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회의실을 나온 서윤은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복도를 걸었다.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재헌이었다.[오늘 저녁 시간 있어?]서윤의 입가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올라갔다.정말 다시 물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답장을 보냈다.[오늘도 안 돼요.]문이 열리기도 전에 답이 왔다.[알았어.]끝이었다.누구를 만나는지 묻지 않았고 어디로 가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서윤이 화면을 끄려는 순간 다시 진동이 울렸다.이번에는 도준이었다.[오늘 저녁도 시간 있습니까?]서윤은 메시지를 보자마자 피식 웃었다.[어제 먹었잖아요.]답이 금방 왔다.[하루 한 끼만 먹습니까?]서윤은 걸음을 멈추고 답장을 쳤다.[그 말이 아니잖아요.][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보는 겁니다.]서윤이 웃으며 화면을 두드렸다.[대표님 요즘 많이 한가한가 봐요.]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한가하지 않습니다. 한서윤 씨한테 쓸 시간은 만들고 있고.]서윤의 손가락이 멈췄다.어제 저녁부터 권도준은 이런 식이었다.웃게 만들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걸음 들어왔다.서윤은 입술을 깨물며 답장을 썼다.[오늘 메뉴는 내가 정해요.]곧바로 답이 왔다.[좋습니다. 어제보다 발전했네요.][뭐가요?][오늘은 거절부터 안 했잖아요.]서윤이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또 당했다.[지금이라도 거절할까요?][이미 늦었습니다.][왜요?]잠시 뒤 도준의 답이 도착했다.[기분 좋아졌으니까 취소 안 받습니다.]서윤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복도를 지나던 직원이 그녀를 한번 돌아봤다.그 순간 또 한 줄이 도착했다.[그리고 오늘은 어제 못 한 얘기도 할 겁니다.]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서윤의 손끝이 화면 위에 머물렀다.[꼭 해야 해요?]이번에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빠져나왔다.서윤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싫으면 안 합니다.]그 한 줄 아래로 조금 뒤 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대신 내가 왜 이
서윤도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그런데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곳이 없으면요?”도준은 밥을 한 숟갈 뜨다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없으면 만들면 되죠.”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또 시작이네요.”“뭐가요?”“연구소 만들어준다는 얘기.”도준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그게 별로였습니까?”“누가 연구소를 저녁 메뉴처럼 말해요.”“그럼 규모부터 진지하게 이야기할까요?”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권 대표님, 지금 돈 자랑하는 거죠?”“아니요.”도준은 서윤 쪽으로 반찬 접시를 밀어놓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쓸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하는 중입니다.”서윤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도준은 그대로 밥을 먹었다.몇 초 뒤 서윤이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도준은 수저를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연구소 규모를 검토한다고.”“그 앞에요.”“돈 자랑 아니라는 거?”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도준의 입꼬리가 결국 올라갔다.“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습니까?”“됐어요.”서윤이 다시 젓가락을 집자 도준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왜 그렇게까지 해요?”이번 질문에는 장난기가 조금 빠져 있었다.도준의 손도 자연스럽게 멈췄다.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조용한 방 안으로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도준이 서윤을 바라봤다.“그걸 정말 몰라서 묻습니까?”서윤은 입을 열지 않았다.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둘 사이의 웃음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도준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먼저 수저를 들었다.“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왜 또 혼자 끝내요?”“더 말하면 한서윤 씨 또 도망갈 것 같아서.”서윤이 물잔을 들며 피식 웃었다.“제가 언제 도망갔다고.”도준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왔다.“그럼 다음에는 안 도망갑니까?”서윤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잔을 내려놓고도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도준이 자신의 앞에 놓아둔 반찬
서윤은 차에 타려다 다시 멈췄다.“그런데 이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러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도준의 웃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기다렸다는 듯이?”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한서윤 씨, 나는 오늘 시작한 게 아닙니다.”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도준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대신 차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녀가 선택할 공간을 열어주었다.“오늘부터 숨기지 않기로 한 거지.”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서윤은 차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그를 돌아봤다.“앞으로 계속 이럴 거예요?”도준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오늘 정도로요?”“네.”“그럼 조금 약한데.”서윤이 눈을 크게 뜨자 도준이 웃었다.“농담입니다.”“권도준 대표님도 농담을 해요?”“요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습니다.”“성과가 별로인데요.”“평가가 너무 박한데.”도준이 열린 차 문을 살짝 흔들었다.“일단 타요. 오늘 저녁까지 평가받아보고 개선하겠습니다.”서윤이 웃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도준이 문을 닫기 직전 그녀가 말했다.“기대는 안 할게요.”문을 잡고 있던 도준의 눈썹이 올라갔다.“그 말 후회하게 만들고 싶은데.”서윤은 웃으며 안전벨트를 잡았다.“해보세요.”도준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이번에는 서윤이 먼저 문을 당겨 닫았다.차창 너머로 보이는 도준의 얼굴에 천천히 웃음이 번졌다.이번에는 그가 당한 차례였다.도준이 데려간 곳은 연구센터에서 차로 십여 분 떨어진 한식당이었다.직원이 두 사람을 조용한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자리에 앉자 도준은 메뉴판을 서윤 앞으로 밀었다.“오늘은 먹고 싶은 거 직접 고르세요.”서윤이 메뉴판을 펼치며 그를 흘끗 봤다.“지난번에는 대표님 마음대로 골랐어요?”“한 박사가 잘 먹던 걸로 골랐죠.”페이지를 넘기던 서윤의 손이 멈췄다.“내가 뭘 잘 먹는지 어떻게 알아요?”도준은 물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같이 밥을 몇 번 먹었는데 그것도 모르면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닙니까?”서윤이
사람들이 노트북을 닫고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재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잠시 서윤 쪽을 바라봤지만 곧 강성 직원에게 수정안을 넘겼다.“내일까지 검토해서 올려.”그가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서윤의 시선이 무심코 닫히는 문을 따라갔다.눈앞으로 서류 한 묶음이 불쑥 들어왔다.도준이었다.“남의 뒷모습 그만 보고 이것부터 챙기죠.”서윤이 서류를 받아 들며 그를 흘겨봤다.“누가 봤다고 그래요?”“꽤 오래 봤습니다.”“시간까지 재셨어요?”도준은 자신의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다음부터는 재볼까요?”“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한서윤 씨 관련이면 시간을 좀 낼 수 있습니다.”서윤은 결국 웃으며 서류로 그의 팔을 가볍게 툭 쳤다.“요즘 말이 많이 늘었네요.”도준은 맞은 자리를 내려다보더니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반응이 좋아서.”“누가 좋대요?”“지금 또 웃고 있잖아요.”서윤은 입가를 누르며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도준이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그것도 괜찮네요.”“뭐가요?”“웃는 것도 예쁘고, 화난 척하는 것도.”서윤의 표정이 정말로 굳었다.도준은 그제야 낮게 웃으며 가방을 들었다.“저녁 먹읍시다.”“그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요?”“지금 더 하면 저녁 약속 못 잡을 것 같아서.”서윤이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봤다.“아직 제가 간다고 안 했는데요.”도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문 쪽으로 걸어갔다.“일곱 시에 아래에서 기다리겠습니다.”“안 나가면요?”문을 잡은 도준이 뒤를 돌아봤다.“집에 가야죠. 한서윤 씨를 들고 나갈 수는 없으니까.”서윤이 피식 웃었다.“그 정도 양심은 있으시네요.”“대신 내일 다시 물어볼 겁니다.”“내일도 안 되면?”“모레.”익숙한 대답에 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도준이 입가를 올렸다.“왜요. 누가 벌써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순간 재헌이 떠오른 서윤이 아무 말도 못 했다.도준은 그 표정만으로 알아차린 듯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문을 열며 낮게 덧붙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혼자 확인해요?”“그러네요.”도준은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그럼 물어볼까요?”서윤은 그제야 자신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렸다.“아니요. 그냥 혼자 확인하세요.”“이미 거의 끝났습니다.”“결론은요?”이번에는 도준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한서윤 씨가 오늘 자꾸 위험한 질문을 하네요.”서윤이 얼른 자료를 집어 들었다.“안 물어본 걸로 하죠.”“그건 곤란한데.”“왜요?”“나는 기억력이 좋아서.”“선택적으로 잊는 능력도 좀 기르세요.”도준이 웃음을 터뜨렸다.평소처럼 입가만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낮은 웃음소리가 실제로 흘러나왔다.서윤도 따라 웃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강성 측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재헌이 모습을 드러냈다.재헌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서윤이 웃고 있었다.그 앞에는 도준이 서 있었다.재헌이 기억하는 두 사람의 모습과는 미묘하게 달랐다.두 사람 사이에는 업무상 친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흘렀다.재헌의 시선이 서윤에게서 도준으로 옮겨갔다.도준도 그를 발견했다.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예전에는 그 사이에 분명한 선이 하나 있었다.남편.이제는 없었다.도준은 재헌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서윤 옆의 의자를 빼주었다.“회의 시작합니다, 한서윤 씨.”서윤이 그를 흘겨봤다.“갑자기 왜 또 한서윤 씨예요?”도준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태연하게 대꾸했다.“불러보니까 괜찮아서.”서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 모습까지 재헌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그는 아무 말 없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회의에서는 대전 시설에서 확인된 기술의 확장안을 두고 양측 의견이 계속 엇갈렸다.“그 방식으로 진행하면 기존 설비 대부분을 교체해야 합니다.”강성 측 연구원이 도면을 띄우자 도원에서도 곧바로 다른 자료를 올렸다. 전력 제어 모듈만 분리하는 방안이었지만 비용을 줄이는 대신 안정성이 떨어졌다.서윤
이혼하고 사흘째 되는 아침이었다.서윤은 평소보다 일찍 연구센터에 도착해 밤새 돌려둔 시뮬레이션 결과부터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복도에 하나둘 발소리가 늘어났고, 닫혀 있던 연구실마다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생활은 놀랄 만큼 달라진 게 없었다.달라진 건 책상 위 풍경이었다.국내외 유수 연구기관에서 보내온 제안서가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국가과학전략청의 공식 면담 요청서까지 놓여 있었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윤은 자신의 가치를 직접 입증해야 했다. 결혼 생활 동안 생긴 연구 공백을 설명하고, 다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상대에게 납득시켜야 했다.지금은 반대였다.독립 연구 공간과 전폭적인 예산 지원.연구진 독자 구성권.연구 주제 완전 자유 선택권.서윤은 마지막 장까지 읽은 제안서를 덮었다. 조건만 놓고 보면 어느 곳 하나 부족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선뜻 손이 가는 곳은 없었다.커피를 들고 다가오던 이현석이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서류 더미 위에 적힌 기관 이름들을 훑던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박사님, 이 정도면 영입이 아니라 연구소 하나를 통째로 차려주겠다는 건데요?”서윤은 모니터에 떠 있던 결과값을 저장하고 의자를 돌렸다.“그래서 더 못 고르겠어요. 예전에는 날 받아줄 곳부터 찾았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뭘 만들고 싶은지 먼저 정하고, 그걸 할 수 있는 곳을 고르면 될 것 같아요.”현석은 제안서를 다시 내려놓으며 혀를 내둘렀다.“저 조건 내민 사람들이 들으면 잠 못 자겠네요. 서로 모셔가려고 난리인데 정작 당사자는 뭘 만들지부터 생각하고 있으니.”서윤이 웃으며 서류를 다시 가져왔다.그때 연구원 한 명이 열린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태블릿을 건넸다. 오후 공동회의 참석자 명단이었다.도원에너지테크.강성그룹.서윤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강성 측 참석자 맨 위에는 강재헌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회의 시작 십 분 전, 도준이 먼저 들어왔다.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