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당신의 불면을 잠재울 유일한 처방전은, 나여야만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정작 '잠'조차 마음대로 잘 수 없는 남자, 이준. 그의 서늘하고 딱딱한 비즈니스 세계에 향기와 온기를 처방하는 여자, 서윤이 찾아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를 넘어, '치유'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가장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고, 결국 서로를 구원하는 어른들의 감성 멜로입니다.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정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두 사람의 아슬아슬하고도 섬세한 관계를 통해, 읽는 이들에게 깊은 위로와 설렘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View More불이 꺼진 방 안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차가운 바닥 위로 촛불이 뿜어내는 따뜻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고,
그 작은 조명들만이 이 공간의 유일한 온기처럼 흔들렸다.
깊은 밤, 시곗바늘은 자정이 훌쩍 넘은 시점을 가리키고 있었고,
바깥의 세상은 모두 잠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방의 가장 깊숙한 곳, 침대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이준. 이레제약의 대표이사. 성공한 청년 CEO, 냉정하고 완벽한 경영인.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엔 그러한 수식어들이 어울리지 않았다.
눈꺼풀은 닫혀 있었지만 이마엔 미세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고,
입술은 말없이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그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잠드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 조용히 다가온 사람은 서윤이었다.
긴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오며 공간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가 깨지 않도록.
그러나 동시에, 그가 자신을 인식하길 바라는 것처럼.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그림자도 벽에 부드럽게 퍼졌다.
마치 그의 불안한 심장을 감싸는 어떤 형체 없는 감촉처럼.
서윤은 조용히 침대 곁으로 다가가, 천천히 몸을 굽혔다.
“이준 대표님.”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단정했다.
그러나 어딘가 낮고 부드러운 결이 섞여 있었다.
말보다 숨결이 더 가깝게 닿는 거리.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오일병을 꺼냈다. 라벤더, 샌달우드,
베르가못이 섞인 조합이었다. 진정과 안정,
그리고 미세한 각성. 그녀가 직접 만든 조향이었다.
손끝에 오일을 떨어뜨리고, 따뜻한 체온으로 덥힌 손바닥을
이준의 관자놀이 근처로 가져갔다.
처음으로 이준의 숨소리가 조금 길어졌다.
“오늘은 아무 말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방 안을 스치고 흘러갔다.
마치 처방처럼. 그녀는 말을 하되,
그것을 언어로서가 아닌 자장가처럼 풀어냈다.
“단지 여기 있다는 걸 느끼게 해드릴게요.”
그의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작게 움찔했다. 저항은 없었다.
대신, 그 안에는 어딘가 절박한 의존이 숨어 있는 듯했다.
서윤은 그 손을 감싸쥐지 않았다. 다만 손등 위에 손을 올리고,
체온을 전달할 뿐이었다. 감각 중심의 치유.
그녀는 말보다 온도가 더 많은 것을 해결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온도에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그 순간,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의 불안한 리듬에 자신의 숨을 맞추었다. 이 공간 안엔 오직 둘만 존재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공기마저 두 사람을 가만히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밤이 흘러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가장 많은 감정이 오간 밤.
침묵 속에서, 그들의 관계는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방 안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 스며든 희미한 도시의 불빛도 닿지 않는 깊숙한 밀실,
커튼은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게 단단히 닫혀 있었고,
어젯밤 그녀가 밝혀놓은 촛불들만이 조용히,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불빛으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서윤은 침대 끝자락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손등 위에 얹힌 촛불의 노란 그림자가 이준의 윤곽을 어루만졌다.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밤새 땀이 약간 맺혔는지
이마 근처엔 작은 습기가 맴돌았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뺨 끝과 목덜미 주변의 긴장은 아직 풀리지 않은 듯했다.
“잠은 좀 주무셨을까…”
혼잣말이 낮게, 거의 숨결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어젯밤, 서윤의 손끝 아래에서 잠시나마 고요한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허락되지 않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는 다시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첫날 밤부터 모든 경계는 예상보다 더 쉽게 침투당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목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체온, 맥박, 미세한 떨림. 감각은 숫자보다 먼저 반응했다.
그는 아직 깨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그녀의 접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부하지 않았고, 긴장도 이전보다 덜했다.
“2회차 감각 반응, 안정화 상태로 진입 중.”
마치 실험 노트를 정리하듯 혼잣말을 되뇌며,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를 가늠해보았다.
이 남자는 환자다. 그것이 그녀가 붙잡고 있는 마지막 선이었다.
하지만 그 선 너머에서 자꾸만 속삭이듯 이준의 존재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마치 꿈결처럼.
“……윤서윤.”
그가 낮게, 아주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서윤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준은 분명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목소리는 감정이 들어 있지도, 의식적인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깊은 곳에서 올라온 속내처럼.
서윤은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마한 아로마 오일 통을 집었다.
라벤더와 머틀, 로즈우드. 이 조합은 진정과 무의식 유도를 동시에 끌어내는 데 적절했다.
그녀는 손끝에 소량을 덜어, 그의 관자놀이와 목덜미 근처에 아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이건 그저 처방의 일환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준은 다시금 그녀의 손길을 느낀 듯, 아주 미세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서윤의 심장 쪽에서 먼저 반응했다.
무게중심이 어긋났다. 이 공간, 이 온도, 이 거리.
모든 것이 너무 쉽게 그녀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서윤은 조용히 속삭였다. 눈을 감은 그에게 말하듯,
아니 어쩌면 자신에게 말하듯. 오늘은 의무감도,
과거도 내려놓고 단지 한 사람의 감각을 위해 존재해도 괜찮다고.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으면 그녀는
이 공간 안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떨렸다. 아마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의 무의식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윤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처방인지,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촛불 하나가 바람도 없이 툭 꺼졌다.
그녀는 그 조용한 사라짐마저도 이 공간에서는 이준의 감정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이준은 깊은 잠을 잤고, 서윤은 단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알았다. 그가 내뿜는 불안의 온도에 이미 자신의 체온이 물들고 있다는 걸.
눈에 띄게 바람이 잦아든 저녁이었다.창문을 닫고 나면 세상은 놀랄 만큼 조용해졌다.마치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작고 고요한 세상.서윤은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무릎 위에 올려둔 노트에는 여전히 그녀가 정리하지 못한 마음이 펼쳐져 있었고,그 위를 손끝으로 조용히 쓰다듬다 말았다.'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지.'속으로 조용히 중얼이는 마음은 그 자체로 작고 부드러운 죄책감처럼 느껴졌다.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감정이라는 건 늘 그런 식이었다.“오늘은… 괜찮으셨어요?”조심스럽게 이준에게 말을 건넨 건 서윤이 먼저였다.평소보다 다소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에 이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네. 당신이 있어서 괜찮았어요.”생각보다 짧고 간결한 대답.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꽤나 무게감 있었다.서윤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이번엔 그녀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 말… 듣고 싶었어요. 오늘 하루 종일.”그녀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그렇게 조금 솔직하게 내어놓았다.그것이 그저 감정의 파편이 아니라,그에게 다가가기 위한 작은 걸음이었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고, 이준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이준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자주 해요.”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데에 얼마나 많은 마음의 경계가 무너졌을지를 서윤은 대답 대신, 살짝 떨리는 숨으로 이해했다.“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서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둘 사이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느리게 흘렀다.조용하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이전보다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그날 밤, 이준은 침실에 들어가 조용히 불을 껐다.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둔 작은 병을 열어 향을 천천히 손목에 덜었다.서윤이 만들어준 블렌딩 오일.라벤더, 베르가못, 그리고 은은한 시더우드의 조합.손목에서 번지는 향을 가만히 들이마
그날 오후, 회사 옥상엔 가을 바람이 조용히 불고 있었다.바람결을 따라 나뭇잎이 이리저리 흔들리고,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이진의 그림자가 긴 빛으로 늘어져 있었다.그는 난간에 팔을 기대고 서윤이 자주 앉는 자리를 내려다보았다.거기에 그녀는 없었지만, 그녀의 잔향이 어쩐지 여전히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이준이랑 점심을 같이 먹었다고?”그는 자문하듯 중얼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그러다 꺼낸 건 서윤이 예전에 떨어뜨린 손수건이었다.그녀가 놓고 간 것들을 그는 좀처럼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한편, 이준은 회의실에서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떨궜다.서윤에게 보낼까 말까 오랜 시간 망설이던 메시지 하나.[오늘은, 잘 지내고 계시죠?]지극히 평범한 문장인데 그 말이 가진 무게가 자신에게는 유난히 컸다.그녀에게 말을 건다는 것. 그녀의 하루를 묻는다는 것.그건 어느새 그의 일상이 되어버렸다.그 시각, 서윤은 약제실에서 조제 스케줄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러다 불쑥 울린 진동음에 핸드폰을 열어보니 이준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화면을 바라보았다.한참을 말없이, 그러다 손가락을 움직였다.[덕분에요. 대표님도요?]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따스한 결은 서로에게 미세하게 스며들었다.그날 저녁, 서윤이 건물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진과 마주쳤다.“오늘은 좀 늦네요, 윤서윤 씨.”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했고, 그 차분함이 오히려 묘한 긴장감을 안겼다.“오늘은 조금 정리할 게 있어서요.”서윤은 짧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이진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점심은, 즐거웠어요?”서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랜만에 편하게 웃었던 것 같아요.”그녀의 대답에 이진의 눈빛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그는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그 웃음 너머로 감춰진 감정은 서윤에게도 느껴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함께 탑승했다.내려가는 짧은 시간, 공기는 유난히 조용했고 그 속에 감정들
이진은 요즘 자신의 표정이 낯설게 느껴졌다.거울을 볼 때마다 그 안에 담긴 눈빛이 예전의 그것과 닮아 있지 않아서였다.서윤을 바라볼 때의 눈동자,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난 뒤의 미세한 미소.그 모든 건 한때 아주 오래전, 감정을 숨기기 전에 그가 가졌던 얼굴이었다.그는 바쁘게 돌아가는 회의실을 나와 혼자 조용한 옥상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오늘도, 서윤이 있었다.“또 여기 계시네요.”이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서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바람이 좋아서요. 잠깐 쉬러 왔어요.”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피로와 서늘한 공기가 깔려 있었다.이진은 그 미묘한 온도차를 읽어냈다.“오늘 대표님과 무슨 일 있었어요?”그의 질문에 서윤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아무 일도요.”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와 나란히 앉은 채 하늘을 바라봤다.둘 사이엔 말보다 긴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이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서윤 씨, 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한 번 멈췄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던 거라는 거.”서윤은 그의 옆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이진의 눈동자엔 과거의 기억들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예전에… 서윤 씨가 힘들어하던 시절이 있었죠. 병원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그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그때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게 지금도 마음에 걸려요.그래서인지 지금은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서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진심이 그녀의 가슴 안쪽 깊은 곳까지 닿기에는 아직 이른 감정들이 너무 많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진 실장님, 저… 그때랑 지금은 달라요.”그 말은, 감정에 대한 거절이기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이 어디쯤 있는
하루가 저물 무렵, 병원 뒤편의 작은 정원.햇살이 마지막 힘을 다해 잎맥 사이로 흘러들고 있었다.고요한 공간, 그 안에서 서윤은 혼자 있었다.그녀의 손끝에는 얇은 노트 한 권이 쥐어져 있었고,표지에 적힌 작은 글씨 ‘환자 맞춤 감정 일지’라는 제목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이건 그녀가 예전, 아직 세상과 부드럽게 연결돼 있다고 믿었던 시절,병원 내 특수 클리닉 팀에서 작성하던 자료였다.그때 그녀는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싶었고,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충분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 믿었다.그러나 그 시간 속 어딘가에서 서윤은 그 믿음을 잃었다.“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서윤은 몸을 굳힌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진이었다. 하얀 셔츠 위에 얇은 재킷을 걸친 모습.해가 지는 방향으로 선 그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그때 당신이 쓴 감정 일지. 버린 줄 알았는데.”서윤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잊은 건 아니에요. 다만, 열어볼 자신이 없었어요.”이진은 그녀의 맞은편 벤치에 앉았다.둘 사이의 공기는 낯설지도, 완전히 편하지도 않았다.“나, 아직도 기억해요. 당신이 처음 내게 말 걸던 날.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험할 수 있어요. 그 말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서윤은 조용히 웃었다.그건 그녀가 감정 읽기를 가장 날카롭게 하던 시절의 말이었다.“그땐 내가 조금 더 사람에게 예민했죠.”“아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당신은 항상, 아픔을 더 먼저 읽는 사람이었으니까.”두 사람 사이에 길게 침묵이 흘렀다.하지만 그 침묵은 버겁지 않았다.마치 오래된 책장을 함께 넘기는 듯한, 조심스럽고 천천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이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서윤아. 그때 나랑 같이 일하던 마지막 날 기억나?당신이 한참 환자랑 말다툼한 뒤였지. 혼자 의자에 앉아 있던 당신한테 내가 말했지.너무 닳지 마, 제발. 그 말, 그땐 그냥 던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가장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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