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일요일 새벽 네 시.
순옥이네 김밥은 일요일에 쉰다. 그런데 조리대에 불이 켜져 있었다.
"너 지금 뭐 허냐."
엄마가 잠옷 바람으로 내려왔다.
"김밥 싸요."
"오늘 쉬는 날인디."
"오늘 본가 가잖아요. 빈손으로 가요?"
"그런 집에 김밥을 들고 가? 과일이나 한과를 사 가야제."
"과일은 그 집에도 있을 거고 한과도 있을 거예요. 근데 이 김밥은 없어요."
엄마는 더 말리지 않았다. 대신 옆에 서서 지단을 부치기 시작했다. 말리는 척하다 돕는 것, 이것이 순옥 여사의 전통 기술이다.
"들기름 한 방울 더 넣어라. 어른들 드시는 거여."
"네."
"우엉은 두 줄. 빼먹지 말고."
"한 번도 안 빼먹었어요."
"오늘 빼먹을 수도 있잖여. 떨리면."
보리는 떨리지 않는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검지가 벌써 허공에서 두 바퀴를 돌고 있었다.
열 줄을 쌌다. 삼단 찬합에 담았다. 엄마가 옷장 깊숙이에서 쪽빛 비단 보자기를 꺼내 왔다.
"이거 너 돌잔치 때 쓴 거다."
"이걸 아직도 갖고 있었어요?"
"딸 시집갈 때 쓸라고 뒀제."
엄마가 매듭을 두 번 묶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보리는 못 본 척했다. 이 집 식구들은 서로 못 본 척하는 데 도가 텄다.
―
저녁 다섯 시 사십 분. 송림동 언덕 위 본가.
담장이 길었다. 차로 담장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서야 대문이 나왔다.
"오빠. 여기 담장이 우리 시장 골목보다 길어요."
"조금."
"조금이 아닌데요."
대문이 열리자 누렁이 한 마리가 달려 나왔다. 덩치가 보리 허리만 했다.
"대장이야. 할아버지 개. 사람 가려서 짖어."
대장이 보리 앞에 딱 멈췄다. 보리는 숨을 참았다. 대장이 코를 킁킁거렸다. 보자기 쪽으로. 그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김밥 냄새 맡았나 봐요."
"대장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꼬리 흔드는 거 처음 봐."
여기서 미리 말해 두자면, 이 집에서 대장의 판단은 꽤 정확한 편이다. 적어도 사람보다는.
현관에 들어서니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천장이 높고 소파가 길었다. 사람들이 그 소파를 따라 쭉 앉아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인사드려, 보리야."
"안녕하세요. 윤보리입니다."
태오가 한 사람씩 소개했다. 보리는 단골 목록 외우듯 이름을 넣었다.
큰아버님 권정훈. 해강그룹 부회장. 안경, 신문, 짧은 목례.
큰어머님 장혜란. 비취 반지, 꼿꼿한 등, 이 집 맏며느리 삼십 년 차.
아버님 권정민. 해강호텔 대표. 부드러운 눈.
어머님 배숙희. 진주 귀걸이, 무릎 위의 하얀 말티즈. 분홍 리본.
형님 권태희. 짧은 단발, 보리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는 눈. 그릇을 굽 밑까지 뒤집어 보는 사람 눈이었다.
아주버님 권태민, 형님 신예나, 그 사이에 공룡 양말을 신은 일곱 살 남자아이.
그리고 소파 맨 끝, 혼자 떨어진 일인용 의자.
해강그룹 회장 권영철. 여든하나. 다음 달이면 여든둘.
체구가 작았다. 머리는 하얗고 눈썹이 짙었다. 손목에 낡은 노란 고무줄이 하나 감겨 있었다. 시장에서 돈다발 묶을 때 쓰는, 딱 그 고무줄이었다. 재벌 회장 손목에 저게 왜 있는지는 한참 뒤에 밝혀진다.
회장은 보리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리 앉아요. 새아기라고 부르면 되나?"
큰어머님 혜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부드러워서 더 긴장됐다.
"네, 큰어머님."
"들고 온 건 뭐예요?"
"김밥이에요. 제가 새벽에 쌌어요."
보리가 보자기를 풀려는데 혜란이 손을 살짝 들었다.
"어머, 김밥. 정성이네요. 그런데 새아기, 우리 집은 저녁을 코스로 먹어서요. 이런 건 부엌에 두세요. 아랫사람들 먹으라고."
거실이 조용해졌다. 태오가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보리가 한발 빨랐다. 김밥집은 원래 손이 빨라야 한다. 입도.
"네, 큰어머님. 그럼 부엌에 계신 분께 제가 직접 드리고 올게요."
"……직접?"
"네. 드시는 분이 누군지 알고 드려야죠. 김밥은 싼 사람이 드려야 제일 맛있거든요."
보리가 보자기를 들고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려는 태오를 눈짓으로 앉혔다.
"부엌은 어디예요?"
대답한 사람은 뜻밖에 태희였다.
"저쪽 복도 끝."
태희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이 집 사람들은 웃음도 격식을 차려서 웃는다. 삼 밀리미터쯤.
―
부엌은 거실만큼 넓었다. 조리대가 섬처럼 가운데 있었다.
그 앞에 은색 안경줄을 늘어뜨린 여자가 서 있었다. 예순 넘어 보였다. 앞치마 끈을 뒤로 단단히 묶은 폼이 순옥이네 엄마랑 똑같았다.
이 집 부엌을 삼십 년 지킨 오금례 여사다. 식구들은 오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오 여사는 거실 대화를 다 들었다. 부엌 문은 늘 조금 열려 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아가씨, 김밥 들고 여기로 오겠구먼. 그리고 정말 왔다.
"안녕하세요. 윤보리입니다. 김밥 좀 드시라고요."
"아가씨가 직접 가지고 왔어요? 부엌에?"
"큰어머님이 아랫사람들 드시라고 하셔서요. 근데 저도 김밥집에서 일해요. 새벽 네 시 반부터요. 그럼 저도 아랫사람이잖아요. 같이 먹어요."
오 여사가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흔들면서.
"여기서 삼십 년이에요."
"삼십 년이요? 저희 엄마 가게도 삼십 년이에요."
"그럼 동갑이네."
오 여사가 찬합을 열었다. 김밥 단면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우엉이 두 줄이네."
"알아보세요?"
"부엌 삼십 년이면 단면만 봐도 알아요. 이거 싼 사람 손 빠르겠네."
오 여사가 김밥 하나를 먹었다.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커피 마실래요? 믹스로."
"여기도 믹스커피가 있어요?"
"내 거. 서랍 맨 밑 칸. 이 집에서 아무도 몰라요."
둘은 조리대 옆에 서서 종이컵으로 믹스커피를 마셨다. 재벌가 부엌에서 벌어진 가장 소박한 모의였다.
"거실 사람들 얘기 좀 해 줄까요?"
"네. 주세요."
"회장님은 말이 짧아요. 짧게 말하면 좋다는 거고, 아예 말을 안 하면 생각 중인 거예요. 큰어머님은 부드럽게 말할 때 조심하고. 막내 도련님 어머님은……."
오 여사가 뜸을 들였다.
"차가워 보여도 매운 거 못 드세요. 김치찌개 끓이면 몰래 물 타 드려요."
보리는 머릿속 단골 목록에 적었다. 어머님, 매운 거 못 드심.
그때 부엌 문이 빼꼼 열렸다. 공룡 양말이었다.
"오 할머니, 배고파요. 코스는 너무 느려요."
조카 하율이었다. 오 여사 뒤에 숨어서 보리를 올려다봤다.
"누구세요?"
"태오 삼촌이랑 결혼할 사람이야. 윤보리."
"보리? 보리차 할 때 보리?"
"응. 보리차 할 때 보리."
하율이 찬합을 봤다. 침을 꼴깍 삼켰다. 손을 내밀다가 멈췄다.
"……오이 들었어요?"
"아니. 우리 집 김밥은 오이 대신 시금치야."
"진짜요?"
"진짜. 보리차 걸고."
하율이 김밥 하나를 쏙 입에 넣었다. 볼이 불룩해졌다. 두 번째, 세 번째. 오 여사가 말릴까 하다가 말았다.
"저녁은 원래 못 먹어요. 맨날 풀만 나와요."
하율은 네 번째를 입에 물고 거실로 뛰어가다 돌아서서 외쳤다.
"김밥 숙모! 또 싸 와요!"
보리는 아직 숙모가 아니었다. 그래도 대답했다.
"그래!"
―
복도에 태오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괜찮아?"
"오 여사님이 커피 타 주셨어요."
"오 여사님이? 나 여기서 삼십일 년 살았는데 그 커피 두 번 얻어먹었어."
"오빠는 김밥 안 싸 왔잖아요."
태오가 웃다가 진지해졌다.
"아까 큰어머니 말, 미안해."
"오빠가 한 말 아니잖아요."
"그래도 내가 먼저 막았어야 했는데 네가 너무 빨랐어."
"김밥집은 원래 빨라야 돼요. 손님 안 기다리게."
태오가 보리 머리끈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보리는 끈을 풀었다가 한 번 더 단단히 묶었다.
"자. 코스 먹으러 가요."
―
저녁은 정말 코스였다. 접시가 여섯 번 바뀌었다. 보리는 포크를 바깥쪽부터 쓰라는 태오의 문자를 식탁 밑으로 몰래 확인했다.
"그래서, 새아기 친정은 뭐 한다고 했죠?"
혜란이 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김밥집이요. 솔내시장 입구에서 세 번째 가게예요."
"시장. 요즘도 시장에서 장을 보는 사람이 있나 봐요."
"네, 큰어머님. 해강마트에도 새벽마다 저희 시장 채소가 들어가요. 곽씨네 반찬 사장님 형님이 도매를 하시거든요. 큰어머님 댁 샐러드에도 저희 시장 상추가 들어갔을 수도 있어요."
예나가 컥, 사레들렸다. 태희는 대놓고 웃었다. 이번엔 삼 밀리미터가 아니었다. 혜란은 웃지 않았다.
"……말을 참 잘하네요."
"김밥집은 말로 파는 데가 반이거든요. 나머지 반은 우엉이고요."
어머님 숙희는 식사 내내 보리를 보지 않았다. 몽이만 쓰다듬었다. 딱 한 번, 보리 입에서 '솔내시장'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진주 귀걸이가 작게 흔들렸다. 보리는 봤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그 귀걸이가 왜 흔들렸는지는, 시장 떡집 솥에 김이 몇 번 더 오른 뒤에야 밝혀진다. 지금은 그저 코스 요리 다섯 번째 접시가 나오고 있었을 뿐이다.
여섯 번째 접시가 치워졌을 때였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없던 회장이 입을 열었다.
"김밥."
식탁이 일제히 굳었다.
"아버님, 김밥은 부엌에……."
혜란이 말하는 사이 부엌 문이 열렸다. 오 여사가 찬합을 들고 서 있었다. 한 줄은 이미 비어 있었다. 하율 몫이었다.
"회장님, 여기 있습니다."
회장이 김밥 하나를 집었다. 젓가락도 없이 손가락으로.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보리는 숨을 참았다. 검지가 식탁 밑에서 쉬지 않고 돌았다.
회장이 김밥을 삼켰다. 그리고 처음으로 보리를 똑바로 봤다.
"가게가 솔내시장이라고 했나."
"네, 할아버님."
"입구에서 세 번째."
"네."
회장이 손목의 노란 고무줄을 엄지로 한 번 튕겼다. 탁.
"내일 새벽, 가게로 가마."
솔내시장에서 제일 먼저 불이 켜지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요즘 시장 사람들은 대답하다 싸운다.순옥이네 김밥이라는 사람. 새벽 네 시 반.배가네 떡방이라는 사람. 새벽 두 시. 요즘은 할머니 대신 딸이 불을 켠다. 일주일에 사흘. 서림동에서 첫차보다 먼저 기사 차를 타고 온다. 진주 귀걸이는 떡집 서랍에 넣어 두고.태민 반찬이라는 사람. 새벽 세 시 반. 계란말이는 새벽에 부쳐야 결이 곱다고, 새로 온 반찬 가게 사장이 우긴다.그래서 요즘 솔내시장의 새벽은 세 번 켜진다. 두 시, 세 시 반, 네 시 반. 떡, 계란, 김밥. 시장 사람들은 그걸 "솔내 새벽 삼 교대"라고 부른다. 태식이가 지었다.―목요일 새벽 네 시 반. 결혼하고 딱 일 년이 되는 주.보리가 셔터 밑으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조금 천천히. 배가 아직 티는 안 났지만 몸이 먼저 조심했다. 빨간 머리끈을 한 번 더 조였다."자, 오늘도 백이십 줄."노란 앞치마를 두르고 «순옥이네» 글자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출근 도장.엄마가 조리대 옆에 서 있었다. 원래는 아홉 시에 나오는 엄마가, 요즘은 네 시 반에 같이 나온다. 딸이 새벽에 혼자 김밥 싸는 걸 못 보겠다고."오늘은 네가 싸라. 참기름 냄새 괜찮냐?""괜찮아요, 엄마. 입덧 끝났어요. 오늘은 제가 쌀게요.""그래. 오늘은 니가 싸야제. 목요일이잖여."엄마는 알고 있었다. 오늘이 무슨 목요일인지. 순옥 여사는 모르는 척을 잘하지만, 아는 척도 딱 필요한 만큼 한다.밥솥 두 개가 칙칙 소리를 냈다. 보리가 밥을 펼쳤다.들기름 한 방울. 깨소금 한 줌. 소금 조금.주걱은 세워서 자르듯이. 밥을 비비지 말고 달래라.시금치, 당근, 지단, 어묵, 햄. 그리고 우엉 두 줄.김 한 장, 밥 한 주걱, 재료 가지런히. 말고, 누르고, 참기름 붓질.사십 초.일 년 전 봄과 똑같은 손이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조리대 서랍 안에 공책이 두 권 더 있다는 것. 온도 기록장 옆에 단골 장부 백사십 줄. 그리고 새
오월 셋째 주 토요일. 솔내시장 봄장터.시장 입구에 새 간판이 걸렸다. 나무 간판. 글씨는 민 여사가 골랐다. 붓글씨로.«솔내시장»그 아래 작은 글씨로 한 줄. 곽 사장이 우겼다.«since 양말 좌판»영어였다. 곽 사장이 아는 유일한 영어였다. 딸한테 물어봐서 썼다고. 회장이 간판을 보고 이번에도 "두라" 했다.시장 지붕 공사는 다음 달부터였다. 해강건설 견적대로. 태민 이름이 올라간 견적서대로. 그 전에 봄장터를 열자고 한 건 곽 사장이었다. 공사 시작하면 한동안 어수선할 테니, 그 전에 한번 잔치를 하자고. 시장은 잔치를 좋아한다. 떨이보다 조금 더.―아침 여덟 시. 시장 골목에 가게마다 좌판이 하나씩 더 나왔다. 가게 앞에 작은 상. 봄장터 특별 상.곽씨네 반찬 앞엔 «우엉 조림 — 새벽상 재주문 3등»이라는 종이가 붙었다. 곽 사장이 이사회에서 들은 걸 기억하고 있었다.태식이네 생선가게 앞엔 물고기 도장이 찍힌 종이. «이사회 통과 도장».민그릇 앞엔 결 좌판이 나왔다. 태희가 «시장» 종지를 팔았다. 네 가지 색 유약이 조각조각 입혀진 작은 종지. 한 개에 삼천오백 원. 김밥 한 줄 값이었다. 태희가 그렇게 정했다."형님, 너무 싸요.""김밥이랑 같은 값이면 시장 사람들이 사 가잖아. 비싸게 받으면 서울 사람만 사 가."시장 사람들이 사 갔다. 박 씨 아주머니는 아저씨 약 싸는 손수건으로 쓰겠다고 두 장을 샀다.그리고 순대 골목 초입, 작년까지 비어 있던 작은 가게. 새 간판이 붙어 있었다.«태민 반찬»해강건설 상무 권태민. 오월 말 퇴사 예정인데, 이미 가게를 계약해 버렸다. 새벽상에 계란말이를 올리던 사람이 이제 솔내시장 상인이 됐다. 연명부 백사십일 번째 줄.가게 안에서 태민이 계란말이를 부치고 있었다. 흰 조리복. 옆에서 예나가 계란을 깨고 있었다. 예나는 반찬 가게 사모님이 되기로 했다. 틀려도 되는 곳에서.정훈이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양복 차림으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어가지는 않고."아
엄마 양순옥이 딸 얼굴을 봤다. 딱 삼 초.그리고 행주를 내려놨다. 순옥 여사가 행주를 내려놓는 건 큰일이 났다는 뜻이다."찬아!"골목 저쪽에서 하율이랑 오토바이 소리 흉내를 내던 찬이가 뛰어왔다."왜, 엄마!""약국 가.""뭐 사 와?"엄마가 찬이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찬이 눈이 동그래졌다. 입이 벌어졌다. 누나를 봤다. 다시 엄마를 봤다."……진짜?""가, 이놈아! 오토바이로!"찬이가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렸다. 잔칫상 사이로 부르릉 빠져나갔다. 하율이 그 뒤를 보며 박수를 쳤다. 삼촌 진짜 오토바이 소리라고.보리는 조리대를 붙잡은 채 서 있었다."엄마, 뭐 사 오라고 했어요?"엄마가 대답 대신 보리 등을 쓸었다. 그리고 참기름 병 뚜껑을 닫았다. 꼭."오늘은 김밥 그만 싸. 남은 스무 줄은 내가 싼다."―오후 세 시 이십 분. 순옥이네 가게 뒤 창고.김 상자들 사이. 보리가 서 있었다. 손에 작은 막대 하나. 약국 봉투는 찬이가 가게 앞에 던져 놓고 도망치듯 잔칫상으로 돌아갔다. 스물세 살 남동생에게는 감당이 안 되는 심부름이었다.보리가 막대를 봤다. 창 하나에 선이 떴다. 한 줄.그리고 옆에 또 한 줄. 천천히 진해졌다.두 줄.보리가 김 상자에 등을 기댔다.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앉았다. 곽 사장네 형님 도매에서 들어온 김 상자. 나무 받침대 위. 바닥에서 한 뼘.보리는 두 줄을 한참 봤다. 김밥에 우엉이 두 줄 들어간다. 이십팔 년 동안 두 줄은 늘 우엉이었다. 오늘은 우엉 말고 다른 두 줄이었다.창고 문이 열렸다. 엄마였다."……몇 줄이여."보리가 막대를 들어 보였다. 엄마가 봤다. 엄마 손이 입으로 갔다. 그리고 창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보리 옆에. 김 상자 사이에."아이고. 아이고, 우리 딸."엄마가 보리를 끌어안았다. 앞치마에서 참기름 냄새가 났다. 보리 속이 또 울렁거렸다. 보리가 엄마를 살짝 밀었다."엄마, 앞치마……. 냄새가…….""아이고, 그려, 그려."엄마가 앞
사월 첫째 주 토요일. 권영철 회장 여든세 번째 생신.해강그룹 창립 이래 회장 생신 잔치는 늘 해강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하객 오백 명. 샴페인 탑. 현악 사중주.올해는 솔내시장 골목에서 열렸다. 하객 이백 명. 막걸리 통. 곽 사장네 라디오.시장 입구에 현수막이 걸렸다. 찬이가 인쇄소에 맡긴 것이었다. 흰 바탕에 빨간 글씨.«권영철 회장님 생신 축하 — 솔내시장 일동 (양말 좌판 출신 환영)»괄호 안 문구는 곽 사장 아이디어였다. 회장이 현수막을 올려다보고 한참 서 있었다. 비서실장이 "문구를 바꿀까요" 하고 물었다. 회장은 "두라" 했다. 그리고 현수막 사진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회장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걸 본 사람은 처음이었다.―잔치 음식은 시장이 맡았다. 해강호텔 총주방장이 돕겠다고 왔다가 순옥 여사 옆에서 지단을 부쳤다. 상견례 때 대추 물을 맞힌 그 사돈 옆에서. 총주방장은 영광이라고 했다.곽씨네 반찬은 나물 아홉 가지. 정육점은 수육. 태식이네는 생선전. 순대 골목은 순대. 분식집은 떡볶이. 민그릇은 음식 대신 그릇을 댔다. 잔칫상 사발과 접시가 전부 민그릇 것이었다. 골목 위에는 풍경 줄이 걸렸다. 쪽빛, 옥색, 연분홍, 먹색 작은 도자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딸랑거렸다. 결 대표 태희가 공방 가마에서 구워 밤새 줄에 꿴 것이었다.순옥이네 김밥은 백이십 줄. 우엉 두 줄.그리고 한쪽 조리대에 태민이 서 있었다. 흰 조리복. 가슴에 «권태민». 이름표 아래 «한식조리 야간반»은 떼어 냈다. 야간반을 수료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해강건설에는 사표를 냈다. 오월 말까지 인수인계.태민이 계란말이를 부쳤다. 새벽상 계란말이. 이번엔 이름을 붙였다. 조리대 앞 종이에 매직으로.«권태민 계란말이 두 줄»예나가 옆에서 계란을 깼다. 껍질이 안 들어갔다. 팔 년 차 완벽주의자의 손이었다. 하율이 조리대 밑에서 올려다봤다."아빠, 오늘은 진짜 요리사야?""응. 오늘부터 진짜."하율이 박수를 쳤다. 계란 껍질을 하나 들고
오전 아홉 시 반. 해강그룹 본사 삼십 층 이사회실.긴 타원형 탁자에 의자가 열네 개. 창밖으로 강이 보였다. 상견례 때 운정에서 보던 그 강이었다. 조금 더 높은 데서 보니 더 넓었다.보리는 이사회실 뒤쪽 참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옆에 곽 사장. 상인회장 자격이었다. 회장 비서실이 공문으로 불렀다. 솔내시장 상인회장 및 동반인 일 인, 참고인 출석 요청.곽 사장은 양복을 입고 왔다. 딸 결혼식 때 입은 양복. 넥타이가 조금 삐뚤었다."보리 사장. 내 떨린다.""사장님, 결혼식 축사도 하셨잖아요.""그때는 반찬 파는 사람들 앞이었다. 여기는 재벌들 앞이다.""재벌도 반찬 먹어요. 사장님 우엉 조림, 새벽상에서 재주문 삼등이에요. 이사님들 댁에서도 드셨을 수 있어요.""……그건 맞다."곽 사장 무릎 위에 두꺼운 서류철이 있었다. 연명부. 백사십 줄. 고기 기름 자국, 물고기 도장, 칠십 년 인감, 엄지 지장들.참고인석 옆 뒷자리에 혜란이 앉아 있었다. 재단 이사장 참관석. 물빛 스카프. 혜란이 보리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어젯밤 정원에서 흙 파던 사람이 오늘은 비취 반지를 끼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이 방에서 아는 사람은 보리뿐이었다.―열 시. 회장이 의장석에 앉았다. 손목에 노란 고무줄. 이사들이 일제히 일어섰다가 앉았다."임시 이사회를 연다. 안건은 하나. 솔내역 복합개발 사업 재검토."회장 말은 거기서 끝났다. 짧았다."발표. 해강유통 신사업본부."태오가 일어났다. 탁자 끝 발표대로 걸어갔다. 넥타이, 남색 양복. 그리고 양복 안주머니가 조금 불룩했다. 은박 봉지였다. 오늘 아침 여섯 시 십 분에 받은.비서 우진이 발표대 옆 노트북 앞에 앉았다. 손에 발표 넘김 버튼. 우진은 이 버튼을 어젯밤 세 번 시험했다. 세 번 다 잘됐다.화면에 첫 장이 떴다.«솔내시장, 김 한 장 더»이사 몇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김? 무슨 김?"김밥은 옆구리가 터지면 버리지 않습니다. 김
밤 열두 시. 송림동 본가 뒷마당 너머 작은 정원.보리는 이 집에 일 년 가까이 드나들었지만 이 정원엔 처음 와 봤다. 본채 뒤편, 담장 안쪽 좁은 땅. 대문에서는 안 보이는 자리였다.정원 등이 하나 켜져 있었다. 그 아래 혜란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코트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목장갑을 끼고. 흙 묻은 모종삽을 들고."큰어머님?""왔어요? 앉아요. 거기 돌."보리가 정원 돌에 앉았다. 혜란은 모종삽으로 화단 흙을 뒤집고 있었다. 겨울 동안 짚으로 덮어 둔 화단이었다. 짚을 걷어 낸 자리에 동백 몇 그루와 수국 뿌리가 보였다."이 정원, 큰어머님이 가꾸세요?""삼십 년 넘게. 시집온 이듬해부터. 어머님한테 혼난 날마다 여기 와서 흙 팠어요. 흙은 대꾸를 안 하거든요."혜란이 동백 뿌리 주변 흙을 손으로 다독였다."오 여사도 몰라요, 여기서 내가 뭐 하는지. 정훈 씨는 알고 모른 척하고."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쪼그려 앉아 짚을 걷는 걸 거들었다. 김밥집 딸은 흙도 만진다. 옥상 평상 옆에 엄마가 고추 모종을 키운다.둘은 한참 말없이 흙을 만졌다. 삼월 밤공기가 찼다.―"새아기."혜란이 모종삽을 내려놨다."태민이가 다 말했어요. 지난주에."보리가 짚을 쥔 채 멈췄다."요리 얘기. 야간반. 새벽상 계란말이가 자기 거라는 거. 김장 날 새아기가 자기 대신 거짓말해 준 거. 그리고 새아기가 여태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거. 태민이가 그러더라고요. 제수씨는 비밀을 너무 잘 지켜서, 제가 직접 말 안 하면 평생 모르실 거라고.""……큰어머님, 그건…….""알아요. 탓하려는 거 아니에요."혜란이 목장갑을 벗었다. 비취 반지가 정원 등 아래서 빛났다."태민이가 그러대요. 어머니, 저 요리사 하고 싶어요. 해강건설 그만두고 싶어요. 서른넷에. 장손이. 그 말 하는데 걔가 울더라고요. 열네 살 때 부엌에서 계란말이 하다가 아버지한테 혼난 날 이후로 처음 울었대요."혜란이 웃었다. 울음 같은 웃음이었다."나는 그날 거기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