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하자 국가가 나를 보호하고, 전남편이 집착하기 시작했다: Chapter 1 - Chapter 10

128 Chapters

1화. 아내의 결혼기념일

결혼 3주년이었다.케이크 위 숫자 3의 초가 절반쯤 녹아내릴 때까지 강재헌은 돌아오지 않았다.긴 식탁 위에는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식어 있었고, 함께 마시려고 꺼내둔 와인도 이미 차가운 온기를 잃었다. 밤 열한 시가 넘어가자 한서윤은 녹아내린 초를 뽑아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몇 시쯤 와요? 음식 데워둘게요.]답은 없었다.[오늘은 일찍 들어온다고 했잖아요.]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서윤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지난 3년 동안 재헌은 늘 바빴고,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그때 현관문이 열렸다.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빗물에 젖은 여자가 재헌의 품에 기대어 들어왔다.재헌은 자신의 코트를 여자의 어깨에 여며준 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쌌다. 결혼한 아내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다정한 손길이었다.“오빠…… 나 너무 추워.”여자가 그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젖은 원피스의 느슨한 목선이 흘러내리며 흰 피부가 드러났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헌의 팔에 몸을 바짝 밀착했다.서윤의 손이 의자 등받이를 움켜쥐었다.“누구예요?”재헌은 그제야 아내를 돌아봤다.“차유리.”“왜 이 시간에 우리 집에 데려온 거예요?”“내가 데려온 사람이야.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야.”아내의 집에 낯선 여자를 품고 들어와 놓고도 그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 하나 없었다.유리는 서윤과 시선이 마주치자 재헌의 소매를 붙잡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입꼬리가 아주 잠깐 올라갔다가 곧 힘없이 처졌다.“언니, 미안해요. 콜록, 콜록…… 저 때문에 불편하시면 호텔로 갈게요.”말과 달리 유리의 몸은 재헌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갈 생각 하지 마.”재헌이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누구도 널 여기서 내쫓지 못해.”서윤은 두 사람이 맞닿은 몸을 잠시 바라보다 재헌에게 시선을 돌렸다.“지금 그 말, 나한테 하는 경고예요?”재헌은 대답하지 않고 집사를 불렀다.“김 집사, 유리 방 준비해. 서윤 방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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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국가가 데려갑니다

한동안 빗속을 걷다 저택으로 돌아온 서윤은 안방에 남은 자신의 물건부터 옮겼다.새벽 한 시가 넘었지만 객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침대 위에는 급하게 챙겨온 옷가지와 물리학 서적들이 흩어져 있었다.책 사이에서 낡은 가죽 연구노트가 미끄러져 나왔다. 결혼 전, 밤을 새우며 수식과 실험값을 적었던 노트였다.서윤은 침대에 기대앉아 노트북을 켰다. 오래전에 닫아버린 연구 폴더를 찾는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발신번호 표시 제한]“한서윤 박사님. 국가과학전략청입니다.”벌써 네 번째 전화였다.“이번에도 같은 제안인가요?”“아닙니다. 박사님의 연구가 국가 핵심기술로 선정됐습니다.”서윤의 손이 멈췄다.“그게 무슨 뜻이죠?”“국가가 박사님의 복귀를 공식 요청한다는 뜻입니다.”“제가 수락하면요?”“저희가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통화가 끝나자 객실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재헌이었다.셔츠의 목 단추가 풀려 있었고 흐트러진 옷깃에는 익숙한 우디 향과 달콤한 여자 향수 냄새가 뒤엉켜 있었다.그는 열린 여행가방을 내려다봤다.“유리 옷이 젖었어. 네 잠옷 하나 줘.”“뭘 달라고요?”“오늘 밤 입을 옷. 아무거나 꺼내.”재헌이 가방 위의 검은색 실크 가운을 집자 서윤이 곧바로 낚아챘다.“내 방을 내준 것도 모자라 내 옷까지 입히겠다는 거예요?”“고작 잠옷 하나 가지고 유치하게 굴지 마.”“그 고작 하나, 당신 옷장에서 꺼내줘요. 당신이 데려온 여자니까.”그때 재헌의 셔츠 깃에서 긴 갈색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발끝으로 밟았다.“몸을 못 가누기에 안아 올렸어. 쓸데없는 상상 하지 마.”“묻지도 않았어요.”“표정이 말하고 있잖아.”“내가 질투해주길 바라요?”서윤이 가운을 여행가방 깊숙이 밀어 넣자 재헌은 책상 위 연구노트를 집어 들었다.“아직도 이걸 붙들고 있어?”서윤이 손을 뻗자 재헌은 노트를 위로 들었다.“돌려줘요.”“결혼하면서 그만둔 일이잖아. 아직도 취미 놀이 중이야?”“내 개인 자료예요.”서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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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남의 방

밤새 연구 자료를 정리하던 서윤은 가죽 연구노트와 노트북을 챙기다 책상 서랍 안쪽을 뒤졌다.검은색 보안 USB가 없었다.결혼 전 자신의 청춘을 바쳐 완성한 핵심 수식과 원천 연구 자료가 담긴 유일한 백업본이었다.서윤은 곧바로 복도로 나왔다. 세탁물을 옮기던 가사도우미도, 김 집사도 USB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그녀의 시선이 복도 끝에 멈췄다.어제까지 자신의 안방이었던 곳.문을 열자 짙은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화장대는 차유리의 화장품과 향수로 채워졌고, 침대 위에는 얇은 실크 잠옷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유리는 전신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재헌의 흰 셔츠만 걸친 채였다.커다란 셔츠 아래로 맨다리가 훤히 드러났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자락이 허벅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밀려 올라갔다.거울 속으로 서윤과 눈이 마주쳤다.유리가 붉은 립스틱을 바르던 입술을 비틀었다.“언니, 아침부터 남의 방에서 뭐 하세요?”남의 방.서윤의 시선이 싸늘해졌다.“내 USB 못 봤나요?”“글쎄요. 난 그런 거 관심 없는데.”서윤의 눈길이 유리가 입고 있는 셔츠에 머물렀다.“그건 재헌 씨 옷이잖아요.”유리는 셔츠 깃을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헐렁하게 벌어진 틈으로 목덜미와 쇄골에 남은 붉은 흔적이 드러났다.그녀가 보란 듯 다리를 꼬았다.“어울려요?”“벗어요.”“왜요?”“내 남편 옷이니까.”묵직한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재헌이었다.유리는 그를 보자마자 셔츠 앞섶을 움켜쥐었다.“오빠…… 언니가 이 옷 당장 벗으래.”단추에 손을 올리자 재헌이 성큼 다가와 유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흘러내린 셔츠 깃까지 끌어 올려 맨살을 가려주었다.“입고 있어.”재헌이 서윤을 돌아봤다.“내 집에서 내가 누구한테 뭘 입히든 당신이 관여할 일 아니야.”서윤은 대답 대신 방 안을 살폈다. 화장대와 침대 옆 협탁, 소파 아래까지 시선을 훑었다.“셔츠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내 핵심 연구 자료가 담긴 USB를 찾고 있어요.”“그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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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남편과 그녀의 키스

저녁이 깊어질수록 넓은 저택은 눅눅한 정적에 잠겨갔다.서윤은 가죽 연구노트를 덮고 객실을 나왔다. 재헌은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고, 식사 자리에서도 그녀와 눈조차 맞추지 않았다.계단을 내려가던 서윤은 1층 거실에서 들려오는 유리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오빠, 나 때문에 언니랑 계속 싸우는 거 싫어…….”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재헌과 유리가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서 있었다. 유리는 몸에 달라붙은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재헌의 셔츠 소매에 매달려 있었다.“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몸 추스르는 것만 생각해.”재헌이 손을 떼어내려 하자 유리는 오히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손바닥으로 단단한 가슴을 쓸어 올리며 몸을 바짝 밀착했다.“오빠…….”재헌이 유리의 손목을 붙잡았다.서윤은 그가 밀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헌의 손은 유리의 손목을 감싼 채 멈춰 있었다.“유리야.”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도 유리는 까치발을 들고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붉은 입술이 그대로 재헌의 입술을 덮쳤다.서윤의 손가락이 난간을 움켜쥐었다.재헌은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유리를 떼어내지도 않았다.잠시 후 입술이 떨어지자 유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자꾸 그렇게 다정하게 굴면…… 나 정말 예전처럼 오빠 안 놓아줄 거야.”재헌의 시선이 유리의 젖은 입술에 머물렀다.“유리야…….”그의 손이 유리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얇은 원피스 위로 손가락이 깊이 파고들었고, 유리의 몸이 휘청할 만큼 거칠게 끌려왔다.이번에는 재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입술이 다시 맞물렸다.“오빠…….”유리의 젖은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녀가 재헌의 목덜미를 끌어안자 그는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빈틈없이 밀착시켰다.유리가 살짝 눈을 떴다.계단 위에 선 서윤을 발견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재헌의 입술을 더욱 깊이 받아들였다.첫 번째 키스는 유리의 도발이었다.두 번째는 재헌의 선택이었다.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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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내 팔찌를 차고 있는 여자

아침 식탁에 내려온 서윤은 재헌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대로 지나쳤다.지난밤 다른 여자의 허리를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던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갈한 셔츠 차림으로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바스락.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넓은 식당을 갈랐다.김준호 집사가 서윤 앞에 따뜻한 차를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재헌의 커피부터 챙겼을 사람이었다.“차로 준비했습니다.”찻잔 손잡이가 서윤 쪽으로 가지런히 돌아왔다. 김 집사는 어젯밤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은 채 한발 물러섰다.그때 2층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좋은 아침.”차유리가 얇은 실크 가운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왔다.느슨하게 묶은 머리 아래로 목덜미와 쇄골이 훤히 드러났고, 그 사이에는 어젯밤에는 없었던 붉은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접시를 내려놓던 가사도우미의 손이 멈췄다.달그락.시선이 유리의 목덜미에서 재헌에게로 짧게 튀었다.유리는 그걸 알아챘는지 가운 깃을 여미기는커녕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서윤은 물잔을 들다 유리의 손목에서 시선을 멈췄다.진주 팔찌.결혼 1주년, 재헌이 직접 서윤의 손목에 채워주었던 것이었다.“그거 어디서 났어요?”유리가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아침 햇빛을 받은 진주가 희게 반짝였다.“어머, 이거 언니 거였어요?”놀란 척 눈을 크게 뜨더니 팔찌를 보란 듯 천천히 돌렸다.“오빠가 줬어요.”서윤의 시선이 재헌에게 향했다.신문을 넘기던 손이 그제야 멈췄다.재헌은 신문을 반으로 접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고작 팔찌 하나뿐이야.”지난밤 다른 여자를 끌어안은 것도 모자라, 결혼 1주년 선물까지 그 여자의 손목에 걸어놓았다.그런데 재헌에게는 고작 팔찌 하나였다.서윤이 유리에게 손을 내밀었다.“내 팔찌 돌려줘요.”유리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재헌을 바라봤다.재헌이 미간을 누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아침부터 꼭 이래야겠어?”서윤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너답지 않게 왜 이래. 질투도 정도껏 해.”질투.서윤의 입술 끝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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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돌아온 안주인

그날 늦은 오전, 저택 현관 앞으로 검은 세단 두 대가 연달아 들어왔다.차유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댁 식구들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것이었다.김준호 집사가 현관으로 향했고, 사용인들은 손님용 찻잔과 다과를 꺼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서윤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유리는 아침의 실크 가운 대신 몸에 붙는 크림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였다. 한쪽으로 넘긴 머리 아래 쇄골 가까이에는 붉은 흔적이 여전히 선명했다.재헌의 오른쪽 자리에는 이미 유리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김 집사가 차를 따르려 하자 유리가 잔 위에 손을 올렸다.“전 설탕은 빼주세요.”재헌은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그녀 앞으로 따뜻한 우유를 밀어놓았다.“빈속에 커피부터 마시지 마.”“오빠는 아직도 그걸 기억해?”유리가 웃으며 우유잔을 감쌌다. 맞은편 서윤을 보며 머리카락까지 쓸어 넘겼다.“어젯밤에도 무리하지 말라고 얼마나 챙기던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가 어디 약한지 너무 잘 안다니까.”접시를 내려놓던 가사도우미의 손끝이 멈칫했다.재헌은 부정하지 않았다. 신문 한 장을 넘겼을 뿐이었다.몇 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는 유리의 사소한 습관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높은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졌다.“유리야!”박정희가 식당으로 들어섰다.서윤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대로 지나쳐 유리의 두 손을 붙잡았다.“세상에, 진짜 너 맞니? 어쩜 이렇게 말랐어.”“어머니…….”“울긴 왜 울어. 살아 돌아왔으면 됐지.”뒤따라 들어온 강민주도 유리를 와락 끌어안았다.“유리 언니! 나 어제 오빠한테 듣고도 안 믿었어.”몸을 떼던 민주의 시선이 유리의 목덜미에 멎었다.“어머. 목은 또 왜 이래?”유리가 머리카락을 끌어내리는 척하자 민주가 재헌을 힐끗 보며 웃었다.“오빠, 적당히 좀 하지. 언니 몸도 약하다며.”“민주야…….”유리가 얼굴을 붉혔다.“왜? 여기 다 써 있는데 뭘 숨겨.”“민주야. 그만해.”“뭘 그만해.”박정희가 유리의 목덜미를 힐끗 보고 피식 웃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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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차유리가 비워둔 자리

식탁 위의 움직임이 일제히 멎었다.강민주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고, 김준호 집사는 새 찻주전자를 든 채 한 걸음 물러섰다.강태준 회장이 굳은 얼굴로 아내를 바라봤다.“그만해.”하지만 박정희는 오히려 유리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없는 얘기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사고만 아니었으면 재헌이랑 유리가 결혼했어. 지금쯤 애가 몇은 있었겠지.”“어머니.”재헌이 신문을 접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그 얘기는 여기서 끝내세요.”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박정희가 아들을 돌아봤다.“왜? 서윤이가 알면 안 되는 얘기라도 되니?”재헌의 턱이 굳었다.“지나간 일입니다.”“너한테나 지나갔지. 유리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미쳐서 찾아다녔는데.”재헌의 손이 찻잔을 움켜쥐었다.“그만하시라고 했습니다.”과일을 만지던 민주도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유리 역시 재헌을 힐끗 바라봤다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박정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붙어 다녔고 양가에서 혼담까지 오갔는데, 뭘 이제 와서 숨겨.”서윤의 손끝이 찻잔 손잡이에 닿은 채 멎었다.단순히 좋아했던 사이가 아니었다. 두 집안이 결혼까지 이야기할 만큼 가까웠고, 그 사실을 자신만 3년 동안 모르고 있었다.서윤이 재헌을 바라봤다.“당신도 알고 있었어요?”재헌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유리가 불안한 얼굴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오빠…….”재헌은 유리의 손을 내려다봤다.그러나 떼어내지 않았다.그제야 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오래전에 끝난 일이야.”“그런데 왜 나한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어요?”재헌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말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나한테는 당신과 결혼할 뻔한 여자가 있었다는 것도요?”“한서윤.”재헌이 낮게 이름을 잘랐다.“쓸데없는 데까지 의미 붙이지 마.”서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 사이 유리의 손이 재헌의 정장 소매 안쪽으로 더욱 파고들었다.“오빠, 나 때문에 괜히…….”식탁 아래에서는 유리의 무릎이 재헌의 다리에 닿아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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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내 허락 없이 떠나지 마

서윤이 식당을 나간 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둔탁하게 울렸다.조금 전까지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던 식탁은 순식간에 정적에 잠겼다. 3년 동안 서윤이 차지하던 자리는 늘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자리가 비고 나자 식당 한쪽이 통째로 비어버린 듯했다.강태준 회장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내가 괜한 말을 했나 보구나.”그러면서도 이내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래도 양가가 다 알던 이야기인데, 알 건 알아야지. 3년이나 지난 과거에 저렇게 날을 세울 일인가.”유리는 여전히 재헌의 재킷 소매 끝을 잡고 있었다. 어젯밤 거실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던 바로 그 손이었다.“오빠…… 나 때문에 언니랑 오빠 사이가 나빠지면 어떡해? 오늘 밤은 다른 방에서 잘까……?”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서윤이 떠난 맞은편 의자에 머물러 있었다. 손도 대지 않은 찻잔과 뒤로 밀려난 의자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내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차유리 씨와 결혼했을까요?’조금 전 아내가 던진 질문이 귓가를 맴돌았다.재헌은 부정하지 않았다.유리는 한때 사랑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였다. 사고로 사라진 뒤에도 완전히 잊지 못했고, 흔적이 있다는 연락을 받을 때마다 직접 확인하러 간 적도 있었다.서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굳이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서윤은 더 따지지도, 울지도 않았다. 자신의 침묵을 확인하고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렸다.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늘 자신이 늦으면 기다렸고, 차갑게 굴어도 결국 먼저 말을 걸어오던 여자였다.“……소매 놓아.”“응? 오빠……?”재헌이 팔을 빼자 유리의 손이 허공에서 미끄러졌다.유리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지만 재헌은 보지 않았다. 조금 전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서윤의 눈만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 다리가 대리석 바닥을 거칠게 긁었다.“재헌아, 식사도 안 마치고 어디 가느냐?”강태준이 불렀지만 재헌은 대답하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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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더러운 손

재헌은 문을 막아선 채 눈앞의 여자를 내려다봤다.3년 동안 서윤은 이런 눈으로 자신을 본 적이 없었다. 화가 나도 먼저 고개를 숙였고, 상처받아도 결국 혼자 삼키던 여자였다.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자.언제나 자신이 돌아오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여자.재헌은 그렇게 믿었다.“그만해, 한서윤.”그가 가방을 빼앗으려 손을 뻗자 서윤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틀었다. 가방이 반대편으로 옮겨지고, 닿지 못한 재헌의 손만 허공에서 멈췄다.“겨우 아버지한테 지나간 이야기 좀 들었다고 이러는 거야?”겨우.서윤은 그 말이 우스웠다.어젯밤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춘 남편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그 여자가 자신보다 먼저 재헌의 아내가 될 뻔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그런데 재헌에게 그 모든 모욕은 그저 ‘겨우’였다.서윤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당신, 내 옆에서 잠들어서도 그 여자 이름 불렀어요.”재헌의 눈빛이 멎었다.“한두 번 아니었어요.”드물게 같은 침대에서 몸을 섞었던 밤에도 재헌은 잠든 채 같은 이름을 불렀다.차유리.그때는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자신을 품에 안고도 다른 여자를 찾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무슨 소리야.”재헌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기억 안 나요?”서윤의 입술 끝에 허탈한 웃음이 스쳤다.“그렇겠죠. 당신한테는 기억할 필요도 없는 밤이었을 테니까.”재헌의 턱이 굳었다.“잠꼬대까지 가지고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야?”“잠꼬대?”“내가 기억도 못 하는 말을 가지고—”“그날 당신 품에 안겨 있던 사람은 나였어요.”재헌의 입이 다물렸다.서윤이 한 걸음 다가섰다.“당신이 만지고 있던 것도 나였고.”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그런데 부른 이름은 차유리였어요.”이번에는 재헌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그를 바라보던 서윤이 가방을 들고 어깨 옆으로 비켜가려 했다.재헌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어딜 가.”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당신은 내 아내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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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죽은 여자를 찾던 남편

차유리가 사라진 건 재헌과의 결혼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오가던 해였다.그날 강재헌은 강성그룹 본사 회의실에 있었다.해외 사업 보고가 한창이던 중 진동으로 해둔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평소라면 회의가 끝날 때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전화였다.재헌이 화면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수신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은 지 불과 몇 초 만에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지워졌다.“……어디라고?”순식간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차유리가 해외에서 사고를 당했다.현지 산악도로에서 차량이 가드레일을 뚫고 수십 미터 아래 절벽으로 추락했다.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파손된 차 안에서는 유리의 가방과 핏자국이 묻은 휴대전화가 발견됐다.하지만 시신은 없었다.재헌은 그날 밤 가장 빠른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사고 현장으로 향했고, 경찰 수색이 끝난 뒤에는 사설 수색대까지 동원해 산을 다시 뒤졌다.그래도 유리는 나오지 않았다.결국 강태준까지 현지로 들어왔다.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한 재헌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셔츠는 흙먼지와 식은땀에 얼룩졌고 턱에는 거뭇한 수염이 올라와 있었다.“재헌아.”강태준이 아들의 어깨를 붙잡았다.“이제 그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재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뭘요.”“경찰도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사고 지형과 수색 기간을 고려하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그곳에 있던 누구나 같은 결론을 내렸다.차유리는 죽었다.강재헌, 단 한 사람만 받아들이지 않았다.“시신은요?”강태준이 입을 다물었다.“유리 시신, 아버지가 직접 확인했습니까?”“재헌아. 그만해.”“없잖아요.”재헌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죽었다는 증거가 없는데 내가 왜 포기합니까.”그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살아 있으면 찾아낼 겁니다.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내 눈앞에 가져다 놓으라고 하세요.”난간을 움켜쥔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그전까지는 아무도 유리 죽었다는 말 못 합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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