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바보가 아니었다.이미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채미소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 했으며, 신인이 자신의 인기를 넘어서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자신의 꼼수가 들통난 것은 채미소에게 큰 수치였고, 심경이 불편했다.“쓸데없는 말은 그만해요, 당신은 꼭 나랑 가야 해요!”그러나 온지유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저도 제 할 일이 있어요. 먼저 가볼게요.”온지유는 채미소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더 이상 그녀와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채미소는 온지유의 태도에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야, 온지유!”온지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이 상황에서, 사무실의 사람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채미소를 그렇게 대놓고 무시한 건 온지유가 첫 번째였다.방송국을 나와, 온지유는 택시를 잡고 보육원의 주소로 향했다.보육원이 궁핍한 이유도 있었다. 보육원은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시내를 벗어난 데다가 길도 좋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았다.목적지에 도착한 온지유는 차에서 내려 보육원의 문 앞에 섰다. 정문에는 녹이 슬어 있었고, 안에는 대나무가 빼곡했으며 건물은 매우 낡아 있었다. 전혀 번화한 도시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온지유 씨 맞는가요?”원장이 온지유가 밖에 서 있는 것을 보며 말했다.원장은 40대의 여성이었지만, 이미 머리카락이 많이 희어져 나이가 들어 보였다.소박한 옷차림에, 신발은 천으로 된 것이었으며, 헝겊을 덧대어 꿰맨 상태였다.생활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인터뷰하러 왔습니다.”“어머, 어서 들어오세요!”원장은 녹슨 철문을 열었다.안으로 들어가자, 내부는 더욱 허름했다. 벽에는 아이들이 분필로 그린 그림이 가득해 지저분하고 더러웠으며, 벽의 타일은 여러 군데 떨어져 있었다.온지유가 문가에 서자, 안에 있던 아이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지유 씨, 저희 아이들입니다.”원장이 그
상황을 파악한 후, 온지유는 밖으로 나와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대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아이는 손에 사탕을 쥐고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이를 본 온지유는 아이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어, 지유 언니.”아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했다.온지유는 아이에게 물었다.“왜 사탕을 안 먹고 있어?”아이의 눈은 아래로 향했고, 사탕을 손에 쥐며 고개를 저었다.“먹기 아까워서요.”“왜?”아이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친구들이 말했어요. 이 사탕이 정말 맛있대요. 먹어 본 중에 제일 맛있는 사탕이라고요! 다 먹어버리면 이젠 없을까 봐서 아껴 먹으려고요. 조금씩 핥아서 아주 오랫동안 먹을 수 있게요.”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혀로 살짝 핥았다.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마음이 아팠다.이건 그녀에게 아주 평범한 사탕이었다. 어렸을 때 자주 먹던 것이기도 했다.온지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지금은 아직 어리지만, 나중에 크면 사탕을 아주아주 많이 살 수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마음껏 먹을 수 있어.”아이가 사탕을 다시 포장지에 싸고 머리를 들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정말요? 크면 사탕을 많이 먹을 수 있어요? 저는 사탕이 제일 좋아요.”온지유는 말했다.“그러려면 열심히 공부하고 나중에 열심히 일해서 돈도 많이 벌어야 해.”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알아요. 저는 아주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벌면 언니처럼 다른 사람들을 도울 거예요.”“다른 사람을 돕는 건 좋은 일이지만,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해. 능력껏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거든.”온지유는 부족한 것이 없었고 이런 고달픔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이곳의 모든 고아가 사랑을 받으며 자기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다.그들은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부족한 어린 시절은 성인이 되어서야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그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원장님, 원장님, 차가 여러 대 찾아왔어요!”원장은 급히 밖으로 나가며 물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행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진그룹은 여태 많은 자선 사업을 해왔지만 여이현이 직접 나선 적은 없었다.온지유는 다시 말했다.“그게 아니라 제가 오고 난 뒤 바로 당신이 와서 물품을 보내는 게 의심스럽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더 묻지 않을게요.”온지유는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이곳에서 여이현과 다툴 여유가 없었다.게다가 그는 온지유에게 불만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눈살을 찌푸렸다.이미 온지유에게 쌓인 불만이 많았는데, 이제는 심지어 그에게 쌀쌀한 태도까지 보이고 있었다.“아저씨, 아저씨!”온지유는 열 명 남짓의 아이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넘어지는 게 무섭지도 않은지 쏜살같이 달렸다.온지유는 아이들이 여이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뒤를 돌아봤다.아이들은 차창 앞에 몰려들어 호기심과 감사의 눈빛으로 재잘재잘 말했다.“고맙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정말 최고예요!”여이현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아이들과 접촉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열 명 넘는 아이들이 차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여이현은 자신이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의 아이들은 더럽고 어수선해 보였다.그는 딱딱한 표정으로 거리를 두고 거부하는 기색을 보였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싫어할 것을 알았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이면 시끄럽고 방해가 될 테니 분명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어쨌든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여이현이 어떤 아이에게도 다정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온지유는 아이들이 여이현을 화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 자칫 이 물자가 다시 회수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보육원으로 돌아가려고 다가갔다.“아저씨, 저 차들 다 아저씨가 부르신 거예요?”차창에 붙어 있던 어린아이가 여이현을 순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여이현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아이들과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대기업의 대표인 그에게 보육원의
여이현은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지른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온지유는 급히 아이들을 끌어안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얘들아. 아저씨는 호랑이가 아니야. 아저씨는 착한 사람이야. 방금 너희들에게 물품도 보내줬잖아. 눈물 그치자, 우는 아이는 선물 못 받는다?”아이들은 금세 눈물을 그치고 말했다.“안 울어요. 우린 용감하니까 울지 않을 거예요!”하지만 여이현을 보면 또 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참으려 해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이를 대하는 온지유는 흐르는 샘물처럼 부드러웠다.헛기침을 두 번 하고 여이현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아이들은 조금 전 일로 경계하며 온지유의 뒤로 숨었다.여이현은 얼굴을 굳혔다. 이렇게 겁이 많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말이다.“너희들 빨리 돌아가.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호랑이가 잡으러 간다!”아이들은 그 말에 단숨에 뛰어 돌아갔다.온지유는 그 뒤를 따라갔다.여이현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온지유는 꾸밈없이 자연스러웠다. 긴장한 상태를 유지할 필요도 없었고, 진심으로 다정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온지유의 색다른 모습을 엿본 듯한 기분에 여이현도 진심으로 웃음을 지었다.여이현은 기사를 보며 물었다.“제 얼굴이 무섭게 생겼나요?”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기사도 멍하니 있다고 말했다.“대표님이 무서울 리가요. 절 키워 준 부모님과도 같으신데 고마울 뿐이죠.”여이현은 아이들이 왜 자신을 무서워하는지 영문을 몰랐다.그도 곧 아이들의 뒤를 따라 보육원으로 들어섰다.“호랑이가 왔다!”여이현이 들어서자, 아이들이 경계하며 외쳤다.원장이 보고 급히 제지했다.“호랑이라니, 좋으신 분인데! 입을 것 먹을 것을 이렇게나 많이 보내주셨는데 빨리 감사해야지!”“감사합니다, 아저씨!”아이들은 말을 잘 들었다.여이현은 이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아저씨라는 소리를 듣는 동시에 온지유는 누나였다. 온지유보다 두 배는 더
“그럼 저흰 이만 돌아가 볼게요.”온지유가 말했다.“네, 또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원장이 대답했다.여이현은 아이들을 보며 돌아서기 전에 다시 한번 물었다.“우릴 어떻게 불러야 한댔지?”“형, 누나요!”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형과 누나가 아니면 또 뭐로 불러야 한댔지?”“삼촌이랑 이모!”아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열 번을 넘게 가르쳤으니 말이다.기억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그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걸지도 모른다. 얼굴에는 미소가 띠어있었다.“이모, 삼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온지유가 놀라서 물었다.“얘들아, 그게 무슨 소리야?”“아까 삼촌이 그랬어요. 이모는 삼촌이랑 결혼했다고. 그러니까 족보가 꼬이지 않게 형과 누나라고 부르든지, 이모 삼촌으로 부르라고요. 어쨌든 하나는 누나, 다른 하나는 삼촌이면 안 된대요.”아이들이 사실대로 말했다.온지유는 할 말을 잃었다.여이현이 뭘 그렇게 신경 쓰고 있었는지 몰랐었는데.이것이었구나.하지만 왜 둘 사이가 부부라는 것을 말하고 다니는 걸까?온지유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원장이 웃으며 말했다.“지유 씨, 아직 젊으셔서 결혼을 한지도 몰랐네요. 여 대표님같이 사업을 지지해 주는 남편이 계시니 지유 씨도 꼭 행복하실 거예요.”“전...”온지유는 둘 사이는 이미 부부관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원장이 바로 말을 이었다.“대표님처럼 아내의 일을 지지해 주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인터뷰한다는 말에 이렇게나 많은 물건을 준비해 주신다니. 저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도움을 주겠다고까지 했다니까요. 지유 씨를 알게 되어서 다음 생까지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원장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듣기 좋은 말은 이미 여러 번 말했다. 모두 진심으로 우러나온 말이지만 정말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시길 빕니다.”두 사람이 영원히 사랑하기를 원장은 진심으로 바랐다
“여긴 동떨어진 곳이라 내리면 몇 시간은 걸어야 시내로 나올 수 있어. 기분으로 고집부리지 마.”여이현은 차창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며 가볍게 말했다.온지유는 길을 보고 확실히 여기서는 몇 시간을 흙길 위를 걸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야생동물이 나타날지도 몰랐다.안전을 위해 온지유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때와 시간을 가리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방송국 앞에 차를 세우고 여이현은 간판을 보며 물었다.“여기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던데.”“그래요?”온지유가 한마디 대답했다.여이현이 깊은 눈동자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네가 오지 않은 거지?”온지유는 자신이 거절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여 대표님을 인터뷰하는 일은 아직 제게 들어오지 않아요. 들어간 지 열흘도 안 되는데, 아직 제가 할 수 있는 건 글 몇 자 적는 것 뿐이에요.”여이현은 그 말을 일단 믿는 수밖에 없었다. 온지유의 말을 존중하기 위해서일 뿐이었지만 말이다.잠시 생각하던 여이현이 또 물었다.“날 인터뷰하면 너에게도 꽤 유리하지 않은가?”온지유는 말없이 의문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뜻인 걸까? 온지유를 돕기라도 하겠다는 건가?하지만 그는 자기 일에 바쁘니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때, 온지유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지유야.”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민우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나민우? 여긴 왜 왔어?”나민우는 차 문을 닫고 말했다.“회사를 옮겼다는 말을 듣고 잘 적응하고 있나 보러 왔는데. 잘 지내나 보네?”나민우는 시선을 여이현에게 돌리며 말했다.“우연이네요, 대표님도 계셨군요.”여이현은 나민우를 보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대표님, 여기서 만난 건 우연이 아닐 것 같은데요.”“맞아요, 온지유씨를 보러왔습니다. 밥이라
“...”나민우는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온지유도 경악을 금치 못해 여이현을 바라봤다.혼인 증명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여이현은 겹겹이 싸인 것을 벗기고 서류를 꺼냈다.나민우에게 더 잘 보이도록 높이 들어 말했다.“저와 온지유의 증명서입니다. 보이시죠?”나민우는 눈빛이 짙어졌다.여이현의 눈길에서 자기의 것이 아닌 자신감을 느꼈다.아직 온지유와의 관계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기쁘기라도 한 듯했다.그러나 계약 결혼이었다면 이혼이 반가워야 하는 것 아닌가?처음에는 여이현이 남자로서 자존심을 세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온지유가 자기 아내라고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은 그가 유치하기 그지없다고 처음으로 느꼈다.누가 혼인 증명서를 층층이 감싸서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 있게 꺼내 보이기까지 한단 말인가.“여 대표님, 어차피 이혼은 하셔야지 않습니까.”나민우가 무덤덤하게 말했다.그러나 여이현이 반박했다.“누구 마음대로요?”나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이 상태를 보아하니 여이현은 이혼을 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하다.“제 마음대로요.”온지유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이현을 쏘아보며 말했다.“이혼 하겠다고 처음부터 계속 말하지 않았나요? 혼인 증명 서류가 있더라도 앞으로는 이혼 증명 서류를 들고 다니게 해드리죠.”나민우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온지유를 바라보았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 손안에 든 서류를 꼿꼿하게 펴 들고 말했다.“결혼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소꿉장난이 아니야. 지금 이게 놀음 거리 같아?”온지유는 더더욱 여이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지금 혼인을 장난으로 여기는 건 다름 아닌 여이현 아닌가. 이 혼인 관계에서 온지유는 하루라도 아내로서의 행복을 느낀 적이 없었다,말해도 이미 소용없다.온지유는 이미 그의 아내로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유가 갖고 싶었다
나민우는 곁에 놓여있던 술을 들고 들이켰다.그는 늘 이성적이었다.온지유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친구 관계를 유지해 왔다.온지유를 좋아한다고 인정한 날에도, 술을 먹고 그 기운에 취해 말이 나온 것이었다.하지만, 이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었다.나민우는 온지유가 여이현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온지유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고 싶었다.나민우는 시종 여이현처럼 대범하게 나가지 못했다.사랑받는 사람은 자신감이 생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는 온지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여이현이 부러웠다.나민우는 쓴웃음을 삼키며 잔에 술을 더 붓고 한입에 들이켰다.손 옆에 놓인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다.나민우는 곁눈으로 힐긋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받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끊임없이 술을 마실 뿐이었다.온지유는 자리를 뜨고 택시를 불러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근처에 빈 택시가 없는지 앱을 켜 확인해 보니 대기 순번이 30을 넘어가고 있었다.차를 타려면 아직도 30분은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여이현이 쫓아 온 것을 본 온지유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여이현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다. 이 시간에는 차를 탈 수 없음을 눈치챘다.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차에 탄 여이현은 온지유의 뒤에 따라붙었다.그는 차창을 열고 외쳤다.“타, 데려다줄게.”온지유는 뒤돌아보지 않았다.“필요 없어요.”여이현은 잘 알고 있었다.“여기서 집까지 차로 20분밖에 안 걸려. 걸으려면 1시간은 넘게 걸리잖아.”“이미 차 불렀어요.”“지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차를 불러. 거짓말하지 말고 빨리 타.”“신경 끄세요!”온지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오는 여이현에 짜증이 났다.여이현은 그대로 클락션을 울렸다.길가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그에 또 2번을 연속으로 울렸다.“안 타면 뒤에서 따라가면서 계속 울릴 거야.”여이현이 말했다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