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윤은 마지막 표의 단위를 고쳤다.
원과 천 원이 한 페이지 안에 섞여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숫자를 다시 확인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민재였다.
[아직 회사야?]
서윤은 짧게 답했다.
[이제 가.]
[내일 보자. 뭐라도 먹고 자.]
모니터를 껐다. 검은 화면에 얼굴이 비쳤다. 입술을 너무 세게 다물고 있었다.
서윤은 입술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어제 들었던 목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가방을 챙기다 책상 한쪽의 메모를 봤다.
내일 오후 세 시. 사장실.
밑줄도 없었다. 그런데 그 문장만 눈에 들어왔다.
한 대리.
아닙니다.
서윤은 메모 끝을 잡았다. 손가락 아래로 종이가 조금 휘었다.
「그다음 말은 없었어.」
메모를 뒤집었다. 끝내 하지 않은 말을 혼자 채워 넣는 버릇은 오래전에 그만뒀다. 답 없는 질문에 시간을 쓰면 해야 할 일을 못 했다.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위쪽 표시등은 보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박 팀장은 서윤이 앉기도 전에 불렀다.
“한 대리. 어제 사장실 갔다 왔다며?”
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기획안 방향을 미리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오늘 오후 세 시입니다.”
“오늘?”
박 팀장이 책상 위 달력을 봤다. 금요일 칸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제출은 금요일이라더니, 벌써 보자고 하네.”
“중간 브리핑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같이 올라가야지. 자료 몇 부 뽑아.”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 팀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어제 다른 얘기는 없었어?”
“없었습니다.”
대답은 짧았다. 가방 끈을 놓는 데는 조금 더 걸렸다.
“팀 인원이라든가. 업무 겹치는 부분이라든가.”
“기획안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박 팀장이 넥타이를 만졌다. 어제도 몇 번이나 봤던 동작이었다.
“그래. 일단 잘 보여야지.”
서윤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민재가 의자를 반쯤 돌리고 있었다.
“오늘 발표야?”
“브리핑.”
“그게 그거지. 왜 갑자기 당겼대?”
“방향부터 보려는 것 같아.”
“필요한 거 있어?”
서윤은 파일을 열었다. 어젯밤 고친 표가 떴다.
“지난달 고객 문의 원본. 뚜껑 관련된 거만 다시 확인해 줘.”
“비율?”
“응. 중복 문의 빼고.”
민재는 바로 자기 모니터로 돌아갔다.
“점심 전까지 줄게.”
이유를 더 묻지 않았다. 서윤은 그게 고마웠다.
◇
기획안 첫 장에는 주방용품 신제품 라인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보관 용기 사진이 나란히 놓였다. 겹쳐 쌓을 수 있고, 크기가 달라도 뚜껑 규격을 함께 쓰는 구성이었다.
서윤은 설명 문장을 지웠다.
‘편리한 생활을 위한 새로운 선택.’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득할 수는 없었다. 고객이 가장 많이 말한 불편을 위로 올렸다.
맞는 뚜껑을 찾기 어렵다.
용기는 멀쩡한데 뚜껑 때문에 버린다.
민재가 보내 준 표를 붙였다. 고객의 불편부터 제품 구조와 가격, 생산 방식까지 순서가 잡혔다.
마지막 장에서 손이 멈췄다.
생산 수량을 줄였을 때의 원가가 비어 있었다. 받아 둔 견적은 대량 생산 기준이었다.
거래처에 전화했지만 담당자는 외근 중이었다.
“회신 받는 대로 확인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고 빈칸에 ‘확인 중’이라고 적었다. 추정치를 넣고 싶지는 않았다.
서윤은 그 글자를 잠깐 봤다.
도현은 이 빈칸을 볼 것이다. 자료를 보다가 눈을 들어 서윤에게 물을 것이다.
어제 가까이서 들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낮고 차분했다. 이름 대신 직함을 부를 때도 그랬다.
「일 이야기만 하면 돼.」
옆에서 민재가 종이컵을 놓았다.
“커피 말고 물.”
“고마워.”
“자료는 괜찮아?”
“아직.”
민재가 화면을 봤다.
“반년 준비한 건데 뭐.”
“반년 준비했어도 빈칸은 있지.”
“그럼 채우면 되고.”
쉬운 일을 말하듯 가벼웠다.
서윤은 컵을 들었다.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풀렸다.
점심은 민재와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맛은 잘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밥을 절반 넘게 비웠다.
오후에 목소리가 떨리는 걸 배고픔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
오후 두 시 사십 분, 프린터가 멈췄다.
종이 걸림이라는 글자가 깜빡였다.
서윤은 덮개를 열었다. 안쪽 종이를 천천히 당겼다. 찢어지면 조각을 찾느라 더 늦어질 터였다.
뒤에서 박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나왔어?”
“마지막 한 부만 다시 뽑으면 됩니다.”
“그런데 한 대리, 원가 얘기는 너무 길게 하지 말자. 일단 제품 장점부터 보여 줘.”
“질문하시면 설명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지. 그래도 첫인상이 있잖아.”
서윤은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확인 안 된 부분은 확인 중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박 팀장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래. 괜히 숫자 틀리는 것보단 낫지.”
민재가 옆에서 출력된 자료를 정리했다. 모서리를 맞추고 집게를 끼웠다.
“샘플도 가져갈 거지?”
“응.”
“박스 줘. 엘리베이터까지 들어 줄게.”
“가벼워.”
“자료까지 들면 안 가볍잖아.”
서윤은 더 사양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박스를 건네받았다. 민재는 서윤이 바닥을 받친 걸 확인하고 손을 놓았다.
“잘하고 와.”
“다녀올게.”
박 팀장이 먼저 들어갔다. 서윤은 그 뒤에 섰다.
6층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어젯밤에는 계단을 올랐다. 오늘은 숨을 고를 시간이 그보다 짧았다.
서윤은 박스를 받친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
「얼굴부터 보지 말자.」
◇
두 시 오십팔 분.
사장실 앞에서 비서가 두 사람을 맞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윤은 박스를 고쳐 잡았다. 박 팀장이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문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에 손이 잠깐 굳었다. 서윤은 박스 바닥을 다시 받쳤다.
도현은 책상이 아니라 옆쪽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제와 달리 재킷을 입고 있었다. 앞에는 태블릿과 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재킷 어깨가 반듯했다. 펜 옆에 놓인 손은 힘이 빠져 있었다.
서윤은 얼굴을 보지 않으려다 그런 것부터 봤다.
“앉으십시오.”
박 팀장이 먼저 인사했다.
“상품기획팀 박 팀장입니다. 준비 중인 안이라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방향을 보시기에는—”
“설명 들으면서 확인하겠습니다.”
도현의 시선이 서윤에게 왔다.
“한 대리, 준비됐습니까?”
“네.”
눈이 마주친 건 짧았다. 대답하고 나서야 숨이 나왔다.
서윤은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테이블이 있었다. 팔을 뻗어야 닿는 거리였다.
그 정도는 필요했다.
자료를 한 부씩 놓고 샘플을 꺼냈다. 도현 앞에 자료를 놓을 때 손끝이 종이 모서리를 한 번 더 눌렀다.
“기존 주방용품 구매 고객의 불편을 기준으로 기획했습니다. 보관 용기와 뚜껑의 규격을 단순화한 라인업입니다.”
첫 문장은 무사히 나왔다.
도현은 자료를 펼쳤다. 서윤의 얼굴보다 표를 오래 봤다.
그 편이 나았다.
서윤은 두 용기를 나란히 놓고 뚜껑을 바꿔 끼웠다.
“같은 규격 안에서는 높이가 달라도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뚜껑을 따로 찾는 시간을 줄이고, 일부가 손상돼도 전부 버리지 않게 하려는 방향입니다.”
도현이 손을 뻗었다.
재킷 소매가 조금 올라갔다. 손목이 보였다.
서윤도 샘플을 넘기려다 멈췄다. 용기를 잡은 손끝 가까이로 도현의 손이 왔다.
「닿기 전에.」
서윤은 용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도현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서윤은 빈손을 자료 위에 얹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뚜껑만 별도로 판매합니까?”
“그렇게 제안했습니다.”
“별도 포장 비용도 반영됐습니까?”
“아직 확정 원가에는 넣지 못했습니다. 판매 단위부터 정해야 해서요.”
“그럼 여기 예상 이익률은 완성품 기준이군요.”
“네. 뚜껑 단품은 따로 산정해야 합니다.”
도현의 펜이 움직였다.
펜을 쥔 손가락이 조금 굽었다. 서윤은 그 손을 보다가 자료로 눈을 내렸다.
물은 건 비용이었다. 그런데 서윤은 대답이 끝난 뒤에도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
“가격은 기존 제품보다 높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규격을 통일하려면 초기 제작비가 들어갑니다.”
“소비자는 제작비 때문에 더 비싸게 사지는 않습니다.”
박 팀장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편의성을 강조해서 홍보하면—”
“한 대리 생각은 어떻습니까?”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펜을 쥔 채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을 보는 눈은 자료를 볼 때와 달랐다. 그렇게 느끼는 쪽이 서윤뿐일 수도 있었다.
시선을 피하면 대답이 더 늦어질 터였다. 서윤은 도현을 봤다.
묻고 싶은 말이 먼저 떠올랐다.
「왜 왔어요.」
「여기에는 왜 왔어요.」
서윤은 자료를 한 장 넘겼다. 종이를 잡은 손끝이 겨우 풀렸다.
“한 번에 전 구성을 사게 하는 방식은 어렵다고 봤습니다. 먼저 자주 쓰는 크기로 시작하고, 같은 뚜껑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추가 구매하게 해야 합니다.”
“추가 구매를 할 거라는 근거는요?”
“기존 고객 설문이 있습니다. 다만 구매 의향과 실제 구매는 달라서, 그 수치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도현이 펜을 멈췄다.
박 팀장의 구두 끝이 테이블 아래에서 움직였다.
서윤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 품목을 출시하는 대신 범위를 줄이는 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판매 반응을 보고 늘리는 방식입니다.”
“줄이면 원가가 올라갈 텐데요.”
“맞습니다. 생산 수량별 견적을 다시 요청했습니다.”
“아직 답은 못 받았고요.”
“네.”
짧은 침묵이 왔다.
서윤은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래도 모르는 것을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준비한 만큼 말했고, 모르는 만큼 인정했다.
도현은 자료 오른쪽 위에 작게 표시했다.
“그 숫자가 있어야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끝을 높이지 않았다.
서윤은 도현의 입가를 잠깐 봤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 제출본에 반영하겠습니다.”
“출시 범위를 줄였을 때와 기존 안을 비교해 주십시오. 뚜껑 별도 판매 비용도 따로 정리하고요.”
“알겠습니다.”
도현이 용기를 내려놓았다.
“문제 설정은 명확합니다.”
서윤의 눈이 조금 올라갔다.
도현은 서윤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윤도 곧바로 눈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좋은 의도와 팔리는 제품은 구분해야 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근거로 설명해 주세요.”
칭찬보다 다음 문장이 길었다.
그런데 숨은 편해졌다.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평가받는 자리가 무서운 것과 일을 못 하는 건 달랐다.
서윤은 무릎 위에서 손을 폈다.
「이건 할 수 있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
브리핑이 끝났을 때 박 팀장의 표정은 들어올 때보다 나아져 있었다.
“말씀 주신 부분 잘 보완하겠습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자료와 샘플을 정리했다. 뚜껑 하나가 박스 옆으로 굴렀다.
잡으려는 순간 도현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뚜껑이 테이블 끝에서 멈췄다. 도현의 손바닥 아래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서윤의 손끝은 그 가까이에서 멈췄다.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손을 거뒀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도현은 뚜껑을 박스 쪽으로 밀었다. 서윤은 뚜껑이 아니라 물러나는 손을 잠깐 봤다.
“샘플 한 세트는 두고 가도 됩니까?”
“네. 사용성 확인용이라 마감은 양산품과 다릅니다.”
“그 점은 감안하겠습니다.”
서윤은 용기 하나를 꺼냈다. 도현이 손을 떼고 나서야 뚜껑과 함께 내려놓았다.
도현은 그 짧은 틈을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도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박 팀장이 먼저 문 쪽으로 갔다.
“한 대리, 가자.”
“네.”
서윤도 박스를 들었다.
“한 대리.”
몸이 먼저 멈췄다.
어젯밤에도 등 뒤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직함을 부르는 낮은 끝음까지 같았다.
서윤은 박스를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
「이번에는 돌아봐.」
도현은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오늘 설명한 내용은 한 대리가 작성한 겁니까?”
“네. 고객 문의 집계는 오민재 대리가 같이 확인했습니다.”
“기획 방향은요?”
“제가 잡았습니다.”
도현이 서윤을 봤다. 자료를 볼 때보다 긴 시선이었다.
박스를 받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서윤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숨만 조금 얕아졌다.
“알겠습니다.”
그 말로 끝이었다.
서윤은 잠깐 서 있었다. 더 듣고 싶은 건지, 먼저 나가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도현의 입술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문을 닫자 박 팀장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꼼꼼하네. 숫자는 확실히 챙겨야겠어.”
“네.”
“그래도 방향은 괜찮다고 한 거지?”
“판단하려면 근거가 더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박 팀장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서윤은 박스를 양손으로 받쳤다. 손끝에 남은 힘을 천천히 풀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
4층에 도착하자 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땠어?”
“수정할 게 생겼어.”
“얼마나?”
“견적부터 다시.”
“많네.”
“할 수 있어.”
민재가 박스를 받아 책상 옆에 놓았다.
“그럼 나도 할 일 줘.”
서윤은 앉아서 파일을 열었다. 두 가지 출시안을 비교할 표를 만들었다. 빈칸이 늘어났다.
아침과 달리 막막하지는 않았다.
수정 사항을 적는데 새 메일 알림이 떴다.
발신자는 강도현이었다.
서윤은 손을 멈췄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나서 제목을 읽었다.
‘상품기획팀 브리핑 후속 확인.’
참조에는 박 팀장이 있었다. 요청은 짧았다. 생산 수량별 원가와 단계별 출시안, 뚜껑 단품 판매 비용.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최종안에도 기획 담당자를 명시해 주십시오.’
서윤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제가 잡았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을 때 도현이 보냈던 시선이 떠올랐다. 오래 보던 눈과 짧았던 대답.
「그래서 물었나.」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민재가 옆에서 물었다.
“사장 메일?”
“응. 보완 사항.”
“일 빠르네.”
서윤은 답장을 쓰려다 첫 장으로 돌아갔다. 팀 이름 아래 비어 있던 작성자 칸에 자기 이름을 넣었다. 함께 확인한 자료에는 민재의 이름도 적었다.
한서윤.
화면에 적힌 이름을 잠깐 봤다.
도현 앞에서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건 가능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 기획안까지 자기 것이 아닌 척할 수는 없었다.
서윤은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아직 회신이 오지 않은 거래처 번호를 다시 눌렀다.
(2화 끝)
“월요일은 괜찮아.”서윤이 대답하자 민재가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저녁 먹으면서 얘기해도 되지?”“응. 어디로 갈까?”“너 자주 가는 데. 회사 뒤에 밥집.”“거긴 퇴근 시간에 사람 많잖아.”“안쪽 자리 있으면 앉고. 없으면 다른 데 가자.”평소 식사 약속을 잡을 때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민재는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서윤을 한동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월요일에 보자.”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갈림길에서 민재가 먼저 손을 들었다. 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 민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민재가 다시 손을 들었다.서윤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방 끈을 잡고 그대로 걸었다.◇3월 24일, 서윤은 출근하자마자 제조사 메일을 확인했다.재시험 일정은 아직이었다. 승인된 비용 안에서 진행할 항목을 정리했다는 답만 와 있었다.민재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답 왔어?”“일정은 오후에 준대.”“고객 자료는 오전에 다시 보낼게. 구매 이력 확인된 것만 먼저 묶었어.”“고마워.”민재는 자리에 앉았다. 서윤은 화면을 조금 당겼다. 두 사람 모두 금요일에 잡은 약속을 꺼내지 않았다.오전 회의가 끝나자 후배가 자료철을 안고 다가왔다.“대리님, 제가 지난주 조사 안내물을 추가 제작비에 넣었는데요.”서윤은 후배가 가리킨 항목을 봤다.&ld
“재시험을 빼면 수정한 조건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서윤은 승인 메일 옆에 빈 문서를 띄웠다.전화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필수 시험과 추가 조사를 나눠서 보내 주시겠습니까?”“네. 비용이 이미 발생한 항목도 따로 적겠습니다.”“자료를 보내신다고 유지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알고 있습니다. 같은 항목이 두 번 삭감되지 않게 확인해 주세요.”통화가 끝났다.서윤은 첫 줄에 재시험이라고 적었다. 낙하와 개폐력, 높이가 다른 몸체에 같은 뚜껑을 끼우는 시험. 확인한 것과 남은 것을 나눴다.책상 한쪽에 조사실에서 가져온 샘플이 있었다.큰 몸체 안에서 작은 몸체 두 개를 꺼냈다. 높이는 달라도 입구는 같았다. 뚜껑을 바꿔 끼워도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다.「필요한 것만 살 수 있으면.」기록지에 적힌 말을 다시 읽었다. 서윤은 큰 몸체를 상자에 넣었다.◇3월 21일 아침, 민재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서윤의 책상을 봤다.“밤에 구성 바꿨어?”“아직 제안이야. 자주 쓰는 크기 두 개로 시작하려고.”서윤은 용기를 민재 쪽으로 밀었다.“규격은 같고 높이만 달라. 뚜껑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어.”“단품보다 이쪽이 나아?”“각각 포장하면 처음 사는 가격은 내려가도 비용이 많이 붙어. 두 개를 묶는 안으로 견적 요청했어.”민재가 작은 몸체를 들었다.“구성이 줄어도 공용 뚜껑을 써 볼 수 있겠네.”“응. 나중에 필요한 높이를 더 살 수 있고.”“추가로 살 거라고 계산에 넣은 건 아니지?”서윤이 손익표를 돌렸다.“입문 구성만으로 계산했어. 추가 구매는 따로 검증해야 해.”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 봉투를 내려놓았다.“그럼 이것도 입문 구성.”작은 빵 두 개가 들어 있었다.서윤이 민재를 봤다.“커피만 마셨을 것 같아서.”“아직 물도 안 마셨어.”“더 심하네.”민재는 자기 자리에서 물병을 가져왔다. 서윤은 병을 받고 빵 하나를 꺼냈다.먹는 동안 제조사 회신이 왔다. 두 용기를 묶으면 재료비는 줄었다.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