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와 나라의 커밍아웃 이후, 분위기는 아예 폭발했다.그동안 서로 눈치만 보면서 조용히 지내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앞다퉈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 사실 저희도 사귀고 있었어요!”“저희도요!”“저도요!”“...”별다른 연애 사실이 없는 사람들마저 왠지 들뜬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이 사람들은 왜 다들 이렇게 신나 있는 거야?’‘이 분위기는 뭐지, 장난 아닌데?’예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멍하니 잔을 들었다.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광경.그때 사람들 사이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임인성 변호사님!”로펌 내에서 가장 어린 변호사로 막내 중의 막내.아직 맡은 사건은 많지 않았고, 한아름 밑에서 실무를 배우는 중이었다.활발하고 엉뚱한 성격 덕분에 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기 짱인 변호사였다.누군가 장난스럽게 외쳤다.“임 변호사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설마 누구랑 사귀고 계세요?”인성은 턱을 치켜들며 당당하게 말했다.“아직 사귀는 건 아니지만요, 저는 자신 있어요. 곧 시작될 거니까요!”“오... 우리 임 변의 목표가 있는 거네?”“누군데요? 오늘 여기 계세요?”“우리도 좀 압시다!”“...”사람들이 다 같이 궁금하다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인성을 쳐다봤다.잠시 의미심장하게 웃던 임인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아름을 바라봤다.아름은 그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와인을 마시려던 찰나였다.그 순간, 인성이 바로 한아름의 앞에 섰다.남자의 눈빛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함만 가득했다.“선배님.”아름이 멈칫했다.“사실 그동안은 망설였어요. 괜히 선배님 일하시는데 방해될까 봐... 저한테는 너무 대단하신 분이라 괜히 부담만 드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근데 오늘 대표님 말 듣고 생각했어요. 사내연애가 죄도 아닌데, 왜 숨겨야 하나... 그래서 오늘 여기서 선언합니다. 앞으로 선배님을 진심으로... 열심히... 당당하게... 쫓아다닐 생각입니다!”룸 안은 한순간 모든 동작이 정지된 듯했다.
예진은 순간 목이 꽉 막히는 듯한 기분에 무심결에 침을 꿀꺽 삼켰다.‘아, 진짜... 내가 그 한마디만 안 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정우와 나라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건 분명 자기였다.그래서 정우가 혹시라도 화를 내더라도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래, 욕 먹을 각오는 했어. 미안하다고 말하려면 지금 해야...’예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던 그때, 예상치 못한 정우의 말이 룸 안의 공기를 확 뒤집었다.“고 비서님, 더 이상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굳이 저희를 위해 수습하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고 비서님의 잘못이 아니니까요.”순간 모두가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정우는 조용히 나라 쪽으로 걸어갔고, 나라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얼어붙어 있었다.그리고 정우는 단번에 나라의 손을 잡아 올렸다.나라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정우는 손을 꼭 잡은 채 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 이쯤 됐으니까 저도 더는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고 비서님이 질문하셨을 때 속으로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하고 나라 씨는... 사귀고 있습니다.”사람들 사이에서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쏟아졌다.놀란 나라가 급히 손을 빼려고 하면서 말했다.“대, 대표님...! 정우 씨가 그냥 장난처럼 말한 거예요. 진짜 그런 건...”하지만 정우는 단호히 말을 끊었다.“이제 그만해, 나라야. 숨기고 사는 것도 너무 지쳤어. 너하고 커플 티도 입고 싶고,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데이트도 하고 싶어. 회사로 오는 길에 같이 커피도 마시면서 말이야. 이제는 우리도... 정상적인 연애를 하고 싶어.”나라의 눈가가 붉어지면서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정우는 그런 나라를 자신의 뒤로 감싸면서 민혁을 향해 말했다.“대표님,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나라 씨와 진지한 관계입니다. 양가 부모님께도 인사드릴 예정이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혹시 로펌 규정상 사내 연애가 어렵다면, 저를 정리
정우와 나라는 겉으로 보기엔 일부러 서로를 피하는 듯 보였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둘 사이에 흐르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더구나 아까 예진이 노래를 부를 때 정우의 핸드폰 화면이 살짝 보였는데, 그 배경화면이... 나라의 폰 배경화면과 똑같은 커플 일러스트였다.‘설마 진짜 사귀는 건가?’예진은 단지 가볍게,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정말, 그저 장난스럽게 웃고 넘길 수 있는 분위기를 기대했는데...질문이 끝나자마자 룸 안의 공기가 묘하게 달라졌다.말 그대로 정적!누구 하나 말하지 않고,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정우는 웃고 있던 표정 그대로 멍해졌고, 나라의 표정도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예진은 처음엔 그 분위기의 의미를 잘 몰랐다.‘어... 뭐지? 내가 뭘 잘못 말한 건가?’그러다 바로 다음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라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고 비서님, 무슨 그런 농담을 해요? 저랑 정우 씨는 그냥... 같은 팀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좀 친한 사이일 뿐이에요. 진짜 오해하시면 안 돼요!”억지로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라의 표정은 이미 웃음을 잃은 지 오래였다.다른 직원들도 황급히 박수를 치면서 분위기를 띄우려 했지만, 그 어색함은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나라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을 때, 안색은 마치 얼음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예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예진은 조용히 옆에 앉아 있는 아름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제가... 말실수를 했어요?”아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살짝 기울이며 예진의 귀에 속삭였다.“고 비서님... 회사에서 사내연애는 진짜 조심해야 해요. 특히 들키게 되면, 누가 잘못하지 않았어도 한 명은 나가야 하는 분위기가 되거든요.”그 말을 듣는 순간,
다른 세 사람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은주 혼자 잔뜩 들떠 있었다.얼마 전에 민혁이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절친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자, 은주는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사람처럼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그 사람이 진짜 예진이든 아니든, 그 감정이 오래된 오해든 착각이든 상관없었다.재하가 아무리 분석하고 영호가 확신이 안 선다고 해도, 은주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중요한 건 지금 이 타이밍이야.’‘예진이가 또 상처받는 일은 절대 없어야 돼...’‘오빠도 이제 정말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고...’‘그 둘이 잘 되면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케미 아니냐고!’예진과 민혁.이 둘의 성격, 습관, 연애스타일까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다름 아닌 은주였다.‘둘이 사귀기만 하면 진짜... 세기말 대로맨스 그 자체지!’누군가는 사랑꾼 하나만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데, 둘 다 사랑꾼이라면?그건 그냥 행복 폭발 아닐까?그 화면을 상상만 해도, 은주는 당장이라도 회식 자리에 뛰어들어 둘을 서로의 품에 밀어 넣고 싶을 정도였다.‘아 오늘 진짜 꼭 성공해야 돼. 내가 짠 이 솔로 탈출 플랜...’‘이 날만을 위해 준비한 거라고!’너무 들뜬 나머지 은주가 칵테일을 섞는 손마저 자꾸 삐끗대자, 바텐더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그녀는 웃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이미 불타오르는 실행욕으로 가득했다....한편, 예진과 민혁은 은주의 ‘계획’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회식의 흐름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술잔이 몇 차례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예진도 어느새 얼굴이 붉어지고 눈빛이 살짝 흐려져 있었다.진짜... 술이 용기를 준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예진은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만큼 직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노래방 기계 앞에서도 박수치며 따라 부르고, 누구와도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았다.‘이렇게 웃은 게 얼마만이지...’시간이 흐르며 분위기가 점점 더 들뜨자,
예진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서 곡을 고르고 있는 민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설마, 그 말이 사실인 걸까?’‘민혁 씨가 정말 은주 때문에 날 뽑은 거라면...’예진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만 해도 자존심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혹시 그래서 아무도 그 얘길 안 꺼낸 걸까?’‘혹시 말했다가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래서 아예 모른 척하는 건가?’예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유명 로펌의 대표 변호사.명문대 출신에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그런 사람이 수많은 경력직과 자격증을 보유한 사람들을 제쳐두고, 굳이 자격증도 없고 졸업 후 몇 년을 백수로 지낸 자신을 채용한 이유라니.‘당시에는 그럴듯했던 말들이... 다시 생각해 보니까 어쩐지 부자연스러웠어.’예진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꽉 쥐었다.하지만 그때 룸 안에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모두의 시선이 음악 소리와 함께 자연스레 무대로 향했고, 그곳엔 마이크를 든 민혁이 서 있었다.민혁이 선택한 곡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오래된 명곡이었다.반주가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하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리듬을 맞췄고, 그 안에는 어느새 공감과 추억이 녹아 들었다.예진의 눈길도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쥔 민혁에게 고정됐다.‘이 노래...’처음 듣는 노래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예진도 기억하고 있었다.대학 시절, 축제 무대에서 민혁이 이 노래를 불렀던 그 장면을...그땐 서로 얼굴도 몰랐던 사이였지만, ‘서민혁’이라는 이름은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법대의 과묵한 수석 냉미남!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다니던 남자.그날 무대 위에서 민혁은 하얀 셔츠에 청바지 차림에 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바로 청춘 그 자체였다.그런데 막상 노래가 시작되자, 그 목소리에선 설명하기 힘든 깊은 아쉬움 같은 게 스며 있었다.‘그때... 이상했지. 기분 좋은 노래인데, 왜 그렇게 쓸쓸하
예진은 부드럽게 술을 따르며 잔을 들었다.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잔을 높이 들었다.“우선,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돼 정말 기쁩니다. 사실 입사한 지는 조금 되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렇게 함께 자리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예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렇게 갑작스러운 회식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해서, 혹시나 업무에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잠깐 주변을 둘러본 예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마지막으로, 저를 따뜻하게 받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한 잔을 여러분께 올립니다. 오늘 즐겁게 마음껏 즐기시면 좋겠습니다.”말이 끝나자 예진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이어 다른 직원들도 ‘고 비서 파이팅’을 외치며 술잔을 비웠다.분위기는 한층 더 밝아졌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회식이 시작되었다.민혁이 로펌 대표로 자리하고 있음에도, 직원들의 얼굴엔 부담이나 긴장감은 없었다. 오히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자연스럽고 유쾌한 분위기였다.‘다들 참... 잘 지내는구나.’‘나는 왜 이렇게 이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지지...’그 활기찬 웃음소리 사이에 조용히 앉은 예진은, 잔을 손에 든 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예전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이런 자리를 참 좋아했었지.’ 어느새 사람들의 웃음과 음악이 뒤섞인 공간 속에서, 예진은 혼자 조용히 소파에 기대고 있었다.‘그땐... 내가 결혼하기 전이었지.’그때, 동료들과 술잔을 나누던 민혁이 예진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무슨 생각해요? 아직도 아까 그 생각을 하는 거예요?”예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그냥... 다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요. 보니까 민혁 씨는 좋은 대표네요.”칭찬을 들은 민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더니,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좋은 대표뿐만이 아닌데요?”예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민혁 씨, 자뻑도 수준급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