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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

Author: ikkuyot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2 14:23:15

저녁상이 차려지면, 늘 그랬듯 아이의 숟가락은 금세 멈췄다. 반찬을 건너뛰고 물컵을 들여다보며, 젓가락으로 밥풀을 옮겨 심는 데만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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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공기가 어제보다 더 얇아진 탓인지 투정이 유난했다. 준호의 손이 무심코 휴대폰을 더듬었다. 다희가 없을 때면 늘 꺼내 들던 마지막 수단—그녀는 못마땅해했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넘어가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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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혜정의 손이 가볍게 그의 손등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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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그런 거 보여주고 그러면 안 좋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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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달난 전문가라는 인간들이 빠짐없이 하는 경고. 전두엽 손상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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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약사라구요, 안 좋은 거 안다구요’ 준호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혜정의 눈빛이 먼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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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 딱히 대안이 필요없는 손짓과 눈빛으로 아이의 투정을 제압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인상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아이는 그 기세에 눌렸다가, 할머니 특유의 미소가 지어지자 따라 웃으며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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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고개를 젖히며 기세를 올리는 순간마다, 혜정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먼저 올라갔다 내려가며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아이는 따라 웃으며 입을 벌렸다. 고전은, 늘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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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일 테니까, 자네나 얼른 먹어. 배고플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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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의 밥그릇엔 공기가 반쯤 남아 있었다. 준호는 ‘됐어요’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그녀는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밥풀을 한 알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듯, 아이 입술 가장자리까지 행주로 쓸듯 닦아내며 템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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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세 번 정도 더 났을 때, 아이의 접시는 반 이상 비워졌다. 준호는 뒤늦게 젓가락을 들어 한 술 삼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지나갈 때, 휴대폰은 식탁 끝에서 조용히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 공기는, 오래된 방식대로 천천히 평온 쪽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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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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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수면을 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엄마의 팔꿈치를 꼭 쥐어야만 잠이 드는 아이였다면, 벌써 공항 카트를 따라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 방의 스탠드만 낮게 켜 두고, 준호는 누운 아이 옆에 책을 한 권씩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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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하나만…” 하는 목소리가 세 번째쯤 얇아질 때까지 표지를 넘겼다. 그림 속 강아지가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아이의 눈꺼풀이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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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엄마 배 속에 들어있을 때부터 들려주던 바람 부는 소리를 천천히 불어 넣자, 작은 배가 파도처럼 오르내리다 고요해졌다. 손바닥이 배 위에 가만히 얹히고, 네 번, 다섯 번—토닥의 간격이 길어질수록 숨결이 완전히 잠으로 기울었다. 이불 끝을 목까지 끌어올려 주고, 이마에 입김만큼 가벼운 손길을 한 번 더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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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아이 방문을 나서며 반뼘쯤 열어두려다가 거실 쪽에서 발소리가 다가오자 완전히 닫았다. 휴대폰을 든 혜정이 급히 손짓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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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잘 도착했니? 아… 거긴 아침이구나. 아! 하윤이는 이제 잠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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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 다희의 얼굴이 떴다. 열몇 시간을 통과한 뒤의 창백함, 공항 조명의 흰빛이 눈가의 부기를 더 도드라지게 했다. 가족을 떠나면서 강철같던 의지도 한풀 꺾여버린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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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이는? 엄마 안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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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보다 먼저 튀어나온 건 아이 안부였다. 약이 바닥을 보이는 사람처럼 다급하고 마른 질문. 준호는 잠깐 숨을 고르고 화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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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찾긴… 하윤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입가가 먼저 웃었고, 그제야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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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희는 웃으면서 울었다. 샤워실 김처럼 금방 번지는 울음. 혜정은 딸의 눈물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휴대폰을 조심스레 돌려주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훔치며 자기 방 쪽으로 뛰듯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얇은 훌쩍임이 벽을 타고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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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 다희는 “잘했어”라고 입모양으로만 말한 뒤, “거긴 밤이지? 나는 호텔에 가방만 두고 바로 회사로 가야 해” 하고 미소를 억지로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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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찍이서 들려오는 공항 안내 방송이 문장 사이사이를 잘라냈다. 통화를 끝내고 화면이 어두워지자, 비행기 엔진 같은 잔음만 귓속에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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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닫힌 아이 방 문을 바라봤다. 지금 가장 많이 울어야 할 사람은 그 안에서 조용히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데 어른들이 더 난리다. 침대 위의 작은 가슴이 일정한 리듬으로 오르내릴 것을 떠올리며, 그는 문 앞에서 잠깐 더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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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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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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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의 소동이 가라앉자 준호는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TV를 없애자고 우겼던 다희의 성화로, 이 집 거실에는 큼직한 테이블 하나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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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고, 가족이 나란히 책을 펼치자던 그 자리—이제는 매일 저녁 식탁이 된 자리였다. 깜깜하게 물든 창밖에서 띄엄띄엄 박힌 불빛들이 베란다 샷시에 듬성듬성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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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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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병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놓였다. 그 소리가 잠든 집안사람들을 깨우는 건 아닐까, 준호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후—”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유리컵을 끌어다 병목을 기울였다. 꼴꼴, 꼴꼴—투명한 액체가 잔을 채우는 소리. 그는 그것을 한숨에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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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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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 가득 퍼지는 쓴맛. 그때 혜정이 조용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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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도 없이 그것만 먹으면 어떻게 해. 안주 하나 해줄까?”

‘됐어요’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혀끝의 쓴맛이 그 말을 붙잡았다. 이걸 지우지 않으면 남은 소주를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뭐… 있어요? 그럼… 김치 좀 볶아 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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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승낙에 혜정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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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기다려, 금방 해올테니.” 짧게 답하고는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냉장고 문패킹이 푹! 하고 떨어졌다 붙고, 서랍이 열리며 그릇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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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빈 잔을 굴리듯 손가락으로 돌리다가, 다시 병을 들어 조심스레 절반만 채웠다. 베란다 샷시에 비친 불빛이 잔 표면에서 부서져 흔들렸다. 조금 뒤, 발소리가 가볍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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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이 접시를 내려놓았다. “김치만 볶기 그래서 내일 찌개에 넣으려던 삼겹살도 넣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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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와 뒤섞인 고깃조각들이 참기름의 투명함에 반짝이며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준호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여 소주의 쓴맛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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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잔 해도 되지?”

​

혜정이 빈 잔을 내밀었다. 준호는 그 맑은 바닥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길게 한숨이라도 뽑아야 속이 풀릴 텐데그럴 틈도 주지 않는 밤공기. ‘안주를 포기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혀끝을 스치다가, 김치볶음 속 삼겹살이 오도독 씹히는 질감을 상상하며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는 병목을 기울여 얇은 줄기로 잔을 채웠다.

​

혜정이 딸의 집에 들어와 함께 살기 전에도 둘은 자주 마주 앉았다. 준호는 애주가였고 특히 소주를 좋아했다. 가까운 데 살던 딸 내외가 처가에 들르면 혜정은 늘 그 입맛에 맞는 안주와 술상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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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혀끝이 예민하던 젊은 시절엔 술을 전혀 못 넘겼지만, 세월이 많은 것들을 무디게 했는지 술이 주는 쓴맛보다 잠깐의 망각을 먼저 받아들이게 됐다. 많이는 못 마셔도 사위와 몇잔 정도는 나누며 그에게 맞춰주는 정도는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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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희는 그런 엄마의 젊은날을 닮았는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셨다. 그래서 집안에 ‘술친구’가 하나 생긴 건 준호에게 나쁘지 않았다. 장모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서로 멀고 편안한 사이였으니까. 지금은 가까워져서, 오히려 불편한 자리가 되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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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와 유리가 가볍게 닿는다. 탁—. 혜정이 잔을 입술에 붙이고 한 모금 털어 넣는다. 눈썹이 아주 조금 흔들리고, 숨이 낮게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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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미안하게 생각해… 괜히 나 때문에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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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에요. 집사람, 원래부터 미국에 가고 싶어했어요. 조건도 좋고… 우리도 돈 모이면 좋죠. 앞으로 돈도 많이 들어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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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말머리에서 젓가락이 공중에서 한 번 멈췄다. 돈이야기가 혜정을 가리키는 것만 같아 준호가 말끝을 접어 삼키는 사이, 혜정의 입가가 짧게 굳었다가 풀렸다. 씁쓸한 웃음이 한 겹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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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이는 내가 많이 거들 테니, 자네도 이제 늦게까지 일하고 와도 되네. 저녁에 친구랑 술도 한잔씩 하고 와.”

​

늘 늦게 출근해 일찍 퇴근하는 것이 지환에게 늘 미안했던 준호였다. 아무리 친한형과 같이 차린 약국이라지만, 엄연히 동업은 동업이었다. 서로 서운함이 남으면 좋았던 관계마져 흐려질 수 있기에 혜정의 그런 다짐이 내심 고마워 준호는 가볍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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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등원은 제가 할게요. 하원만 어머님이 해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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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대신 혜정의 어깨가 먼저 열렸다. 숨이 길어지고 얼굴빛이 환해졌다. “빚쟁이 장모가 뭐든지 해야지~ 뭐든지 말만 해. 내가 다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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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라는 말이 테이블 위에 오래 남았다. 늘어진 티셔츠의 목선 사이로 살짝 노출된 피부가 고요한 조명을 받아 얇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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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이 비워질수록 유리벽에 비친 선이 느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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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욕실 문턱 너머로 스쳐 보였던 실루엣이 천 속에서 겹쳐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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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증기가 복도 끝까지 옅게 번졌지만, 그 얇은 장막은 농염한 육체의 굴곡과 음영을 가리기엔 모자랐다. 풍성함을 앞세우기보다 세월의 무게를 받아들인 젖가슴은 도톰하게 굴곡진 뱃살에 대각선으로 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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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짙게 퍼져있는 유륜의 형태는 다희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그러나 두세번 굴곡진 뱃살 아래 숨은 짙은 계곡은 다희보다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음모를 다듬은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곳은 다희보다 살색을 많이 드러내고 있었다.

​

전체적인 인상이 눈에 익은 실루엣이었다. 다희가 몇 해를 더 지나면 닿을지도 모를 형상—미래를 앞질러 본 듯한 닮음의 결이 겹쳐 보였다. 그 생각과 함께 장면이 과장되게 선명해져, 준호의 시선은 정면을 오래 붙들지 못했다. 잠깐 본 것뿐인데도, 기미와 잔주름이 많지 않은 매끈한 살결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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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말 대단한 거 같아.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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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이의 요즘 말버릇, 다희와 다혜 자매의 어린 시절까지, 혜정의 말은 작은 접시처럼 가볍게 탁탁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어색함을 덮으려는 속도였지만, 준호의 귀엔 멀리서 오는 파장처럼 흐렸다.

​

잔 표면의 빛만 오래 들여다보던 그의 시선이 잠깐 비어 있던 틈, 거실 공기가 한 톤 식는 걸 그제서야 알아챘다. 준호가 눈을 들어 혜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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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그렇죠? 한 잔 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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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잔을 향해 병목이 살짝 움직였지만, 혜정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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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는 못 마셔. 오늘은 이만 들어갈게… 자네는 더 마시고 들어가. 나는 먼저 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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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말 끝이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벽시계 시침이 12에 닿을 듯, 조용히 바늘 소리를 눌렀다. 불면증을 앓는 혜정이 지금들어가도 잠들기는 만무했지만, 쓸데없는 잔상이 자꾸만 괴롭히던 준호는 병을 내려놓으며 고개로 짧게 응답했다.

​

“그럼 전 남은 것만 먹고 들어갈게요. 먼저 주무세요,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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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 자신의 잔과 수저를 모아 든다. 그릇이 포개지는 소리가 한 번, 둘. 의자를 미는 소리에 스탠드 불빛이 얇게 흔들렸다. 등을 돌려 걸음을 떼는 순간, 티셔츠 헐렁한 옆선이 한 번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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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시선이 따라붙으려다, 창틀에 비친 야광을 보듯 재빨리 방향을 바꿨다. 보지 못한 뒤태가 머릿속에서 먼저 그려지는 걸 막으려는 듯, 그는 잔을 들어 남은 술을 살짝 기울였다. 유리 가장자리가 입술에 닿자, 가볍게 식은 밤공기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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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 등을 매트리스에 붙이고 숨을 고르게 세어 보았다. 입안엔 막 헹궈낸 치약 향이 서늘하게 남아 혀끝을 감돌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천장의 희미한 결만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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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 사이로 스탠드 불빛이 아주 얇게 번지던 거실 먼발치에서 잔을 만지작거리던 준호의 멍한 옆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미안함이 한겹 더해지며, 베개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두 번, 세 번 쓸었다. ‘한 잔쯤 더 따라주고 옆에 앉아 있어줄 걸…’ 혀끝까지 올랐다가,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말수가 늘면 안 될 밤이었다.

​

아침의 장면이 틈으로 파고들었다. 협탁 위 구겨진 휴지뭉치, 손에 쥐었을 때의 거친 감촉, 씻어도 남는 듯한 자극적인 환취. 그 기억이 스위치처럼 켜질 때마다 몸이 근질거렸다.

​

“아무렇지 않게”라는 표정을 하루 종일 유지했던 얼굴 근육이 이불 속에서야 비로소 풀렸다가 다시 굳었다. 같은 지붕 아래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면, 오늘은 모른 척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베개 속에 밀어 넣듯 고개를 깊게 묻었다.

​

시곗바늘 소리가 얇게 방을 건너왔다. 혜정은 이불 끝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리고, 호흡 간격을 길게 늘려 보았다. 그러나 떠나지 않는 잔향과 낮의 장면들이 되돌아오며, 눈꺼풀 안쪽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지우고 싶은 생각일수록 선명해지는 밤. 불을 끄고 누웠지만, 잠은 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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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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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억…”

“하응…”

“허윽…!”

​

꿈이었다면 금방 흩어졌을 소리가, 귓바퀴 속으로 자꾸 파고들었다. 베개에 붙은 땀이 식으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준호는 더듬어 머리맡의 휴대폰을 켰다. 04:00. 화면 불빛이 손바닥을 하얗게 적시고 꺼지자, 방은 다시 먹물처럼 어두워졌다. 그와 함께 소리도 스윽—사라졌다.

​

잘못 들었나. 새벽의 조용한 소음들이 우웅거리며 금방 다시 잠들지 않으면 완전히 잠에서 깨버릴 것만 같아 준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

그때, 아주 얇게—

​

“흐윽…”

​

귀가 먼저 일어섰다. 벽을 타고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단단한 콘크리트 사이로 스며든 숨, 한 번 꺾였다가 길어지는 리듬.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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