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By:  데이지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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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서 사라지는 영혼을 추적하던 저승사자 강도진은 인간 세계에 내려왔다가 한서대학병원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도화준의 몸에 들어간다. 죽음을 데려와야 할 그는 응급실에서 사람을 살리며 처음으로 삶의 무게를 배우고,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곁을 지키는 민영에게 점점 마음을 내준다. 하지만 병원 안에서는 사라진 영혼과 정체불명의 ‘세 번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강도진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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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 죽은 남자

비가 억지로 도시를 눌러 앉히는 밤이었다.

한서대학병원 응급센터 유리문은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열렸다. 

젖은 우산을 든 보호자, 술 냄새를 풍기는 환자, 배를 움켜쥔 노인, 

아이를 안은 젊은 부부가 번갈아 들어왔고,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의 찬 비 냄새가 소독약 냄새와 뒤섞였다. 

응급실 안쪽에서는 모니터 알람이 끊이지 않았고, 

간호사 스테이션에는 식다 못해 거의 물이 된 커피 두 잔이 주인 없이 놓여 있었다.

도화준은 그 커피 중 하나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카페인 때문인지, 수면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 사망 선언을 끝낸 환자의 얼굴이 아직 눈앞에 남아 있어서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삼 일째 제대로 잔 시간이 없었다. 

낮에는 대형 교통사고 환자가 들어왔고, 밤에는 호흡곤란 환자와 흉통 환자가 연달아 밀려왔다. 

잠깐 앉으면 콜이 울렸고, 콜이 끝나면 차트가 쌓였다.

응급실은 사람을 조금씩 닳게 한다.

그걸 알면서도 도화준은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도 버티고 있었다.

“화준 선생님.”

옆에서 서민영이 차트를 넘기며 불렀다.

도화준은 고개를 들었다.

“네.”

민영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퇴근 찍었으면 진짜 가요. 여기서 또 차트 보고 있지 말고.”

도화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다봤다.

“이거 하나만 마저 쓰고요.”

“그 하나만이 보통 세 개로 늘어나잖아요.”

“이번엔 진짜 하나예요.”

민영은 믿지 않는 눈으로 그를 한 번 봤다. 

눈 밑이 피곤하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녀도 도화준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머리카락은 대충 묶여 있었고, 

가운 소매에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소독약 자국이 희미했다. 

그래도 환자 이름을 부를 때나 보호자를 볼 때의 목소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점이 도화준은 오래전부터 조금 신기했다.

지친 사람인데도, 끝까지 사람을 놓지 않는 느낌.

민영은 그를 보며 낮게 말했다.

“진짜 위험해 보여요. 운전해서 가는 거죠?”

“네. 집 멀지 않아요.”

“멀지 않아도 졸면 똑같아요.”

“알아요.”

“알면 바로 가요. 차트는 제가 확인할게요.”

도화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고맙다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응급실 사람들은 고마운 일을 너무 많이 주고받아서, 때로는 고맙다는 말이 더 어색해진다. 

민영도 그걸 아는지 더 재촉하지 않고 차트를 가져갔다.

“가요. 진짜.”

“네. 갈게요.”

도화준은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조금 휘청였다. 

민영이 그걸 봤는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택시 타요.”

“괜찮아요.”

“그 말 제일 못 믿겠는데.”

“정말 괜찮아요.”

민영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 응급실 입구 쪽에서 울린 호출음에 고개를 돌렸다. 

구급대원이 들어오고 있었다. 다시 일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더 붙잡지 못하고 짧게 말했다.

“도착하면 단톡에라도 남겨요.”

“네.”

“진짜요.”

도화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그게 그날 밤, 도화준이 서민영에게 한 마지막 대답이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비가 얼굴을 때렸다. 

새벽의 주차장은 형광등 불빛 아래 흐릿했고, 

바닥에는 물웅덩이가 불규칙하게 고여 있었다. 

도화준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차 안은 차갑고 조용했다. 

시동을 걸자 라디오가 자동으로 켜졌지만, 그는 바로 껐다.

고요해지자 피로가 더 선명해졌다.

핸들을 잡은 손이 무거웠다. 눈 안쪽이 뜨거웠다. 

민영의 말대로 택시를 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 오는 새벽 도로는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다.

차량은 많지 않았다. 대신 간간이 지나가는 트럭의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서 길게 찢어졌고, 

신호등 색은 물 위에 번진 잉크처럼 흔들렸다. 

도화준은 창문에 맺힌 빗물을 보지 않으려고 앞만 봤다. 

손목시계는 새벽 두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그는 한 번 하품을 삼켰다.

‘졸면 안 된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응급의학과 단체방이었다.

[서민영] 도착하면 확인 남겨요.

[차태겸] 야 도화준 졸지 마라. 죽으면 내일 당직표 꼬인다.

[서민영] 말 좀 예쁘게 해.

[차태겸] 살아서 도착하라는 뜻이잖아.

도화준은 신호 대기 중에 화면을 봤다.

피곤한데도 아주 작게 웃음이 새었다. 

태겸은 늘 그런 식이었다. 걱정도 장난처럼 했다. 

민영은 늘 그 장난을 받아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사람을 봤다.

도화준은 답장을 치려다 

신호가 바뀌자 휴대폰을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도착해서 보내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이 마지막으로 또렷한 생각이었다.

고속도로 진입로에 들어서자 비가 더 거세졌다.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였지만 앞유리는 금세 흐려졌다. 

차 안의 히터가 낮게 돌아갔고, 일정한 엔진 소리가 귀를 감쌌다. 

피로는 늘 이렇게 온다. 갑자기 덮치는 게 아니라,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주 조용히 몸을 끌어내린다.

도화준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면 안 됐다.

그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비 냄새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이 드는 듯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눈앞의 불빛이 다시 번졌다. 

멀리 앞서가던 화물트럭의 후미등이 두 개였다가 네 개로 보였다가 다시 두 개가 되었다.

‘졸지 마.’

민영의 말이 떠올랐다.

도화준은 핸들을 고쳐 잡았다.

그 순간,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던 화물트럭 하나가 크게 흔들렸다. 

빗길에 미끄러진 건지, 차체가 비정상적으로 틀어지더니 중앙분리대 쪽으로 밀려왔다. 

도화준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꺾었다.

타이어가 젖은 도로 위에서 비명을 질렀다.

시간이 갑자기 길어졌다.

헤드라이트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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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은 남자
비가 억지로 도시를 눌러 앉히는 밤이었다.한서대학병원 응급센터 유리문은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열렸다. 젖은 우산을 든 보호자, 술 냄새를 풍기는 환자, 배를 움켜쥔 노인, 아이를 안은 젊은 부부가 번갈아 들어왔고,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의 찬 비 냄새가 소독약 냄새와 뒤섞였다. 응급실 안쪽에서는 모니터 알람이 끊이지 않았고, 간호사 스테이션에는 식다 못해 거의 물이 된 커피 두 잔이 주인 없이 놓여 있었다.도화준은 그 커피 중 하나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카페인 때문인지, 수면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 사망 선언을 끝낸 환자의 얼굴이 아직 눈앞에 남아 있어서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삼 일째 제대로 잔 시간이 없었다. 낮에는 대형 교통사고 환자가 들어왔고, 밤에는 호흡곤란 환자와 흉통 환자가 연달아 밀려왔다. 잠깐 앉으면 콜이 울렸고, 콜이 끝나면 차트가 쌓였다.응급실은 사람을 조금씩 닳게 한다.그걸 알면서도 도화준은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도 버티고 있었다.“화준 선생님.”옆에서 서민영이 차트를 넘기며 불렀다.도화준은 고개를 들었다.“네.”민영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퇴근 찍었으면 진짜 가요. 여기서 또 차트 보고 있지 말고.”도화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다봤다.“이거 하나만 마저 쓰고요.”“그 하나만이 보통 세 개로 늘어나잖아요.”“이번엔 진짜 하나예요.”민영은 믿지 않는 눈으로 그를 한 번 봤다. 눈 밑이 피곤하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녀도 도화준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머리카락은 대충 묶여 있었고, 가운 소매에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소독약 자국이 희미했다. 그래도 환자 이름을 부를 때나 보호자를 볼 때의 목소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그 점이 도화준은 오래전부터 조금 신기했다.지친 사람인데도, 끝까지 사람을 놓지 않는 느낌.민영은 그를 보며 낮게 말했다.“진짜 위험해 보여요. 운전해서 가는 거죠?”“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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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 몸 조금만 빌리겠다
충돌음이 먼저인지, 몸이 튀어 오른 감각이 먼저인지 알 수 없었다.차가 옆으로 밀렸다. 가드레일이 찢어지는 소리, 유리가 터지는 소리, 금속이 접히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안전벨트가 가슴을 미친 듯 조였고, 에어백이 얼굴을 때렸다. 도화준의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혔다. 뜨거운 것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그리고 정적.다시 빗소리.도화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숨을 쉬려는데 가슴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둔하고 깊은 통증이 밀려왔고, 입안에는 피맛이 번졌다. 그는 자신이 응급실 의사라는 사실을 아주 멀리서 떠올렸다.늑골 골절 가능성. 흉강 안 출혈 가능성. 의식 저하. 쇼크. 머리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조수석 바닥 어딘가에서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단체방 알림인지, 누군가 전화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도화준은 손을 뻗으려 했다. 손가락이 조금 움직이다가 멈췄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했다. 빗물이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와 손등을 적셨다.춥다.그는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이상하게도 그 순간 응급실이 떠올랐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차트, 민영이 가져간 펜, 태겸이 장난스럽게 보낸 메시지. 보호자에게 내일 다시 설명하겠다고 한 말. 별것 아닌 것들이 마지막 남은 불빛처럼 떠올랐다.그리고 그 불빛마저 천천히 멀어졌다.그때 빗소리가 사라졌다.정확히는 세상이 아주 얇게 멈췄다.와이퍼는 중간에서 멈춰 있었고, 공중에 튄 빗방울들이 유리 조각 사이에 박힌 듯 떠 있었다. 멀리 보이던 비상등 불빛도 깜빡이다 만 채 정지해 있었다.도화준은 숨을 들이쉬지 못한 채 눈만 움직였다.누군가 사고 차량 앞에 서 있었다.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우산도 없었다. 그런데 비 한 방울 젖지 않았다. 남자는 찌그러진 차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운전석 쪽으로 다가왔다.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도화준은 그가 구조대원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남자는 깨진 창문 너머로 그를 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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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승사자
모니터 알람이 울렸다.삐삐삐삐—민영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자꾸 눈이 갔다. 퇴근길 조심하라고 했는데. 택시 타라고 했는데. 도착하면 연락 남기라고 했는데. 그런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그녀는 장갑 낀 손에 힘을 줬다.“화준 선생님, 들리면 눈 떠봐요.”대답은 없었다.태겸이 옆에서 낮게 말했다.“민영아, 흉관 내가 할게.”“아니. 내가 할게.”“너 손 떨고 있잖아.”민영은 자기 손을 보았다.정말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도화준을 보았다.“그럼 같이 해.”태겸은 더 말하지 않았다.흉관 삽입 준비가 빠르게 진행됐다. 소독, 절개, 기구, 튜브. 피가 흘러나오자 간호사가 배액량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았다. 민영의 턱이 굳었다.“수술방 준비됐어요?”“아직 연락 중입니다.”“빨리요.”도화준의 심박이 흔들렸다.태겸이 모니터를 보고 낮게 말했다.“민영아.”“알아.”둘은 동시에 움직였다.응급실의 빛이 차갑게 번졌다. 누군가는 피 묻은 거즈를 치웠고, 누군가는 수혈팩을 가져왔다. 민영은 환자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계속.“화준 선생님, 버텨요. 여기 병원이에요. 저희가 보고 있어요.”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이 막혔다.‘저희가 보고 있어요.’응급실에서 환자에게 자주 하는 말이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지금 붙잡고 있다고 알려주는 말. 그런데 이번에는 그 말이 너무 가까웠다.도화준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민영은 그걸 봤다.“움직였어.”태겸이 바로 확인했다.“의식 반응?”“화준 선생님, 들려요?”도화준의 눈꺼풀이 떨렸다.잠깐.정말 잠깐.그의 눈이 열렸다.민영은 숨을 멈췄다.눈빛이 달랐다.피와 통증에 흐려진 환자의 눈이어야 했다. 그런데 눈을 뜬 도화준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초점이 흐린데도, 어딘가 너무 차분했다. 응급실 천장과 의료진들, 자신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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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살아 있다는 두 단어
태겸이 압박을 교대했다.“내가 할게. 너 흉관 쪽 봐.”민영은 물러나며 숨을 골랐다. 팔이 무거웠고, 손끝이 떨렸다. 그러나 시선은 모니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리듬 체크.”압박이 잠시 멈췄다.모두가 모니터를 봤다.짧은 침묵. 태겸이 이를 악물었다.“돌아온다.”파형이 불안정하게 흔들렸지만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약했다. 그러나 있었다.“맥박 확인.”간호사가 도화준의 목을 짚었다.“잡혀요. 약하지만 잡힙니다.”민영은 바로 움직였다.“수술방으로 올려요. 지금 더 버티게만 하고 있을 상황 아니에요. 흉부외과 도착하면 바로 들어갑니다.”“보호자는요?”그 말에 응급실 안이 잠시 굳었다.도화준의 보호자.그의 어머니에게 연락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을 누가 설명해야 할까. 민영은 잠시 입술을 눌렀다. 태겸이 먼저 말했다.“내가 연락할게.”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부탁해.”태겸은 휴대폰을 들고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은 평소보다 조금 굳어 있었다. 장난처럼 말하고, 거칠게 걱정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동료가 침대 위에 누워 있고, 죽음과 몇 센티미터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민영은 도화준의 침대를 따라 움직였다.수술방으로 향하는 복도는 길었다. 바퀴가 젖은 바닥을 밀며 달렸고, 천장 형광등이 빠르게 지나갔다. 도화준의 얼굴은 산소마스크 아래에서 하얗게 식어 있었다. 피는 계속 빠져나왔고, 수혈은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매달렸다.민영은 침대 옆에서 그의 손끝을 보았다.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화준 선생님.”그녀가 작게 불렀다.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다만 그의 눈꺼풀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민영은 그걸 보며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환자의 반응이라면 좋은 신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 전 그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낯설고 차갑고, 도화준 같지 않았던 눈.수술방 문이 닫혔다.민영은 바깥에 남았다.정확히는 남겨졌다. 흉부외과 교수와 외상팀이 들어갔고, 응급의학과에서는 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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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 몸은 약하군요
한참 뒤, 수술방 문 위의 불이 꺼졌다.민영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도화준은 눈을 뜨지 않았다.수술은 끝났지만, 완전히 안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중환자실로 올라가기 전 회복실에서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 흉관은 유지됐고, 수혈도 계속 들어가고 있었다. 교수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태겸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운.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면서도 가장 자주 떠올리는 단어였다.민영은 회복실 밖에서 도화준을 바라봤다.그는 창백했다. 평소보다 훨씬 말라 보였다. 산소마스크와 라인들, 흉관, 모니터 선들이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응급실에서 늘 남의 몸에 붙이던 것들이 이제 그에게 붙어 있었다.태겸이 옆에서 낮게 말했다.“어머니 오시는 중이래.”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설명은?”“교수님이 하실 거고, 내가 옆에 있을게.”“응.”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회복실 안에서 모니터가 규칙적으로 울렸다.삐. 삐. 삐.그 소리가 이렇게 고마운 적이 있었나 싶었다.민영은 유리창 너머 도화준의 손을 보았다. 수술포 아래로 드러난 손끝. 피가 닦여 나간 손.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손은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라기엔 너무 하얗고 차가워 보였다.민영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아까 응급실에서 도화준의 손끝이 움직였을 때, 아주 짧게 닿았던 감각이 떠올랐다.차가웠다.사고 환자라서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출혈, 쇼크, 저체온.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그런데 왜 그 차가움이 단순한 체온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질까.“민영아.”태겸이 불렀다.“응.”“너 진짜 좀 쉬어. 얼굴이 환자보다 안 좋아.”민영은 희미하게 웃었다.“말이 심하다.”“사실이야.”“화준 선생님 깨어나는 것만 보고.”“그 말 할 줄 알았다.”태겸은 더 말리지 않았다.민영은 유리창 너머를 계속 봤다.도화준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런데 어느 순간, 회복실 조명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민영은 처음엔 눈이 피곤해서 그런 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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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깨어난 의사
도화준은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모니터의 파형은 불안정한 구간을 지나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고, 산소포화도도 위험선을 겨우 벗어났다. 흉관에서는 여전히 붉은 액체가 천천히 빠져나오고 있었지만, 수술 직후 상태를 감안하면 당장 다시 수술방으로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민영은 회복실 침대 옆에서 한참 동안 차트를 확인했다.수술 기록, 수혈량, 흉부 손상 부위, 늑골 골절, 폐 손상, 혈압 변화. 모든 기록은 현실적이었다. 교통사고 환자에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손상이었고, 사고 직후 의식 혼탁 상태에서 이상한 말을 하는 것도 설명은 가능했다.그런데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납득되는 것은 달랐다.민영은 펜 끝을 멈춘 채 도화준의 얼굴을 봤다.피를 닦아낸 얼굴은 더 낯설어 보였다. 평소의 도화준은 사람 좋은 쪽에 가까웠다. 피곤하면 말수가 줄었고, 긴장하면 괜히 펜을 만지작거렸고, 민영이 뭐라고 하면 대답은 짧게 하면서도 결국 그대로 했다. 그런데 방금 눈을 떴을 때의 그는 달랐다.서민영. 이름을 그렇게 부른 적은 없었다.차태겸. 동료의 이름을 확인하듯 부른 적도 없었다.‘이 몸은 약하군요.’‘살아 있는 몸은 이렇게 시끄럽나.’민영은 차트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고 후 섬망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저산소 상태와 쇼크, 마취 여파, 통증, 출혈. 원인은 충분했다. 그러니 이상한 말은 이상한 말로 두면 된다.그렇게 정리하려는 순간, 도화준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민영은 바로 몸을 숙였다.“화준 선생님.”대답은 없었다.그녀는 동공 반응을 확인하고, 맥박과 호흡을 봤다. 아직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움직임은 반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영은 손을 거두지 못했다. 손목에 닿는 피부는 여전히 차가웠다.너무 차가웠다.그때 회복실 커튼이 열렸다.태겸이 들어왔다. 손에는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이미 식었고, 다른 하나는 김이 조금 남아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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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죽음에서 돌아온 것처럼 서 있는 남자
구급대원들이 침대를 밀고 들어왔고, 환자의 흉부 위에서는 이미 가슴 압박이 이어지고 있었다. 보호자로 보이는 여자가 비에 젖은 외투를 입은 채 따라 들어오다 간호사에게 제지당했다. 그녀는 “아빠”라는 말만 반복하며 울고 있었다.민영은 장갑을 끼며 침대 옆으로 붙었다.“나이, 경과요!”“남자 62세. 집에서 갑자기 의식 잃고 쓰러졌습니다. 현장 도착 시 맥박 없었고, 심폐소생술 시작한 지 12분 됐습니다.”“기저질환?”“당뇨, 고혈압. 협심증 약 복용 중이라고 보호자가 말했습니다.”태겸이 모니터 패드를 붙였다.“리듬 확인.”압박이 잠시 멈췄다.모니터에는 심실세동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제세동 가능 리듬. 충전 200.”민영이 주변을 확인했다.“다들 떨어져요.”전기 충격이 환자의 몸을 흔들었다. 침대가 작게 밀렸고, 보호자는 유리문 바깥에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다시 압박.”태겸이 바로 압박을 시작했다. 민영은 약물 투여 시간을 확인하고, 기도 확보 상태를 봤다. 응급실은 다시 빠르게 호흡했다. 누군가는 혈관을 잡고, 누군가는 약물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그 와중에도 민영의 머릿속 한쪽에는 회복실의 도화준이 있었다.‘살아 있는 몸은 이렇게 시끄럽나.’그녀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환자 봐.’지금은 눈앞의 환자다.“리듬 다시 확인할게요.”압박이 멈췄다.심실세동은 여전했다.“한 번 더 갑니다. 충전 200.”두 번째 충격.환자의 몸이 다시 튀어 올랐다.모니터 파형은 흔들렸지만 안정되지 않았다.태겸이 이를 악물었다.“잘 안 돌아오네.”“압박 계속. 에피네프린 들어갔어요?”“네, 들어갔습니다.”민영은 환자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창백하고, 축축하고, 점점 죽음 쪽으로 기울고 있는 얼굴. 그녀는 환자에게 말을 걸었다.“들리시면 버티세요. 따님 밖에 있어요.”반응은 없었다.보호자의 울음이 유리문 너머에서 낮게 번졌다.그 순간 응급실 한쪽 자동문이 열렸다.민영은 반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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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는 고백
민영은 리듬을 기다렸다.몸이 지쳤는데도 머리는 이상하게 맑았다. 도화준의 말이 자꾸 귓가에 남았다.한 번 더. 지금 놓치면 안 됩니다.“리듬 체크.”태겸이 압박을 멈췄다.모니터가 흔들렸다.심실세동이 잠깐 거칠게 번지더니, 아주 미세하게 다른 파형이 끼어들었다.민영의 눈이 좁아졌다.“한 번 더 갑니다.”태겸이 바로 충전했다.“200.”“다들 떨어져요.”네 번째 충격.환자의 몸이 들렸다가 떨어졌다.몇 초. 모두가 모니터를 봤다.삐. 삐. 삐.느리지만 규칙적인 파형이 돌아왔다.간호사가 목동맥을 짚었다.“맥박 잡혀요!”응급실 안에 아주 짧은 안도가 퍼졌다. 민영은 곧바로 다음 처치로 넘어갔다.“혈압 확인하고, 심전도 다시 찍어요. 심장내과 콜하고, 중환자실 자리 확인하세요. 보호자분께는 제가 설명할게요.”태겸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도화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민영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화준 선생님, 지금 뭐 하는 거예요?”말투는 낮았고, 감정은 억눌려 있었다.도화준은 그녀를 보았다.그 시선은 여전히 낯설었다.“소리가 들렸습니다.”“무슨 소리요?”“멈추는 소리.”민영은 숨을 삼켰다.태겸이 뒤에서 다가왔다.“야. 너 지금 수술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걸어 나와. 진짜 죽고 싶어?”도화준은 태겸을 보았다.잠깐 멈췄다가, 마치 말을 고르듯 천천히 말했다.“…아니.”태겸의 표정이 굳었다.“뭐?”“죽고 싶지는 않다.”태겸은 어이없다는 듯 웃을 뻔하다가, 그 웃음을 삼켰다. 뭔가 이상했다. 말이 이상한 게 아니라, 말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이상했다. 도화준은 원래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민영은 도화준의 얼굴을 보았다.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입술은 창백했고, 수술 부위가 있는 쪽으로 가운이 살짝 젖어 있었다.“상처 봐야 해요. 지금 바로 돌아가요.”도화준은 응급실 안쪽을 한 번 더 봤다. 조금 전 살아난 환자의 침대 쪽이었다. 환자 위에 무언가가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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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말하면 달라집니까
태겸은 그녀의 침묵을 보고 더 굳어졌다.도화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 시선은 조용하고 차가웠다. 마치 둘의 관계, 말투, 거리감을 눈으로 익히는 것 같았다. 민영은 그 감각이 마음에 걸렸다. 도화준은 원래 사람을 이렇게 보지 않았다.“아프면 말해요.”민영이 말했다.도화준은 그녀의 손끝을 보았다.“아픕니다.”민영의 손이 멈췄다.태겸도 그를 봤다.너무 담담한 말이었다. 보통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은 표정이나 숨이 먼저 흔들린다. 도화준은 아프다는 사실을 보고하듯 말했다.민영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그럼 참지 말고 바로 말해요.”“말하면 달라집니까.”“네.”민영은 짧게 대답했다.“제가 덜 아프게 할 수 있어요.”도화준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그녀를 보았다.민영은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 눈은 이상하게 깊었다. 무언가를 처음 배우는 사람의 눈. 말하면 달라진다는 아주 사소한 사실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눈.그 시선 때문에 민영의 손끝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태겸이 둘 사이를 보다가 일부러 헛기침했다.“야. 환자랑 의사 눈싸움하냐?”민영은 바로 시선을 내렸다.“조용히 해.”“나 지금 분위기 이상해서 그래.”“드레싱 세트나 줘.”태겸은 투덜거리면서도 바로 건넸다.도화준은 그 짧은 대화를 보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태겸과 민영은 오래된 사람들처럼 말했다. 반말은 자연스러웠고, 걱정은 잔소리처럼 섞여 있었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닌 공기였다.그는 그 감각을 이름 붙이지 못했다.하지만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조용하지 않았다.새벽이 깊어지자 응급실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진짜 평온은 아니었다.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는 얇은 정적. 간호사들은 밀린 기록을 정리했고, 보호자들은 대기실 의자에 기대 잠시 눈을 붙였다. 방금 살아난 심정지 환자는 중환자실로 올라갔고, 도화준은 다시 회복실로 옮겨졌다.민영은 회복실 앞에서 마지막으로 모니터를 확인했다.태겸은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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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살아 있는 시체
병원 가장 낮은 층에서 울린 호출음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적어도 민영과 태겸에게는 그랬다. 회복실 안에는 여전히 모니터의 규칙적인 소리와 산소가 흐르는 낮은 마찰음만 있었다. 새벽은 병원을 아주 얇게 눌러두고 있었고, 창밖의 비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도화준은 그 소리를 들었다.짧고 차가운 소리. 살아 있는 환자를 부르는 호출음이 아니라, 죽은 자가 남긴 빈자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한서대학병원 지하 어딘가. 이 건물 가장 낮은 곳. 사람들이 쉽게 내려가지 않고, 불이 켜져 있어도 늘 온도가 다른 장소.도진은 그곳의 이름을 아직 완전히 알지 못했지만, 도화준의 기억이 곧 답을 건네주었다.영안실.그는 아주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이 몸은 숨을 쉬어야 했다. 심장은 계속 뛰었고, 폐는 공기를 요구했다. 통증은 선명했고, 수술 부위는 무겁게 욱신거렸다. 살아 있는 몸이라는 것은 불편할 정도로 많은 소리를 냈다.피가 흐르는 소리,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 갈비뼈 사이로 통증이 지나가는 소리, 피부가 체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소리.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화준 선생님.”민영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도진은 천천히 그녀를 보았다.민영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가운 소매는 살짝 접혀 있었고, 손에는 차트가 들려 있었다. 피로는 얼굴에 분명히 남아 있었지만,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환자를 보는 의사의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다만 그 눈 안쪽 어딘가에는 의학적 판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아주 작은 균열이 있었다.“어디 불편해요?”도진은 잠시 대답을 고르다 말했다.“불편한 곳은 많습니다.”민영의 손이 차트 위에서 멈췄다.“어디가 제일 아파요?”“가슴 안쪽.”“숨 쉴 때 더 아파요?”“예.”“그건 당연해요. 늑골 골절도 있고, 흉관도 들어가 있으니까요. 통증 조절 더 할게요.”민영은 간호사에게 약을 확인해달라고 짧게 말했다. 태겸은 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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