속는다면 어쩐다!노승아의 이름을 듣자, 온지유의 손이 잠시 멈췄다. 현재 노승아는 연예계에서 아주 잘나가고 있으며, 아주 빛나는 사람이다.여이현 곁에 서 있어도 충분히 어울린다.온지유는 침착하게 이윤정을 보며 말했다."일찍 오셨는데
기자의 촬영 당한 것이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온지유는 영상을 보고도 조용히 있었다. 노승아와 그 남자 배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이현이 그렇게 신경 쓰고 화를 낸다니,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걸까?온지유는 노승아와 단둘이 사무실에 있든 말든, 여이현이 화를 내는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신경 쓰면 스스로 고생하는 길일 뿐이었다.온지유는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한편, 곁에서 이윤정과 송서연은 여이현이 노승아에게 해줬던 일들을 두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사무실 문이 다시 열리고 이번에는 노승아가 문을 열고 나왔다.이윤정과 송서연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오빠, 나랑 그 남자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기자들이 그냥 짜집기 한 거예요.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화 푸세요, 네?”노승아는 울먹이며 여이현을 달래려 했다.이윤정은 입을 삐죽이며, 노승아의 연기가 과하다고 생각했다.반면 여이현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도 무거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한 번뿐이야. 다시는 이런 스캔들이 나오지 않도록 해.”“신경 쓸게요.”노승아가 다시 말했다.“아시다시피 저는 신인이라 아직 연예계 사정에 대해 잘 몰라요. 앞으로 남배우들과는 거리를 둘게요.”“그래.”여이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들의 대화는 온지유에게 고스란히 다 들렸다.송서연의 말처럼, 확실히 여이현은 노승아의 스캔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노승아가 사무실을 나섰다.온지유의 책상은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금방 눈에 띄었다.노승아는 모두가 그곳에 모여 서 있는 것을 보고,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고 말했다."왜 다들 여기에 모여 있는 거예요? 오빠, 사무실에 비서가 두 명이나 더 늘었나요?"여이현은 이윤정과 송서연을 쳐다보고는, 기웃거리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일은 안 하고?"이윤정과 송서연은 놀라서 금세 고개를 숙였다.여이현이 이런 말을
노승아는 온지유의 말에 자존심이 긁혔다. 온지유가 노승아의 드라마는 대단한 기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노승아는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다. 가수로서도 성공했고, 배우로서도 더 높은 경지에 올랐으며, 예전보다 훨씬 인기도 많아졌다.그러나 온지유의 말은 순전히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었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여이현이 있는 자리라 어쩔수 없이 화를 억눌러야 했다.“이번에 새로 찍은 포스터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노승아는 일부러 창가로 가서 밖의 대형 광고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녀는 피식 웃었다. 온지유의 자리가 마침 이 포스터가 훤히 다 보이는 좋은 위치라 매일 보면서 기분을 잡칠 것이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승아 씨, 저는 일을 마저 해야 하는데, 아직도 남은 할 말이 있나요?”온지유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노승아는 단지 자신을 과시하려 할 뿐이고, 온지유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없어요. 오랜만에 봤으니 잠시 수다나 떨까 해서요.”노승아는 다시 온지유의 책상 옆에 섰다.“듣자 하니, 퇴사할 생각이라면서요. 혹시 다른 일자리는 필요하세요?”노승아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가 퇴사하면, 우리 회사에서 비서로 고용할 수도 있어요. 경력도 풍부해서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이는 온지유와 여이현 모두에게 기분 나쁜 말이었다.특히 여이현은 온지유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노승아가 하필 그 점을 건드리자, 여인 현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온지유가 사직한다고 누가 말했어?”여이현의 얼굴빛을 보고 노승아는 당황했다.“아니, 저도 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거예요. 지유 언니가 사직한다는 게 비밀도 아니잖아요.”이미 소문이 돌고 있는 걸 보니 별일도 아닐 텐데, 왜 여이현이 그렇게 크게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온지유가 여이현 곁에서 7년을 보냈는데, 사직한다는 건, 그들이 곧 이혼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노승아는 이날이 오기를 한없이
지시를 받은 송서연은 빠르게 대답했다.“네.”여이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내가 다른 사람이 탄 건 마실 수 없어서요.”송서연은 또다시 멈춰 섰다. 이때 온지유가 말했다.“승아 씨 얘기 못 들었어요? 회사는 쓸데없는 사람을 남겨두지 않아요. 커피 타는 일도 제가 해야 하면, 송 비서를 고용해서 뭐 하죠?”온지유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이윤정과 송서연이 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아무래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온지유와 꽤 긴 시간 함께 있은 이윤정도 당황할 정도였다. 평소 냉정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 없는 그녀였다.두 사람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이현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불쾌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온 비서가 고용한 비서잖아요?”“맞아요. 제가 고용한 비서예요. 그러니 가르치는 것도 제 책임이겠네요. 제가 커피 타는 법을 가르치는데 의견 없으시죠?”여이현은 비서가 필요 없었다. 그건 단지 온지유를 붙잡을 핑계에 불과했다.온지유는 오늘 유독 예민해 보였다. 여이현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싸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르쳐요. 대신 오늘은 온 비서가 탄 커피를 마셔야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고 사무실에 들어가 버렸다. 이윤정은 이제야 한숨 돌리며 온지유에게 말했다.“온 비서님 너무 멋져요! 노승아 씨 표정 봤어요? 아마 단단히 빡쳤을 거예요.”노승아는 등장 자체가 온지유에게 스트레스였다. 더군다나 듣기 싫은 말까지 해대니 당연히 쉽게 보내줄 수 없었다.“노승아 씨는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예요. 평생 온 비서님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테니까요!”노승아가 반갑지 않기는 이윤정도 마찬가지였다. 온지유의 말 덕분에 그녀도 덩달아 속이 후련해졌다. 동시에 깨달았다. 온지유의 적이 되어서 득이 될 건 없다는 것을 말이다.“이 얘기는 그만해요.
온지유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여이현은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결혼한 지 한참 되었지만 외식 한 번 한 적 없다. 원래도 진짜 커플끼리 하는 일이기에 바란 적이 없다.그녀가 대답 없는 것을 보고 여이현이 말을 이었다.“왜 대답 안 해? 레스토랑은 이미 예약했어. 밥 먹고 영화관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자.”“갑자기 왜요? 무슨 영화까지... 오늘 무슨 날이에요?”그녀는 모든 일에 의심을 품었다. 여이현과 관련된 일에는 무조건 그래야 했다.요즘 이혼 얘기를 꺼내고 나서 그녀는 계속 차갑게 굴었다. 여이현은 조금만 잘해주면 그녀가 생각을 바꿀 것으로 여기고 대답했다.“그냥 그러고 싶어서. 이따가 나랑 같이 가자.”말을 마친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미간을 찌푸렸다.“브랜드 바꿨어?”“원래 브랜드가 없어서 다른 걸 사봤어요. 원래 마시던 게 오면 금방 바꿔줄게요. 오늘은 일단 있는 걸 마셔요.”“괜찮아.”여이현은 예상 밖으로 덤덤하게 커피를 계속 마셨다. 온지유는 무조건 안 마실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녀는 커피 때문에 한바탕 또 시끄러워질 줄 알았다.그러나 새로 바꾼 브랜드도 괜찮은 듯 그는 묵묵히 마시고 있었다. 온지유는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오늘따라 일로도 너그럽게 굴었던 것 같다.‘갑자기 무슨 외식이야. 오늘 노승아랑 마주친 것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나?’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하지만 뭐가 됐든 여이현은 인간적으로 그녀와 이혼하고 노승아에게 명분을 줘야 했다....같은 시각, 노승아는 회사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 한 차량이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왔다.“하임아, 저 사람 노승아 아니야? 대박, 이렇게 실물을 보다니!”강하임과 같은 차에 타 있던 여자가 흥분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강하임은 아직도 강윤희와 어색했다. 어차피 친구는 많으니, 이제는 그냥 다른 사람과 놀 생각이었다.연예계에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덤덤하게
여자는 궁금한 듯 물었다.“넌 어떻게 알아? 아, 혹시 전에 여진이랑 협력하면서 여이현 대표한테 들은 거야?”강하임은 곁으로 지나가는 노승아를 힐끗 봤다. 확실히 첫사랑으로 불릴 만한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이현에게 직접 물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지나가던 노승아는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노승아 씨.”노승아가 다시 머리를 돌리려고 할 때 강하임이 그녀를 불렀다. 상대가 여자인 것을 보고 그녀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그녀는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이다.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친절한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했다.“안녕하세요.”“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저 노승아 씨 팬이에요. 노승아 씨가 나온 영화랑 드라마는 전부 봤어요. 장다희 씨보다 백배 천배 아름다우세요.”강하임은 신이 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승아가 출연한 작품은 조금 전 검색으로 알아본 것이었다.노승아는 이런 칭찬에 아주 약했다. 특히 장다희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가장 좋았다. 장다희는 그녀의 경쟁 상대로 쉽게 이길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그녀를 아니꼽게 여기는 장다희는 태도가 좋았던 적이 없다. 그녀가 이미지를 위해 먼저 미소를 지어 보여도 무시하기 일쑤였다.다행히 신은 공평했다. 좋은 캐릭터를 만난 덕분에 그녀의 인기가 장다희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도 겉으로는 항상 겸손하게 공로를 돌렸다.“아니에요. 선배님은 실력파 배우예요. 저는 아직 선배님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걸요. 계속 공부해야죠.”강하임은 원래 노승아와 인사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강한 사람을 선호했다. 하지만 노승아는 예외였다. 어쩐지 알아 둬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았다.“이건 제 명함이에요.”그녀는 명함을 건넸다. 노승아는 힐끗 보고 놀란 듯 물었다.“금강그룹의 대표님이셨어요?”노승아는 강하임을 잠깐 바라보다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그러
노승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실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오빠는 오래전에 결혼했다는 걸 인정했거든요. 하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노승아 씨는 알아요?”“네. 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괜히 비밀 결혼인 게 아니니까요. 결혼한 지 한참 됐는데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예민한 문제예요.”“...”“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같이 커피라도 한잔해요.”말을 마친 노승아는 차에 올라탔다. 강하임은 제자리에 덩그러니 서서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차에 오르고 시선이 차단된 다음, 노승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언니, 이럴 때 기선 제압해야지 왜 가만히 있었어요? 대표님이 언니를 좋아한다는 걸 밝혀야 그 여자들이 귀찮게 굴지 않을 거 아니에요!”김예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만약 예전 같으면 노승아도 오늘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하임과 여이현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다음에는 달랐다.두 사람은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여이현이 학교에 있은 시간이 별로 길지 않았는데도 인상이 깊을 정도면 무언가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그 여자 절대 내 드라마를 본 적 없어.”“네?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노승아는 손톱을 바라보며 말했다.“핸드폰에 내 이름을 검색한 기록이 있었어. 팬은 무슨, 그냥 말 걸려고 급하게 찾아봤던 거야. 나랑 오빠 사이가 궁금했겠지. 저 여자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 괜히 엮여 봤자 좋을 게 없어. 운 좋으면 도움받을 수도 있겠지.”김예진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언니 진짜 똑똑해요!”강하임은 제자리에서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여이현이 결혼했다고? 말도 안 돼!’그녀는 섬뜩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우리의 약속은 잊은 거야? 내가 성인이 된 다음 결혼하기로 했잖아! 나랑 그런 약속을 해놓고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 있지? 도대체 누구랑 결혼한 거야?’노승아의 대답은 아주 애매했다. 정
여이현은 살짝 기대되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한 적이 없었기에, 온마음의 반응이 궁금했다.하지만 막상 사무실에 도착하니, 온마음의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컴퓨터가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가오는 이윤정에게 차갑게 물었다.“온 비서는 어디 있죠?”이윤정은 서류 다발을 들고서 대답했다.“온 비서님은 10분 전에 나가셨어요. 친구랑 저녁 약속 있다고 하던데요?”여이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친구랑 저녁 약속?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 전에 오늘은 나랑 밥 먹자고 하지 않았나? 이건 혹시 거절...?’여이현은 굉장히 언짢았다. 깊고 날카로운 눈동자도 순식간에 서늘해졌다.그의 점점 어두워지는 안색을 보면서, 이윤정은 도망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왜 갑자기 화났는지 몰랐지만 일단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여자분과 약속을 잡은 것 같습니다.”여이현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아래층에는 배진호가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의 식사를 위해 그들은 많은 준비를 했다. 배진호는 여이현이 혼자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급히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이건 주문하신 꽃입니다. 사모님께서는 데이트한다고 위에서 준비하고 계시죠?”꽃은 여이현의 눈앞에 다가왔다. 그는 배진호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배진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여이현의 감정 변화는 대부분 온지유 때문이었다.“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 먼저 가신 건 아니겠죠...?”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기를 바랐다.여이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분노를 억누르다가 말했다.“차에 타요!”“네!”배진호는 오늘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너무 터무니없었던 것 같다. 그는 꽃다발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는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