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모니터 알람이 울렸다.
삐삐삐삐—
민영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자꾸 눈이 갔다. 퇴근길 조심하라고 했는데.
택시 타라고 했는데. 도착하면 연락 남기라고 했는데. 그런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장갑 낀 손에 힘을 줬다.
“화준 선생님, 들리면 눈 떠봐요.”
대답은 없었다.
태겸이 옆에서 낮게 말했다.
“민영아, 흉관 내가 할게.”
“아니. 내가 할게.”
“너 손 떨고 있잖아.”
민영은 자기 손을 보았다.
정말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도화준을 보았다.
“그럼 같이 해.”
태겸은 더 말하지 않았다.
흉관 삽입 준비가 빠르게 진행됐다.
소독, 절개, 기구, 튜브. 피가 흘러나오자 간호사가 배액량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았다. 민영의 턱이 굳었다.
“수술방 준비됐어요?”
“아직 연락 중입니다.”
“빨리요.”
도화준의 심박이 흔들렸다.
태겸이 모니터를 보고 낮게 말했다.
“민영아.”
“알아.”
둘은 동시에 움직였다.
응급실의 빛이 차갑게 번졌다.
누군가는 피 묻은 거즈를 치웠고, 누군가는 수혈팩을 가져왔다.
민영은 환자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계속.
“화준 선생님, 버텨요. 여기 병원이에요. 저희가 보고 있어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이 막혔다.
‘저희가 보고 있어요.’
응급실에서 환자에게 자주 하는 말이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지금 붙잡고 있다고 알려주는 말.
그런데 이번에는 그 말이 너무 가까웠다.
도화준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민영은 그걸 봤다.
“움직였어.”
태겸이 바로 확인했다.
“의식 반응?”
“화준 선생님, 들려요?”
도화준의 눈꺼풀이 떨렸다.
잠깐.
정말 잠깐.
그의 눈이 열렸다.
민영은 숨을 멈췄다.
눈빛이 달랐다.
피와 통증에 흐려진 환자의 눈이어야 했다.
그런데 눈을 뜬 도화준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초점이 흐린데도, 어딘가 너무 차분했다.
응급실 천장과 의료진들, 자신의 상태를 놀라워하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장소를 조용히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민영은 그 눈을 보고 아주 짧은 순간 말문을 잃었다.
“화준 선생님?”
그의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민영이 가까이 몸을 숙였다.
“네. 말해봐요.”
도화준은 아주 낮게, 거의 숨처럼 말했다.
“…여기가…”
민영은 그의 말을 들으려 더 가까이 갔다.
그의 차가운 숨이 산소마스크 안쪽에서 흐려졌다.
“…이승인가.”
민영의 손끝이 그대로 멈췄다.
그 순간 모니터 알람이 길게 울렸다.
삐——————
태겸이 외쳤다.
“민영아, 리듬 떨어져!”
삐——————
모니터의 긴 경고음이 응급실 천장을 갈랐다.
민영은 산소마스크 너머로 열린 도화준의 눈을 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환자의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통증과 쇼크 사이에서 엉뚱한 말을 내뱉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방금 도화준의 눈빛은 달랐다.
사고 직후 혼란에 빠진 사람의 눈이라기보다,
너무 멀리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이승인가.’
그 말이 민영의 귀 안쪽에 차갑게 남았다.
“민영아!”
태겸의 목소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민영은 바로 몸을 돌렸다. 지금은 그 한마디에 붙잡혀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도화준의 심장 리듬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혈압은 더 떨어졌고, 흉관으로 빠져나오는 피의 양도 가볍지 않았다.
소포화도는 불안정했고, 모니터의 파형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압박 준비해요. 수혈 더 빨리 연결하고, 흉부외과 아직이에요?”
“교수님 내려오는 중입니다!”
“중간에 멈추면 안 돼요.
수술방 바로 열어달라고 다시 연락하세요.”
민영은 말을 짧게 잘랐다.
태겸이 도화준의 목동맥을 확인했다.
“맥박 약해. 거의 안 잡혀.”
“심폐소생술 들어가요.”
민영의 손이 도화준의 흉부 위로 올라갔다.
동료의 몸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스테이션에서
차트를 넘기던 사람. 퇴근하라고 말했는데, 괜찮다고 대답하던 사람.
하지만 지금 손바닥 아래에 있는 것은 살려야 할 환자의 흉부였다.
민영은 그 구분을 억지로 붙잡았다.
하나, 둘, 셋.
압박이 시작되자 도화준의 몸이 일정하게 흔들렸다.
갈비뼈가 이미 손상된 상태라 압박을 할 때마다 손끝에 끔찍한 감각이 전해졌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태겸은 옆에서 약물 투여 시간을 확인하고, 간호사는 수혈 라인을 교체했다.
응급실은 금방 하나의 몸처럼 움직였다.
피 묻은 장갑, 산소마스크 안쪽의 흐린 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독 솜, 빨라지는 발소리.
누군가는 도화준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 애썼고,
누군가는 끝내 한 번쯤 그 이름을 삼켰다.
민영은 압박을 이어가며 낮게 말했다.
“화준 선생님, 돌아와요.”
대답은 없었다.
“이렇게 죽지마요. 제발…”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민영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다.
평소라면 “버텨요”라고 했을 것이다. “여기 병원이에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이승’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말끝을 이상한 방향으로 밀었다.
태겸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를 보고 입술을 굳혔다. 그는 환자 이송팀을 따라가야 했지만, 잠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민영이 도진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그것이 태겸을 불안하게 했다.수술방 앞에서 보호자 설명을 마친 뒤, 민영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박성재의 아내는 젖은 케이크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구급대원이 챙겨준 것이라고 했다. 상자 옆면은 찌그러졌고, 리본은 피와 빗물로 젖어 있었다. 아내는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품에 안았다.“오늘… 딸 생일이라서요.”그녀는 울면서 말했다.“퇴근길에 사 온다고 했는데…”민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응급실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었다. 사람은 늘 평범한 일을 하다가 죽음에 닿는다. 케이크를 사러 가다가, 퇴근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죽음은 특별한 장면에서만 오지 않는다.그래서 더 잔인하다.“수술 들어갔습니다.”민영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상태가 많이 위중해요. 출혈이 컸고, 응급실에서 심장이 한 번 멈췄습니다. 그래도 지금 다시 뛰고 있고, 수술팀이 계속 보고 있습니다.”아내는 케이크 상자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살 수 있나요?”민영은 그 질문 앞에서 늘 같은 무게를 느꼈다.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것.그래도 말해야 하는 것.“지금은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어요.”그녀는 거짓말하지 않았다.“저희도 놓지 않을 겁니다.”아내는 무너져 울었다.민영은 잠시 그녀 곁에 있었다. 할 말은 많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도왔고, 물을 가져다주었고, 연락할 가족이 있는지 물었다. 설명이 끝나도 보호자를 바로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은 민영이 자신도 모르게 지켜온 습관이었다.응급실로 돌아왔을 때, 새벽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도진은 회복실에 있어야 했다.그러나 그는 응급실 한쪽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이번엔 간호사와 함께 있었다. 적어도 혼자 움직이지는 않았다. 민영은 다가
응급 개흉.그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모두가 떠올렸다. 흉부를 열고, 심장을 직접 압박하고, 출혈을 잡는 마지막 선택.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끝난다.민영은 환자의 얼굴을 보았다.딸.생일.젖은 케이크 상자.그녀는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준비해요.”태겸이 그녀를 봤다.“민영아.”“수술방 못 가면 여기서라도 해야 해.”외상외과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응급 개흉 준비합니다.”응급실이 다시 한 번 뒤집혔다.멸균포가 펼쳐지고, 기구가 준비되고, 추가 수혈이 연결됐다. 보호자들이 있던 쪽은 간호사들이 막았다. 누군가는 울음을 삼켰고, 누군가는 고개를 돌렸다. 응급실에서 생명을 붙잡는 장면은 때로 너무 잔인하다.도진은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이 몸은 움직이면 안 된다.하지만 저 환자는 가고 있다.그리고 민영은 그 앞에 서 있다.피 묻은 장갑을 낀 채, 두려움보다 먼저 손을 뻗는 사람.도진은 처음으로 그 장면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민영이 다칠까 봐서인지, 실패했을 때 그녀가 무너질까 봐서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슴 안쪽에서 심장이 너무 시끄럽게 뛰었다.태겸이 압박을 교대하며 외쳤다.“민영아, 네가 빠져. 외상외과가 들어왔어.”“나 보조할게.”“너 지금 손 떨려.”“안 떨어.”“떨고 있어...”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정말 떨리고 있었다. 환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화준 사고 때의 피 냄새가 다시 올라왔다. 고속도로, 흉부 손상, 수술방, 보호자에게 전할 말. 다 겹쳤다.그때 도진이 말했다.“민영 선생님.”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민영은 들었다.“손을 보십시오.”민영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봤다.떨리고 있었다.도진이 낮게 말했다.“숨을 한 번 쉬십시오.”민영은 그를 바라봤다.그 짧은 순간, 응급실 소음이 조금 멀어졌다. 도진의 눈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이 “지금 무너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
응급실 안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환자의 보호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급대원이 가져온 휴대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떠 있었다. ‘여보’라고 저장된 이름이 반복해서 울리고 있었다. 민영은 그 화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은 먼저 숨을 열어야 했다.“민영아, 복부 안에 피 있어.”태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초음파 화면 속 검은 액체가 보였다.민영은 망설이지 않았다.“외상외과 콜. 수술방 바로 준비해달라고 해요. 수혈 프로토콜 시작합니다.”그녀는 왼쪽 흉부 쪽으로 이동했다. 바늘 감압 준비가 끝났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움직임은 정확했다. 늑골 사이 위치를 확인하고, 소독하고, 바늘을 밀어 넣는 순간 공기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쉭~환자의 산소포화도가 조금 올랐다.“흉관 들어갑니다.”민영은 바로 다음 처치를 이어갔다. 절개, 기구, 튜브 삽입. 피 섞인 공기와 액체가 배액관으로 흘러나왔다.간호사가 양을 확인하며 소리쳤다.“초기 배액량 600 넘습니다!”태겸의 얼굴이 굳었다.“계속 나오면 수술방 가야 돼.”“어차피 복부 출혈도 있어. 바로 올려야 해.”민영은 환자 손목의 맥박을 확인했다.약하고 빨랐다.“박성재 씨, 들리면 눈 떠보세요. 지금 병원이에요. 저희가 보고 있어요.”환자의 눈꺼풀이 잠깐 떨렸다.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말했다.“…딸…”민영의 손이 멈칫했다.“따님이요?”환자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생일…”민영은 숨을 삼켰다.그 한마디가 응급실의 모든 소음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구급대원 가방 옆에 놓인 작은 종이 쇼핑백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비닐 안쪽으로 젖은 리본이 보였다.민영은 보지 않으려 했지만, 봐버렸다.케이크 상자였다.태겸도 그걸 봤다.“민영아.”“알아.”민영은 환자에게 다시 몸을 숙였다.“따님한테 가야죠. 그러니까 지금 버텨요.”환자의 눈가가 아주 희미하게 젖었다.그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피인지 알 수 없었다.모니터 알람이
민영은 돌아오지 않았다.도진은 당직실 의자에 앉은 채 복도 쪽을 보고 있었다. 민영이 남기고 간 컵라면은 불어 있었다. 뚜껑은 반쯤 열려 있었고, 국물 위로 식은 기름이 얇게 떠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웃으며 “다녀올게요”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방 안에는 아주 작은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형광등 아래 오래 방치된 음식 냄새와 식은 공기만 남아 있었다.복도 끝에서 들렸던 웃음소리는 사라졌다.그러나 도진은 그것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누군가 이 병원의 바깥쪽을 손끝으로 긁고 있다. 아직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한 기척. 도진은 그 불쾌한 감각을 따라가려다 멈췄다.약속했다.혼자 움직이지 않겠다고.그 말이 이렇게 몸을 묶을 줄은 몰랐다. 저승에서의 명령과는 달랐다. 명령은 지키거나 어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이상하게 사람의 얼굴을 함께 떠올리게 했다. 민영이 손목을 잡고 “이번엔 진짜 안 돼요”라고 말하던 얼굴. 태겸이 “너 또 움직이면 진짜 묶어버린다”고 하던 목소리.도진은 문밖으로 시선을 두었다.응급실 쪽 소음이 평소보다 거칠었다.침대 바퀴 소리, 간호사들의 뛰는 발소리, 보호자의 울음, 누군가 낮게 욕을 삼키는 소리. 그 사이에서 민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렷하고 빠르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게.“압박 준비해요. 기도 먼저 봐요.”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 손잡이를 잡았다.민영은 살아 있었다.다녀오겠다고 했으니 돌아올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순간, 응급실 전체를 찢는 호출음이 울렸다.트라우마 콜. 트라우마 콜. 응급센터 외상구역 준비 바랍니다.도진은 눈을 들었다.트라우마.도화준의 기억이 그 단어를 열었다. 대형 외상. 교통사고, 추락, 압궤 손상, 다발성 출혈. 한 생명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무너지는 순간. 응급실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가 다시 멈췄다.민영은 돌아오지
죽음의 냄새 때문은 아니다. 민영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오래 버텨 닳은 사람의 피로, 소독약, 커피, 그리고 살아 있는 환자를 끝까지 놓지 않는 이상한 온기.그는 그 온기가 낯설어서 보고 있었다.“확인하게 됩니다.”“뭘요?”“민영 선생님이 무너지지 않았는지.”민영은 숨을 멈췄다.그 말은 너무 조용했다. 꾸미거나 떠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저 안 무너져요.”“그건 모릅니다.”“왜요?”“무너지는 사람들도 대부분 직전까지 괜찮다고 합니다.”민영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말은 이상하게 정확했다.환자도, 보호자도, 의사도 그랬다. 괜찮다고 말하다가 무너진다. 버틸 수 있다고 말하다가 주저앉는다. 자신도 여러 번 그랬을 것이다. 다만 아무도 그 순간을 그렇게 똑바로 보지 않았을 뿐.도진은 그녀가 말이 없자 낮게 덧붙였다.“아까 태겸이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민영은 그제야 아주 작게 웃었다.“태겸이는 원래 잔소리가 많아요.”“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맞아요.”민영은 시선을 내렸다.“오래 같이 일했으니까요.”도진은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오래.’그 단어는 인간에게 무게가 있다.도진은 문득 자신에게는 그런 오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저승에서 보낸 시간은 길었지만, 누군가와 함께 쌓은 오래는 아니었다. 그는 지나가는 죽음을 봤고, 끝난 시간을 데려갔고, 남겨진 사람들의 울음을 스쳐 지나갔다. 머문 적은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멈춰 서 있었다.민영 앞에서.“화준 선생님.”민영이 조용히 불렀다.“네.”“진짜로 잠이 안 와요?”도진은 잠시 침묵했다.“잠드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민영의 눈빛이 흔들렸다.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도진의 얼굴은 너무 진지했다. 사고 후 불면, 불안, 통증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의 결이 달랐다.잠을 못 자는 사람이 아니라, 잠이라는 행위를 새로 배워야 하는 사람 같았
“너 말 잘한다.”“뭐가.”“죄책감은 나중에 와도 늦지 않다는 거.”민영은 잠시 멈췄다.“그냥… 지금 무너지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너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야.”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태겸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화준이 사고, 네 탓 아니야.”“그 얘기 또 하려고?”“할 때 됐으니까.”“나 진짜 괜찮아.”“그 금지어 들으면 나 이제 혈압 오른다.”민영은 아주 작게 웃었다.“그럼 혈압 재봐.”“장난치지 말고.”태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민영은 그제야 그를 제대로 봤다.태겸은 평소처럼 농담을 섞고 있었지만, 눈은 진지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이런 식으로 봤다. 너무 오래 버티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손이 떨리는지, 웃는 척하는지.그 시선은 익숙했다.그래서 때로는 더 피하고 싶었다.“알아.”민영은 조용히 말했다.“내 탓 아닌 거 알아.”“아는 얼굴이 아닌데.”“그래도 알아.”태겸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먹어.”“나 애 아니야.”“애보다 말을 안 들으니까.”민영은 초콜릿을 받아 들고 피곤하게 웃었다.그 순간 회복실 쪽에서 도진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민영은 웃음을 거두었다. 도진은 멀리서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투 같은 건 아니었다. 아직 그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리 없다.그런데도 그의 시선이 묘하게 걸렸다.태겸도 그걸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또 보고 있네.”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도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초콜릿, 짧은 농담, 걱정 섞인 말투를 보고 있었다. 인간의 관계는 복잡했다. 민영과 태겸은 서로를 오래 알고 있었다. 그 안에는 편함도 있고, 걱정도 있고, 말하지 않는 감정도 있어 보였다.도진은 그것을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낯설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다만 가슴 안쪽이 조금 조용하지 않았다.밤이 다시 내려앉았다.사실 병원 안에서는 낮과 밤의 구분이 희미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