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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돌아온 견적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43:41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여기 있습니다.”

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

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

아버지 회사.

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

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

「묻지 말자.」

“한 대리.”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

“파일 드리겠습니다.”

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

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

“네.”

묻지는 않았다.

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

◇

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

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

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왔어?”

“응. 포장 비용까지.”

“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

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

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제품 단가에 포함됐다.

뚜껑 단품 포장 항목에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개별 상자 대신 보호 덮개와 종이 띠를 쓰는 조건이었다.

서윤은 첨부 사진을 확대했다. 얇은 덮개가 뚜껑 모서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 위로 두른 종이 띠 앞뒤에 규격과 제품 정보가 나뉘어 들어갔다.

“상자를 빼야 맞는다는 거네.”

민재가 말했다.

“그대로 바꾸면 안 돼. 운송 중에 휘는지 확인해야 해.”

서윤은 제조사에 전화를 걸었다.

“단품 포장 변경안 봤습니다. 보호 덮개는 뚜껑 전체를 받치는 겁니까?”

“네. 가장자리만 감싸는 게 아니라 뒤쪽까지 받칩니다.”

“종이 띠가 젖으면 규격 표시가 지워지지는 않고요?”

“겉면 처리를 포함한 견적입니다. 포장 업체에서 샘플을 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샘플은 저희 쪽에도 보내 주세요. 출고용 합포장 조건도 같이요.”

담당자가 잠깐 말을 멈췄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배송 상자와 완충재 비용은 별도로 적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단품 포장 단가는 확정이고, 포장 성능은 샘플로 확인하는 조건이죠?”

“맞습니다.”

서윤은 견적서 옆에 짧게 적었다.

확정된 비용과 남은 확인 항목을 나눴다.

민재가 의자를 조금 당겼다.

“내가 판매 쪽 비용 붙일게. 기존 자료 쓰면 되지?”

“응. 완성품하고 교체 뚜껑 나눠서.”

“한 표로 합치면 안 돼?”

“뚜껑이 많이 팔린다고 가정하면 완성품 손익이 좋아 보일 수 있어.”

민재는 열어 둔 표를 복사했다.

“그럼 뚜껑은 뚜껑대로 버틸 수 있는지 보자.”

서윤은 지난 브리핑 자료를 옆 화면에 띄웠다.

소량 생산 원가와 뚜껑 단품 포장 비용. 확인 중이던 항목을 새 견적서와 대조했다. 단위를 맞추고, 금형 수정 비용은 개당 단가에서 뺐다.

민재가 계산을 마친 표를 보냈다.

“완성품 기본 구성은 공급가 9,000원. 생산이랑 포장, 판매 관련 비용까지 6,500원.”

“남는 건 2,500원.”

“뚜껑은 공급가 2,000원에 비용 1,400원. 600원 남고.”

서윤은 뚜껑 쪽 표를 내려 봤다.

개별 상자를 유지한 안도 있었다. 작은 상자라도 최소 주문 수량을 맞추면 포장재가 많이 남았다.

“배송비는?”

“낱개 주문은 별도 부담 조건이야. 무료 배송으로 바뀌면 다시 계산해야 해.”

“그 조건도 표에 써 줘. 합배송하고 낱개 배송을 같이 보지 않게.”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금형 수정 비용 200만 원을 초기 비용 칸에 넣었다. 완성품에서 남는 금액으로만 나누면 800세트였다.

“이건 손익분기라고 쓰지 말자.”

민재가 손을 멈췄다.

“다른 비용이 더 있으니까?”

“응. 금형 수정 비용 회수 수량으로. 반품이 생기면 달라지고.”

“알겠어.”

숫자 아래에 조건이 붙었다.

교체 뚜껑의 판매 수량은 넣지 않았다. 문의는 있었지만 주문은 없었다. 서윤은 그 자리에 ‘실제 주문 없음’이라고 적었다.

◇

후배 직원이 출력물 몇 장을 들고 서윤의 책상 앞에 섰다.

“대리님, 포장 사진을 보니까요.”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부분?”

“띠를 뜯으면 규격 표시도 없어지는 것 같아서요. 고객이 버리고 나면 뚜껑만 남잖아요.”

후배가 사진 한쪽을 가리켰다.

서윤은 화면을 다시 봤다. 제품 정보가 적힌 종이 띠가 뚜껑 가장자리를 가리고 있었다.

“좋은 지적이야.”

“제가 포장을 잘 몰라서 틀릴 수도 있는데…….”

“포장을 보고 고객이 쓰는 순간까지 생각한 거잖아.”

서윤은 요청서에 항목을 보탰다.

“뚜껑 자체의 규격 표시를 가리지 않는 위치로 띠를 옮겨 달라고 할게. 표시 크기도 같이 확인하고.”

후배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손끝으로 잡았던 곳에 구겨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건 고객 문의 정리한 겁니다. 포장 때문에 문의한 건 따로 표시했어요.”

“고마워. 원본 위치도 알려 줄래?”

“네. 바로 보내겠습니다.”

후배가 돌아가자 민재가 작게 말했다.

“말할까 말까 한참 서 있더라.”

서윤은 요청서에 자료를 보탠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먼저 물어볼걸.”

“방금은 잘 말했잖아.”

민재는 서윤 책상 위에 물병을 놓았다.

“너도 좀 마셔. 아침부터 전화만 했어.”

서윤은 뚜껑을 돌려 열었다. 그동안 민재가 바뀐 포장 조건을 표에 넣었다.

사라진 빈칸을 보며 서윤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

박 팀장은 비교표를 오래 들여다봤다.

소량 출시안에는 확인된 비용이, 확대 출시안에는 재고와 추가 포장 주문 부담까지 들어갔다.

“이 정도면 소량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거지?”

“현재 견적 조건으로는 가능합니다. 포장 성능 확인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사장님하고 다녀오니까 얘기가 빨라지네.”

박 팀장이 넥타이 매듭을 고쳤다.

“우리끼리 갔으면 제조사가 이렇게 맞춰 줬겠어?”

서윤은 출장 승인서를 앞으로 밀었다.

“시험 범위는 출발 전에 승인받았습니다.”

“그건 아는데.”

“추가 수정도 비용과 작업 범위를 적고 진행했습니다. 대표님 동행을 조건으로 받은 단가는 없습니다.”

박 팀장이 서윤을 봤다.

서윤은 승인서 옆에 시험 결과표를 놓았다.

“실패한 샘플과 다시 수정한 샘플입니다. 단가가 바뀐 건 몸체 금형을 유지하고 체결부만 수정했기 때문이고요.”

“한 대리, 내가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네. 그래서 문서로 먼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성과 보고에도 같은 근거가 들어가야 하니까요.”

박 팀장이 첫 장을 넘겼다. 민재가 말없이 견적 비교표를 그 옆에 맞춰 놓았다.

잠시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났다.

“알았어. 출장 성과가 아니라 시험 결과하고 비용 변경으로 정리하지.”

“네.”

“그런데 이 수치면 팀 통합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서윤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계산이 맞는 것과 제품이 팔리는 것은 달랐다. 첫 브리핑에서 도현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듣던 도현의 시선도 기억났다. 서윤은 자료 쪽으로 눈을 내렸다.

“팔리기 전까지는 예상 손익입니다.”

박 팀장의 손이 다시 넥타이로 올라갔다.

“회의에서 너무 그것만 강조하지는 말고.”

서윤은 자료를 모았다.

“확인된 것부터 설명하겠습니다.”

◇

오후 회의는 6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도현은 테이블 끝에 앉아 자료를 읽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재무팀과 경영기획 담당자가 자리했다. 투자사 검토 담당자는 노트북을 열어 두고 있었다.

서윤은 박 팀장 옆에 앉았다.

자료를 내려놓으며 도현을 봤다. 고개를 숙인 탓에 눈은 보이지 않았다. 종이를 누른 손과 소매 끝만 보였다.

차 안에서 파일을 건네던 손이었다.

서윤은 의자에 등을 붙였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거리가 오히려 편해야 했다.

「자료만 보자.」

도현의 시선은 첫 장에 머물러 있었다.

“변경된 원가부터 설명해 주세요.”

서윤은 견적서를 펼쳤다.

“완성품과 교체 뚜껑의 손익을 분리했습니다. 완성품은 소량 생산 조건에서도 변동비를 충당할 수 있습니다. 교체 뚜껑은 개별 상자를 유지하면 포장 최소 주문 수량에 따른 부담이 큽니다.”

“포장을 바꾸면 해소됩니까?”

재무팀 담당자가 물었다.

“단가는 낮아집니다. 다만 샘플로 운송 중 변형과 표시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뚜껑 판매량은 왜 안 잡았습니까?”

“고객 문의를 실제 주문으로 볼 수 없어서 제외했습니다.”

담당자가 표를 다시 봤다.

“그럼 초기 비용은 완성품 판매로 회수하는 안이군요.”

“네. 교체 뚜껑 매출은 회수 계획에 넣지 않았습니다.”

도현이 펜으로 시험 결과표를 짚었다.

“기존 몸체를 유지한 이유도 말씀해 주세요.”

서윤의 눈이 펜 끝을 따라갔다. 도현이 짚은 곳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공용 뚜껑의 규격을 유지하면서 초기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샘플은 맞물리는 깊이가 줄어 낙하 때 열렸습니다. 깊이를 회복한 뒤에는 여는 힘이 너무 높았습니다.”

서윤은 다음 장을 넘겼다.

“깊이는 유지하고 잠금부 위치를 옮겼습니다. 수정 샘플은 낙하와 개폐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투자사 담당자가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시험용 샘플 결과로 양산까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시험 생산에서 같은 조건이 유지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도현이 입을 열었다.

“한 대리가 현장에서 선택한 것도 그 이유였습니다. 쉽게 열리게 하려고 맞물리는 깊이를 줄이는 대신, 깊이를 유지하고 열리는 순서를 바꿨습니다.”

서윤의 손이 종이 모서리에서 멈췄다.

공장에서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윤이 설명할 때도 이렇게 듣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조금 들었다. 도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성능 확인과 수익성 검토는 구분돼 있습니다. 견적이 나왔다는 이유로 품질 확인을 생략하지는 않겠습니다.”

도현은 투자사 담당자를 향해 말했다.

서윤 쪽을 보지는 않았다. 자료를 넘기고, 질문을 듣고, 답을 적었다. 점심 그릇의 받침을 옮기던 손이 지금은 펜만 쥐고 있었다.

서윤은 종이 모서리를 반듯하게 폈다. 눌러 편 곳을 손끝으로 한 번 더 쓸었다.

그렇게 일하는 편이 맞았다. 서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고개를 들고 싶어졌다. 눈이 마주치기를 바라는 건지, 마주치지 않아서 신경이 쓰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자꾸 보게 돼.」

서윤은 펜을 쥐었다. 도현이 말을 마친 뒤에도 낮은 목소리가 귀에 남았다.

박 팀장이 말을 보탰다.

“기존 금형을 쓰면 중단 시 손실도 이전 안보다 줄어듭니다.”

“그 비교는 검토하겠습니다.”

투자사 담당자는 짧게 답했다.

도현이 회의 자료를 덮었다.

“확정 비용은 오늘 기준으로 반영하고, 남은 검증 항목은 별도 일정으로 제출해 주세요.”

“네.”

서윤은 펜 뚜껑을 닫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손가락 끝이 조금 눌려 있었다.

◇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씩 나갔다.

박 팀장은 경영기획 담당자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서윤은 테이블 위에 남은 견적서를 챙겼다.

투자사 검토 담당자가 노트북을 닫으며 서윤을 불렀다.

“한 대리님.”

“네.”

“오늘 자료는 잘 봤습니다. 비용을 확인한 건 의미가 있습니다.”

서윤은 파일을 가슴 앞에 들었다.

“다만 조직 검토 일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담당자는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실제 매출로 수익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팀 통합은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문 앞에 서 있던 도현이 걸음을 멈췄다.

“출시 전 검증 자료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서윤은 파일 끝을 눌렀다. 도현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멈췄다.

“검토하겠습니다. 다만 구매 의향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서윤은 도현을 보지 않고 담당자에게 물었다.

“판단 기준을 문서로 받을 수 있을까요?”

“경영기획 쪽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비용 자료에 보완할 항목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나갔다.

서윤은 파일을 내려다봤다. 확인 중이던 칸에는 이제 숫자가 있었다. 그다음 칸에는 아직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다.

파일을 가슴에서 조금 떼었다. 짧게 들이쉰 숨을 내쉬었다.

도현이 문에서 한 걸음 비켜섰다.

“한 대리.”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시선이 파일을 쥔 손에 닿았다가 올라왔다. 서윤은 그제야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회의 내내 마주치지 않던 눈이었다. 이제는 먼저 피하기가 어려웠다.

도현은 잠깐 서윤을 보고 말했다.

“오늘 확인한 비용은 판단 근거로 남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서윤은 파일 가장자리를 엄지로 쓸었다. 대답하기 전에 숨부터 골랐다.

“네. 판매를 확인할 방법도 찾겠습니다.”

도현을 지나 문으로 향했다. 좁아진 거리는 잠깐이었다. 서윤은 파일을 몸 쪽으로 당겼다. 도현의 소매에 닿지 않게 팔을 붙였다.

도현은 비켜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은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온 뒤에야 파일을 조금 내렸다.

4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휴대전화가 울렸다. 경영기획 담당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첫 줄을 확인한 서윤의 손이 엘리베이터 버튼 앞에서 멈췄다.

「고객 설문만으로는 검토 기간을 연장할 수 없습니다.」

(1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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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1화. 돌아온 견적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0화. 남아 있는 습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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