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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Auteur: 라온하제

1화 죽었는데요, 오늘부터 출근이라뇨?

Auteur: 라온하제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8-20 14:14:55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 나 살았구나'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천장부터가 이상했다. 병원 특유의 형광등 불빛이 아니라, 어딘가 낡고 오래된 사무용 조명이었다. 깜빡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은은하게 밝은데, 묘하게 사람 기운을 쭉 빼놓는 색이었다. 바리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아픈 데가 하나도 없었다. 트럭에 치이는 순간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지금은 어깨도 안 아프고 다리도 멀쩡했다.

'어? 나 안 아파?'

발밑을 내려다보니 사고 났던 순간 신고 있던 낡은 운동화 그대로였다. 신발끈에 흙 좀 묻어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다만 피 한 방울 안 묻어있다는 게 좀 소름이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는 딱 봐도 관공서였다.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가 열을 맞춰 늘어서 있고, 벽에는 큼지막한 전광판이 번호를 띄우고 있었다. 창구는 대여섯 개쯤 됐고, 그 위로 '친절 서비스 만족도 98%'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저 안쪽에서 "다음 번호 손님, 237번 손님" 하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여기... 동사무소야?'

바리는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앞에 있던 창구로 다가갔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예요?"

접수처 직원은 서류에서 눈도 안 떼고 대답했다.

"명부 관리국 민원실이요. 사망 접수처. 대기표는 저기 기계에서 뽑으시고요."

"사망... 접수처요?"

"네. 손님 방금 돌아가셨잖아요."

직원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바리는 잠깐 멍해졌다. 죽었다는 말을 이렇게 사무적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마치 택배 도착 안내처럼, 세탁물 찾아가라는 문자처럼.

"저, 정말 죽은 거예요? 확실해요?"

"확실하죠. 저희가 그런 걸로 실수할 리가요. 대기표 뽑고 앉아 계세요. 손님은 412번이시니까 좀 걸리실 거예요."

바리는 발권기 앞으로 걸어가 버튼을 눌렀다. 종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나왔다. 412. 숫자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와, 나 진짜 죽었는데, 여기 완전 동사무소잖아. 번호표까지 뽑아야 돼?'

자리에 앉아 멍하니 전광판을 쳐다보는데,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학생, 몇 번이야?"

"어... 사백십이 번이요."

"아이고, 나는 오백 몇 번인데. 여기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 나 벌써 두 시간째 앉아있어."

"두 시간이요? 저승도 대기 시간이 있어요?"

"그럼 있지. 요즘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는데. 명절 끝나고 나면 특히 더 밀려."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바리는 그 옆에서 대기표를 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아빠는, 아빠는 어떻게 됐을까. 마지막 기억은 병원비 마련하겠다고 밤샘 알바를 뛰고 나오던 길이었다. 신호등을 못 봤는지, 트럭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잘 기억도 안 났다. 그냥 순간적으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그다음은 여기였다.

'수술은 잘 됐을까. 아니, 애초에 나 없이 수술비는 어떻게 낸 거지.'

생각이 거기 미치자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리 씨, 맞으시죠."

돌아보니 검은 슈트를 딱 떨어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반칙이다 싶을 정도로 정교했는데, 표정은 하나도 없었다. 눈매는 날카롭고, 입매는 일자로 다물어져 있었다. 마네킹이 양복 입고 걸어 나온 줄 알았다.

"네, 근데... 누구세요? 저 아직 순서 안 됐는데요."

"관문통과심사팀, 무장승이오. 당신 건은 별도로 처리하오."

이름도 뭔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남자는 대답도 안 기다리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바리는 얼떨결에 대기표를 손에 쥔 채 뒤를 쫓았다.

'이름이 장승이야? 진짜로? 서 있는 것도 딱 장승같이 뻣뻣하게 서 있더니.'

속으로 실컷 놀리면서 따라간 곳은 널찍한 상담실이었다. 책상 위엔 서류 뭉치가 각 잡혀 쌓여 있었고, 벽에는 '관문통과심사팀'이라는 명패가 딱딱하게 걸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회색빛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들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무장승은 자리에 앉으며 서류철 하나를 펼쳤다.

"앉으시오."

바리는 얼떨결에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이상하게 딱딱했고, 책상 위 서류는 바리 이름으로 이미 잔뜩 채워져 있었다. 생년월일, 사망 경위, 심지어 어릴 적 살던 동네까지.

"이거... 저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신 거예요?"

"명부 관리국은 모든 기록을 관리하오. 바리 씨 부친, 오구 씨. 현재 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중이오."

바리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네? 아빠가요? 아직... 아직 안 돌아가셨어요?"

"아직은. 하지만 오래 못 버티오. 심장 기능이 계속 떨어지고 있고, 수술비도 부족한 상태요."

"수술비가... 부족해요? 저 없이 어떻게 하고 있는데요."

"당신이 죽고 나서 남은 유일한 자산은 이백만 원 남짓. 필요한 수술비는 그 열 배가 넘소."

바리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저는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방법이 있으니까 이렇게 저 불러온 거잖아요."

무장승은 서류를 한 장 넘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살릴 방법은 하나뿐이오."

"뭔데요, 그 방법."

"당신이 여기서 49일간 근무하며 마흔아홉 개 관문을 통과해 생명수를 얻어오는 것."

"...네?"

"근무. 취업.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그렇소."

바리는 잠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죽어서까지 취업 걱정을 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

"저기요, 저 방금 죽었거든요? 근데 취업이요? 여기 이력서 안 받아도 되는 거 맞아요? 경력증명서는요? 자격증은요?"

"규정상 특별 채용이오. 정확히는, 임시직."

"저 이런 일 처음 해보는데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여기 업무가 뭔지도 모르잖아요."

"업무는 배우면 되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아니, 잠깐만요. 진짜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에요? 죽었는데 취업이라니, 이거 완전 사기 아니에요? 무슨 저승 다단계 같은 거 아니에요?"

바리가 속사포처럼 쏟아내자 무장승은 처음으로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말이 많군."

"당연히 말이 많죠! 지금 제 인생, 아니 죽음 최대 갈림길에 서 있는데!"

"...끝까지 들으시오.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심사 점수가 쌓이고, 마흔아홉 관문을 모두 통과하면 생명수 한 병이 지급되오. 그걸 가지고 이승으로 돌아가면 부친을 살릴 수 있소."

바리는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려 애썼다. 화낼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빠를 살릴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하면 되는 거죠? 그 마흔아홉 관문."

"하겠다는 거요?"

"당연하죠. 아빠 살릴 수 있다는데 뭘 망설여요."

무장승은 잠깐 바리를 빤히 쳐다봤다. 표정 변화는 여전히 없었지만, 뭔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알겠소."

그는 서류를 내밀었다. 이름, 생년월일, 사망 경위까지 이미 다 적혀 있는 계약서였다. 바리 것치고는 지나치게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여기 서명하시오. 그럼 오늘부로 명부 관리국 임시 직원 자격이 부여되고, 관문 통과 자격도 함께 주어지오."

바리는 펜을 받아 들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아빠를 살릴 수 있다면. 그 말 한마디에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서명란에 이름 석 자를 적고, 도장을 찍으려는 순간—

"잠깐."

무장승의 손이 불쑥 뻗어와 바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차가운 손끝이 손목에 닿는 순간 바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남자는 여전히 표정 하나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아까와는 다른 미묘한 긴장이 묻어 있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소."

"...조건이요?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규정을 다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오."

바리는 손목을 살짝 빼려다가, 생각보다 힘이 세게 잡혀 있어서 포기했다. 이 남자, 손은 차가운데 잡는 힘은 이상하게 확고했다.

"뭔데요, 그 조건."

무장승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리고 서류철 아래에서 다른 종이 한 장을 천천히 꺼냈다. 바리는 그 제목을 읽는 순간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거... 설마..."

무장승은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혼인관계증명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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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76화 국장님, 이제는 말씀하세요!

    "나 안 가. 못 가. 진짜 못 가."국장은 사무실 기둥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었다. 낚시 조끼를 입은 덩치 큰 몸이 기둥 폭보다 두 배는 넓어서 숨었다기보다 기둥에 매달린 모양새였다. 바리와 덕순이 한쪽 팔씩 잡았지만 국장은 발끝을 바닥에 붙이고 버텼다."국장님, 13관문이잖아요.""13관문이 하필 이거라는 게 문제야.""내용을 한 번 더 읽어 드릴까요?"덕순이 서류를 펼쳤다. 13관문의 제목은 '인연 성사 1건'. 내용은 서로 마음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는 한 쌍을 이어 줄 것. 담당 심사위원란에는 정자체로 '은숙'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리는 이 서류를 처음 받았을 때 한참 웃었다. 마지막 칸에는 그녀가 직접 쓴 메모가 붙어 있었다.대상자는 제가 지정합니다. 이미 정해 두었습니다. 낚시터에서 기다리겠습니다."이게 사실상 청첩장이잖아요.""청첩장이 아니라 경고장이야. 내가 이 나이에, 명부 관리국장이 낚시터에서 고백이라니.""국장님이 염라대왕 모델이시라고 들었는데요.""그러니까 더더욱! 위신이 있지!""위신이 있어서 오십 년 동안 말씀을 못 하셨다는 거예요?""오십 년이라니, 사십구 년이야.""정확하게 세고 계셨네요.""세고 싶어서 센 게 아니야. 매년 사탕 포장지에 줄을 하나씩 그었더니 어느새 사십구 줄이 됐어.""그 포장지 지금 어디 있어요?""...서랍에.""가져오세요. 증거물로 제출할 거예요.""증거는 무슨 증거야!"국장이 입을 다물었다. 귀 끝이 붉어졌다. 덕순이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바리는 한숨을 쉬고 기둥에서 국장을 떼어내는 일을 포기했다. 대신 방 한구석을 돌아봤다. 무장승이 서류 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팀장님도 한마디 해 주세요.""...작성해 왔소.""뭘요?""고백 대사 초안이오. 서른 장.""서른 장이요?""압축하여 한 줄로 만들었소."무장승이 맨 위 종이를 국장에게 내밀었다. 국장은 안경을 올리고 받아 읽었다. 거기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좋아하오."...""...""

  •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75화 12관문: 사자팀장은 사자성어로만 말한다

    "감지덕지."문을 연 사자팀장이 바리를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검은 갓에 검은 도포,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까지 갖춘 중년 남자였다. 책상 위에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저승사자팀 팀장 흑태수'. 바리는 인사를 하려다 말고 옆을 돌아보았다. 무장승도 같은 표정이었다."...무슨 뜻이오?""분에 넘치는 대접에 감사한다는 뜻이에요, 팀장님."덕순이 뒤에서 속삭였다. 오늘은 해설사 역할이라며 따라붙은 터였다. 손에는 사자성어 사전이 들려 있었다. 흑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 위 서류를 가리켰다."일사천리.""빨리 진행하자는 말이래요.""다다익선.""많을수록 좋다는 말이고요. 도시락은 많을수록 좋다는 뜻일 거예요.""동고동락.""같이 고생하고 같이 즐거워하자고요?"흑태수가 엄지를 척 세웠다. 바리는 한숨을 쉬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12관문의 제목은 '야간 근무자 위로 방문'. 내용은 단순했다. 밤새 일하는 저승사자 열두 곳에 도시락을 전달할 것. 단, 전달할 때 '고맙다'는 말을 쓰지 말 것. 사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 불길하다는 오래된 금기였다."왜 고맙다는 말이 불길해요?""결자해지.""...덕순 씨?""스스로 시작한 일은 스스로 끝내야 한다는 뜻인데, 이 경우엔 '우리 일은 우리가 끝낸다, 남이 고마워할 일 아니다'라는 뜻으로 읽혀요.""해석이 되게 자유롭네요.""사자성어 사전이 해석을 다 안 알려 줘요."무장승이 도시락 열두 개가 담긴 보냉 가방을 어깨에 멨다. 오늘은 입에 테이프도 사탕도 없었다. 대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틀 전 실을 내준 이후로 그의 앞머리 한 가닥이 하얗게 센 채였다. 아침에 덕순이 그걸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을 때 그는 짧게 대답했다."...햇빛 탓이오.""저승에 햇빛이 어디 있어요!""...관사 창문으로 들어오는 형광등이오."아무도 믿지 않았다. 해온은 더 묻지 않고 그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무장승은 그날 아침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첫 번째 방문지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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