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은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정말 나 때문에 영호가 꿈을 포기하게 된다면...’‘난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그녀는 한참을 더 울었다.영호는 그런 은주를 옆에서 묵묵히 달래 주었다.한참 뒤, 울다 지친 숨소리만 방 안에 가득했다.잠시 후, 은주는 눈가를 닦으며 영호를 바라봤다.“신세준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 때... 영호 씨는 단 한 번도 의심 안 했어? 혹시... 내가 진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사실 은주는 늘 불안했다.술집을 운영하고, 밤마다 바에 앉아서 손님들을 상대하는 자신.심지어 영호와도 자신이 먼저 다가가서 시작되었다.그래서 마음 한쪽엔 늘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영호는 아무 말도 없이 은주의 머리를 톡 하고 쳤다.“아야!”은주는 머리를 감싸 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왜 때려!”“벌이야.”“벌?”은주는 눈을 깜빡이며 억울하다는 듯 바라봤다.영호는 짧게 웃었다.“은주 씨가 어떤 사람인지,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거야. 다른 사람 입으로 들을 필요 없어.”“게다가, 은주 씨는 내 여자친구잖아.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지.”그 말을 들은 순간 은주의 가슴이 뜨겁게 일렁거렸다.‘이 사람은 항상 나를 믿어줘.’영호는 말을 이었다.“그리고, 나 바보 아니야. 은주 씨도 알잖아. 경찰이 제일 하면 안 되는 게, 남의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는 거야.”영호의 단단한 말투 속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그 한마디 한마디가 은주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느님은 진짜 공평하시지.’‘그때 내가 신세준 같은 놈을 만나서 정말 불행했지만...’‘아마 그 모든 불행은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던 것 같아.’은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의 영호를 바라봤다.남자의 눈빛이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 안았다.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띠릭-“우리 왔어...”예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혁도 뒤따라 들어왔다.두 사람
은주는 예진과 민혁이 한 말을 떠올렸다.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영호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감정적으로 폭발하거나, 시비를 거는 타입도 아니었다.늘 참을성 있고, 화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런 영호가 신세준한테 주먹을 휘둘렀다는 건,단순히 전 남자친구라서, 혹은 질투 때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어.’은주는 갑자기 밥맛이 싹 달아났다.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영호를 바라봤다.“나 알아. 그 일, 나하고 관계된 거지?”영호도 천천히 젓가락을 놓았다.남자의 눈빛이 고요하게 은주를 마주했다.“그런 생각 하지 마. 괜히 마음 쓰지 말고. 이건 그냥 나랑 신세준 사이의 일일 뿐이야. 은주 씨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은주 씨 때문에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은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쿡 하고 아팠다.‘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 너무 불안했어.’그동안 꾹꾹 눌러온 감정이 터져 나왔다.은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영호는 그런 은주를 보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은주가 우는 순간, 모든 평정심이 무너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주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조심스럽게 은주를 품 안으로 끌어안으면서 말했다.“울지 마. 알잖아, 나 은주 씨 우는 거 제일 못 보겠어. 정말 괜찮아. 기껏해야 일 잠깐 쉬면 돼. 며칠 구류 정도겠지 뭐.”“은주 씨가 그랬잖아, 나 일 그만두면 은주 씨가 먹여 살려준다고. 이런 꿀 같은 기회를 내가 어떻게 놓치겠어?”영호는 장난스럽게 웃어보였지만, 그 웃음 뒤의 어색함은 너무나 뚜렷했다.‘괜찮다고 하면서, 눈빛은 하나도 괜찮지 않아...’은주는 오히려 더 미안해졌다.‘내가 뭐라고... 이런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걸까?’사람 마음이 괴로울 때는, 누가 위로해 주는 게 더 버거울 때가 있다.영호가 아무리 다정하게 말을 걸어도, 은주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그만해, 그런 말 하지 마... 나 다 알아. 나 걱정시키기 싫어
윤제는 생각했다. 살면서 이렇게 웃긴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그 말은 바로 자신이 바닥까지 떨어졌던 그때, 언젠가 아린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그 시절이 있었다는 뜻이다.‘그땐 정말, 바보 같았지.’아린이 몰래 떠난 데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녀가 힘들어서,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린은 해외에서 다른 남자의 품 안에 있었고, 심지어 딸까지 있었다.‘참 우습지. 세상에서 제일 웃긴 조롱거리는 나 자신이었어.’윤제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손에 쥔 서류를 바라봤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 남자의 신원도 조사했습니다. 류아린 씨랑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은 제법 잘나가는 집안의 아들이었더군요.”“가문이 수출입 무역업을 했는데, 결혼하고 아이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집안이 망했습니다. 빚도 꽤 많이 졌고요.”그 뒤 이야기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랬겠지. 아린은 별의별 이유를 다 붙여서 이혼했겠지.’‘아이도 두고 나왔을 거고.’그러다 윤제가 다친 게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부씨 집안이 금융위기를 버텨냈다는 걸 확인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돌아왔다.아린은 또 그럴듯하게 말했다. 그때 자신이 떠난 건 어쩔 수 없었다고, 심지어 암에 걸렸다는 말까지 했다.하지만 병원 기록엔 그런 건 없었다.해외에서 치료받은 흔적도, 진단도 아무것도 없었다.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면서, 윤제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휘어졌다.그 비웃음은 남을 향한 게 아니었다.‘류아린의 거짓말은 처음부터 허술했는데...’‘내가 그걸 믿고 싶어서, 일부러 외면한 거야.’그때, 비서의 폰이 진동했다.“대표님,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류아린 씨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비서는 즉시 파일을 열고, 결과를 윤제에게 전송했다.윤제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진단서에는 분명히 ‘암’이라고 적혀 있었다.“너, 어떻게 생각해.”비서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아린은 지금도 완벽했다.정갈한 옷차림에 부드러운 말투, 남편의 말에 꼬리처럼 붙는 따뜻한 미소.누가 봐도 모범적인 아내의 모습이었다.윤제는 그런 아린을 바라보며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렇게까지 태연할 수 있지?’그는 아무리 봐도 눈앞의 여자가 자신이 의심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연기라면, 이건 거의 예술이야.’식사는 평화롭게 이어지는 듯했다.하지만 윤제는 천천히 나이프를 내려놓으면서, 조심스레 화제를 꺼냈다.“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어머니 잠 못 주무실 때 네가 약 챙겨 드렸잖아. 그거 덕분에 한동안 잠 잘 주무셨다고 하셨어.”“나도 요즘 잠이 잘 안 와서 그러는데... 그 약 어디서 샀는지 알려 줄래? 나도 좀 사 먹어볼까 해서.”그 말이 떨어지자, 스테이크를 자르던 아린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칼끝이 살짝 덜덜 떨렸다.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 고개를 들었다.“그 약?”아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무나 먹으면 안 돼. 어머니 체질엔 맞았지만, 오빠한테는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어.”“요즘 피곤하면 병원 가서 의사한테 처방을 받는 게 제일 안전해. 지금 집안도 정신없는데, 오빠까지 아프면 진짜 큰일이잖아.”윤제는 미소를 유지한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역시 피하네. 대답을 회피하는 건, 곧 인정이나 다름없지.’아린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핑계를 준비해둘 걸...’‘그래도 침착해야 해. 의심받는 순간 끝이야.’그녀는 일부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제의 팔 위에 손을 올렸다.“오빠, 진짜로 요즘 너무 피곤해 보여. 오늘만큼은 일 생각 말고 푹 쉬어.”윤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그러나 그 눈빛엔 냉기가 서려 있었다.‘좋아, 끝까지 연기해 봐.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식사가 끝난 뒤, 윤제는 곧바로 차를 몰고 아린을 병원까지 데려다 줬다.아린은 차에서
아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제 신분이야 뭐 대단할 게 있겠어요. 다만, 아까 오셨던 고예진 씨랑 서은주 씨 두 분이 아주 절친이잖아요. 저는 그 두 사람과 예전부터 좀 인연이 있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서씨 가문 덕에 억울한 일을 좀 당했죠. 도련님처럼 신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전 그냥 참고 넘길 수밖에 없었어요.”세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아린은 말을 이어가며 천천히 세준의 자존심을 간질였다.“하지만요, 제가 만약 신씨 가문 같은 백이 있는 입장이었다면, 절대 고예진 씨나 서은주 씨한테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거예요.”“결국 세상은 돈보다 권력이 중요하잖아요. 제가 알기로는, 도련님 외삼촌께서 H시에선 꽤 영향력 있는 분이시라고요.”“그 정도면 서씨 가문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쉽게 못 덤비죠.”그 말은 세준의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히 찔렀다.세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맞는 말이야. 내가 괜히 가만히 있던 게 아니야. 서씨 가문이야 돈으로 굴리지만, 우리 집안이 그보다 못한 건 없거든. 솔직히 서씨 가문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아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역시 단순하네. 신세준, 머리보다 허세가 앞서는 타입이야.’그녀는 마음속으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말 몇 마디로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이걸로 서민혁하고 서은주, 고예진 셋 다 제대로 골치가 아프겠지.’‘벌써 기분이 좋아지는 걸.’아린이 조금 더 말을 잇고 분위기를 몰아가려던 찰나, 핸드폰이 진동했다.화면에는 ‘여보’라는 이름이 떴다.아린은 순간 표정을 감추며 폰을 무음으로 바꾸었다.“세준 도련님,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오늘 얘기는 정말 즐거웠어요. 쾌차하시길 바랍니다.”세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래, 가 봐. 근데... 저 여자 말이 틀린 건 없지. 사람은 체면으로 사는 거야. 예영호가 날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서씨 가문이 돈 몇 푼으로 덮겠다고
세준이 가장 분통이 터진 건 따로 있었다.‘원래대로라면, 지금 서씨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어야 할 사람은 나였어!’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예영호 따위가 아니라,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게 당연했다.서은주, 그 여자.‘그 싸가지 없는 년이 예전에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는데...’‘매일 꼬리를 흔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그는 생각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았다.그리고 얼굴이 이미 부운 데다가, 분노가 더해지자 붓기가 심해지는 것 같았다.그 모습을 본 민혁은 여전히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뭐,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지. 천천히 생각해 봐. 우리 쪽도 네 답변 기다릴게.”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맺었다.“그럼, 이만 실례.”민혁과 예진이 병실 문을 닫고 나가자, 복도 쪽에서 아린이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멀리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본 아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고예진? 서민혁이랑 고예진이 왜 여기 있어?”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아린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 병실 앞까지 다가갔지만, 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막아서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도련님 허락 없이는 출입이 안 됩니다.”아린은 살짝 발끝을 세워 병실 안을 힐끔 들여다봤다.그러다 세준의 얼굴을 본 순간, 표정이 굳었다.‘저 사람... 신세준 아니야?’예전에 윤제와 함께 갔던 파티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신씨 가문에서 가장 아끼는 귀한 아들이라던 세준이었다.그런데 지금 세준의 얼굴은 마치 돼지 머리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게다가 분노로 들썩이며 침대에 앉아 있는 세준의 모습은 영 정상이 아니었다.‘설마, 신세준이 다친 게 고예진이랑 관련이 있는 거야?’그렇게 생각하자, 아린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아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세준 도련님, 실례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치신 거예요?”세준이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봤다. 눈빛엔 짜증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흥미가 섞여 있었다.“너 누구야?”아린은 얌전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