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 복도는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린은 일부러 윤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고개를 숙여 억울한 듯 목소리를 냈다.“이안한테 내가 얼마나 정성 쏟았는지 오빠도 다 봤잖아. 그런데 예진 씨 말은 결국 우리가 애를 제대로 못 챙겼다는 거야?”예진은 차갑게 아린을 노려봤다.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눈빛을 단단히 굳히며 입을 열었다.“벌어진 일 앞에서 책임을 떠넘겨 봤자 뭐가 달라져? 지금 중요한 건 현실이야. 근데 둘째 얘긴...”윤제가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압박이 묻어 있었다.“지금 둘째 얘기를 거부한다는 건, 곧 이안의 목숨을 외면한다는 거랑 같아. 너 정말...”“입 다물어.”예진은 날카롭게 잘라냈다.“그따위 모함하지 마. 나라고 이안 잘못되길 바라겠어? 둘째의 제대혈이 백 퍼센트 살려낼 수 있다면, 내가 왜 못 하겠어. 하지만 장담할 수 있어? 성공한다고?”말을 마친 예진의 시선이 곧장 아린으로 옮겨졌다.“그리고 넌? 네 남편이 전처 아이 갖는 거, 정말 감당할 수 있어?”잠시 침묵이 흘렀다. 윤제와 아린, 둘 다 말문이 막혔다.결국 먼저 표정을 수습한 건 아린이었다.“당연히 싫지. 어느 여자인들 그게 쉽겠어. 하지만... 이안을 살릴 수 있다면, 참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아린의 억울한 연기에 윤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윤제는 미간을 깊이 찌푸리며 예진을 몰아세웠다.“고예진, 아린 같은 새엄마도 이 정도로 각오했어. 근데 넌? 친엄마라는 사람이 자기 행복이랑 연애 타령하면서 애를 버리겠다는 거야?”예진의 속은 순간적으로 또 갈라졌다.‘내가 정말 이기적인 걸까? 아니야... 이건...’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예진의 망설임은 순식간에 증발했다.‘그래, 내가 뭘 해도 이 둘은 절대 고마워하지 않겠지.’‘둘째를 낳아도 이안을 못 살리면, 결국 그 책임은 전부 나한테 뒤집어씌울 거야.’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예진의 눈빛은 한층 단단해졌다.“이안
송승예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문제는 아무리 자기가 옆에서 말해도, 예진이 겪는 괴로움까지 대신 덜어줄 수는 없다는 걸.‘내가 무슨 말을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지.’‘결국 이 애가 스스로 부딪치고 결정해야 하는 거야.’그래서 송승예도 더이상 길게 타이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이건 결국 이안이 몸에 관한 일이니까 내가 뭐라 하긴 어렵다. 그래도 이안이 네 자식인 건 맞지만, 넌 내 자식이야. 난 내 딸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거 말곤 다 필요 없어.”예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송승예의 말이 따뜻하게 스며들었지만, 그 따뜻함이 오히려 예진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엄마는 늘 내 편이야.’‘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해 줄 거라는 걸 잘 알아.’‘그런데... 그래서 더 괴로워.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잖아.’송승예는 다시 손을 꼭 잡으며 덧붙였다.“확률이 얼마나 낮은 일인지 너도 알잖아. 네 인생을 다 걸고 희생할 필요 없어. 그 시간에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겠니? 그러면 너도, 우리도 양심에 덜 걸리고.”하지만 예진의 가슴 속은 여전히 답답하게 뒤엉켜 있었다. 어차피 엄마 아빠는 끝까지 자기 편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바로 그 확신 때문에 더 큰 짐이 되는 기분이었다.송승예는 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며칠째 잠도 못 잔 얼굴이네.’‘이런 일 아니었으면 마음 놓고 웃으면서 밥 먹고 다녔을 텐데...’“됐어. 아무리 힘들어도 밥은 먹고 생각해야지. 배고픈 몸으론 아무 결정도 못 해.”그렇게 말하며 송승예는 예진을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바로 그때, 예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엔 ‘부윤제’라는 이름과 함께 사진이 한 장 도착해 있었다.차갑게 닫힌 수술실 철문. 위엔 붉은 불빛으로 ‘수술 중’이라는 글자가 켜져 있었다.메시지는 짧았다.[이안이 지금 수술 중이야. 어떻게 될지 몰라. 그래도 네가 이안 엄마니까 알려는 줘야 할 것 같아. 올지 말지는 네가 정해.]예진은 그 문자
예진이 한참을 울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고르며 진정이 되었다.송승예는 가슴이 죄여 오르는 걸 꾹 참고 조심스레 물었다.“도대체 왜 그래? 너랑 민혁이랑 싸웠어?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어? 그냥 이렇게 울기만 해선 답이 안 나오잖아. 말해 봐. 무슨 일이든 같이 풀어 보자.”엄마의 말이 따뜻할수록, 예진의 가슴은 더 미어졌다.‘말하면... 엄마가 더 걱정할 텐데...’하지만 그토록 쌓여 있던 억울함과 무력감에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 예진은 오랜 망설임 끝에, 겨우 입을 열어 윤제가 자신을 찾아왔던 일, 그리고 그가 요구한 것까지 모두 털어놓았다.송승예는 예상과 달리, 이안의 병세보다 그 뻔뻔한 요구에 먼저 분노했다.“아니, 이게 말이 돼? 부윤제 그 인간, 예전에 너 억지로 이혼시킬 땐 단 한 마디 미안하단 소리도 없더니, 이제 와서 애가 아프다고 너더러 다시 애를 낳으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네, 제정신이야 그게!”예진은 순간 움찔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근데, 엄마... 이안도 제 아이잖아요.”아무리 아이가 자기 친엄마를 외면하고 아린을 따르고 있어도, 결국 예진의 뱃속에서 열 달을 품고 낳은 친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송승예는 다시 예진의 손을 꼭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그게 네 아이면 뭐해. 성은 부 씨고, 결국 부윤제 집안 애야. 위에서 삐뚤어지면 아래도 삐뚤어지는 법이야.”“걔는 이미 딴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잖아. 그런데 네가 뭐 하러, 이제야 겨우 되찾은 네 삶 다 내던지고 또다시 부윤제한테 발목을 잡히겠다는 거야?”둘째 아이... 말은 간단하지만,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임신 준비부터 열 달의 임신 기간, 그리고 출산 후 회복까지, 적어도 2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그 2년 동안 예진이 민혁을 어떻게 마주 볼지...예진이 정말 전남편과 또 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민혁의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예진의 머릿속은 한순간에 복잡해졌다.아이를 향한 책임감과, 새로 시작된 사랑을
송승예는 문을 두드려도 아무 대답이 없자 얼굴을 굳혔다.“예진아, 안에 있니? 자는 거 아니지? 안 열면 엄마 그냥 들어간다?”그 순간, 예진은 베란다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야 멍하니 있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예진은 얼른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 최대한 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 이제 자려고요.”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코맹맹이 소리에 송승예는 더 이상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민혁과 가까워지는 게 눈에 보였는데, 갑자기 집으로 돌아와 방에 틀어박히다니.게다가 지금은 저녁 여섯 시, 자러 들어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닌가.“엄마 들어갈게.”말을 마치기도 전에 송승예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예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훔치고, 애써 웃는 얼굴로 돌아섰다.“엄마, 배 안 고파요. 병원에 며칠 누워 있었더니 살만 쪘어요. 오늘은 그냥 안 먹을래요.”하지만 부은 눈가는 금세 티가 났다. 딸이 울었다는 걸 송승예는 한눈에 알아봤다.‘내 새끼가 속상한 일 있으면 꼭 혼자 웅크리고 울지...’송승예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으며 예진을 침대에 앉혔다.“예진아, 엄마가 너랑 얘기한 지 오래됐어. 우리 얘기 좀 하자.”예진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무 일 없어요. 얘기할 게 뭐가 있겠어요.”“민혁이랑 싸웠니?”민혁의 이름이 나오자 예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아니에요. 저희 괜찮아요. 민혁 씨는 제 상사잖아요. 제가 어떻게 민혁 씨랑 싸우겠어요.”예진이 이렇게 말할수록 송승예는 더 확신했다. 딸은 분명히 마음속에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민혁이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챙기는 걸 부부는 다 봐왔다. 민혁이 문제를 일으켰을 리 없었다.‘그럼... 둘 사이에 무슨 큰일이 생긴 거겠지.’송승예는 예진의 손을 꼭 잡으며 눈빛을 놓지 않았다.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며 예진의 손등을 살짝 두드렸다.“예진아, 네가 이제 다 컸다고, 엄마한테 말 안 하고 혼자 꾹꾹 참는 거 엄마도 알아. 그래서
예진이 남긴 짧은 메시지, 그것이 곧 예진의 대답이었다.혹은, 아직 확실한 대답을 내릴 용기가 없는 채, 민혁에게 전한 단호한 거절이었다.민혁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손에 든 꽃다발은 결국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반지는 주머니 속으로 거칠게 들어갔다.차로 돌아가는 남자의 발걸음은 무겁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예진이가 원한다면... 기다리자.’‘이미 수년을 기다려 왔는데, 하루 이틀 더 못 기다리겠어?’멀지 않은 곳,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예진은 민혁이 지친 어깨로 차에 오르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제야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그 눈물에는 미안함과 흔들림,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결심도 뒤섞여 있었다....그 시각, 병원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윤제는 연일 이안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아린은 마치 교과서 속 현모양처라도 되는 듯, 그림처럼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이안에게 동화를 읽어 주고, 약을 제때 챙겨 주는 그 손길은 살뜰하기까지 했다.윤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음 한구석이 아리면서 아팠다.“아린아, 며칠째 병원만 지켰잖아.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어. 이안은 내가 볼게.”윤제가 책을 건네받으려 하자, 이안도 아빠 편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집에 가서 쉬어. 아빠가 이안이한테 동화책 읽어 주면 되잖아.”아린은 순간 입술 끝을 달달 떨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무슨 소리야. 오빠 같은 남자가 무슨 동화를 알아? 내가 읽어 줄게.”그러고는 다시 책을 손에 꼭 쥐었다.아빠와 엄마가 다정하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이안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아이의 시야가 갑자기 흐려졌다.콧등을 타고 선홍색의 피가 흘러내렸고, 작은 몸이 푹 꺼지듯 침대에 쓰러졌다.“이안!”윤제와 아린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순간적인 공포에 윤제는 곧장 침대 옆 긴급벨을 눌렀고, 아린은 복도로 뛰어나가 의사와 간호사를 소리쳐 불렀다.잠시 뒤, 의료진이
여섯 시밖에 안 됐는데도 노을이 벌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해가 기울수록 공원 안은 더 서늘해졌지만, 빛은 오히려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이었다.예진은 느낄 수 있었다.민혁이 처음부터 계속 조금씩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걸.잔디 위에 앉아 차를 따라 주면서도, 어딘가 어색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 모습이 그대로 전해졌다.‘민혁 씨... 지금 이 분위기, 이 시간... 분명히 고백하려는 거야.’주변의 커플들은 이미 다정하게 어깨를 기대거나 서로를 안은 채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그 속에서 민혁과 자신만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민혁의 등 뒤를 바라보는 순간, 예진의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민혁이 일어서면서 말했다.“나 차에서 좀 가져올 게 있어요.”“네...”예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민혁의 넓은 어깨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민혁 씨가 나한테 고백하면... 나... 대답할 수 있을까?’‘나도 당연히 좋고, 당연히 기대되고, 당연히 행복해야 하는데...’‘만약 내가 결국 이안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어떤 선택을 한다면...’‘민혁 씨는 어떻게 될까...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생각은 점점 고통처럼 예진의 가슴을 조였다. 마치 숨을 쉴 때마다 양쪽에서 쇠사슬이 조이는 것처럼,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윤제였다.[생각은 해봤어? 이안 상태가 점점 나빠져. 당신 골수도 안 맞아. 우리한테 시간이 없어.]윤제의 문자를 보는 순간, 예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끝이 떨렸고, 그 떨림이 그대로 심장까지 전해졌다.곧바로 또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이안이 삭발한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창백한 피부에 환자복은 한껏 커 보였다.그런데도 아이는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웃을 때 입 안 가득 드러난 작은 충치가 더욱 가슴을 찔렀다.‘어떤 엄마가... 자기 아이가 이렇게 돼 가는 걸 눈뜨고 볼 수 있겠어...’‘아이가 날 몰라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