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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명단에 오른 팀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42:51

박 팀장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서윤을 봤다.

“네. 지금 팀원들 있습니다.”

민재가 내려놓은 샘플 상자를 책상 아래로 밀었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내일 오전이요? 자료는 따로 보내 주시는 겁니까?”

서윤은 관찰표를 내려놓았다. 종이 끝에 손가락이 걸렸다.

박 팀장은 한동안 듣기만 했다.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가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끝났다. 박 팀장은 말이 없었다.

서윤이 먼저 물었다.

“무슨 자료를 준비하라고 합니까?”

“기존 상품 실적하고 업무 분장표. 진행 중인 프로젝트 현황도.”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저희 팀 자료를요?”

“검토할 팀들은 다 내라는 모양이야.”

박 팀장은 자리로 돌아갔다. 앉고도 모니터를 켜지 않았다.

서윤은 관찰표 위에 놓인 도현의 기록을 봤다.

설명 전과 후. 시작과 종료.

시간을 적은 글씨 사이로 손끝이 지나갔다. 어제 그가 용기를 받쳐 주던 손이 잠깐 떠올랐다. 서윤이 다 내려놓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던 손.

서윤은 종이 끝을 맞췄다.

「지금은 자료야.」

다른 자료와 함께 파일에 끼웠다.

“민재야. 조사 영상은 원본 그대로 따로 저장해 줘.”

“응. 편집본이랑 폴더 나눌게.”

“기존 상품 문의도 기간별로 받을 수 있을까?”

“얼마나?”

“일단 자료부터 확인하자.”

서윤은 의자를 당겼다.

팀이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오늘 받은 자료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파일을 닫기 전, 도현의 기록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한 번 더 봤다.

◇

3월 11일 오전, 사무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서윤이 컴퓨터를 켜자 민재가 말했다.

“공지 아직 안 올라왔어.”

“응.”

서윤은 메일함을 열었다. 제조사의 회신과 조사 장소의 정산 안내가 먼저 보였다.

그 아래에 인사팀 메일이 있었다.

조직 운영 개선 검토 대상 및 자료 제출 안내.

첨부 파일을 열었다. 상품기획팀 이름 옆에 검토 방향이 적혀 있었다.

조직 통합 및 인원 조정 검토.

기존 상품 수익성 및 신규 투자 적정성 검토.

서윤은 두 문장을 다시 읽었다.

옆자리에서 마우스 소리가 멎었다.

박 팀장이 모니터를 보다가 일어났다.

“잠깐 모이자.”

팀원들이 그의 책상 앞으로 갔다. 서윤은 화면을 잠그고 일어났다. 공지는 출력하지 않았다.

“확정된 건 아니야.”

박 팀장이 먼저 말했다.

“지금은 검토 대상이라는 거고. 오늘 오후에 대상 부서 팀장들하고 실무 담당자들 불러서 설명한다고 해.”

후배 하나가 물었다.

“인원 조정이면 사람도 정해진 겁니까?”

“아직 그런 얘기는 없어.”

“그럼 팀이 없어질 수도 있는 거예요?”

박 팀장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서윤이 말했다.

“통합 여부도 검토 단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론과 일정은 자료를 더 받아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후배가 입술을 다물었다.

괜찮다는 말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서윤은 그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손을 느슨하게 폈다가 다시 모았다.

박 팀장이 헛기침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자료 잘 만드는 게 중요해. 기존 상품 매출이 내려간 건 다들 알지?”

“네.”

“신제품 준비하느라 관리가 좀 느슨했던 부분도 있을 거야. 그런 상황을 같이 설명해야지.”

서윤은 박 팀장을 봤다.

“관리 업무 중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행사도 전보다 줄었고. 기획 인력이 새 라인업에 붙어 있었잖아.”

“행사 축소는 유통사 발주가 줄면서 조정된 건입니다.”

박 팀장의 눈썹이 좁아졌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럼 기간을 나눠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 대리.”

“매출이 언제부터 줄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신제품 투입 기간하고 겹치는지도요.”

서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문장을 끝낸 뒤에야 숨을 들이마셨다.

박 팀장이 넥타이를 당겨 바로잡았다.

“그래. 정리해서 먼저 나한테 줘.”

◇

서윤은 기존 상품의 월별 매출을 내려받았다.

민재는 업무 분장표가 든 폴더를 열었다.

“최신 것만 주면 돼?”

“변경 전 것도 필요해.”

“담당 기간 보려고?”

“응. 우리가 맡기 전하고 후를 구분해야 해.”

민재가 파일 이름을 확인했다.

“출고 기준이랑 반품 차감 기준이 섞인 건 없는지도 볼게.”

“고마워.”

서윤은 실적과 담당 기간을 나란히 띄웠다. 신제품 준비 중에도 기존 상품 관리는 계속됐다. 담당자가 바뀌거나 유통사 요청으로 행사를 줄인 품목을 구분했다.

매출이 먼저 떨어진 구간에 표시했다.

민재가 몸을 조금 돌렸다.

“이 품목은 신제품 준비 전부터 내려갔네.”

“응. 이건 반대로 최근 하락 폭이 커졌고.”

“그건 빼지 말자.”

“넣을 거야.”

발주 감소, 행사 중단, 반품 증가. 확인된 사유를 적었다. 설명할 수 없는 곳에도 표시를 남겼다.

원인 추가 확인 필요.

박 팀장이 다가왔다.

“얼마나 됐어?”

서윤은 화면을 돌렸다.

“기존 상품 실적과 신규 프로젝트 투입 내역을 분리했습니다. 담당자가 바뀐 시점도 표시했고요.”

박 팀장이 표를 훑었다.

“이렇게 나누면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잖아.”

“관계가 없다고 적지는 않았습니다.”

서윤이 마지막 열을 짚었다.

“일정이 겹친 구간은 여기 있습니다. 다만 매출이 떨어진 원인을 전부 신제품으로 적을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 팀이 맡은 건 맞잖아.”

“그래서 저희 담당 기간의 하락도 그대로 넣었습니다.”

박 팀장의 손이 마우스 옆에서 멈췄다.

민재가 자기 화면을 가리켰다.

“기존 상품 관리 업무는 계속 진행했습니다. 행사 협의 메일도 날짜별로 첨부하겠습니다.”

“자료가 너무 많으면 읽겠어?”

“요약은 한 장으로 만들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

“원본은 확인할 수 있게 붙이고요.”

박 팀장이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화면을 그대로 둔 채 기다렸다. 그가 자료를 닫을까 봐 손을 대지 않았다.

박 팀장은 인쇄 버튼을 가리켰다.

“뽑아 줘. 내가 볼게.”

점심시간이 지난 뒤, 서윤은 검토를 마친 자료를 제출했다. 기존 상품 실적과 담당 업무, 신규 프로젝트 현황을 함께 보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민재가 포장된 샌드위치를 놓았다.

“반이라도 먹어.”

“회의 다녀와서.”

“그때는 또 다른 일 생겨.”

서윤은 포장을 뜯었다. 손끝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가장자리를 다시 잡았다.

민재는 더 말하지 않았다. 제출 파일의 이름만 확인했다.

◇

오후 회의에는 상품기획팀만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다른 검토 대상 부서의 팀장들이 먼저 앉아 있었다. 서윤은 박 팀장 옆에 자료를 놓았다.

도현은 테이블 반대편에 있었다.

그 앞에는 부서별 자료가 같은 두께로 묶여 있었다. 서윤이 의자를 당기자 도현의 시선이 올라왔다.

서윤은 의자 등받이에 댄 손을 잠깐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인사는 짧았다.

도현이 먼저 자료로 시선을 내렸다. 서윤도 앉았다. 그와의 사이에는 테이블이 있었다. 팔을 놓고 나니 종이 넘기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어제와는 다르네.」

“시작하겠습니다.”

인사팀 담당자가 설명했다. 제출 자료와 추가 자료를 검토한 뒤, 통합과 인원 조정 여부를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질문이 이어졌다.

“그동안 새 채용은 중단합니까?”

“별도 승인 없이 충원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진행 중인 업무는요?”

“변경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기존 담당자가 수행해 주십시오.”

박 팀장은 펜 끝으로 자료 모서리를 두드렸다.

차례가 오자 입을 열었다.

“상품기획팀은 신제품 출시를 준비 중입니다. 그쪽으로 인력이 투입되면서 기존 상품 대응에 어려움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서윤은 두 번째 장을 펼쳤다. 종이가 손끝 아래에서 조금 밀렸다. 모서리를 눌러 바로잡았다.

박 팀장이 말을 이었다.

“출시까지 가면 회복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도현이 물었다.

“기존 상품 하락과 신제품 투입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확인됐습니까?”

낮고 일정한 목소리였다.

서윤은 종이를 누른 손에 힘을 뺐다. 박 팀장이 서윤 쪽을 봤다.

서윤은 자료를 조금 앞으로 밀었다.

“현재 자료만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일부 품목은 신규 프로젝트 시작 전에 매출 하락이 진행됐습니다.”

도현의 시선이 서윤에게 왔다. 말을 끝낼 때까지 다른 곳을 보지 않았다.

서윤은 턱을 조금 들었다.

“그 이후의 하락은요?”

“담당 기간을 나눠 제출했습니다. 저희가 관리한 기간에도 부진한 품목이 있습니다. 사유가 확인된 건 표시했고, 나머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

도현은 해당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 끝을 잡은 손가락이 보였다. 서윤은 그 손을 봤다가 자기 자료로 눈을 내렸다.

“기존 상품 관리에 투입된 인력도 따로 적었군요.”

“네. 업무 분장표와 진행 내역을 첨부했습니다.”

도현이 표를 읽었다.

기다리는 동안 서윤은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방금 한 대답을 고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신경이 쓰였다.

“이 기준으로 보겠습니다.”

박 팀장의 펜이 멈췄다.

서윤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도현은 이미 다음 자료를 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기 전, 다른 팀장이 물었다.

“자료를 보완하면 현 인원 유지도 가능한 겁니까?”

서윤도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손을 자료 위에 얹었다. 도현이 펜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어느 부서에도 잔류를 약속할 수 없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자료를 제출했다는 사실만으로 조직을 유지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인원과 비용을 유지할 이유가 확인돼야 합니다.”

박 팀장이 입을 열었다.

“새 프로젝트를 맡은 직원들은 적어도 결과를 볼 때까지—”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것 역시 유지의 근거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보장이 되지는 않습니다.”

도현의 시선이 서윤에게 닿았다.

서윤은 피하지 않았다. 자료 위의 손가락만 조금 오므렸다.

“상품기획팀도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생각보다 바로 나왔다.

어제 공유 주방에서 받쳐 준 손이 떠올랐다. 서윤이 용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려 주던 손이었다.

그 손은 지금 테이블 반대편에 있었다.

서윤은 자료를 모았다. 종이 끝을 맞추는데 손끝이 굳어 있었다.

「같은 일로 생각하지 마.」

그 일과 이 회의는 달랐다. 다른 일이어야 했다.

도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아까 눈을 맞춰 주던 짧은 순간까지 신경 쓰였다.

서윤은 자료를 한 번 더 눌렀다.

회의가 끝나자 의자를 밀어 넣었다. 도현은 인사팀 담당자와 다음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문으로 가는 동안 자료를 쥔 손의 위치를 바꿨다. 손끝에 남은 힘을 풀었다.

복도에서 박 팀장이 낮게 말했다.

“아주 칼같네.”

서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추가 자료 요청 오면 확인하겠습니다.”

“그걸로 바뀌겠어?”

문이 열렸다.

서윤은 안으로 들어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박 팀장이 탈 자리를 냈다.

“지금은 제출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죠.”

◇

4층으로 돌아오자 민재가 빈 샌드위치 포장지를 치우고 있었다.

“어땠어?”

“추가 자료를 본대. 아직 결정된 건 없고.”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응.”

서윤은 자료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민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사용자 조사 영상 목록을 띄웠다.

“어제 기록은 다 맞춰 놨어. 사장님이 적은 시간도 영상에서 구간 확인했어.”

서윤의 시선이 멈췄다.

도현이 기록을 읽던 손과 어제의 손이 번갈아 떠올랐다. 서윤은 자료에서 손을 뗐다.

“그건 별도 파일로 두자.”

“기획안에는?”

“지금은 관찰 기록부터 정리할게.”

서윤은 앉아서 메일함을 새로 고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기획 담당자의 공식 자료 요청이 도착했다. 대상 부서와 인사팀에도 함께 보낸 메일이었다.

상품기획팀의 추가 항목에는 단기 매출과 매출총이익, 고객 재구매와 이탈, 부품 수요, 프로젝트 유지·중단 비용이 적혀 있었다.

서윤은 부품 수요 항목을 다시 읽었다.

교체 부품 관련 문의와 실제 구매 수요.

“민재야.”

“응.”

“이것 좀 봐.”

민재가 의자를 가까이 당겼다.

“뚜껑도 포함해서 보라는 거네?”

“응. 문의만 세지 말고 실제 구매랑 구분하래.”

작성 지침은 분명했다. 고객군과 기간을 밝히고, 문의와 구매 의향, 실제 주문을 구분해야 했다. 확인되지 않은 효과는 가정으로 적도록 했다.

서윤은 마지막 페이지를 열었다.

검토 책임자 강도현.

이름을 읽자 회의실에서 들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유지할 이유가 확인돼야 합니다.

낮은 목소리. 서윤을 보며 끝내던 문장.

서윤은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을 책상에 놓고 잠깐 그대로 있었다.

이유를 적을 칸이 늘어나 있었다. 당장 발생한 매출만 넣는 표는 아니었다.

「왜 넣었을까.」

묻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서윤은 다시 화면을 봤다.

자신을 위해 넣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었다. 회의에서 도현이 한 말도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름에서 눈을 떼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만 이 항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용기는 멀쩡한데 맞는 뚜껑을 못 구해 버리는 고객. 다른 제품을 사겠다고 남긴 문의. 뚜껑만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가 답을 받지 못한 기록.

어제 도현이 받쳐 준 것도 그 용기였다.

서윤은 손가락을 폈다. 기억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자료가 있었다.

“지난달 문의만으로는 부족하겠지?”

민재가 물었다.

“응. 기간을 더 봐야 해. 같은 고객이 여러 번 문의한 건 구분하고.”

“구매 이력은 고객관리 쪽 협조 받아야겠다.”

“내가 요청할게.”

서윤은 새 문서를 열었다.

그때 박 팀장이 불렀다.

“추가 요청 봤어?”

“네. 고객 유지하고 부품 수요도 제출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좋은데, 같이 온 통합 검토안부터 봐.”

서윤은 메일로 돌아갔다.

첨부 파일이 하나 더 있었다.

조직 통합 시 업무 이관 기준.

파일을 열었다. 기존 상품 관리 업무는 통합 부서로 넘기고, 계약상 의무가 있는 업무는 따로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아래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검토 기간 내 수익성이 입증되지 않은 신규 프로젝트는 조직 통합 시 중단을 원칙으로 한다.

서윤은 앞 문장으로 돌아갔다. 다시 내려와 읽었다.

중단.

마우스를 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민재가 화면을 봤다.

“아직 판매도 안 한 제품인데?”

서윤은 프로젝트 현황표를 열었다.

진행 상태에는 출시 전 검증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외 조항은 없었다.

팀이 다른 부서로 옮겨 가면, 반년 넘게 준비한 용기는 함께 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서윤은 사용자 조사 파일을 열었다. 첫 화면에서 참여자가 뚜껑 하나를 들고 있었다.

안 찾아도 되는 게 더 좋네요.

서윤은 재생을 멈췄다.

잠깐 화면을 보고 있다가 통합 검토안으로 돌아왔다. 중단 조항 옆에 커서를 놓았다.

도현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대신 문장을 다시 읽었다.

남아야 할 이유를 적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먼저, 이 일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를 써야 했다.

(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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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2화. 밤의 두 자리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1화. 돌아온 견적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0화. 남아 있는 습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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