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제6장
호텔 연회장은 높은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손님들의 담소 사이를 부드럽게 흘러갔다.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과 값비싼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들은 마치 자신들의 세상이 언제나 완벽했던 것처럼 우아하게 웃으며 오갔다. 오로라는 그 모든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 동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리처드는 줄곧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 차분하게 그녀의 곁을 걸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리처드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여러 사람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리처드! 정말 오랜만이군.”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군요.”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리처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눴다. 오로라는 그의 옆에 서 있었지만 몸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그녀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죠?” 중년의 남성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오로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처드는 오로라를 힐끗 바라본 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제 약혼녀입니다.” 그 한마디에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오로라는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놀라는 사람도 있었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감추려 해도 숨기지 못하는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리처드 캘러웨이가 드디어 재혼을 결심했다니?” 한 여성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말 특별한 분인가 보네요.” 리처드는 부드럽게 오로라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물론이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제 곁에 설 수 없겠죠.” 오로라는 가슴이 답답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 자신은 뉴욕 사교계의 화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평범한 젊은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리처드 캘러웨이의 약혼녀가 되어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로라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연회장 반대편에서는 이선이 멀리서 그 모든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는 회사로 가기로 했지만 결국 이곳까지 오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리처드의 차를 따라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오로라가 리처드의 곁에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괴로웠다. 이선은 와인잔을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오늘의 오로라는 너무 아름다웠다.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순백의 드레스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그녀의 피부를 더욱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어깨를 따라 흐르는 긴 머리카락, 그리고 가끔 떠오르는 작은 미소는 오로라가 아직 자신의 연인이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이선의 턱이 단단히 굳었다. “정말 미치겠네...”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와인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이선?” 여성의 목소리에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빨간 밀착 드레스를 입은 바네사 칼턴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완벽하게 손질된 금발과 짙은 붉은 립스틱이 눈길을 끌었다. 그녀의 시선도 곧 리처드와 오로라에게 향했다. 바네사는 옅게 웃었다. “내가 잘못 본 거야? 네 아버지가 너보다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자를 데리고 다니네?” 이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 “리처드는 정말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야.” 그녀는 몇 초 동안 오로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 광경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바네사는 오랫동안 리처드의 곁을 맴돌아 온 여자였다. 그녀가 리처드에게 집착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의 부와 권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리처드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네사는 더욱 그를 원했다. 리처드는 모델과 배우, 사교계 명사 등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 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바네사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자신보다 훨씬 어린 오로라가 나타났다. 사교계 출신도 아닌 평범한 여자였다. 바네사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곧장 오로라에게 다가갔다. 리처드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혼자 서 있던 오로라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렸다. “오로라 맞죠?” 오로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네사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난 바네사예요.” “정말 예쁘네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리처드가 관심을 가질 만도 하죠.” 오로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바네사는 웨이터에게서 샴페인 한 잔을 받아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리처드는 원래 금방 싫증을 내는 사람이에요.” 오로라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죠?” 바네사는 웃음을 흘렸다. “에이, 설마 모르세요? 리처드의 나쁜 버릇은 다들 아는데.” 오로라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죠.” 그녀는 샴페인 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손가락으로 쓸었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아요.” 오로라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 바네사는 자신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당신에게 푹 빠져 있을 수도 있겠죠.” 바네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질리면? 글쎄요... 누가 알겠어요?” 오로라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관계가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자신에게 흥미를 느껴 데려왔고, 자신은 가족을 위해 돈이 필요해서 받아들였다. 이 관계는 명백한 거래였다. 그것뿐이었다. 오로라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켜보면 되겠네요.” 바네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모욕을 당한 여자치고는 오로라가 너무나 침착했기 때문이다. 한편 멀리서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보던 이선은 턱을 굳게 다물었다. 왜 자꾸만 오로라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리처드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볼수록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몇 분 뒤 리처드가 다시 오로라에게 다가왔다. “여기 있었군.” 오로라는 곧장 몸을 돌렸다. 리처드는 바네사를 힐끗 바라본 뒤 다시 오로라를 향해 말했다. “춤추실래요?” 오로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지금요?” 리처드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거절할 생각이 아니라면.” 오로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리처드가 오로라를 연회장 중앙으로 이끄는 모습을 본 순간, 이선의 감정은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음악은 한층 느려졌다. 리처드는 한 손을 오로라의 허리에 올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오로라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마치 아주 소중하고 연약한 것을 다루듯 천천히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선은 그런 광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바네사도 그의 곁에서 두 사람의 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처드가 어떤 여자에게 저렇게 대하는 건 처음 봐요.” 그 말에 이선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바네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늘의 리처드는 분명 달랐다. 그 사실이 이선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질투하고 있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차갑게 말한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바네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연회장을 벗어났다. 더 이상 오로라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필 그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한 시간 뒤. 이선은 맨해튼의 한 고급 클럽에서 술병이 가득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이 클럽을 울렸고,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아무 걱정도 없는 듯 웃고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 어떤 것도 즐길 수 없었다. 그는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채 소파에 몸을 기댔다. 술기운과 억눌린 감정 때문에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선, 괜찮아?” 친구 한 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선은 피식 웃으며 다시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괜찮냐고?” 그는 낮게 되물었다. “그래... 괜찮아.” 그리고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머리는 점점 무거워졌지만 오로라의 모습만은 더욱 선명해졌다. “젠장...”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친구는 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선, 이제 그만 마셔.” 하지만 이선은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 “로리...”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오로라가 자신을 떠난 지난 1년 동안, 그녀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라!” 그가 갑자기 소리치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이선은 눈가를 붉힌 채 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왜... 하필 내 새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이내 그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술에 취한 그 순간에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로리...”제129장 (최종장)일 파라디소 로비에 감돌던 위스키 잔향과 팽팽한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어색한 정적이 채웠다. 루나—아니, 오로라는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붉은 벨벳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애수 어린 그녀의 두 눈은 리처드의 팔에 여전히 올려져 있는 바네사의 손을 직시했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통증과 함께 고집스러운 질투심이 불길처럼 치밀어 올랐다.앞에 선 여자의 몸이 경련하듯 굳어지는 것을 감지한 리처드는 차가우면서도 단호한 동작으로 자신의 팔을 쥐고 있던 바네사의 손을 느슨하게 풀어냈다. 그는 아까부터 자신의 직감을 집요하게 자극하던 확신을 확인하려는 듯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리처드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주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패닉에 빠진 루비가 루나의 손목을 불쑥 낚아챘다."루나, 당장 뒷문으로 나가자! 니콜라스 오빠가 우리를 데리러 보디가드 팀을 보냈을 거야!" 루비는 거의 친구를 소파에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하며 외쳤다.자신의 비밀이 폭로될까 봐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인 오로라는 즉시 몸을 돌려 루비의 이끌림을 따라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끌리는 적포도주색 드레스 자락과 서두르는 발걸음이 얽히면서, 그녀는 미끄러운 로비 복도의 시야를 놓치고 말았다.쿵!뒷골목으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려던 바로 그 순간, 루나의 날씬한 몸이 관리사무실 방향에서 막 걸어 나오던 한 남자의 넓은 가슴에 세게 부딪혔다. 제법 강했던 충격 탓에 오로라는 균형을 잃고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남자의 단단한 두 손이 잽싸게 앞으로 뻗어 나와,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루나의 가는 허리를 잡아채어 받쳐주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반사 신경 탓에, 루나의 머리 뒤에 매여 있던 가면 끈이 남자의 양복 소매 버튼에 걸려버리고 말았다.툭.은색 자수가 놓인 상아빛 베네치아 가면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 챙그랑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어스름한 로비
제128장새틴 셔츠를 입은 남자가 배경 기둥 근처로 구석에 몰린 루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루나의 매끄럽고 땀에 젖은 목덜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광기 어리게 번뜩였다. "이 바보 같은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 좀 볼까, 예쁜이?"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더러운 손가락을 뻗어 루나의 목 피부 표면에 닿으려 했다.루나는 극심한 두려움의 눈물을 참아내며 두 눈을 감았고,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떨렸다. '하느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퍽!묵직하고 거친 주먹 하나가 갑자기 새틴 셔츠를 입은 남자의 턱에 정확히 꽂히며 끔찍한 뼈 소리를 냈다. 취한 남자의 몸은 붕 떠올라 무대 바닥 위로 나뒹굴었고, 몇 개의 술병을 끌고 가 산산조각 내며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루나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는 억센 체구의 남자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슴을 위아래로 크게 헐떡이고 서 있었다. 리처드 캘러웨이는 여전히 단단히 쥔 주먹을 든 채, 굶주린 짐승처럼 덤벼들던 주변의 남자들을 향해 서슬 푸른 눈빛을 쏘아보고 있었다."누구든 저 아이에게 다시 손을 대는 놈은, 평생 그 손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리처드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바리톤 목소리가 치명적인 지배자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번개처럼 울려 퍼지자, 다른 취객들은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무대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본 루비는 즉시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요! 잘하셨어요, 기사님!" 루비가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며 외쳤다.한편, 루나라는 신분 뒤에 숨어 있던 오로라는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불과 몇 인치 앞에 있는 리처드의 단단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마치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가슴속을 채웠던 패닉은 이제 다른 종류의 두려움으로 바뀌어 요동쳤다. 한때 자신의 몸을 차지했던 이 중년의 남자에게 자신의 위장이 파헤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리처드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루나에게 다가섰다. 여자가 피할 겨를도
제127장단 하나의 사파이어빛 조명이 천장에서 내리꽂히며 메인 홀의 어둠을 가르고, 무대 중앙에 서 있는 루나의 날씬한 실루엣에 꽂혔다. 바이올린 연주곡의 선율이 하프 튕기는 소리와 섞여 천천히 흘러나오며, 신비로우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루나는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체형을 감싼 적포도주색 실크 드레스가 유연하게 나부꼈고, 허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냈다. 밤바람에 놀아나는 한 송이 깃털처럼, 회전하고 튀어 오르는 그녀의 발놀림은 지극히 가벼웠다. 허공을 그리는 길쭉한 손가락의 움직임은 신비로운 무용수의 매혹에 완전히 매료된 수백 쌍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의 시끄러운 수군거림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숨이 막힐 듯한 열정과 감탄이 섞인 시선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하지만 그 마법은 VIP석 맨 앞줄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선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은 무대를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완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용수의 날렵한 움직임은 서서히 아득해졌고, 그 자리를 뉴욕의 가랑비 속에서 애교 있게 웃던 오로라의 잔상이 채웠다. 빌어먹을, 가슴을 짓누르는 이 답답함은 오히려 가슴을 더욱 강하게 죄어왔다.바로 옆에 앉은 리처드 역시 같은 표정의 일렁임을 내비치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위스키 잔을 세게 쥐고 있었다. 가면을 쓴 무용수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상하기는커녕, 리처드의 눈에는 저택에서 오로라와 보냈던 마지막 밤의 잔상이 투영되고 있었다. 떠나기 전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저택의 온기를 모조리 빼앗아가 버린 그날 밤이. 오로라라는 이름은 두 캘러웨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저주처럼 울려 퍼졌다.관객석 뒷줄에서는 니콜라스의 양복 주머니 속에 든 전화기가 강렬하게 진동했다. 27세의 남자는 기기를 꺼내 들었고, 화면에 떠오른 수석 비서의 이름을 확인하
제126장오로라는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가면 뒤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가슴을 막아서는 고통을 내뱉은 뒤, 몸을 돌려 탈의실을 향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양심을 계속해서 갉아먹는 과거의 죄악에 짓눌려, 걸음을 옮기는 매 인치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한때 이선과 나누었던 금지된 관계, 그리고 리처드의 오만함 앞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야 했던 기억은 그녀가 돌아갈 자격을 박탈하는 두꺼운 벽이 되어버렸다. 소란스러운 머릿속에서 그 현실이 계속해서 맴돌며, 멀리 떠나 있는 것만이 모두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되새겨주었다.한편, 여전히 긴장의 잔재가 감도는 로비 구석에서 오드리는 손가락에 쥐어진 손수건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녀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는 이선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자의 시선을 파괴적인 과거의 소용돌이로부터 돌리려 애썼다."이선 씨,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시고요." 오드리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는 상사의 단단한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오늘 밤 메인 홀에서 특별 무용 공연이 있어요. 자, 안으로 들어가서 관람해요. 머릿속의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잊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이선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꽉 다물어진 입술 틈새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오드리. 오늘 밤은 머릿속이 너무 가득 차서 그 어떤 것도 즐길 수가 없을 것 같아." 이선이 쉴 대로 쉰 헛헛한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머릿속이 가득 차 있으니까 더더욱 비워내셔야죠." 오드리가 정성스러운 손길로 이선의 눈가에 남아 있던 축축함을 다시 한번 닦아주며 채근했다. "어서요, 적어도 이선 씨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해요."이선이 오드리의 청을 따라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 순간, 클럽 일 파라디소(Il Paradiso) 로비의 유리문이 다시 한번 요란하게 딸랑거렸다. 정장 차림의 검은색 맞춤 양복을 입은 억센 실루엣이 압도적인 지배의 아우
제125장루나의 급한 발걸음이 적포도주색 실크 드레스와 부딪히며 미세한 마찰음을 냈고, 일 파라디소(Il Paradiso) 로비의 어스름한 정적을 갈랐다. 그녀는 고개를 최대한 깊이 숙이고 두 팔을 몸 옆에 바짝 붙인 채, 소파 구석에 앉은 매의 눈을 가진 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기만을 가슴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이선이 앉아 있는 벨벳 소파의 그림자 경계선을 루나의 구두 뒤꿈치가 막 지나는 순간, 캘러웨이 가문의 청년이 갑자기 허리를 바짝 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어쩌면 지극히 짙게 얽힌 기억의 실타래거나, 공기 중에 남아 있던 익숙하고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이선의 중추신경을 강렬하게 자극했다."잠깐만!" 이선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쉴 대로 쉬었지만, 안쪽 방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의 쿵쾅거리는 비트를 뚫고 나갈 만큼 강렬했다.쿵.루나에게는 세상이 회전을 멈춘 것만 같았다. 두 다리의 모든 관절이 마치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시멘트로 고정된 것처럼 순간 얼어붙었다. 심장이 너무나 미친 듯이 뛰어서, 극심한 패닉의 충격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이선은 탁자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음료 잔을 무시한 채 신속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폭이 넓고 가파른 그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며, 둘 사이의 거리를 1미터도 채 남지 않을 때까지 좁혀왔다. 남자는 호흡을 불규칙하게 몰아쉬며 제 앞에 서 있는 자그마한 뒷모습의 실루엣을 똑바로 응시했다."오로라...?" 이선이 소름 끼칠 정도로 격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음성에는 솟구치는 불신과 함께 짙은 그리움이 넘쳐흘렀다.루나는 상아색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두 눈을 감겼다. 패닉에 빠진 신음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그녀의 턱이 꽉 다물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얼굴 상반신이 은색 브로케이드 조각 가면으로 촘촘히 가려져 있는데도, 어떻게 이 남자는 단 한 번 지나치는 것만으로 자신을 알아볼
제125장루나의 급한 발걸음이 적포도주색 실크 드레스와 부딪히며 미세한 마찰음을 냈고, 일 파라디소(Il Paradiso) 로비의 어스름한 정적을 갈랐다. 그녀는 고개를 최대한 깊이 숙이고 두 팔을 몸 옆에 바짝 붙인 채, 소파 구석에 앉은 매의 눈을 가진 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기만을 가슴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이선이 앉아 있는 벨벳 소파의 그림자 경계선을 루나의 구두 뒤꿈치가 막 지나는 순간, 캘러웨이 가문의 청년이 갑자기 허리를 바짝 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어쩌면 지극히 짙게 얽힌 기억의 실타래거나, 공기 중에 남아 있던 익숙하고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이선의 중추신경을 강렬하게 자극했다."잠깐만!" 이선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쉴 대로 쉬었지만, 안쪽 방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의 쿵쾅거리는 비트를 뚫고 나갈 만큼 강렬했다.쿵.루나에게는 세상이 회전을 멈춘 것만 같았다. 두 다리의 모든 관절이 마치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시멘트로 고정된 것처럼 순간 얼어붙었다. 심장이 너무나 미친 듯이 뛰어서, 극심한 패닉의 충격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이선은 탁자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음료 잔을 무시한 채 신속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폭이 넓고 가파른 그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며, 둘 사이의 거리를 1미터도 채 남지 않을 때까지 좁혀왔다. 남자는 호흡을 불규칙하게 몰아쉬며 제 앞에 서 있는 자그마한 뒷모습의 실루엣을 똑바로 응시했다."오로라...?" 이선이 소름 끼칠 정도로 격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음성에는 솟구치는 불신과 함께 짙은 그리움이 넘쳐흘렀다.루나는 상아색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두 눈을 감겼다. 패닉에 빠진 신음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그녀의 턱이 꽉 다물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얼굴 상반신이 은색 브로케이드 조각 가면으로 촘촘히 가려져 있는데도, 어떻게 이 남자는 단 한 번 지나치는 것만으로 자신을 알아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