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하수진의 미묘한 표정을 바라보며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자, 쓸데없는 말은 여기서 그만하지.”“감히 날 감금했으니 그 증거나 보여줘 봐!”하수진은 하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어젯밤 도성 국제공항에서 누군가가 촬영한 거야. 폭탄이 든 선물 상자는 서희진이 미리 준비해 놓은 거야.”“서희진이 폭탄을 터뜨리기 전에 당신이 미리 일어서서 유리를 부수고 몸을 피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어.”“이런 정황으로 볼 때 우리는 당신이 서희진과 함께 폭탄 설치를 모의했다고 의심하고 있어. 이 영상으로 보면 충분히 의심할 만하고 말이야.”“그리고 나중에 도성 경찰서에서 당신을 취조했을 때 최영하가 일부러 당신에게 불리한 이 영상을 삭제한 것도 당신이 이 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인 셈이지.”“모든 사건은 다 하현, 당신 때문이야!”“당신은 이 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해.”하수진은 증거를 제시했고 그 후 하현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웠다.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수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이 정도 증거로 날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하수진, 당신 머리에 총 맞았어?”하수진이 말했다.“물론 이걸로는 안 되겠지.”“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 사건의 배후에 미국 최 씨 집안 최규문이 있는 것으로 추정돼.”“그런데 우리가 제일 먼저 최규문을 체포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심문을 했어. 본심을 털어놓는 일종의 최음제도 써 봤어.”“하지만 그 사람과 이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어.”“도성 국제공항에서 테러를 일으킨 건 황금 삼각주 지역의 놈들이었고 그들이 받은 보수는 10억 달러 상당의 칩이었어. 그런데 그 칩에 당신 지문이 있었어.”“이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보면 당신이 미국 최 씨 집안을 죽일 목적으로 이 일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가장 커!”“왜냐하면 희망호에서 당신과 최규문이 충돌했기 때문에 당신은 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
하현은 냉엄한 표정으로 일관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용전 항도 지부에 오기 전 일찌감치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한 터였다.이제 일의 전말도 대충 알았고 사건의 배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하구천이 있음도 알았다.이렇게 된 마당에 하현이라고 생면부지의 하구천이 목숨을 잃은들 무슨 상관있으랴.제복을 입은 십여 명의 요원들의 안내로 하현은 더 넓은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이곳은 예전의 법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앞에는 높은 재단이 있었고 양쪽에는 실탄이 장전된 총을 메고 있는 남자들이 제복을 입고 도열해 있었다.홀의 양쪽에는 낡은 구호가 훈장처럼 걸려 있었다.“국가에 충성! 국민에 충성!”“청렴결백한 관청!”“위대한 기사도 정신!”등등...과거의 영욕을 상징하듯 걸려 있는 구호들을 하현은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이 구호들을 참관하러 오거나 공무를 수행하러 온 줄 알 것이다.하현이 구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밖에서는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곧 문이 열리고 냉랭한 표정으로 무장한 용전 사람들이 들어왔다.그리고 그들 뒤편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한 명은 최영하, 또 한 명은 최문성이었다.얼굴빛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최문성의 얼굴엔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잡혀왔을 때 용전 사람들에게 맞은 것이 분명했다.하현의 눈에 그 손자국이 들어온 순간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대표님.”홀 안에 있던 하현을 보며 어리둥절해하던 최문성이 미안한 얼굴로 발걸음을 멈추었다.하현은 잠시 최문성을 바라본 뒤 시선을 하수진에게 옮겼다.“최문성이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어? 왜 최문성을 잡아온 거야?”하수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희망호에 그가 나타났잖아. 그럼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순 없지. 최 씨 남매를 취조하는 건 절차상 엄연히 필요한 일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하현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을 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누
주위에 있던 용전 사람들은 마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모르쇠로 일관했다.결국 이 모습을 참지 못한 최영하가 폭발한 것이다.최영하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며 소리쳤다.“그만해! 때리지 말고 놔 줘!”“퍽!최영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천강이 앞으로 한 발짝 나와 최영하의 목을 조르고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빌어먹을! 무슨 자격으로 감히 소란을 피워?”“당신의 그 미련함 때문에 우리 화 씨 집안이 수백억이 넘는 손해를 봤다는 거 알아 몰라?”“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 화 씨 집안의 개여야 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구!”“내 둘째 동생이 당신과 밤을 보내고 싶다고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라구!”“감히 반항을 해? 죽으려고 환장했어!”무시무시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천강은 손바닥으로 최영하의 뺨을 이리저리 갈겼다.고통스러워하는 최영하의 얼굴에 벌건 손자국이 겹겹이 쌓였다.“그만!”하현은 화천강이 감히 용전에서 바로 손을 쓸 줄은 몰랐다.지금 화천강은 사람의 탈을 쓴 흉악한 괴물 같았다.“퍽!”화천강은 최영하의 뺨을 한 대 더 때린 후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하 씨, 기다려. 내 최 씨 남매 둘을 손본 다음에 너도 손봐 줄 테니까!”“여기가 어딘지 몰라?”“용전 항도 지부야.”“간단히 말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지!”“오늘 내가 사람들을 어떻게 때리는지 당신 똑똑히 봐 둬!”“감히 함부로 몸을 움직이다간 내 사람들이 바로 당신을 죽여 버릴 테니까!”말을 하면서 화천강은 경호원들에 손짓했고 경호원 예닐곱 명이 동시에 총을 들고 하현을 가리키며 위협하기 시작했다.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당당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지, 그만두라고. 또 한 번 최 씨 남매에 손찌검을 하다간 나한테 죽을 줄 알아!”“그만하라고? 당신이 그만하라면 내가 그만둘 것 같아?”“당신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여기는 항성이야. 우리 구역
”퍽!”하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화천강의 목을 조르고 허리춤에 있던 총을 빼앗았다.그러고 나서 화천강의 왼쪽 다리에 총구를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펑 하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화천강의 허벅지가 뚫렸고 장내는 혼돈과 충격으로 가득 찼다.사람들은 모두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놀라기는 하수진도 마찬가지였다.그녀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하현이 감히 아무 거리낌도 없이 화천강을 때리고 총을 쏘다니!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간이 배 밖으로 나올 만한 짓을 할 수 있는가?하지만 하현의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보고 있던 사람들은 하현을 용전까지 데려왔음에도 그의 무릎을 꿇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그러나 하현은 마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일관했다.이를 보던 최문성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는 항성과 도성에서 아무도 하현을 능가할 사람이 없음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최영하는 말문이 막힌 채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빌어먹을 놈!”잠시 후 고요 속을 헤치며 하민석이 손을 흔들자 주위에 있던 경호원 무리들이 일제히 앞으로 돌진했다.경호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하현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살벌한 눈빛으로 하현을 조준하며 언제든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화천강은 비록 온몸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벌렁벌렁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냉소를 터뜨렸다.“얼빠진 놈! 넌 곧 죽을 거야! 감히 나한테 총구를 들이대! 죽지 못해 환장했군!”“용전 같은 데서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감히 날 이렇게 만들어!”“당신 용문 대구 지회장 신분은 고사하고 당장 우리 손에 목이 댕강 날아갈 거야!”화천강이 보기에 용전에서 인질극을 벌인다는 건 무모하고도 무모한 짓이었다.게다가 사람한테 총을 쏴?하현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었다.스
하현은 여전히 담대한 표정으로 총구의 방향을 틀었다.이번에는 화천강의 이마를 겨누었다.총구의 방향을 틀었을 뿐인데 화천강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렸다.어디선가 죽음의 냄새가 스멀스멀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하현의 총은 이미 발사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오발이 되었든 의도한 것이든 총알이 나가기만 하면 화천강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었다.“자, 잠깐만.”화천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핏기를 잃어갔다.비록 그는 제멋대로에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그도 사람이었다.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는 없었다.특히 하현처럼 자비 없는 잔인한 사람 앞에서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이 극에 달하는 것이다.지금 심정이 답답하고 초조하기로 화천강만 한 사람이 또 있을까?그도 쩨쩨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싶지 않았다.기껏해야 죽기 밖에 더하겠냐 싶어 하현을 안고 함께 죽으려고도 생각했다.하지만 삼엄한 총구 앞에서 그는 깨달았다.과거의 그에게 있어 죽고 사는 것은 그리 두려운 게 아니었다.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사였기 때문에 전혀 두려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생사의 기로가 자신에게 닥치고 보니 그는 누구보다 죽는 것이 두려웠다.생사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자 화천강은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두렵지 않은 척 호기로운 척하려고 해도 도저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하현은 화천강의 고뇌는 안중에도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길을 비켜.”한 무리의 용전 사람들이 언짢은 표정으로 버티고 서서 총구를 들이대며 하현의 앞길을 막았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화천강의 다리에 상처가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이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10분 안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그가 도대체 용전에서 무슨 직책을 맡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잘못 보지 않
하현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동시에 다 같이 상대를 향해 쏴 보자구. 당신이 날 죽일 수 있는지 아니면 내가 당신들을 죽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구!”“하현,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이나 알아?”하민석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화천강이 어디 보통 신분이야? 그는 용전 항도 지부에서 중요한 인물이야. 그를 죽이면 당신이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 대가를 다 치르지 못할 거라구!”“그리고 당신 주변의 사람들은 당신이 저지른 행동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정말 감히 우리 용전 사람들 앞에서 화천강을 죽일 셈이야?”“만약 당신이 감히 사람을 죽인다면 당신도 바로 총에 맞아 죽을 거야!”“당신이 감히 죽이지도 못하고 허풍을 떠는 거라면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어?”“당신은 도성 국제공항에서 테러를 일으켰다는 혐의도 벗지 못하고 오히려 흉악한 범죄자라는 사실만 더해질 뿐이야.”하수진은 계속된 말로 하현을 설득하려고 했다.“당신 자신은 그렇다 쳐도 당신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야? 그 사람들을 생각해야지.”“예를 들어, 최 씨 남매 말이야. 그들이 지금 당신과 함께 죽길 바라?”하현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표정으로 하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됐어. 헛소리 그만해.”“당신이 인정하든 말든 당신들의 용전 항도 지부는 이미 변질되었어.”“이런 곳에서 무슨 자격으로 사건을 처리한다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 혐의를 제기할 수 있냐구? 그저 사실에 대해 침묵하라?”“게다가 지금 이 장면이 어떻게 하다가 나오게 되었는지 당신 혹시 짐작 가는 게 없어?”“이 사건에서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화천강과 하민석 두 사람을 나타나게 한 것은 그들이 최 씨 남매에게 거침없이 손찌검을 하게 한 다음 날 자극해서 반격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잖아? 아니야?”“내가 손을 쓰기만 하면 당신들 용전은 날 상대할 구실이 생기는 거니까.”“당신, 하 씨 가문에 있을 때보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자 하수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하수진 일행은 하현이 만반의 계획을 세우고 용전에 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오프로드 자동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순식간에 좌우로 흩어져 장내를 포위했다.총을 메고 허리에 당도를 찬 군인들을 바라보는 하수진 일행의 얼굴엔 먹구름이 잔뜩 내려앉았다.강남 병부 사람이라고?그들이 어떻게 항성에 나타났지?항성과 도성은 비록 강남 병부의 방어 지역이기는 했지만 어떻게?일반적으로 강남 병부는 이 두 지역의 외곽에만 일부 인원을 배치한다.하현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병력이 갑자기 용전에 나타나다니 정말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하수진 일행이 충격에 휩싸인 그 순간 오프로드의 조수석이 열렸고 군복을 입은 강남 병부 당도대 통솔자인 당인준이 뛰어내렸다.당인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무겁고 위엄 있었다.그는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지그시 눌렀다.용맹스러운 기운이 절로 뿜어져 나왔다.하수진은 안색이 일그러진 채 마른 입술을 떼었다.“당인준, 여긴 무슨 일이야?”“당신들 병부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용전 구역에 들어온 거냐구?”당인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강남 전역은 강남 병사의 방어 구역이야. 항성과 도성 두 도시는 비록 외부 행정 구역에도 속해 있지만 여전히 내 방어 구역 안에 있어. 난 어디든 올 수 있고 갈 수 있어.”“당인준, 당도대 사람들을 데리고 뭐하러 여길 나타난 거냐구? 도대체 왜?”하수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거야?”“반란?”당인준은 헛웃음이 났다.“우리 당도대는 대하 9대 최고 군대 중 하나야. 유라시아 일전에서 5대 강국을 휩쓸어 대하에 큰 공을 세웠어.”“그런 내가 반역을? 지금 우리 병부를 무시하는 거야?”“그럼 당신들은 왜 이 많은 사람들을 용전 항도 지부에 데리고 온 거야?”“관할 권한 상으로 당신들 병부는 용전 경내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설마 모르
간단히 말해서 항성과 도성에서 7일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당인준 한마디에 결정된다는 것이었다!항성, 도성의 일인자가 와도 아무 소용없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병부 대장에게 잠시 용전에 며칠 동안만 당도대를 빌려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병부에서 전시 상태의 명령까지 내릴 줄은 몰랐다.“당인준, 당신들 너무 한 거 아니야!”하수진이 버럭 하며 눈을 부라렸다.“전시 태세에 돌입했다고 해도 우리 용전은 여전히 당신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용전의 일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은 고사하고 강남 병부 총지휘관 원경천이 와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당인준은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영장이 당신 손에 있지 않아? 거기 총지휘관의 서명이 있을 텐데?”“그의 서명이 거기 없다면 내가 대대 전체의 군사를 모두 끌어들일 수 있었겠어?”“하수진, 당신이 잊은 것 같은데 영장을 본 순간부터 이미 여기는 전시상태야.”“전시에는 내가 왕이고.”“불만이 있을 수도 있고 분노할 수도 있고 날 고소할 수도 있어. 미안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전시 상태가 끝난 후의 일이야.”“그러니 하수진, 당신 손에 있는 무기 다 내려놔.”“당인준!”하수진의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거렸다.“당신이 하현과 돈독한 사이란 건 알지만 우리 용전을 짓밟고 우리 하 씨 가문을 무시할 만큼 하현이 가치가 있는 인물이야?”“당신이 비록 병부에서 전쟁의 신으로 통하지만 세상 일은 싸우고 죽이는 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아야지.”“공공 기기를 사적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당신과 당도대가 앞으로 얼마나 큰 후환을 맞을지 잘 생각해 봤어?”“깊이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란 거 알고나 있어?”당인준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후환?”“용전이 공적인 척하며 뒤로는 사리를 취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후환이 두렵지 않고?”“하수진, 당신은 용전 항도 지부 책임자이면서 부잣집 도련님들이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