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00년 만에 이승 땅을 밟은 무장승, 로봇처럼 뻣뻣한 걸음걸이부터 몰래 음료수를 뽑아주는 반전 매력까지 터지는 적응기. 오랜만에 맡는 매캐한 공기와 붉은 노을 앞에서 바리는 아빠와의 기억에 코끝이 시큰해지는데, "예쁘오"라는 말이 노을을 향한 건지 바리를 향한 건지 묘하게 스친다. 국장마저 눈치채는 두 사람의 미묘한 기류 속,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가 점점 줄어들며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차오르는 해 질 녘 풍경이 펼쳐진다.
생가를 나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골목을 세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바리는 편지를 접어 품 안쪽에 넣고, 그 위에 손을 얹은 채였다."...바리 씨.""네?""...배고프지 않소."바리가 걸음을 멈추고 무장승을 올려다봤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굳어 있었는데, 문장 하나가 어색하게 삐져나와 있었다."방금 그거, 질문이에요? 아니면 위로예요?""...둘 다 아니오. 단지, 허가 시간이 남았고, 오는 길에 보니 먹을 것을 파는 곳이 있었소.""팀장님, 지금 저 먹이려고 길 외워두신 거예요?""...규정상 보호 대상의 영양 상태도 관리 항목이오.""그런 규정 없잖아요. 지금 막 지어내셨죠."무장승의 귀가 가로등 불빛보다 먼저 붉어졌다. 국장이 뒤에서 기침으로 웃음을 가렸다. 바리는 눈가가 아직 젖은 채로 피식 웃었다. 우는 얼굴로 웃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인 줄 몰랐다."좋아요, 가요. 어디예요, 그 먹을 것 파는 곳.""...저쪽이오. 오 분 거리요.""오 분인 걸 어떻게 아세요?""...왔던 길에서 걸음 수를 세어뒀소. 이천삼백 보였소.""그걸 센 거예요? 편지 읽는 동안에?""...읽기 전에 센 것이오. 그때는 아직, 당신이 배고플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오."바리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걸 해두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지 알기나 할까 싶었다.무장승이 가리킨 곳은 큰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포장마차였다. 비닐 천막 사이로 김이 하얗게 피어오르고, 빨간 플라스틱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바리는 그 앞에 서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냄새가 먼저 와닿았다. 간장과 무와 멸치 육수가 뒤섞인, 아까 방 안에서 착각했던 바로 그 냄새였다."어묵이네요.""...그렇소.""팀장님, 혹시 이 포장마차예요? 편지에 나온 데?""모르오. 다만 병원이 이 근처라는 건 지도에서 봤소."바리는 고개를 들어 길 건너편을 봤다.
편지지는 세 장이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래 있었고, 접힌 자리마다 올이 풀려 있었다. 바리는 첫 줄을 읽기도 전에 글씨체부터 알아봤다. 어릴 적 아빠 서랍 깊숙한 곳에서 본 적 있는, 둥글고 단정한 필체였다."소리 내서 읽어도 될까요. 혼자 읽다가는 중간에 못 읽을 것 같아서요.""...그렇게 하시오."무장승이 대답했고, 국장은 말없이 창가 쪽으로 물러섰다. 바리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사랑하는 내 딸에게. 이 편지를 네가 읽고 있다면, 엄마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거겠구나."첫 문장에서 목이 막혔다. 바리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장승의 손이 어깨 위에서 조금 더 단단해졌다."먼저 이름부터 말해줘야겠다. 엄마의 이름은 해온이야.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내가 있던 곳에서 불리던 이름이지. 나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사람들의 인연을 지켜보는 일을 했어. 관측자라고 부른단다. 지켜보기만 하고, 절대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바리가 중얼거렸다. 국장이 창가에서 낮게 헛기침을 했다."그런데 엄마는 한 사람 앞에서 그 규칙을 지키지 못했어. 네 아빠, 오구 씨. 처음엔 그냥 관찰 대상이었어. 병원 앞 포장마차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어묵을 사 먹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 눈이 자꾸 갔단다. 하루는 내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 사람이 고개를 돌려서 이렇게 말하더라. 거기 서 계시면 춥지 않으세요, 하고."바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웃는데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아빠답다. 진짜 아빠가 할 법한 말이에요."바리는 소매로 얼굴을 한 번 훔치고 다시 편지를 내려다봤다. 잉크가 번진 자리가 여기저기 보였다. 어떤 건 물방울이 떨어진 자국 같았다. 쓰는 사람도 울면서 적었을 것이었다."그 포장마차, 저도 알아요. 병원 앞에 있던 거. 아빠가 항상 어묵 국물은 꼭 마셔야 한다고, 그래야 안 춥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이 편지에 나오는 줄은 몰랐네요.""...인연이란 그런 식으로 이어
골목을 꺾어 들어서자, 수첩에 적힌 주소지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이층집 한 채였다. 담장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창문 몇 개는 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여기가... 맞아요?"바리가 수첩과 집 앞 번지수를 번갈아 보며 확인했다."맞소. 번지수가 일치하오.""근데 이거 완전 폐가 같은데요. 사람이 산 흔적이 없어 보여요."국장이 조심스럽게 대문을 밀었다. 녹슨 경첩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들어가 보자고. 조심해서."세 사람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섰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무장승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가구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떠난 것처럼, 식탁 위에는 먼지 쌓인 그릇 몇 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팀장님, 여기 진짜 누가 살았던 곳 같은데요.""...그런 것 같소."바리는 거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낡은 소파, 색이 바랜 벽지, 그리고 벽에 걸린 빛바랜 달력. 날짜를 보니 20년도 더 지난 것이었다. 소파 옆 선반에는 작은 장난감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먼지가 두껍게 쌓인 채로도 누군가 정성스레 정리해둔 흔적이 느껴졌다."팀장님, 이것 좀 보세요. 이 장난감들, 누가 일부러 안 치운 것 같지 않아요?""...그런 것 같소. 마치 언젠가 다시 쓰일 걸 기다리는 것처럼."바리는 장난감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색이 바랜 작은 딸랑이였다. 손에 쥐자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이 달력, 20몇 년 전 거예요. 그럼 설마 여기가—""...당신이 태어난 곳일 가능성이 있소."바리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집 안 곳곳을 살피던 바리는, 작은 방 하나를 발견했다. 아기 침대가 놓여 있는 방이었다. 침대 위에는 색이 바랜 모빌이 걸려 있었다."...여기가 제 방이었나 봐요."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국장과 무장승도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리는 벽에 붙어 있는 낡은
이승으로 나가는 문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명부 관리국 지하 1층, 비상계단 옆에 있는 낡은 철문 하나가 전부였다."이게 진짜 이승으로 가는 문이에요? 완전 그냥 청소도구함처럼 생겼는데.""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시오. 규정상 모든 차원 이동 통로는 위장 처리되오."국장이 허가증을 문에 가져다 대자, 철문이 옅은 빛을 내며 스르륵 열렸다. 그 너머로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가자고. 시간 끌면 끌수록 위험하니까."세 사람은 문을 통과했다. 순간 바람이 훅 밀려들며, 바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으악, 이게 뭐야. 공기 왜 이렇게 매캐해요?""이승 공기요. 미세먼지, 자동차 매연 같은 게 섞인.""팀장님은 안 답답하세요?""...조금 그렇소. 500년 만이라 그런가."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낯선 변두리 공업단지였다. 녹슨 공장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저 멀리 고속도로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바리는 그 소음마저도 반가웠다. 저승에서는 들을 수 없던, 사람 사는 세상의 소리였다."팀장님, 저 진짜 이상한 게, 이런 공장 소음까지 그리웠나 봐요.""...이승은 당신이 살던 곳이니 그럴 만하오.""팀장님은 이승에 뭐 그리운 거 없으세요?"무장승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딱히 없소. 저승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기니까.""그래도 500년 전엔 이승에서 사셨을 거 아니에요. 그때 기억은요?""...거의 남아 있지 않소. 너무 오래전이라."국장이 지도를 펼쳐 방향을 확인했다."이쪽으로 쭉 가면 수첩에 적힌 주소가 나올 거야. 걸어서 한 시간 정도.""한 시간이요? 택시 같은 거 못 타요?""우리 지금 신분증도 없고 돈도 없어. 그리고 이승 교통수단에 함부로 타면 흔적이 남을 수도 있고."바리는 한숨을 내쉬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걸음 못 가서 무장승이 이상하게 뻣뻣한 걸음걸이로 걷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팀장님, 왜 그렇게 걸으세요? 로봇처럼.""...이승 중력이 저승보다 미묘하
허가 절차가 진행되는 사흘 동안, 사무실은 겉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돌아갔다. 다만 모두가 조금씩 날이 서 있었다."언니, 그거 알아요? 요즘 팀장님 완전 이상해요."점심시간, 덕순이 식판을 내려놓으며 소곤거렸다."뭐가 이상한데요?""언니가 화장실만 가도 따라 나오려고 하시잖아요. 어제는 탕비실 갈 때도 같이 가시던데."바리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거 그냥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요즘 상황이 상황이잖아요.""그래도 그렇지, 화장실까지 따라가려던 건 좀 과했어요. 결국 복도에서 기다리긴 했지만.""팀장님도 나름 고민 많이 하셨을 걸요. 어디까지 따라와야 되나.""그뿐이 아니에요. 어제 회의실 갈 때도 멀찍이 따라오시고, 탕비실 정수기 쓸 때도 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더라고요. 저 완전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니까요.""감시가 아니라 보호죠, 그건. 근데 좀 과하긴 하네요. 제가 뭐 혼자서 못 다니는 애도 아니고.""그래도 언니, 솔직히 싫지 않잖아요? 그 눈빛 보면 완전 애틋한데."바리는 그 말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서 국물을 떠먹는 척했다.그때 무장승이 식판을 들고 다가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소.""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팀장님 요즘 되게 과잉보호 하신다는 얘기였어요.""과잉보호가 아니라 필요한 조치요.""화장실 앞까지 따라오시는 것도 필요한 조치예요?"무장승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덕순이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에이,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손목에 추적기라도 다시는 건 어때요? 그럼 편하잖아요.""...그런 방법이 있었소?""팀장님! 농담인데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 어떡해요!"바리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무장승은 아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국을 떠먹었다."그래도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오. 관리국 물품 창고에 위치 추적용 사원증도 있다고 들었는데.""팀장님, 그건 진짜 범죄예요. 사생활 침해라고요.""...사생활보다 안전이
이튿날 아침, 국장실에 모인 세 사람은 수첩에 적힌 주소를 두고 머리를 맞댔다."이 주소, 이승 쪽 좌표인데."국장이 낡은 지도를 펼치며 중얼거렸다."이승이요? 그럼 저희가 직접 이승으로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그런 셈이지. 근데 이게 좀 묘해. 이승 좌표치고는 관리국 데이터베이스에 등록이 안 된 곳이야. 마치 일부러 지워진 것처럼."무장승이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봤다."관측자들의 은신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내 생각도 그래. 근데 이승으로 나가는 건 규정상 특별 허가가 필요한 일이라, 그것부터 처리해야 돼."바리가 조바심이 난 듯 물었다."허가 받는 데 얼마나 걸려요? 사흘 뒤가 약속 날짜잖아요.""서둘러보긴 할 건데..."그때 국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사람은 낯선 여자였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눈빛이 유난히 날카로웠다."실례하겠습니다. 관문통과심사팀, 맞습니까?"세 사람 모두 순간 경계했다. 무장승이 바리 앞을 슬쩍 막아서며 물었다."누구시오."여자는 미소도 없이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받아 든 국장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명함에는 그 눈동자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이번엔 글자도 함께 적혀 있었다. 관측 본부 제3팀, 선희."선희... 씨요?""이름 정도는 밝히는 게 예의겠죠. 다만 그 이상은 묻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바리는 그 담담한 말투에서 오히려 더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자신들을 전혀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듯했다."관측 본부에서 나왔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바리는 숨이 턱 막혔다. 드디어 상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무슨 일로 오셨소."무장승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여자는 바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그 관측자의 딸이군요."바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숨기려 해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맞는데요. 그게 왜요.""확인차 왔을 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해를 끼치러 온 게 아니니까.""그럼 왜 오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